CAFE

요한복음

요한복음 18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4.08.24|조회수12,812 목록 댓글 0
요한복음 제 18장
=====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여기서 지시하는 예수의 말씀은 17장에서 언급된 예
수의 기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는"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예수의 중보기도(17장)에 이어 수난 기사에 관한 내용
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공통되게 다루고 있는 겟세마네 기도
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요한은 17장의 기도를 겟세마네 기도와 대체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므로써 요한은 예수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노출시키지 않고
대신 17장의 기도문에 나타난 예수의 위엄을 강조하려고 의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 예수가 기도를 마치고 이동한 장소의 방향으로 언급되는
기드론 골짜기(공동번역)를 말한다. '시내'로 번역된 '케이마르로스'(*
)는 '겨울에 흐르는 시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이 시내는 겨울 우기 동안에 약
간의 물이 흐르고 곧 말라버리기 때문에 다른 계절에는 말라있는 건천(wadi)이라고 보
는 것이 더 정확하다. 기드론은 '백향목'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인데 구약 시대의 우상
들이 불태워지던 곳이며(왕상 15:13)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군을
피해 다윗이 건넜던 곳이기도 하다(삼하 15:23).
거기 동산이 있는데 - 기드론 시내 건너쪽에 있는 동산이라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
는데 '동산'(* , 케포스)이라는 말은 요한만이 언급한다. 마태와 마가는 '겟
세마네'라 불리는 곳으로, 누가는 '감람산'으로 언급하고 있다(마 26:36;막 14:32;눅
22:39). 그러나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곳'이 '장소', '들'을 의미하는 '코리온'(*
)인 것으로 보아서 '정원'(garden)을 의미하는 본절의 '동산'과 의미상 별다른 차이가
없다. 또 '들어가다'는 말이나 4절의 '나아가'(* )라는 말로 보아서
이곳에 어떤 울타리가 있음을 암시하므로 '케포스'나 '코리온' 둘다 '정원' 또는 '제
한된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C.K. Barrentt). 특히 이곳은 2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예수와 제자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이 장소를 가롯 유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라는 이름을 가진 '정원' 또는 '농원'을 지칭
한다.
그의 제자들 - 저자는 제자들을 복수로 언급할 분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
다. 이점은 공관복음서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이름을 언급하여 세 명의 제자를
강조하고 구별한 것과 대조된다.

=====18:2
가끔 모이시는 곳 - 요한은 예수와 제자들이 이 동산을 처음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전에 여러 차례 방문한 곳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보다 더 자세하게 이곳을
'늘 하시던 대로'(눅 22:39, 공동번역) 찾으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따로 떨어
진 유다가 군대를 이끌고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즉 유다가 예수의 일행이 머문 장소를 알았던 것은 유다 자신도 예수와 함께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8:3
군대와 - 본문은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이끌고 온사람
들의 신분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공관복음서는(마 26:47;막 14:34;눅 22:47) 유다가
이끌고 온 사람들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 , 오클로스)라고만
밝히고 있으나 요한은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
서 언급된 '군대'(* , 스페이라)는 로마군 600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 단위
를 나타내기도 하며 또한 200여명으로 구성된 보병 중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
다(C.k>Barrentt). 그런데 혹자는 '스페이라'를 안토니아 성에 주둔해 있던 작은 부대
로 추측한다(Robertson, Lenski). 그러나 12절에서 지휘관으로 천부장이 언급되는 점
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작은 부대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예수와 그의 11제자와 다
수의 백성들이 함께 있을 것을 대비해 많은 수의 하속을 동행했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하속들 - 공관복음서와 같이 요한도 역시 예수를
죽게한 주동자로 대제사장 계급과 바리새파 계급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하
속(下屬)들(* , 후;페레테스)은 성전 경비를 맡은 일종의 경찰로서 이
해된다(C.K> Barrett). 한편 예수를 체포하러 온 무리 중에 대제사장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산헤드린이 보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Lenski)이는 예수의 죽
음에 대해 유대의 지도층 전체가 개입되어 있음을 시사해 준다.
등과 홰와 병기 - 공관 복음서에서는 '검과 몽치'라고만 언급하는데(마 26:47;막
14:43) 본문에서는 등과 홰까지 언급된다. '등'과 '홰'는 고대에 동의어였으나 후대에
와서 등불과 횃불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C.K. Barrett). 한편 이때는 유월절(니산월
14일) 전날이며 당시 월력(月曆)을 사용했던 정황으로 보아 거의 만월의 상태였을 것
이다. 따라서 불이 필요치 않을 수 있으나 당시 상황이 구름으로 인해 흐린 날씨였거
나 아니면 예수의 체포 시간이 한밤중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등과 홰를 언급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요한은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장본인이기에 일기와 관련
된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후자보다는 전자의 추정이 본절에 더
적합한 것 같다.

=====18:4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 이 말은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豫知)를 부여하기 위해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예수는 사역 초기부터 죽음의 위협이 있음을 예측하고 이
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을 때 예수는 자
신이 예측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
을 때 예수는 자신이 예측하고 있는 그 고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아시고 위
험한 피해 자리를 옮긴 적이 있었다(10:39;11:54). 그러나 지금은 때가 이르렀기 때문
에(17:1) 피하지 않고 담대히 맞부딪치고 있다. 한편 혹자는 '아시고'에 해당하는 헬
라어 '에이도스'(* ) 대신 '이돈'(* , '깨닫다')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C.K. Barrett). 그 근거는 '에이도스'보다 '이돈'이 신적 예지와 관련된 용
어이며 요한이 예수에 대한 신적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독특한 용어를 많이 애용했다는
점이다. 본절에서 '이돈'이 사용될 경우 2절의 '에데이'(* , '알다')와 구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어 '그 당할 일을 다'(* ,
판타 타 에르코메나)란 표현에 이미 예수의 신적 예지가 암시되어 있으므로 굳이 '이
돈'으로 본문을 변경시킬 필요가 없다.
나아가 - 예수는 동산에서 나가셔서 잡으로 온 무리들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이
같은 묘사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자발적 체포를 강조하고 있으며 당당하고 권
위있는 예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요한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적대자들에 의한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구원사적 맥락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섭리이
며 예수가 섭리를 자발적으로 수용했음을 강조한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 예수께서 체포하러 온 자들 앞으로 나아가 '누구를 찾느
냐'라고 질문하신 것에는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이 나타나 있으며, 예수가 무기력하게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다하기 위해 당당하게 체포됨을 묘사하기 위한 저자
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본절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의 체포나 죽음을 위
엄있는 구속사적 드라마로 이해하게 된다.

