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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 20장 주석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04.08.24|조회수16,599 목록 댓글 0
요한복음 제 20장
=====20:1



<예수님께서 잠시 누우셨던
무덤을 기념한 교회>
안식후 첫날 - 이는 일주
일의 각 요일에 해당하는
명칭올 사용하지 않고 있
었던유 대인들이 안식일올
중심으로 요일올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안식 후
첫날'은, 하루의 해가지는
시간부터 다음날 해지는
시간까지튤 하루로 계산
하는 유대인의 방식에
따른다면 토요일일몰 후부터
일요일 일몰 때까지의 어느
시점을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첫날'(* ,미아)은'하나'를
뜻하는 기수인데, 당시에
'첫째'(* ,프로토스)를 뜻하는 서수로 표현했던 일반 용법과는 다른 표현이다.
혹자는 이것이 셈어 (Sem 語)적 표현법의 영향이라고 보는데(Barrett),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히브리어나셈어에 그런 표현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근거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어두을때 - 마태의 '미명'과 마가의 '해 돋을 때'라는 표현에 비해다소 이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흑자는 복음서들의 표현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집을 떠날때
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때였고 무덤에 도착한 때는 여명이 밝아올 때였다고
본다(Lenski).아무튼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매우 이른 시간에 예수의 무멈올 찾아갔
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렇게 일찍 무덤을 방문한 것은 예수를 탄압한 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식지않는 열정올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본절의 '이른 아침'그러니까 아직 어둡기는 하지만 이제 날이 밝아지기 시
작하는 시각은 하나넘의 구원사에 있어 매우 증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시점이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주일이 시작되는시점이며, 시작으로서의 창조를 기념하
는 안식일이 완성으로서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대치(代置)되는 시점인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인은 한때 일곱 귀신에 들려 고통올 받다가 예수께 고침을
받은 이후 예수를 따르며 비사하였던 여제자격의 인물인데(막 16:9; 눅8:2), 갈릴리
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르며 수종들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도 끝까지 남아 이를 지켜보았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19:25). 혹 독자들 중예는 이
여인을 마르다의 동생이자 나사로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 혼동할 수도 있으나
양자는 전혀별개의 인물이다(11장).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a)라는 이름은 가리
키며 막달라라는 성읍은 디베랴(Tiberias) 북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한편 본문
에서는 무덤을 최초로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여러명의 제자들이 함께 동행하였다(마 28
:1; 눅 23:55;24:1). 이런 차이는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여인들이 동행했다
는 사실을 모른데서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2절의 '우리'라는 표현은 복
수의 인물들이 무덤올 방문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아마 요한은 첫 방문자듸 가운데
핵심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에만 초점올 맞추어 서술하였을 것이다.
돌이...옮겨간 것을 보고 -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무덤을 방문한 것은 유대인의 관
습에따라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라고 보는것이 가장 일반적이다(막 16:1) 향유
를 바르는것은 곧 시신을 돌보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유대인듸은 시신이 썩기 전까지
는 고인(故人)의혼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장사 지낸 후
사흘동안 시신을 돌보았던것이다. 한편 여인들이 무덤을 채아왔을 때 무덤입구를 막았
던 돌문이 옮겨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무덤에서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강
하게 암시한다. 왜냐하면 무덤을 막았던 돌문은 장정 다섯 명이 힘올 합해야 겨우 옮
길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으며 입구에 움푹 패인흠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인 몇
몇이 옮기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마가는 여인들이 돌문올 여는 것에
대해 염려하며 길을 떠나는 장면올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막 16:3).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달려가서 -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와는 달리
천사에 대한 언급을(12,13절) 비교적 간략히 다룬다(마 28:2-7; 막 16:5-7; 눅
24:4-7) 본서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을 확인해 보았는지 아니면 무덤 문이
열려져 있는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시신의 도난을 생각했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튼 막
달라 마리아는 시체가 없어졌다고 확신했고 그것올 급히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달
려갔다. 요한은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만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빈무덤의 사실을 전
해들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과 콴련시켜 볼 때 모든 제자들이 그소
식을 들었을 것이 확실하다. 아마요한은 직접 무덤을 확인한 두 중심적인 제자에 초점
을 맞추어 서술해 나갔을 것이다(눅 24:12 주석 참조). 베드로는 세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제자들 중 대표격으로 언급된다. 18:27
이후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나 이제로부터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바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요한의 특징적인 표현으로
(13:23;19:26) 21:20과 24절을 연관시켜 블 때 이 인물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요한이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표현 속에 자신을 숨
기는 것은 그의 겸손한 태도 때문이라고 블 수 있다.
사람이 주를...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 본문의 '우리'라는 표현은 무덤을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1절 주석 참조).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가져갔다'
에 혜당하는 혤라어 '에란'(* )은 비인칭 동사로서 예수의 시신을 흠쳐갔으
리라고 의심되는 대상을 분명하게 가리키지는 않는 표현이다. 아마 무덤 도굴꾼이거
나 예수의 적대자들이 마리아에게는 혐의(嫌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 내용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바 그녀가 무덤을 찾아간 것이, 예수께서 생전에 부활을 예고한 말씀을 믿었
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은 전혀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20:3
베드로와...무덤으로 같새 -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즉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무멈율 향해 달려갔다. 아마 이들도 막달라 마리아의 생각
대로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횹쳐갔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확인해 보고자 했을 것이다
(9절). 여기서 '갈새'(* , 에르콘토)는 미완료형으로 두제자가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자들이 이렇게 즉각적(卽刻的)인 반응을 보이고 있
는 것은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 제자들에게는 전혀 금시 초문의 뚱밖의 사건이었
음을 시사한다. 만약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가 놓고 예수께서 부
활했다고 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면(마 27:63, 64) 베드로나 요한이 그것올 몰랐을
리가 없고 그들이 이렇게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눅24:
12에 의하면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한 제자는 베드로 한 사람이다.그런데 본문은 요
한도 함께 갔다고 진술하고있다. 본서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븍음
서 가운데 남자 제자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사람은 요한 혼자이기 때문에
(19:26, 27) 예수의 무덤을 알고 있던 요한이 베드로를 인도하여 무멈으로 함께 갔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4절에서 요한이 먼저 무덤에 당도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다.

