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 21장
=====21:1
시간을 나타냈던 20:26의 표현과는 달리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법
이다. 이 문구로는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의 발생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학
자들은 20:26-29의 현현 이후 그리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고 본다
(Tenney).
<디베랴바다>
디베랴 바다 - 요한은 제자
들이 갈릴리 바다로 내려갔음을
따로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본문은
이를 간접적으로 발해주고 있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6:1),
'긴네렛 바다'(민 34:11), '긴네롯
바다'(수 12:3), '게네사렛 호수'
(눅 5:1) 등의 이름으로 불리어
지기도 했는데, '디베랴 바다'로 불리어진 까닭은 '디베랴'가 갈릴리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타내셨으니 - 여기에 서술되는 예수의 현현은, 요한의 말대로 하면 세번째이나
정확하게는 네번째이다. 첫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내셨고(20:16, 17), 두번째
는 도마 외의 다른 제자들이 모여있을 때(20:19-23) 세번째는 도마를 포함하여 제자들
이 모였을 때(20:26-29), 그리고 지금이 네번째이다. 아마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만을 구별하였던 듯하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현현(顯現)의 이야기는 장소가 갈릴리 바다라는 점, 소재가 물고기라는 점에서 눅
5:1-11과 유사하다는 견해(Harnack, Bernard)가 있으나 다음과 같은 분명한 차이 때문
에 결코 동일한 사건이라고 볼 수 없다. 첫째, 눅 5장에서는 제자들이 고기글 잡지 못
하여 밖으로 나와 있다가 예수의 명령을 따라 다시 바라로 나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계속 바다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 눅 5장에
는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자이 찢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에는
153마리에 달하는 많은 고기가 잡혔지만 그물른 찢어지지 않았다고 보도된다. 셋째,
눅 5장은 예수의 공생애 시작 부분에서 발생한 것이나 여기에 오는 이야기는 지상을
떠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21:2
함께 잇더니 - 함께 있던 제자들은 모두 7명이었다. 이중 '세베대의 아들들'이란
요한과 야고보를 가리킨다.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세베대의 아들'
로 표현한 것은 아마 그의 겸손한 성품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제자는 빌립과 안드레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J. Haubleiter). 또한 여기에
나온 제자들이 왜 갈릴리에 내려왔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킨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
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바보고 혐의점을 찾아 핍박하려 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갈릴리로 갔을 것이다(20:19 주석 참조). (2)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자
실망에 빠진 나머지 과거에 자기들이 거주하였던 갈릴리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3)갈
릴리로 가서 예수를 만날 준비를 하라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하였을 것이다
(마28:10, 16주석참조). 이 가운데 첫번째와 두번째 추측은, 현재의 상황이 이미 제자
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라는 점에서 다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며 세번째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결코 하찮은 일이라 할 수 없는 갈릴리에
서의 재회 약속이 언급되지 않은 점과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 보지 못한 점 등능 이해
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21:3
물고기 잡으러...잡지 못하였더니 - 본문을 통해 제자들이 과거의 직업으로 되돌아
갔다고 추론하는 것은 20:26-29와 쉽게 조화되지 않아 보인다. 혹자는, 최초에 베드로
가 물고기를 잡으로 간다고 했을 때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무료함을
달래거나 정신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는지 불확실하다 하더라고 이 이야기가 복
음서의 현 위치에서 갖는 의미는 사도의 사명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즉 사람을 낚는
것으로서의 사도적 사명은 예수의 명령과 도와주심에 의해서만 온전(穩全)하게 수행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Sanders). 본문 가운데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는
표현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그의 동료 제자들이 주님과 관계없이 일을 시작했을 때 그
들은 완전한 실패에 부딛힐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주며 예수께서 직접 관여하여 성공을
거둔것과(6절) 좋은 대조를 이룬다. 사도적 사명은 온전히 주님의 지시를 따를 때만
좋은 결과를 얻들 수 있다. 하편 본문의 '이 밤에'는 갈릴리에서 고기잡이에 가장 좋
은 시간이 밤이었음을 감안할 때 더욱 잘 이해되는 부분이다(Barrett).