=====18:5
나사렛 예수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언급된 본문은 나사렛(*
, 나조라 이온)이란 형용사를 첨가하고 있다. 이와같은 형태는 본서에서는 예수
의 명패에 쓰인 칭호에서(19:19), 그리고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전할 때(1:45
, *, 아포 나자렛, '나사렛에서 온') 언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름 앞에 지명을
붙여 사용한 것은 아마도 예수의 출생지를 밝히려 했던 의도에 따른 것임과 동싱 동명
이인(同名異人)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내로라 - 예수는 '나사렛 예수'가 자신임을 아주 짧은 말로 밝힌다. '내가...이다'
(* ,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출 3:14) 간결하면서도
권위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단순히 자신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시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다. 요한은 예수의 자기 계시를 강조하기 위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
이 표현을 부각시켰다.
유다도 함께 섰더라 - 이는 유다가 예수의 맞은편에 적대자들과 함께 서 있음을 묘
사해 준다. 정면으로 예수와 마주하고 있는 유다는 배신자로서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
여준다. 한편 공관복음서와 구별되는 점은 유다가 예수에게 입맞추어 예수를 체포케
하는 행위가 언급되지 않고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예수의 권위와
위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묘사한다는 점이다.

=====18:6
저희가 물러가서...엎드러지는지라 - 본문은 예수가 '내가 그이다'라고 말하자 나
타난 반응을 묘사한 것으로 예수의 신적 권위를 묘사해 주고 있다. 즉 이 말이 하나님
을 가리키는 말인 '나는 스스로 있는자'(* , 에고 에이미 호온)
라는 출 3:14의 70인역(LXX)을 연상했기 때문에 적대자들이 두려워 물러서며 엎드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신적 권위가 강조됨은 물론 예수의 승리자의
모습으로 죽으셨음이 확인된다.

=====18:7
물으신대...하거늘 - 4절과 동일한 질문이 반복되고 5절과 똑같은 대답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독자성, 즉 예수가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것이 아님을
거듭 확인해 주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깔려 있다. 한편 요한은 5절의 '대답하되'를 본절에서는 '말하되'로 바꾸어 표현했다.
이는 같은 말의 반복을 싫어하는 요한의 습관에 따른 것이다.

=====18:8
이 사람들의 가는 것 - 예수는 적들이 찾고 있는 예수가 자신임을 거듭 확인시키고
대신 자신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자유롭게 갈수 있도록 하라는 제안을 하고 있다. 즉
자신을 내어 놓고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다. 이것은 요한의 독특한 자료로
막 14:50에서 언급되는 제자들의 도주와 대조되고 있다. 이것은 요한이 공관복음서 저
자와 달리 제자들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혀 제자들을 호
의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의 이같은 행동은 10:11에서 예견된
바로서 이는 예수의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밝
히는 것이다.

=====18:9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예언의 성취를 나타내는 본문의 어투는 본서에서 자주 언
급되는 문구이다(C.K.Barrett, A.T. Robertson). 여기서 성취된 예언은 17:12을 가리
킨다. 특히 17:12에서 언급된 멸망의 자식이 여기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이미 유다가
악의 세력에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예언의 성취에 관한 언급은 예수 자신의
말을 성경적 권위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18:10
시몬 베드로 - 본절에서 베드로의 이름이 히브리식 이름과 함께 쓰이고 있다. 즉
'바요나 시몬'(마16:17) 또는 '요한의 아들 시몬'(1:42;21:15)으로 언급되지만 주로
'시몬'이란 말만을 덧붙여 '시몬 베드로'라고 호칭하게 된다. 여기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하여 적들에게 대항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칼을 사용한 자의 이
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마 26:51;막 14:47;눅 22:50). 아마도 공관복음서는 칼
을 사용한 자의 신분에 해가 돌아가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요한 복음은 공관복
음서보다 훨씬후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이름을 밝혀도 본인에게 아무런 영형을 주
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여 베드
로의 이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검을 가졌는데 - 눅 22:36-38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검을 휴대하도록 지시하
였고 제자들 중에서 검 두 자루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공격용으로 준비된
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눅 22:36-38 주석 참조). 왜냐하면 칼 두 자루로
무력에 해당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유월절에는 무기를 휴대할
수 없도록 규제되었으므로(C.K. Barrett, Robertson) 베드로가 무기를 소지한 것은 불
법이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베드로가 열심당원이었다고 할 증거는 될 수 없을 것이
다. 이 칼은 아마도 위험한 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감지한 베드로가 호신용으로 준
비해 둔 단검으로 보인다.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인지 언급하지 않지만 누가와
요한은 동일하게 오른쪽 귀를 잘랐다고 언급한다. 누가는 역사가로서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통해 '오른편'이란 형용사를 사용했으며 요한은
귀를 자른 장본인으로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을 밝힌 것처럼 잊을 수 없는 그 밤의
사건을 세밀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 형용사를 사용했던 것같다. 한편 본서에서는 '베어
버리니'가 '아페콰센'(* )으로 언급된 반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아페일
렌'(* )으로 기록되었다. 이 차이는 요한이 공관복음서에서 그의 사용되
지 않는 독특한 용어를 종종 언급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므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아무튼 눅 22:49에서는 한 제자가 예수에게 칼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던 것으로 진
술되고 있으나 본서에서의 베드로의 행동은 예수의 의사와 무관하게 갑자기 일어난 것
으로 볼 수 있다.
말고 - 귀가 잘려나간 대제사장의 종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름
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본서에만 언급되고 있다. 이것도 역시 사건 현장을 사실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신뢰성을 높이고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
다.

=====18:11
검을 집에 꽃으라 - 칼을 사용한 베드로에게 보인 예수의 반응은 칼을 놓으라는 명
령인데 공관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만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마 26:52). 그리고 이
표현대신 누가는 잘리워진 귀를 만져 낫게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눅 22:51). 특히
마태복음은 칼을 사용한 사실에 대해 채강하고 훈계하는 장면을 관심 깊게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누가복음은 원수를 치료하고 싸매는 모습을 통해 사랑과 화해의 실천자로
서의 예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본서는 메시야적 사역에 깊은 의미를 두었으므로
칼 사용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 - 본서에서 '잔'이라는 말이 본절에서만 나타나고 있으며 공관
복음서에서 언급된 잔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막 10:38, 39;14:36 주석 참조).
특히 본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해졌던 예수의 기
도가 본절에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눅 22:42). 여기서 잔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
스도 예수가 겪어야 할 수난을 의미한다.그러나 이 수난의 잔이 우연히 발생된 것이
아니라 죄악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는
'아버지께서 주신'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공관복음서
에 비해 하나님의 예정을 매우 강조하는데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운명이 하나님의 예정
에 따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 본문은 공관복음서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을 함축한 듯하
다. 즉 아버지의 뜻이라면 잔을 마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결단을(마 26:42;막 14:36;눅
22:42) 좀더 담담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예수는 이 수난의 길이
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할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
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어 순종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길을
막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마 16:21-23).