=====20:4
달음질하더니 - 두 제자는 그들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무덤이 비어 있고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그녀의 추측예 동의했건 예수의 부활
을 떠올렸건 간에(물론 전자일 가눙성이 많지만, 9절 주석 참조) 흥분하지 않을 수 없
었고 그런 심리상태로 침착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오히려 어색 할 것이다.
다른 제자가...먼저 무덤에 이르러 - 베드로보다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
에 대해 학자들은 대개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 때문이라고 본다(Lenski, Tenney).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3절 참조). 요한이 무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
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이 곧 요한
의 사도적 우월성올 뜻한다고는 볼 수 없다(5-4절)

=====20:5
구푸려 - 이는 헬라어 '파라큐사스'(* )를 번역한 말로서 자세
히 관찰하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베드로처럼 적
극적이지 않고 세심한 요한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그러나 요한은 세심하게 관찰을 할
뿐 선뜻 들어가지는 않고 있다. 혹자는 요한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것은 수의가 무덤
안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시신이 아직 있다고 생각해서 이 시신을 존귀하게 여겼거나
시체틀 만지는 부정(不淨)을 저지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8절).
세아포 - 이것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감쌀때 사용한 삼베를 가리
킨다(마 27:59). 성경상으로 살펴보면 삼베는 시체를 싸는 것 외에도 성막의 앙장(仰
帳)(출 26:1), 귀족의 복장(창 41:42), 돛(겔 27:7), 이불(잠 7:16)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20:6
베드로도...세마포가 놓였고 - 베드로의 행동은 그의 성격대로 거침없이 단숨에 무
덤안으로 들어가는 양태로 나타난다. 앞절과 본절에서는 무덤 안에 세마포가 있었다는
것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갈은 확인은 세마포의 존재가 시체 도적설을 반증(反
證)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거듭 언급되고 있는 듯하다(7절 주석 참조)

=====20:7
머리를 쌌던 수건은...개켜 있더라 - '개켜 있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테튈리
그메논'(* )은'싸다', '봉하다'라는 뜻으로 수건이 식탁
보가 접혀있는 것처럼 납작한 형태가 아니라 둥그렇게 말려있는 모양을 가리킨다. 그
런데 이것이 머리에 말려있던 대로의 모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사용하기 전의 처음
상태로 말려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전자라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손과 발이 세마포로 묶여 있고'머리에는 수건이 감겨 있던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온
몸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으로부터 몸만 빠져나오는 신비한 방식으로 부활했다는 결
론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었을 가눙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만약 세마포
와 수건이 처음 싸여있던 그대로 제자리에 남아있고 예수께서 몸만 빠져나간 것이라면
그것을 요한이나 다른복음서 제자들이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머리를 쌌던 수건은 셰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는 표현에
서 '딴'(* , 알라)이 '따로 떨어진'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자일 가능
성은 더 희박해진다. 왜냐하면 전자의 해석을따를 경우에는 수건과 세마포가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목 길이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나란히 눠여져 있어야 하겠
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요한이 세마포가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수
건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적은 시체 도적설을 반박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시체를 훔쳐 갔다면(마 27:64) 세마포를 벗겨내어 두고 간다거
나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벗겨내어 잘 정돈해 놓았을 가눙성은 회박하기 때문이다

=====20:8
들어가 보고 믿더라 - 베드로가 담대히 무덤 안에 들어가 살펴보고 나자 요한도
힘올 얻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기서 '믿더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대상으
로 하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대략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가 세마포와 수건이 있는것을 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다는 해석이다(Barrett, Godet, Hosknys). 특히 고데(Godet)
는 '보고'와 '믿더라'의 두 동사가 모두 단수형임에 주목한다. 2-7절에서는 두제자가
함께 언급되고 9절과 10절에서도 함께 언급되지만 유독 본절에서만 단수형인 둥사를사
용하여 그 다른 제자를 따로 언급한 것은 저자 요한이 자신만의 특별한 체험을 부각시
키기 위한 의도를 보여주며, 따라서 사도 요한이 여러제자들 중 처초로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음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고 향다. 이 해석은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어찌하여 베드로나 무덤 밖에서 울고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의 부활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설령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부활의 의의를 총체적로 이해한 것도
아니며(9절), 보지 않고 믿는것에 비해(29절) 충분하지 못한 믿음이었다 하겠다. 둘째
는, 본문의 '믿더라'는 말의 뜻을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는 것
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Broomfield).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전자에 가깝다.