=====21:4
날이 새어갈 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이아스(* )인데, 이 단
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1)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으나 아직은 어두운 상태를 가
리킨다고 보는 견해와(Barrett). 이렇게 보는데에는 다른 곳에서 사용된 '프로이'(*
)의 용법을 고려하였기 때문인 바 마 20:1에서 이 단어는 그날의 일이 시작되는 시간
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
금의 상황은 다음과 같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지금 갈릴리 바다에는 여명이 밝
아와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밝아졌다. 그런데 바닷가라는 특성상 자
주있는 일인 것처럼 어느 정도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런데다 제자들은 설마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곳에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예수를 제대로 알
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두번씩이나 예수릎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니면 눅 24:16의 상황처럼 제자들의 눈이 가리워져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바닷가에 서셨으나 - 여기에는 예수께서 어디서부터 또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
설명이 없다. 다만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다고 언급될 뿐이다. 아마 이것은 20-:19에
서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아무런 물리적 작용없이 제자들 사이에 서셨던 것과 같은 차
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1:5
애들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아'(* )는 '아이'를 뜻하는 '
파이스'(* )에서 온 말인데 현재의 문맥에서 이에 호칭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
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로 갈린다. 혹자는 '어! 여보게들!'의 뜻으로 보며
(Robertson) 또 어떤 학자는 '젊은 이들!'의 의미로 본다(Lenski). 현대 헬라에서는
성인(成人)들에 대하여 그 칭호를 사용한다고 한다(Barrett). 본문에서 예수께서 제자
들을 향하여 '애들아'(Children, RSV)라고 불렀을 때 그것이 부모가 아이들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였든 아니면 젊은이들로 부르는 것이었든, 적어도 매우 친밀하고 애정
이 담긴 부르심이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예수께서는 이런 마음으
로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9절).
고기가 있느냐...없나이다 -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
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물음은 18:35에서처럼 당연히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물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라기온'(*
)은 '먹다'라는 의미의 어근 '파그'(* )와 '....와 함께'를 뜻하는 '프로스'(*
)가 결합된 것으로'떡과 함께 먹는 양념'(특히 생선과 함께 요리함)을 가리키기도 하
고 '일용 양식의 하나'를 가리키기도 하였으나 후에는 생선을 가리키는 '아폰'(* )
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Robertson). 그러니까 본문의 '고기'는 '생선'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없나이다'라는 부정의 대답은 제자들이 철저한
실패의 상황에 직면하였음을 말해 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은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21:6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한 것에 대해
(1)갈릴리에서 어부 생활을 했던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던 고기잡이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거나 (2)아니면 위치상 예수께서 물고
기의 떼를 더 잘 식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등의 추측이 있으나 그러
한 추측은 본절에 접근하지 못하는 피상적(皮相的)인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배 오
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했을 때 이는 제자들이 밤이 새도록 헛수고한 행위를 다
시 한번 반복해 보게 하는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
구하고 제자들이 그 명령에 순종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한 혹자는 '오른쪽(* , 뎌시오스)이라는 단어의 이차적인 의미가 '행
운'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행운'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지만, 요한이 이 사건을 통해
독자들이 깨달아 알기를 기대했던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명령에 대한 제자
들의 즉각적인 복종 그리고 그에 따른 놀라운 결과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순종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그물을 들어올
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끌어 올리다'(* ,여퀴에인)는 말이 사람
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오는 것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음을 감안한다면
(6:44;12:32), 여기에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 또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즉 고기는 개종자를, 고기를 잡는 행위는 사도직의 수행을 뜻한다고 볼때 제자
들이 예수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했응 때 단 한 사람의 개종자도 이끌어 낼 수 없
었으나 예수의 명령에 따라 했으때 그들은 놀라우리 만큼 많은 개종자를 만들수 었었
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절대 의존읜 관계에있으며 그들의 능력
의 원천(源泉)은 오직 예수에 대한 절대적 복종에 있었다.