=====18:12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 - 요한은 최종적으로 예수를 체포한 사람들을 밝
히고 있다. 3절의 언급과 다른 점은 '천부장'이라는 구체적 직위를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부장은 문자 그대로 1000명으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을 의미한다. 그러
나 바렛(C.K. Barrett)은 천부장에 해당하는 본절의 헬라어 '킬리아르코스'(*
)가 로마군의 한 부대의 지휘관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라고 주장한다. 그렇
지만 그는 어떤 규모 부대의 지휘관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역 성
경 중(RSV)에서는 바렛의 견해와 같이 단순히 'Captain'이라고 번역되어 지휘관적인
'천부장'이 아니라 규모가 작은 부대의장임이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견해는 다음두
가지 추정에 의해 부정된다. (1)요한으로 추정되는 15절의 제자는 대제사장과 서로 알
고 있었으므로 그곳에 온 자가 '천부장'인지 직급이 그보다 훨씬 낮은 자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2) 민란의 이유로 산헤드린이 예수를 체포하러 군대까지 동원
시켰으므로 '천부장'이 나섰을 것이다.
잡아 결박하여 - '잡아'(* , 쉰엘라본)는 '함께 잡다'란 말로 '
체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결박하여'(* , 에데산)는 본절에서는 '묶는
다'로 해석되지만 본래는 투옥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같은 표현은 시사해 주는 것
은 단호하게 법을 집행하는 체포 현장을 묘사함과 동시에 11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단
호한 모습과 함께 예수의 체포 역시 간결한 용어로 표현하여 예언의 전격적인 성취를
돋보이게 하는 데 있다. 또한 요한은 공관복음처럼 체포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첨가하
지 않음으로써 생략법을 통한 예언 성취를 강조했다.

=====18:13
안나스 - 안나스는 눅 3:2;행 4:6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누가는 안나스 직책을 대
제사장 가야바와 함께 언급함으로써 안나스가 대제사장인 것처럼 이해하게도 한다. 허
나 요한은 안나스의 직책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해 대제사장 가야바와 구분함으로써
당시 안나스는 대제사장이 아님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안나스는 A.D. 6-15년 사이에
대제사장의 직책을 맡았던 사람인데 그에게 아들 다섯이 있었다. 그 아들들 역시 제사
장을 맡았었다며 본문에 언급된 사위 가야바도 대제사장이었다. 본래 대제사장은 종
신적이었으나 로마의 지매가 시작된후 대제사장직이 막대한 부와 권력에 의해 좌우되
어 로마에 대한 적극적인 추종자들에게 주어짐으로써 자주 교체되었다. 안나스 역시
로마 총독 그라투스(Gratus)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런데 무리들이 예수를 대제사장 가
야바에게로 데려가지 않고 그의 장인 안나스에게로 데려간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에 언
급되지 않아 알수 없다. 아마 안나스는 대제사장 직위에서 폐위 당했으나 그의 사위가
대제사장이었으므로 대제사장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사람
으로 짐작된다.
그해의 대제사장 - 본문과 동일한 언급이 11:49에서 나타난바 있는데 '그해'라는
단어는 제사장직이 1년으로 끝나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체포되던 역
사적인 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언급된 가야바는 약 20년 동안 대제사장직을 맡
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C.K. Barett).

=====18:14
가야바는...권고하던 자러라 - 가야바는 예수께서 사역을 하였던 기간에 대제사장
으로 활동하던 자였다. 본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11:50을 가리킨다. 유대 백성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들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그것이 필경은 로마의 공격을 초래하
리라는 염려에서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들에게 예수를 죽이는것이 모두를 위하여 유익
하다'고 말했었다. 이러한 그의 권고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
에는 예언적 의미로 예수의 죽으심과 결부되었던 것이다(11:51, 52).

=====18:15
다른 제자 - 베드로와 더불어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의 뒤를 따라갔던 두 제자 가
운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제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다. 아
리마대 요셉(19:38)이나 니고데모(3:1-15;7:50-52;19:39)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가
하면 저자의 동생인 야고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Godet, Watkins) 그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즉 요한 자신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
도 있는데(Lenski, Robertson)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한낱 갈릴리 어촌의 어부에 지나지 않는 요한이 어떻게 유대의 최고 지도
자인 대제사장 안나스와 친분관계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요한이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기 때문에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
측한다. 그러나 이는 실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오히려 요한이 예수
의 제자로서 예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했던 당시의 모습을 연
상하면서 그제자가 자신이라고 밝히지 않았을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리고 본절의 설명을 통해 베드로와 자신이 어떻게 그 법정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독
자들에게 알려주어 법정안에서의 모든 일들이 직접 두 제자에 의해 목격된 진실임을
암시해준다.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 - 이 제자가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문지키는 여
종에게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 문을 통과해 들어갈 수 있었던 데서 입증된다. 여기
서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스토스'(* )는 어느 정도의 친밀성을
나타내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 말은 '친한 친구', '친척 관계' 또는 '형제'를
뜻할 수 있지만(Barrett) 그런 정도의 관계는 아닐지라도 그가 안으로 들어갈 때 문지
기로부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결코 단순한 관계가 아닌 것으
로 짐작된다. 한편 다드(Dodd)는 '그 사람이 대제사장과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
람으로서 제사장 출신이거나 아니면 대제사장과 관련된 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제사장이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제롬(Jerome)은 이에 반박하면서 '기독 교회의 사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거의 근거가 없으므로 타당하지 않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 여기서 '뜰'(* , 아울렌)이 울타리 안의
뜰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산헤드린의 집회장소 안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여기서
안나스가 예수에게 심문을 하는 데(19-24절), 이 심문이 안나스 개인에 의한 비공식적
인 것이라면 '안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산헤드린에 의한 심문이 시작되기 직전
에 있었던 것이라면 산헤드린 집회 장소의 안뜰이라고 볼 수 있다(Barrett). 안나스가
심문 후에 예수를 그해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 보낸 점 그리고 본절에서 '집 뜰'
이라고 진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18:16
다른 제자가...데리고 들어왔더니 - 베드로가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를 왜 따라왔
는지 분명치 않다. 10절에서와 같이 자기의 스승을 구출하거나 복수를 하기 위해 따라
왔을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서 그들의 손에서 예수를 구출한다는 것은 불
가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스승인 예수의 신변에 어떤일이 일어날 것인지 걱정이 되
어 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13
:38)는 말씀을 이루려는 주님의 섭리가 있을 수도 있다.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는 문안
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따라
오기는 했지만 예수의 제자로서의 신분이 드러날 경우 자기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감히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거기에는 자기의 칼
에 상처를 입었던 대제사장의 종(10절)도 있었을 것이므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일
종의 모험이었다. 베드로가 들어오지 못한 것을 안 '다른 제자'가 문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여 베드로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그 다른 제자가 처음 들어갈 때 베드
로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은 사실을 언급한 것에 대해 다음 세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1)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2) 내부의 사
정을 그가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다. (3) 들어가기 힘든 그곳에 베드로도 확실히 들어
갔음을 밝히기 위함이다(L. Morris). 본문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보아 여기서는 첫번째
추정이 개연성(蓋然性)이 높다.