=====20:9
저희는 성경에...아직 알지 못하더라 - 본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부활의 의
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만약 요한이(혹은 베드로도) 무덤
안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님의 부활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의인의 부활이라는 범주에서 이해한 정도였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
지는 구원사적(救援史的)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말하는 성경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치않으나 학
자들은 일반적으로 시 16:10을 가리킨다고 본다(Robertson, Sanders, Tenney). 이 성
구는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 중에도 언급되고 있다(행 2:27;13:35).그리고 눅 24:44-47
에 잘 묘사된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표되어 있
음을 말씀하셨다.

=====20:10
집으로 돌아가니라 - 요한과 베드로는 각각 자기의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공동의
숙소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븜이 타당할 것이다(공동 번역 참조). 한편 빈 무덤을 확
인하고 돌아가는 두 제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요한의 경우는 주님의 부활에 대
한 어느 정도의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8절), 베드로는 다소 기이한 생각을 가
지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돌아갔을 것이다(눅 24:12).

=====20:11
마리아는...울면서 - 두 제자는 떠나고 막달라 마리아 횬자만 남아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애통해 하고 있다. 요한은 마리아가 언제 무덤에 다시 돌아왔는지 혹은
두 제자가 돌아갈 때 마리아와 다시 만났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마리아
가 통곡하는 장면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울면서'에 해당하는 헬라
어 '클라이오'(* )는 조용히 눈물을 횰리며 우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감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통곡하는 울음을 가리킨다. 마리아의 이런 대성 통곡은 예수께
대한 그녀의 제자로서의 애정이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다는 생각 외에 다른 가눙성(부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구푸려'에 대해서는 5절을 참조
하라

=====20:12
흰 옷 입은 두천사 - 빈 무덤과 관련된 천사의 출현에 대해서는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천사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에 대해서는 약간씩의 차이를 드러
낸다. 가령 마태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로 묘사하고 천사의 숫자는 하나인
것처럼 기록했다(마 28:2). 마가는 "횐 옷을 입은 한 청년"으로 묘사하고(막 16:5),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눅 24:4). 이와 같은 천사에
대한 묘사를 비교해 보면 천사가 횐 색깔의 옷과 관련되어 있고 광채가 난다는 점에
서 공통적인 부분이 있고, 숫자에 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천상적 존재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천상적 존재를 인간
의 육안(肉眼)으로 관찰하여 묘사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전제
로 할 때 별 무리없이 이해된다. 각 복음서 기자들은 둥일한 사건을 묘사함에 있어 관
점의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누가와 요한은 무덤주위의 사실에 대한 설명에
성실했던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부활예 대한 사실 설명에 몰두한 나머지 천사의
숫자 같은 부대 사항들을 묘사하는 것은 소흘히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빈 무덤에서의
천사의 출현은 무덤에서 무언가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20:13
천사들이...어찌하여 우느냐 - 마리아의 슬픔에 찬 울음이 어찌나 처절한 것이었던
지 천사들조차 그것을 일차적인 관심으로 삼고 있다. 마리아가 이렇게 슬픈 눈물을 흘
리면서 울고있는 것은 바로 삼 일 전에 사랑하는 주님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슬
픔에 무덤 속의 시신마저 없어진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장례와 장
사를 매우 중하게 생각했고 시신에 대한 결례를 끔찍한 일로 중오하였던 육대인들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마리아의 걱정과 불안 그리고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겠는가는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천사의 물음은 그녀가 어떤 이유로 울고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물음은 '여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르고 슬퍼하느냐'의 뜻이었을 것이다(눅 24:5, 6). 한편 본서에서는 천사의 역할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어찌하여 우느냐'는 질
문을 하는 것 외에 다른말을 하지 않으며 더이상 둥장하지도 않는다. 이에 반해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천사가 주님의부활 사실을 고지(告知)하고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
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기도 한다(마 28:5-7: 막 16:6, 7;눅 24:5, 6).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여기서 2절에서와 달리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
용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임을 가리킨다. 한편 이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뒤에 부활하신 주님을 두고도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아
이러니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20:14
예수의 서신 것을...알지 못하더라 - 마리아는 무덤 속올 들여다 보고 있었고 천사
들은 안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뒤를 돌아다 보았을까? 여기에 대해
서는 두가지 가눙성이 제시되어 왔다.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소스톰(Chrysostom) 이래 많은 주석
가들이 제시한 것으로 천사들이 질문올 하면서 손가락으로 뒤에 계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것이 정확하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또다른 문제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 서계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막달라 마
리아의 눈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야톨 가려서일까? 그보다는 부
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
해이다. 이런 몸에 대해서는 바울이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라고 말한 바 있다(고전
15:51-53). 이 견해가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본 것이 막달
라 마리아 혼자만이 아니라 엠마온 도상(道上)의 두 제자도 그랬고(눅 24:13-16). 해
변에서의 제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이다(21:4). 여기에 덧붙여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몰라본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20:15
여자여...누구를 찾느냐 - 부활하신 주님의 첫번째 물음은 천사의 물음과 동일한것
이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침착한 마음으로 생전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면 두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질문이 뚱하는 바를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나 유감
스럽게도 그녀의 마음은 걱정과 조급함 그리고 당황과 슬픔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마
리아는 살아 있는 자 곧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렸어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은
시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물음은, 믿음이 부족
한, 성도들이 괜한 걱정과 불안으로 무의미한 눈물율 흘리며 찾지 않아야 할 곳에서
주님을 찾을 때 들려주어야 할 물음인 것이다.
동산지기. 막달라 마리아는 얼떨결에 뒤에 서있는 주님을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 그
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지기라고 착각했다. 그토록 이른 시간에 동산 주위에 서
성이는 사람으로서 동산지기를 떠올림은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주여...가져가리이다 - 여기서 사용된 '주여'(* , 퀴리에)는 13, 18절의
'주'(* , 퀴리오스)와는 달리 일반적인 존칭어로 사용되었으므로 '선생님
' 또는 '여보세요'(공동번역)가 옳은 번역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찾아
야 한다는 염원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고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조급한 나머지 '누구의 시신이 없어졌는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 만일
옮겨 놓았다면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있다. 단신(單身)으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주
님의 시신을 찾아 자신이 다시 매장하겠다고 나서는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부
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한 실수를 어느 정도는 덮어주고 있다.