=====21: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주시라 -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
가 잡힌것은 하나의 이적이었고 그 이적은 요한으로 하여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
라' 명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게 하였다. 20:8에서도 그랬거니와 여기서도
요한은 남달리 빠른 직관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제일 먼저 주님을 알아보았고 그
사실을 베드로에게 말해 주었다.
시몬 베드로...겉옷을 두른후...뛰어 내리더라 - 20:6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
의 적극적이고 급한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배를 끌고가자니 잡은 고기를 처리
해야 하는 사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냥 물에 뛰어내려 헤엄으로 예수께 가고자 했다.
그런데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고 뛰어내렸다는 것은 그가 일하는 동안 활동을 편안히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있었거나 거의 벗은 상태로 옷을 느슨하게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
다. 여기서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이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옷을 벗어야 했지만 그래도 주님 앞
에서는 옷을 벗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의 벗겨지다시피 헐렁하게 걸쳐져 있던 겉옷
을 수영하기 위해 제대로 동여맸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옳든 중요한 것은 열정
(熱情)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15절 주석참조).
=====21:8
오십간-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콘디아코시온'
은 직역하면 '이백 규빗'이라는 뜻이다. 1규빗이 약 45cm에 해당된다고 볼 때 뭍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약 90m(공동 번역은 100미터로 번역함)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작은 배...끌고 와서 - 베드로외에 물로 뛰어내린 제자는 없었다. 그물에 잡힌 물
고기를 운반해야 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앞절에서(6절) 밝힌 바대로 너무
많은 고기가 잡혔으므로 그물을 들어올릭 수 없어 뭍에까지 끌고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작은 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로이아리온'(* )은
'플로이온'(* )에 비해 작은 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큰 배는 뭍
에 밑창이 닿기 때문에 작은 배로 고기 그물을 예인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이 앞의 두 단어를 같은 뜻으로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
고 있음을 지적하면서(6:17, 19, 21, 22, 24), 여기서도 3절의 '배'와 동일한 배를 가
리킨다고 본다(Barrett, Robertson).
=====21:9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제자들이 배를 뭍에 대고 예수에게로 왔을 때 거기에
는 제자들의 예상을 초월하는 장면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을 위하
여 식사를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고기잡이를 하느라 피곤하
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세심한 배려(配廬)를 보여주신
다. 예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 생선과 떡을 구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준비되
어 있었다는 사실만이 언급되며 그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와 제자들이 함
께 나눈 이 아침의 공동 식사는 서로의 마음을 여는 친밀한 교체의 시간이며(15절 주
석 참조), 소명을 부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151-19절).
=====21:10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
라 명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예수께서 미리 준비해둔 생선
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물에 걸린 생선을 가져오라 하셨다(L.
Morris). (2)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와서 함께 식사를 하기 전에 고기 잡은 것을 처리하
고 오라고 하신 것으로 본다(Lenski). 전자의 해석은, 그것이 예수께서 마련한 식사의
불충분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에서도 볼 수
있었던 바(6:1-13), 예수께서는 단 한 마리의 생선으로도 충분히 제자들을 먹일 수 있
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의 해석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의 상황에서 잡은 물고기를 처리하는 것은 시급하다고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는 여기에서 제3의 해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체험할 수 있었는가를 주의깊게 상기시킴으
로써 그들이 감당해야 할 소명(召命)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21:11
시몬 베드로가...큰 고기가 일백 쉰세 마리 - 그물에 든 고기를, 끌아올려 셈하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제사는 역시 베드로였다. 본문에는 베드로 혼자 그 일을 다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게 묘사되어 있으나 6절과 관련지어 볼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했다
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한편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잎뒤스'(*
)는, 묘하게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글자를 모은 것과 일치하
는데 이런 이유로 해서 초대교회에서는 물고기를 기독교 또는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부