=====18:17
문 지키는 여종 - 이 말의 헬라어 '헤파이디스케 헤 뒤로로스'(*
)는 비슷한 표현의 반복이라고 생각된다(C.K. Barrett). 16절에서는 '헤파이디스케'가
생략된 채 '헤 두로로스' 만으로 '문 지키는 여자'를 표현했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그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어린 소녀' 또는 '하녀'를 의미하는 '헤 파이디스
케'를 첨가시켰다. 요한은 '헤두로로스'를 반복함으로써 베드로가 문을 통과하지 못하
고 있음과, 베드로가 부인하게 되는 정황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마가는 베드로에게 첫
번째 질문을 한 여자가 '대제사장의 여종'이었다고 전해주며(마 14:66, 67) 마태와 누
가는 단지 '한 여종'이었다고 전해주고 있다(마 26:69, 70;눅 22:56-57). 여기서 발견
되는 공통점은 베드로에게 첫번째 치욕스런 부인(否認)을 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사람
이 여종이라는 점이다. 하찮고도 연약한 여종 앞에서조차 베드로는 담대함을 가지지
못하고 주님을 부인하는 비겁함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베드로의 초라한 모습은 그가
예전에 보여 주었던 용기있는 언행이 얼마나 인간적인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던가를
잘 보여준다(13:37).
너도...하나가 아니냐 -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다른 제자'와 같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가 아니냐"는
의미로 여종의 질문을 해석하는 학자가 있다(Barrett). (2) '너도 다른 많은 사람의
제자 중 하나'라는 표현은 '다른 제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
에 대한 것이므로 '너도'는 예수의 모든 제자들과 관계있는 표현이다. 따라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18:18
추운 고로...쬐더라 - 유월절은 양력으로 3, 4월경이므로 밤에는 다소 쌀쌀한 날씨
였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특별하여 대제사장의 하속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마당에 불을 피워 쬐고 있었다. 본문에
숯불 - 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드라키안'(* )은 매우 오래된 말
로 신약성경에는 본절과 21:9에만 나온다. 이에 대해 모리스(L. Morris)는 요한이 당
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여러 사람들
이 둘러서서 불을 쬐는 자리는 몸을 숨기고 추위를 피하는 데에도 적당한 장소라고 생
각되었을 것이다. 한편 '대제사장을 아는 다른 제자'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없는데
이 때문에 '이 제자'의 등장이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 저자가 등장시
킨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는 듯하다(15절 주석 참조). 또한 예수를 체포하여
안나스에게 인도한 병사들에 대한 언급도 없는데 아마 이들은 자기들의 숙소로 돌아갔
을 것이다.

=====18:19
대 제사장 - 예수께서 체포당하신 해의 공식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으며(13절)예수
가 붙잡혀 온 곳은 안나스가 있는 곳이었다(13절). 따라서 본문의 '대제사장'은 안나
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24절을 볼때 더욱 명확해진다. 그런데 혹자
는 본문의 대제사장이 가야바를 가리킨다고 보고 안나스는 단지 원로로서 참관한 것이
라고 한다(Godet, Westcott). 이러한 해석은 다른 복음서들이 안나스에 의한 심문을
전하지 않고 가야바에 의한 심문만을 전하고 있는 것과 일치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나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나스앞에서의
심문은 유죄를 위한 예비 심문이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즉 요한은 안나스에 의한 예
비심문을 전해주는 것이고 다른 복음서들은 가야바에 의한 공식 심문을 전해주는 것이
다. 그렇다면 왜 이 해의 대제사장이 아닌 안나스(13절)을 가리켜 대제사장이라고 했
는가? 그것은 본래 대제사장직이 종신적이었고 여전히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
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3절에서 요한은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
는데 그것이 여러 사람이 대제사장직을 동시에 맡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
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를 포함시켜 그렇게 불렀던 것이라고 보
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안나스를 '대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
는다.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 - 공관복음서들이 전하는 바 가야바의 질문과 본문이 전
하는 안나스의 질문은 핵심이 다르게 나타난다. 즉 가야바의 심문은 예수의 인격 곧
예수가 메시야인가에 초점이 있고(마 26:57-68;막 14:53-65;눅 22:54, 55, 63-71) 안
나스의 심문은 예수의 의도들에 초점이 있다. 안나스의 심문은 예수의 의도들에 초점
이 있다. 안나스는 두 가지를 묻는데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
는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교훈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제자
들의 숫자, 성향,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 등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후자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예수는 가르침을 통해 어떤 것을 기대하는가 즉
그의 교훈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예수가 제자들을 규합하여 무력
혁명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11:47, 48 주
석 참조). (2) 예수가 가르치는 중심 교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으로 예수의 가르침에서
구약의 교훈에 반하는 이교적인 사상을 찾아내 정죄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18:20
드러내어 놓고 - 안나스의 두가지 질문 가운데 예수는 제자에 관한것은 대답하시지
않고 교훈에 관한 것만 대답하셨다. 예수는 안나스가 묻는 질문의 의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의 물음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안나스는 거만과 권위에
도취되어 지극히 상투적인 질문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이교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인정할
만한 혐의를 잡아 내려 했지만 예수는 자기의 모든 언행이 공개적이었음을 밝힘으로써
안나스의 의도를 좌절 시킨다.
세상에 - '세상'은 주로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활동 영역으로 언급되지만 여기서
는 단순히 인간들이 사는 생활 터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의 교훈이 공개
적이었음을 말하는 또다른 표현이다. 예수는 결코 은밀한 곳에서 비밀스럽고 파괴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회당과 성전 - 예수께서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이 공개적이
었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준다. 회당에서의 가르침은 6:59에, 성전에서의 가르침은
7:14;8:20에 언급된다.
은밀히는 아무것도 - 예수는 쿰란 종파와 같이 은밀하게 공동체를 형성하여 엄격한
제한을 두어 가르치지 않고 언제나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므로 산헤드린 회원뿐 아니
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교훈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 예수는 안나스가 질문을 통하여 포착하고자 의도한 어떤내
용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물음 자체가 어리석은 것임을 지적하셨다. 안나
스는 예수가 공개적으로 가르치신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동안 그들은 예수를 잡기 위해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
도 그가 질문한 것은 예수의 발언 가운데서 책잡을 만한 것을 찾아 내고자 함이다. 그
러나 유대인의 재판 원칙은 피고가 자신에게 부리한 증언을 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으
며, 피고의 진술을 유죄의 근거로 삼을 수도 없게 되어 있다. 다만 증인들의 증언이나
구체적인 물증의 객관성과 타당성에 의해서만 유죄를 선언할수 있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예수는 안나스의 교활한 음모에 일침을 가하면서 증인들을 요구하고 있다.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 예수의 이 요구는 잔꾀를 부리지 말고 적법한 방식으로
증거를 제시하라는 뜻이다. 참고로 공관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산헤드린은 예
수를 심문함에 있어서 비록 거짓된 증인들이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증언하게 하여 심문
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마 26:59-63;막 14:55-59).