=====20:16
아리아야 -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고 마리
아의 가려진 눈을 띄어 주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생전에 자신을 부르시던 음성과 억
양을 기억하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았던 것이다. 부드러
운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시는 이 극적인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 극적 장면은
목자가 자신의 양을 부르면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본다고 하는 10:3, 27
말씀을 연상시킨다.
돌이켜...랍오니여 - 본문의 '돌이켜'는 8절과 연관시켜 블 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14절의 동작이 절반쯤 돌아선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돌아서서 말한 후에 다시 무덤 쪽으로 돌아섰다고 보기도한다. 그러나
전자는 '스트라페이사(* 라는 표현이 완전히 돌아선 것을 뜻한다는
사실에 의해 거부되며 후자는 15절과의 문맥상 마리아가 말을 하고 다시 돌아섰을 가
눙성보다 대답을 기대하면서 마주보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 이것은 요한이 극적인 장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즉 마리아가 주님의 음성
을 듣는 순간 받았을 충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러한 수사법을 사용했으리라 보는 것
이 타당하다(Lenski). 한편 '랍오니'(Rabboni)는 '나의 선생님'을 뚱하는 헬라어 '디
다스칼레'(* )에 상응하는 아랍어이다. 이 칭호가 본문에서 갖는 의
미에 대해서는 (1) 단순한 선생님이라는 뜻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견해와
(Barrett, Lenski) (2) 문자적 의미 그대로 즉 '선생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
다(Bultmann). 그러니까 전자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인식하였다고 보아
'나의 친애하는 주'의 뜻으로 보는 견해이며 후자는 마리아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에
대해 부활하신 주님으로가 아니라 생전의 예수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아 단지 '선생
님'으로 보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는 바 어
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여하튼 마리아는 순간적으로 기쁨에 넘쳐 주님을 향
해 달려들었다(17절)