=====18:22
하속 하나가 손으로...쳐 - '하속'으로 번역된 '헤이스 파레스테코스 톤 휘페레톤'
(* )은 직역하면 '관원들 중 곁에 서 있었던 한 사람'을 의미한
다. 이 표현으로 보아 이 사람은 대제사장의 경호원이거나 산헤드린 경비원이었을 것
이다. 그는 안나스를 대하는 예수의 태도가 불손하다고 느꼈던지 손으로 예수의 뺨을
때렸다. 혹자는 본절의 '손으로 예수를 쳐'라는 표현이 손바닥으로 예수의 뺨을 친 것
이 아니라 몽둥이나 채찍으로 때린 것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 '라피스마'(*
)의 초기용법을 따른 것이라고 본다. 초기에 이 단어는 몽둥이로 때리
는 행위를 가리켰다. 그러나 점차 후기로 갈수록 그 단어는 손으로 뺨을 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Meyer, Barrett, Bernard, Bultmann, Morris). 그리고 다드(C.H.
Dodd)는 본 구절을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사 50:6과 연관지어 예수가 손으로 뺨을 맞
았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본문의 묘사는 손으로 뺨을 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랍비 율법에 의하면 심문 중에 있는 피고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순순히 응해
야 한다. 이것과 晥쳬臼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다음과 같은 기록
을 남기고 있다. '대제사장에게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에게 불경건한 자
처럼 정의를 등지는 것이다'(Josephus, C. Apion, II). 그러나 이런 것은 지극히 권위
주의적이고 편의주의적 발상일 뿐으로 피고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받지 않는
다는 랍비적인 가르침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대제사장 안나스의 한 하속이
예수의 뺨을 친것은 정당한 선고에 의해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육체적 가혹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유대법에 위배되는 불법적 과잉 충성의 행위였다. 특히 유대인
들에게 있어 어떤 사람의 뺨을 친다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는 거의 금기시되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뺨을 맞은 것은 말할수 없는 수욕(羞辱)을 의미하며 또한 사 50:6의 예언이 성취된 것
이라고 할수 있다.

=====18:23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며...나를 치느냐 - 본문에서 예수는 정당한 항의를 한다. 만
약 예수가 한 말 가운데 잘못된 것이 있다면 대제사장이 정당하게 심판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심판이 내려지기도 전에 또는 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폭
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이의 제기는 지극히 정당했다.그
것은 안나스의 침묵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24절). 한편 본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태도는 '오른 쪽 뺨을 치는 자에게 왼쪽 뺨도 돌려 대라'는 그의 말씀(마 5:39)과 모
순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말씀의 핵심은 상대방의 행위에 대하여 절
대 복수하지 말라는 데에 강조됨이 있다.지금 예수가 보여준 행동은 정당한 발언을 한
것일 뿐이었다.

=====18:24
예수를...가야바에게 보내니라 - 안나스는 자기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
있으며 그리하여 더 이상의 심문을 포기하고 예수를 당시의 실제적인 대제사장 가야바
에게 보내었다. 요한은 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짧은 기록만을 남길 뿐
공관복음서에서 자세히 언급된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
다(마 26:57-68;막 14:53-65; 눅 22:66-71). 대신 요한은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
를 강조했다. 아마 요한은 가야바를 수장으로 하는 산헤드린이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 거짓증언과 억지로 인한 것이었으며 사실상 예수는 무죄하였다는 사실이 빌
라도 앞에서의 심리 과정에서 충분히 드러난다고 보아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안나스가 당시 가야바보다 실제적인 영향력을
더 많이 끼칠 수 있었으므로 안나스 앞에서의 심문만 묘사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것
이다.

=====18:25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울었다는 곳에 세워진 통곡교회>


사람들이 묻되...아니라 하니 - 이 장면은 18절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그 사이에
예수는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고 있었다. 복음서들 사이에는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
는 당사자가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
어 나타난다.
마가의 경우 첫번째와두번째 질문자
가 동일인으로 여종이며 세번째는 익명의 '어떤 사람'인 것으로 전해주고 있다(눅 22:
54-62). 이에 비해 요한은 첫번째는 여종, 두번째는 '사람들', 마지막 세번째는 베드
로의 칼에 귀가 잘린 바 있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와 인척 관계인 한 종에 의해 질문
이 주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여러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들에 피워 놓은 불빛
과 횃불에 의해 사람을 식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질문자의 성별이나 신분에
관해서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수 있다. 다만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람이 저자 요한이
었다면 그곳에 참관했던 그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부인을 비교적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
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강도가 질문의 횟수가 거듭함에 따라 강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마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맹세하고 부인'하기 까지 했
다(마 26:72). 모든 인류를 위해 무고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모
습과 자기 한 몸의 안전을 위해 거짓을 말하며 자신의 맹세까지(마 26:33, 35) 저버리
는 베드로의 나약하고 추한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18:26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 - 요한만이 증언하고 있는 바 '귀를 베어 버리운 사
람'은 대제사장이 종 말고였다(10절). 세번째 질문자는 이 말고의 친척으로 예수가 체
포되던 사건 현장에 있었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누가에 의하면 이 세번째 질문은 두번
째 질문이 끝난 후 1시간 뒤에 있었으며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에
따라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제시하고 있다(눅 22:59, 60). 아마 이 세번째 질문자는
베드로의 말투를 통해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한편 그의 질문은 질문
자 자신이 말고의 친척으로서 현장에서 목격했다는 것과 베드로가 갈릴리인이라는 사
실이 그가 예수의 제자임을 증거한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동반함으로써 베드로를 압박
해 왔다. 이제 베드로는 순순히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을 고백하던가 아니면 더 강하게
부정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18:27
요한의 서술은 냉정하고 담담하다고 할 수 있을만큼 부가적인 설명없이 사실만을
간결하게 증언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마지막 질문에 직면하여 예수를
저주하기까지 하면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마 26:74).
이러한 베드로의 부인 속에는 자기의 맹세를 단 몇 시간도 지켜내지 못하는 그의 나약
한 모습과 불안이 상징적으로 잘 암시되어 있다.
곧 닭이 울더라 -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는 베드로의 맹세와 "닭울
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의 예언 중에 유감스럽게도 실현된 것은
베드로의 맹세가 아니라 예수의 예언이었다(13:37, 38). 요한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공
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는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했
다고 전한다(마 26:75;막 14:72;눅 22:62).

=====18:28
가야바에게 관정으로 - 요한은 안나스가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만 보
도했을 뿐 산헤드린에서 예수가 질문받은 이야기는 전하지 않았다. 공관복음서에 의하
면 예수는 빌라도 앞에 서기 전에 유대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심문에서 예수는
유대법에 의하면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는 신성모독 죄를 뒤집어 쓴다(마 26:57-
66;막 14:53-64;눅22:66-71). 그러나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은 사형을 집
행할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본
문의 의미이다. 한편 본문에서 '관정(* , 프라이토리온)은 라틴어
'프라에토리움'(Praetorium)에 상응하는 말로서 본래로마 군대의 영내에 있는 장군의
막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본문에서는 총독의 관저를 가리킨다. 유대지역을 다스리
는 로마의 총독은 평상시에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총독의 직무를 수행했다(행 23:33).
그러나 유월절과 같은 대축제일에 총독은 식민지 백성의 소요(騷擾)를 예방하거나 진
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이때 총독이 머물던 관저의 위치에 대해 학자에
따라 헤롯 궁전이었다고 보는 견해(Benoit, Barrett)와 안토니아의 성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옳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새벽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 )는 로마의 시간법으로 제 4
졍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새벽 3-6시를 가리킨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예수를 빌라도의
관저에 데리고 왔다는 것은 산헤드린에서의 예수의 심문이 밤사이에 있었음을 말해 주
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의 불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
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밤에 심문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2) 심문이 있는 당일
에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불법이었다. 전자는 중요한 사건의 심문을 낮에 시행해야
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고 후자는 심문한 당일에는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불법이었
다. 전자는 중요한 사건의 심문을 낮에 시행해야 한다는 규칙을 어긴 것이고 후자는
심문한 당일에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긴 것이다. 한편 혹자는 본 구절
속에는 세상에 대한 예수의 승리의 날이 동텄다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Bultmann) '새벽'이란 표현은 시간의 경과를 알리기 위해 사용된 단어로 영적인 해석
이 요구되지 않으므로 그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 예수를 관정으로 끌고간 유대인들은 예수만 넘겨주고 자
기들은 관정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부정을 법함으
로써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방인의 집
에 들어가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에 따른 규정이 아니라 랍비들이 정한
규례였는데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이 규례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행 10:28).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 본서에 의하면 예수를 빌라도의 법저에 세울 때까지
아직 유월절 잔치를 먹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잡히시
던 날 이미 유월절 식사는 끝났고 대축제 일이 첫날이 시작되었다(마 26:17-30;막
14:12-26;눅 22:7-23). 이러한 공관복음서와 본서의 시간적 차이에 대하여 혹자는 공
관복음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하고(Keim, Strauss), 반면에 다른 학자는 본서가 정
확하다고 하는 등(Lucke, Meyer)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는 데 혹자는 이 차이들을
조화시켜 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학자들은 본절의 '유월절 잔
치'가 유월절 다음날부터 시작되어 절기 칠일 동안 계속 먹는 '식사'인 '차기가흐
'Chagigah)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Lenski, Morris, Robertson).
특히 유대인들은,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먹는 니산월 14일의 양고기 식사 후 축제
적 분위기에서 니산월 15일의 '차기가흐'를 반드시 먹었다. 로버트슨(Robertson)은 이
주장의 신빙성을 더 강화하기 위해 '파스카'(* , '뜻')라는 단어에 대한 요
한의 용법을 제시한다. 즉 요한이 '파스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식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축제'를 가리킨다는 것이며 절기 전체의 주간을 가리킨다는 것이
다(39절;2:23). 이렇게 본다면 본문의 '유월절 잔치'는 유월절의 양고기 식사를 가리
키는 것이 아니라 무교절의 식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19:14에서
예수가 빌라도 앞에서 심문당하던 날이 '유월절의 예비일'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
므로 본서와 공관복음서는 분명히 하루 정도의 차이가 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는 13:3의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희극적 아
이러니(Irony)가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무교절을 유월절로 표현했는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구약 시대에는 무교절과 유월절을 엄격
히 구분하였으나 구약 말기에 이르러 점차 구분이 희미해졌다. 따라서 초기 사도 시대
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일컬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
들이 모든 율법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의례적인 규법을 지
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8:29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 한은 아무런 보충 설명 없이 빌라도를 등장
시키는데 이는 본서의 독자들이 이미 그를 잘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빌라도는 A.D.26
-36년 까지 유대 지방의 총독을 맏았었다.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 의하
면 빌라도는 잔인하고 오만하며 쉽게 분노하고 특히 유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완고하고 의식적인 종교적 편견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런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규법을 인정하고 밖으로 나온 것은(28절) 다소 뜻밖
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유대인들의 대절기였으며 따라서 민족주의와
강하게 결부된 그들의 종교적 감정은 언제라도 폭동으로 분출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하
면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쉬어야 할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와 심문을 시작했다.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 빌라도는 로마의 재판절차를 좇아 먼저 고발자
에게 피고의 혐의 사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18:30
행악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대문자 사본과 소문자 사본은 '카코포이오스'(* )를, 나머지 대문
자 사본과 후기 시리아 역본 및 콥탁 역본은 '코콘 포이온'(* ),
'코코포이온'(*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했다. 어느 독법이 정
확한지 결정지을 수 없으나 본절에서 '에이미'(* , '이다')의 미완료 과거형이
사용되었으므로 명사형인 '카코포이오스'나 분사형인 '코콘 포이온'과 '코코포이온'이
적합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형태를 취해도 본질적인 뜻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법률 위반 여부에 관계없이 심성 자체가 악하며 인격이 바르지 못
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유대인들의 고소는 다분히 감정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범죄
사실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요한은 전하
고 있지 않으나 공관복음서들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다고
결정한것은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혀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보았기 때
문이었다(마 26:63-66;막 14:61-64;눅 22:66-71).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
한 것이었고 로마 법정은 식민지 국민의 종교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재판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것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로마 법정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이끌어 내기 위
해 비종교적인 죄목으로 예수를 고발했지만 그것이 전혀 구체성이 없는 '행악자'라는
죄목이었다. 혹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가리켜 '행악자'라고 고발하는 이 장면에서
'세상'과 계시'의 대졀을 발견한다(Bultmann). '세상'은 '계시'를 반대하고 거부한다.
'계시'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했으므로 그들은 계시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은 끝내 계시를 거부하거나 벗어날 수 없고 계시를 눌러 이길 수도 없다
(19:30;20:1-17). 한편 고소자들은 예수가 '행악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즉 지
속적으로 악을 행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에이미'의 미완료 과거형 '엔'(* )
을 사용했다. 이표현 속에는 예수가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반역음모를 꾀
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18:31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 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하여(30절)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 묻지도 않고 재판을 거부할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빌라도가 이런 반응을 보이
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를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빌라
도는 유대인들이 제기하는 소송이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의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2)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알았고 따라서 자기에게 재판을 하라는 것은 결국 자기들이 판결한 바를 추인
해 달라는 것이므로 그런 무례한 행위에 대해 자기는 권세있는 자로서 결코 응할수 없
다는 의사 표시일 것이다. (3) 빌라도는 본래 포악하고 거만한 자였으므로 총독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릴수 있는 자기의 권위를 강하게 내보이고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의 무력
함을 스스로 고백하게 하려는 계산된 정치적 발언을 하였을 것이다. (4) 때가 유대인
의 명절이니만큼 그들에게 넘겨 주고자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품으로써 좋지 않았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
고자 꾀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본 구절은 네번째의 추정이 가장 타당하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하여(30절)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 묻지도 않고 재판
을 거부할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빌라도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는 분명치 않으나 이를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제기하
는 소송이 로마 법정에서 재판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의 문제라고 여
겼을 것이다. (2)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알았고 따라
서 자기에게 재판을 하라는 것은 결국 자기들이 판결한 바를 추인해 달라는 것이므로
그런 무례한 행위에 대해 자기는 권세있는 자로서 결코 응할 수 없다는 의사 표시일
것이다. (3) 빌라도는 본래 포악하고 거만한 자였으므로 총독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는 자기의 권위를 강하게 내보이고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의 무력함을 스스로 고백
하게 하려는 계산된 정치적 발언을 하였을 것이다. (4) 때가 유대인의 명절이니맡큼
그들에게 넘겨 주고자 했을 것이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
으므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품으로써 좋지 않았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자 꾀했을 가능
성이 크다. 따라서 본 구절은 네번째의 추정이 가장 타당하다.