=====20:17
나를 만지지 말라 - 본문은 금지를 나타내는 '메'(* )와 함께 쓰인 현재 명령
법 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행동을 중지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거
의 행동화되기 직전의 상태에서 중지시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개는 본
문의 금지령이 이미 행동화된 상태에서 이제 그만하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Lenski, Rebertson, Tenney).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것을 허락한 마태의 기록(마 28:9)을 고려해서 이다. 그러나 불트만
(Bultmann)과 버나드(Bernard)는 이와 다른 건해를 제시한다. 불트만은 마리아의 행동
이 있기 이전에 그녀의 행동을 멈추게 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만약 마리아가 이
미 주님의 발을 붙잡았다면 '만지지말라'는 표현 보다는 '나를 놓으라'는 표현을 사용
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버나드는 본문얘서 여러가지 해석상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문상의 훼손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즉 본문의 '메 아프
트'(* , '만지지 말라')는 '메 프토우'(* , '두려워 말라'
)의 훼손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구체적인 본문상의 근거를 가지고 있
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므로 앞의 두 견해가 진혀 타당하지 않다고 증명
되는 경우에만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있다. 일단 마태의 기륵(마 28:9)을 고려해 볼때
첫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금지령이 최동화된 이후이
건 흑행동화 되기 이전이건 가장 중요하게 물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는 왜 주님께서 마
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아버지께로...못하였노라 - 앞 절에 이어 여기서 생기는 물음은 어찌하여, 부활하
신 예수께서 하늘예 올라가지 않은 것이 마리아가 예수를 만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
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께서 아직 승천하지 아니하
였고 또 즉시 승천할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만나보고 올라가려 하므로 아직 시간
은 충분하다. 그러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본다(Tenney).(2) 먼저 아버
지에게 간 후에야 제자들과의 접촉을 허락한다는 의미로 본다. 여기에는 마 24:9와 조
화될 수 없는 난점이 있다.(3)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한것은 그녀가 주님을
보았올 때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여기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예
수께서는 자신이 생전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는것이다.
아무튼 이제 마리아는 생전의 랍비로서가 아니라 죽고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예수와 관
계틀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위의 세 견해 중 세번째 것이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내 형제들에게 - 이 문구의 의미가 예수의 직계 혈육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
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이것은 여기서 갑자기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생전에'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한 비 있고(막 3:35),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
를믿고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기 않으셨다'(히 2:11)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 본문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수와 제
자들간의 관계가 친구(15:14, 15)사이에서 나아가 영원한 혈육의 관계로 발전된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
는 표현으로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
도들은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예수와 한 가족, 한 몸이되었다(고전 12:27)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 여기서 주님과 제자들을 따로 분리하여 진술한 것
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는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 전부터 일체(一體) 상태에 있는 특별한 관계이지만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양
자로 선택된 관계라는 것이다(Barrett, Tenney, Lenski).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것을 '본성으로는 나의 하나님이며은혜로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문구로 표현한다.
다른 하나는 본문이,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성(同等性)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룻 1:16을 인용하여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Moule, Brown). 그런데 전통
적인 기독교의 교리상 전자의 견해가 우세하다고 본다.
올라간다 하라 - 혹자는 본절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신 것은
'나를 만지지 말고 가서 내 형제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이 사실을 전
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Toray). 예수께서 부활하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첫째, 수난으로 시작
되는 구원사으 결정을 완성하는 의미가 있다(6:52-62). 둘째 올라감은 또한 다시옴을
뜻한다(14:18, 23). 이것은 곧 성령의 도래를 뜻한다(7:39;16:7). 부활하신 주님이 승
천한 후 성령께서 내려오면 예전보다 더 친밀한 영적 연합의 관계가 맺어지게 될 것이
다.

=====20:18
제자들에게...이르니라 - '이르니라'(* ,앙겔루사)는 현재 능동
태 분사로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거의 한호에 가까운 감정으로 외치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그려주고 있다. '내가 주를 보았다'는 외침은 어디서 소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임을 말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을 확정적으로 선포하
는 의미가 있다. 이어서 미리아는 주께서 분부한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하였다. 요한
은 여기서 이야기를 맺고 장면을 바꾸고 있으며 마리아의 메시지 전달에 대해 제자들
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이에 대하여 마태는 직
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제자들이 분부더로 갈릴리의 산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기
록함으로써 주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마 28:16-20). 그리고
마가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인들이 빈 무덤과 천사의 임재를 경험
한 후에는 두려움에 싸여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고 두번째 예수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
아에게 현헌하셨을 때는 그녀가 가서 전하였으나 제자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록
하고 있다(막 16:8, 9-11).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는 생략한 채 여인들이 제
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고했으나 제자들은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24:8-11). 이런 사실들로 볼 때 제자들이 처음에는 여인들의 부활 보도를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은 것 같다.