=====18:32
예수께서...어떠한 죽음으로 -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것을 결정하였고 이제 로마
법정을 통해그 결정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만약 예수께서 로마법정에 의해 사형 집
행을 선고 받는다면 그것은 곧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코 우
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며 예수께서 이미 예고하신 바였
다(3:14;12:32, 33). 마태의 기록에는 이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마 20:19).

=====18:33
다시 관정에 들어가 -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종교적인 규범을 준수하기 위해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예수만 인도한 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빌라도가 왔다갔다 하며
(38절) 심문을 해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본서 기록에 따르면 빌라도의 이 질문은 다소 갑작스럽다
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끌고와 고발하기까지의 과정에는 이런
질문을 유발시킬 수 있는 어떤 암시도 없었기 때문이다(28-30절). 그런데 공관복음서
에는 이점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주어져 있다. 눅 23:2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예수
를 다음 세 가지 죄목으로 고발하였다. (1) 예수가 유대인을 미혹하는 행동을 한다.
(2) 가이사 즉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지시킨다. (3) 자기를 가리켜 유대
인의 왕이라고 선언한다. 본문에서 빌라도는 그 가운데 정치적 문제와 관련된 것에 대
해 심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와 두번째 고소 내용은 빌라도에게 문
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첫번째 고소 내용은 유대인들 내부 문제로서 그들 스스
로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것은 빌리도가 이미 알고 있는바, 로마 황제에
게 세금 바칠 것을 강요하는 총독에 대해 계속해서 반항해 온 것이 바로 완고하고 저
항적인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이 자기들의 동족인 유대인 자신들이었으므
로 이제 그들이 자기들의 동족인 예수를 가리켜 세금 내는 것을 금하는 자라고 고발하
는 것이 신뢰할 수 없는 조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의 질문은 세번째 고소
내용인 정치적인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마 빌라도가 예수가 추구하며 가르
쳐 왔던 영적 왕에 대한 의미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6:15). 결국 빌라도의
질문의 요지는 예수가 무력으로 유대를 로마로 부터 해방시킬 왕이냐는 것이다.

=====18:34
네가 스스로...다른 사람들이 -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가리켜 '자칭 왕 그
리스도'(눅 23:2)라고 하는 자라고 고소했을때 그들은 빌라도가 그 고소의 내용을 정
치적인 의미로 이해하기를 바랬음에 틀림없다. 만일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고소자
의 의도처럼 정치적 선동자라는 측면자에서 빌라도가 이해했다면 예수의 답변은 부정
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면 진실한 일부 유대인들의 경우처럼 이 말이 대망의 메시야를
가리키는 종교적 의미로 빌라도에게 이해되었다면 예수는 긍정의 답변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35절로 미루어 볼 때 빌라도는 단지 유대인 고소자들의 말을 듣고 정
치적 의미에서 예수께 물은 것 같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네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라'는 정도의 의미로 하신 말씀이라하겠다.

=====18:35
내가 유대인이냐...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빌라도의 대답은
자신의 개인적 호기심에 의한 심문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오직 빌라도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행위가 무
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유대인 중 누군가가 자칭 이스라엘의
왕이라하며 세력을 규합하여 반로마적 투쟁을 주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 없었고 또
한 체포되어 끌려온 예수의 모습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한다며 그를 고발했다. 그리하여 빌
라도는 보다 구체적인 질문으로 예수에 대해 알고자 했다.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 이 표현 속에는 한가지 분명히
확인되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재판이 이방인 총독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대제사장이 주도적 역할을 했음도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 책임의 소재와 결부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 의해 떠밀
려 재판을 진행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재판을 이끌어간 세력은 대제사장들로 대변되
는 유대인들이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로 대변되는 유대인들이다. 빌라도는 직무상 재
판에 관련된 책임을 져야겠지만 유대인들은 사건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
이다.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 예수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빌라도
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그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한다. 결국 예수께서 하신 일
들은 그의 나라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한 일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의 나
라의 정체를 설명하는 것이 빌라도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 나라' 즉
소유자가 예수인 그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왕인 나라
는 사람들이 그렇게 지키고자 애쓰며 권력으로만 유지되고 힘이 질서의 원리인 그런
나라는 아니다. 예수는 그 나라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빌라도에게 설명할 필요
를 느끼지 않는다. 아마 설명한다 하더라도 빌라도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
하여 예수는 그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기본적인 사실만을 말해줌으로써
고소권에 관한 빌라도의 일차적 의혹을 해소시켜 주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내 종들이 싸워 - 예수께서는 자기의 나라가 세상에 속하니 않는 것임을 설명하는
데 있어 단 하나의 단서를 제시한다. 그것은 싸움에 의해 획득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
니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의 권력이란 예외없이 싸움에 의해 얻어지고 싸
움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나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것은 예수의 나라가 세상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질서와 원리에 의해 세원진 것임을 증
명해 준다. 그 나라는 사람이 통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
라이며(계 11:15) 힘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의 원리로 세워지는 나라이다.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 본문에서 예수는 자기가 로마 정부에 넘겨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넘겨졌음을 말함으로써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데 유대인들
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8:37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 '그러면' 이라는 표현은 '네가 왕이 아니냐'는 빌라도
의 질문이 예수의 답변(36절)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준다. 36절에서 예수의 답변 가
운데 '내나라'라는 진술은 그것이 비록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형태
로든 예수가 왕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빌라도의
질문은 긍정의 대답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럴경우 공동번역이나 RSV의 번
역처럼 "네가 왕이냐?" (so you are a king?)로 번역하는 것이 의미상 더 타당할 것이
다. 혹자는 이 빌라도의 질문이 '그래도 그대가 왕이라는 말인가?'의 의미로 해석하여
주장하지만(Morris)그보다가 진지한 자세로 질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내가 왕이니라 - 비로소 예수의 긍정적인 대답이 주어지고 있다. 이 대답은 '네말
이 옳도다'로 되어 있는 마가의 기록보다(막 15:2) 더 분명한 긍정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가 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육적으로 말하자면 왕가인 다윗의 가문에서 출
생했고(마 1:1;롬 1:3), 영적으로 말하자면 성삼위의 제2격인 하나님의 아들이다(롬
1:4). 그래서 서편의 저자들은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현했다(시 47, 48편). 그리고
사사 가드온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곧 택함을 받은 백성의 '왕'이라고 고백했다(삿
8:23). 이처럼 하나님은 왕이시기에 성자 예수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왕이 되신
다(고전 15:25).
났으며...왔나니 - '났으며'는 예수가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음을 가리키
는 것으로 그의 참된 인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는
이단처럼 인간의 몸을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제로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완전한 인간이었다. 한편 '왔나니'라는 표현은 그의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본래적 존재도 이 세상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자신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16:28). 이것은
예수가 신적인 본성을 지니고 계신 존재임을 의미한다. 참 인간이면서 참 하나님이신
예수의 본성은 신비 그 자체이다.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 본 구절 바로 앞에 진술된 '이를 위하여'(*
, 에이스 투토)는 예수가 본구절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예수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며(1:1-3), 진리이다(14:6). 그 자신이 진리인 예수는 세상에 오신 궁
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생명에로 인도하는 것이었다(14:6).
진리에 속한 자는...듣느니라 - 진리에 속한 자만이 진리이신 예수의 말씀을 이해
할 수 있다. 본 구절은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 올 수 없다는 사실(3:27;6:44, 45, 65)과 본절은 잘 조화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정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 본 구절은 영적 진리에 무지한 빌라
도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예수는 진리의 왕으로 진리를 말하고
있으므로 만일 빌라도가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예수의 말씀을 이해했겠지만 그는 결
코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에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18:38
진리가 무엇이냐 - 이 질문은 다음 몇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너같은 자가
어찌 진리를 알겠느냐? (2)'당신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관심이 없다.
' 본 구절은 세상 사람들 특히 정치가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하찮은 회의주의(Scep-
ticism)에서 비롯된 질문이다(Godet). 그들은 이상주의적이고 사변적인 문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무관심하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에게 질문을 던진 후 예수의 대답을 듣
기 전에 곧바로 밖으로 나간것으로 보아 (2)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 빌라
도는 예수에 대하여 어떤 적대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의사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 빌라도는 다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깥으로 나
가(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28, 33절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를 심문한 후 얻은 자신의
판단을 전했다. 그 결론은 예수가 사법적 처벌을 받을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는 사실이
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공정한 재판장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록 그는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의사는 없었지만 적어도 예수가 처벌을 받아야 할만한 행위를 하지 않았
을 뿐 아니라 의도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사실대로 유대인
들에게 전했다.

=====18:39
유월절이면...전례 - 빌라도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심문하기는 하였지만 재판장
으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유기(遺棄)하였다. 그는 자신이 말한 바 예수의 무죄를 확인
하였으므로(38절) 유대인들의 동의를 물을 것도 없이 예수를 석방했어야 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못하고 유대인들의 동의를 얻고자함으로써 우유 부단한 그의 성
격을 노출시켰다. 아마 그는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의 지도자들이 고소했다는 이
유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자기의 판단대로 밀고 나갈 수 없었을 것이
다. 아무튼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시켜 주는 전례를 따라 예수를 풀어주
고자 했다. 한 사람을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한 자들이 유대인들로 기록되어 있다(막15
:8). 요한은 자세한 대화를 기록하기보다는 빌라도의 말에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유대
인들의 요청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시
켜주는 관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쉬나의 암시외에 자료의 불충분으
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예수 당시에 그런 관습이 적용되고 있었던 사실만큼
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아마 그 전례는 로마 통치자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통치를 용
이하게 하기 위한 유화(有和)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왕을...원하느냐 - 빌라도는 예수를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혹자는 빌라도가 이명칭을 사용한 것에 대해 그가 예수를 위해 유대인들의 마음
을 돌리게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L. Morris). 그러나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예수를 고발한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고 볼수도
있다. 따라서 굳이 표현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자 한 것 같지는 않
다. 아마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고소했던 내용 중 하나인 '유대인의 왕'이란 표현
을 단순히 반복한 것 같다.

=====18:40
바라바라 하니...강도러라 - '강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스테스'(* )
는 당시에 '게릴라'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C.K. Barrett). 바라바라는 반로마
적 혁명 운동을 주도했던 정치법이었을 것이다(막 15:7;눅 23:19). 유대인들은 자가당
착적(自家撞着的)인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 왕 즉 정
치법으로 고소한 반면 진짜 정치범은 놓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
대인들은 전혀 일관성도 없이 다만 예수에 대한 적개심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고 메시야를 죽이려고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