=====20:19
안식 후 첫날 - 이 날은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Lord's day)을 가리킨다. 이
'주일'이 정확하게 안식일 다음 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초대교부들의 문헌에 의하면 초대 교회가 '주의 날'로 일컬어진 특정한 날에 예배와
친교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주의 날'이라 공식적인 칭호가 나오는 계
1:10 이나 고전 16:2 등을 참조할 때,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과는 다른 어떤
특정한 날을 지켰음이 확실해진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더이상 안식일이 시간적
구속력을 강요하는 율법적 멍에가 아니라는 사상이 보편화되고 있었다(골 2:16). 그들
은 안식일의 기본 정신은 폐기하기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의미를 주는
'안식 후 첫날'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로마인들이 태양의 날(Sun day)로 인
정했던 주간의 첫날이 A.D.321년 콘스탄틴(Constantine, 274-337) 대제에 의해 공휴일
화 되면서 이 날이 '의로운 태양'(말 4: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굳어진 듯하다.
문들을 닫았더니 - 제자들은 일찍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뿔뿔
이 흩어져 제각기 피신했었다. (마 26:56). 제자듸은 위험한 선동자의 추종자로 혐의
를 받고 있었으므로 비밀스러운곳에 은신하고 있었고, 언제 산헤드린의 군사들이 체포
하러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것이다.
문들을 받았더니...가운데 서서 - 요한이 누가와는 달리(눅 24:38-36) 문이 굳게
닫혀진 사실을 기륵한 것은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 외에 예수께서
어떤 장애에도 방해받지 않고 공간올 통과할 수 있는 영적인 몸을 입은 신적인 존재라
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Bultmann, Lenski, Tenney). 예수
의 부활체는 20절로 미루어 볼 때 지상 생애 당시의 몸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수 있
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에도 당신의 뜻에따라 물리적 제한을 초월하실 수 있음을 나타
내 보이셨다(6:16-21). 그러나 이 부활체는 고전15:44에 언급된 '신령한 몸'이라는 점
에서 단순히 자연 상태인 육체와는 엄연히 구분되어진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 '평강'에 해당하는 혤라어 '에이레네'(* )는 '평
화', '화평','븍지'의 뜻으로 히브리어의 '샬롬'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인데, 길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 5:21), 헤어질때(삼상 1:17;행
16:36). 이웃을 방문할 때(마 10:12) 등의 일상의 생활에서 주고받는 인사이다. 그러
나 본문에서 이 말이 주님의 입에서 베풀어졌을 때, 그 뜻은 일상적인 인사의 범주를
넘어 세상이 가져다 주는 평안과는 다른 그분의 평안이라는 범주에서(14:27) 이해된
다. 아마 이 평강은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결과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행 13:4-12. 참조).

=====20:20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기뻐하더라 - 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자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
여 무서움에 빠졌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상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장면이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하기 시작했다.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더 확신시키기 위하여
생선율 달래서 먹었던 일도 같이 전해주고 있다(눅 24:41-43). 예수게서 손과 옆구리
의 상처를 보여준 것은 그의 부활한 몸이 육신과의 연속성(連續性)을 가지고 있으며
죽으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님께서 영으로만 부활
했다거나 기타 가현실적인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 혹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주님의 현현이 '너희에게 오리라'는 약속(14:18)이
성취된 것이라고 보며, 본절의 '기뻐하더라'는 앞에서 빌어준 평강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본다(Bultmann). 아무튼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목자없는 양같이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심정이 얼마나 곤횬스러웠을지를(19절) 상상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을다시 만
나게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기쁨과 위안이 얼마나 컸겠는지는 눙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이다. 한편 십자가 처형에 관한 사븍음서의 기록은 한결같이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
만 간략히 언급할 뿐(마 27:35;막 15:25;눅 23:33) 구체적인 장면을 생략하고 있다.
다만 눅 24:39, 40을통해 우리는, 예수의 손뿐만 아니라 발에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흔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21
평강이 있을지어다 - 19절의 말씀과 동일하다. 19절의 평강 기원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위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본절의 평강 기원은 제자들이 파송을 받
아 복음을 전파할 때 당할 환난에 대해 담대히 맞설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복음서들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
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도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
터 보내심을 받았다는것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3:34; 5:36,
38;6:57;7:29;8:42;11:42;17:3, 8 등).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
았음을 깊이 인식하였고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명올 완성하였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심이, 아들이 제자들을 보내심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제자들은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제 사
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것처럼 그들의 생명을 바쳐 복음
선포의 사역을 완수해야 한다. 아울러 사도들은 그들의 사도적 권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자각하여(13:20) 권위의 순결성을 간직해야 한다. 혹자는
13:20이나 본문을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으로 간주한다(Bernard). 그러나 이러한
파송이 넓게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였던 것처럼(4:34;5:19;17:4). 또 온전
히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였던 것처럼 (1:32), 교회가 주님께 철저히 의존되어 있고
복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때 위의 사도적 사명과 권위는 교회에 의해 승계(承
繼)된다.

=====20:22
숨을 내쉬며...성령을 받으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 장면 묘사
는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유사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겔 37:9의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
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는 표현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태초에 하나
님이 숨올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주
시는 것이 병행을 이루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주심이 새로운 창조로 묘사되고 있다는점
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면
(창1:27, 28),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사도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고 할수 있다(마 28:16-20). 이 새 창조는 븍음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
력의 출처를 말해주는 바, 사도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직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고전 2:1, 4). 한편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
라어 '라베테'(* )는 '영접하라'는 뜻으로 성령을 받는다 함은 어떤 능력
을 받거나 도구적 수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인간 실존속에
모신다는 뜻이며 또한 사도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해도 그 일의 능력의 원천
은 사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사도들 속에 내주하는 성령에게 있다
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은 오순절(五旬節) 날 한 곳에 모
여있던 제자들에게서 폭발적인 능력올 나타내기 시작했다(행 2:1-4).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약속의 성취였다(7:39;16:7).

=====20:23
뉘 죄든지 사하면...그대로 있으리라 - 누구의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을 권세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막 2:6, 10). 본절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제자들이 자의적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해석하는 학자는 없다. 혹자는 본절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진실함과 충성
하는 자세를 갖지 않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나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 의해 이끌려
지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권세를 설명하고 있다고 재해석하기도 한다(Filson). 그러나
그보다는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에게 생기는 결과
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고다. 즉 사도들에게는 븍음 증거의 사명과 권
위가 주어졌다. 그리고 사도듸이 복음을 증거할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열매
를맺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받는 결과가 생긴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죄가 그대로 남아 끝내는 심판을 받게 된다(막 16:16). 이런의미에서 사도들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제자
들에게 엄청난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사도들이 복음 증거의 사
명을 소홀히 하여 누군가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잘못된 교훈을 받게 된다면 그리하여
그 사람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도들의 직무 태만에 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선별하여 븍음을 들려줄 수 있는 권세를 가
지지 않으며 다만 할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한다. 사도들이 받은
사명은 고귀한 권세이자 엄청난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20:24
다두모라 하는 도마 - '도마'(Thoma)는 '쌍둥이'를 뚱하는 아랍어인데, '디두모'(*
)는 이에 대한 헬라어 번역이다. 본래 사람의 이름이 그의 생의 행적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는 없고지만 '디두모'의 원래 의미가 '둘의', '이중적인'의뜻인 것
과 과거에 그가 보여준 대단한 열정에 비해(11:16) 너무도 나약한 현재의 대조적인 모
습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퍽 의미 심장하다. 요한은 도마가 어떤사정 때문에 주님이 현
현했을 때 함께 있지 못했는지는 전혀 설명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도마가 제자들의
증거를 대하는 태도(25절) 등 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큰
낙담과 좌절에 빠져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20:25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 마리아도 그랬던 것처럼 '주를 보았다'는 진술은 곧 '주께
서 부활하셨다'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18절).
손의 못자국...아니하겠노라 -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여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
보다 더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살아나신 주를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손으로 그 몸의 상처 자국을 만져봐야 믿을수 있다고 증거를 요구한다. 도마가 보인
강한 의혹때문에 그는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비관론자', 또는 '회의주의자'라는 혹평
을 받아왔다. 그가 그토록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인 것은 예전의 충성스러운 모습(예
수께서 눈에 보이고 만져질 때, 11:16)을 떠올려 볼 때 다소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
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보지 않고 믿지 못하기는 다른 제자들도 마
찬가지였다는 점(막 16:11)을 고려한다면 도마만을 '회의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공
평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도마가 주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
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을때,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유령의 츨현을 본 것에 근거
한다는 일부 적대자들의 이의 제기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있다. 그러나 결국 도마는 예
수의 부활하신 몸을보고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임을 확인했으며 끝내
믿음에 이르게 되었고 일부 적대자들의 문제 제기는 이유없는 것으로 기각된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못이 사람의 체증을 지탱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내세워 십자가 처
형시 밧줄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
그리고 '(못) 자국'에 해당하는 혤라어 '튀폰(* )은 '혼적','표'(print,
KJV ; MARK,RSV)라는 뜻이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를 '장소','위치'를 뜻하는 '토폰'(*
)의 오기(誤記)로 보기도 한다.(wounds, LB). 그러나 이역시 추측일 뿐이다.

=====20:26
여드레를 지나서 - 23절과 24절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길지 않았다면 '여드레'를
지난 지금은 주님께서 처음 현현하신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다음 일요일이었을 것이
다(Barrett, Buitmann, Tenney, Robertson).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로 가서 제
자들을 만나실 것을 약속하셨고(마 26:32) 또한 천사들을 통해 이 사실이 재차 통보되
었음에도 불구하고(막 16:7) 제자들이 여전히 유대에 머물고 있었던것은, 그들의 믿음
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도마를 기다리기 위함이었으리라고도 짐작할 수있다(Godet).
본절에 보면 이제는 도마를 포함한 모든 졔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과 같이 문
은 닫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을 닫아놓은 이유로 유대인에 대한 두려움이 언급
되지않고 있다. 혹자는 이것에 대해, 지금은 성령이 주어진 다음이기 때문에(22절) 그
런 어려움이 문제로 등장할 수 없었다고 본다(Hwenton). 이번에도 예수는 '평강'을 기
원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제자들예게 깊은 좌절과 슬픔을 가
져다 주었지만 그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 주었다. 슬픔은 잠깐이
었지만 평강온 영원할 것이다. 비록 주님은 그들 곁을 떠나지만 성령께서는 그들을 더
강하고 담대하게 붙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22절).

=====20:27
네 손가락...네 손 - 주님의 이번 현현은 마치 도마 한 사람을 위함이었던 것처럼
도마와의 대화만이 언급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도마가 믿기 위한 전
제 조건으로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 증명해 보일 용의(用意)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도
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의심을 나타내었을 때 예수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으므로, 도
마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듣고 놀라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믿음 없는 자...믿는 자가되라 - '믿음 없는 자'예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스토스
'(* )는 고전 6:6;14:22과고후 4:4 등에서 '믿지 않는 사람' 즉 '그리스
도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마에게 그 단어가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의 부활에 대
한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있다. 주님의 분명한
요구는 '믿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꼭 그렇
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가 보여준 회의에 대한 책망이 아니
라 아직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가 굳건한 믿음을 갖게되
기를 간곡히 원하는 주님의 애정에 근거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마침내 도마를 감화시켰고 그로부터 위대한 신앙 고백을 이끌어 내었다(28절). 한편
본문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가
끔 사용되는 용법 즉 '자신을 보이다'의 의미로 해석한다(고진 15:58;골 3:15; 살전
1:5;2:7, Lenski, Barrett). 이럴경우 믿는 자가 되라는 말은 '네 믿음을 보이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해석도 의미는 있다. 참다운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의 참됨을
내보여 줄 수 있어야 하기 매문이다.

=====20:28
나의 주...나의 하나님 - 도마가 주님이 허락한대로 그분의 손과 옆구리의 상흔(傷
痕)을 확인해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됨이 없이 바로 감격에 겨운 신앙 고백이 서술
되고있다. 아마 도마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연한 현실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
른다. 본절의 고백은 원문상 '나의 주, 그긔고 나의 하나님'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렇
다면 '나의 주님, 나의하나님'으로 번역한 공동 번역이 정차하다고 할 수 있다(My
Lord and My God!, RSV). 한때 도마가 증거를 요구하며 믿음이 없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그의 입을 통혜 나온 신앙고백은 과거의 실수를 만회할 만하며, '나의선
생님'이라고 고백한 마리아의 신앙 고백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16절). 도마는 부활
하신 예수의 모습 속에서 생전의 주님을 재발견한것이 아니라16,17절 주석 참조)하나
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인데, 이는 곧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했다는 의미
이다. 본서 마지막부분에 기록된 이 결정적인 고백은, 처음 예수의 본원적(本源的)
정체가 하나님이심을 밝혀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과 병행되면서(1:1), 예수 그리스도
의 진면모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는 인간이기 이전에
태초에 하나님콰 함께 계셨던 영원한 말씀 곧 로고스였고 지금은 아버지 곧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다시 영화롭게되신 분이다(17:5).

=====20:29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주님의 말씀은 도마의 믿음의 동기에 대해 지
적하지만, 그것은 책망이 아니라 교훈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
에서 일단은 도마의 믿음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본 것에 근거해 있다.
주님이 바라는 바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에 이르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
나는 보아야 믿는 형태이며 이 믿음은 현상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모종의 이적을 요구
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보지 않고 즉 어뗘한 이적적인
사건에 의하지 않고도 믿음을 갖는것이다. 물론 도마를 비룻하여 제자들은 전자의 경
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것욘 후자의 경우이다. 이것은 요한의 독자들
그리고 이어지는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부활
하신 주님올 직접 목격하였고 결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만 주어
진 특정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서도
성도들은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
서 '보는 것'은 불가결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성된 신.구약 성경이 예수를 증
거하고 또한 성령께서 친히 예수를 증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직접보
지 않아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

=====20:30
제자들 앞에서...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일부 학자들은 30, 31절이 본서의
요약이며 다음 장은 나중에 첨가한 것이라고 본다(Barrett, Tenney, Bultmann). 그 많
큼 이 두절은 본서 전체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
의 끝머리에 자신이 기록한 것은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요한이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 자신의 집필 의도와 일치하는 것들만 선별
(選別)하였음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여기에 미처 기록하지 못한 예수의 행적들이 부활
이전의 일인지 아니면 부활 이후의 일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부활까지 포함하여
예수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있었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또한 요한이 이 표적을 설
명함에 있어 '제자들 앞에서' 행한 것이라고 표현한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요
한은 여러가지 표적들을 비롯한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만을 선별하여 기륵하였지만
그 나머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이 제자들의 중언을 통해 증거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행 4:30).

=====20:31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믿게 하려함이요 - 요한은 독자들을 향한 직접 화법으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 목
적이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
라고 한다. 이말은 본서의 서론과 부합되는 내용으로서(1:1-18) 모든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총체(總體)를 압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
도'는 동격으로 언급된다. 앞의칭호는 요한의 복음서에 가끔 나타나는데 요한이 예수
를 소개할 때(1:34), 나다나엘이 예수를 향하여(1:49), 그리고 예수 자신이
(5:25;10:36;11:4) 이 칭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기롬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메시
야' 즉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드물게 사용되며 특히 예수는 이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
하지 않으셨다. 혹자는 예수가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그 칭호가 지
녔던 정치적 의미 때문이라고 본다(Tenney).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는 이스
라엘의 정치적 독립 및 옛 다윗의 영광을 되찻아 줄 인물로 기대되었던 만큼 예수가
이 칭호률 사용할 경우 자신을 정치적 혁명가로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의 나라는 헌재의 정치적 왕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
다(18:36).
믿고...생명을 얻게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곧 구원을 얻음
을 뜻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됨'(1:12),),'생명을 얻음'(본문)으로 표현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만이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신앙 그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
라 오직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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