호로 사용하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거주지였던 곳에서 물고기 그림이 발견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한편 요한은 여기에서 잡힌 물고기의 숫자가 153마리였다고
기록하는데 이 153이라는 숫자는 기독교 역사상 많은 해석을 야기시켜 왔다. (1)어거
스틴(Augustine)은 율법을 상징하는 10을 구약으로, 성령을 상징하는 7을 신약으로 보
고 이 둘을 합한 수인 17에 이르기까지 1부터 더해 나가면(1+2+3+4+5...+17) 153이라
는 숫자가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엿붙여서 이 153이라는 숫
자는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게 될 자들의 수
를 가리킨다고 했다. (2)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100을 이방인의
수로, 50을 유대인의 수로 그리고 3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수로 보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렇게 볼 때 100+50+3=153이라는 수가 도출되며 이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
이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고 한다. (3)고대의 동물학자
들은 생선을 153종으로 분류했는데 본문의 이 숫자는 인류 전체의 인종(人種)을 상징
한다고 본다(Hieron). (4)사도들에 '낚인' 즉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Barrett). (5)단지 많은 수의 고기가 잡혀다는 것 그리고 153이라는 숫자는 다만 사
실의 보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TYemple, Leski). 위에 열거한 학자들
의 제 견해들은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엄청나게 많은 물기가 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6절).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이 표현은 적어도 그 정도의 물고기가 잡혔다면
당연히 그물이 찢어졌어야 마땅했음을 암시한다(눅 5:6). 그럼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이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편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다고는
것에 대해 학자들은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통일성(unity)을 말해준다고 보기도 한다.
교회는 많고도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지만 그 통일성이 보전되어 언제나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1:12
조반을...묻는 자가 없더라 - '조반'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리스테사테'(*
)는 하루 중 첫 식사를 뜻하는데 후대에는 눅 11:37에서처럼 '만찬'의 의미로 사용되
기도 하였다. 참고로 어떤 학자에 의하면 1세기의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두끼의 식
사를 했다고 하는데(L. Morris), 본문의 '아리스톤'(* )이 바로 그 첫
번째 식사로 대개는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먹었지만 때로는 이른 점심으로 먹
기도 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 먹는 두번째 식사는 '데이프논'(* )으로
저녁 식사에 해당한다. 식사를 위해 제자들이 와서 숯불 주위에 둘러 앉았을 때 이미
제자들은 자기들을 식사에 초대하신 이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자기들에게
두번이나 나타난 바 있던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53마리의 생선이 분명한 현
실이듯 지금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려 하신 주님의 현존(現存)도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현실이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이제 더 이
상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놀라움과 감격이 뒤섞여 감히 예수께 선뜻 말을 건네
지 못한 듯이 보인다(Godet).
=====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생선도 - 본절에서 '예수께서 가셔서'라는 표현 가운데
'가셔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분의 떡과 생선을 가져오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
이 머뭇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갔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셨다'는
의미가 특수한 어법인지 분명치 않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
누어 주셨다. 어떠한 축복의 말씀도 없고 함께 식사를 했다는 언급도 없다. 따라서 이
식사를 굳이 성만찬과 관련시켜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한편 혹자릉 이 식탁에서
오병이어의 이적(6:1-13)과 같은 형태의 이적이 또 한번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본절
의 '생선'에 해당하는 말은 9절의 '와사리온'(* )과 동일하다는 점 그
리고 11절의 '큰 고기'(* , 잎뒤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
해 준다는 것이다(Hendriksen). 예수께서 이적적인 방법으로 생선을 가져오라 명하신
목적이, 예수께서 준비한 생선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잡은 것을 더 가져오기 위함이
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21:14
세번째로 나타나신 것이라 -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있다(20:15-17;19,20;26-29).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서 뺀 것은
그녀가 제자가(* , 메데테스)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arrett). 그런
데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세번의 현현은 다른 신약성경들과 관련시켜 볼 때 정확한 것
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요한은 자신이 쓰고 있는 복음서에서의 순서만 고려하
고 있는 듯하다. 신약성경이 보도하고 있는 바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에 관한 기사들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21:15
요한의 아들 시몬 - 이 이름은 1:42에 나오는데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게바(베드
로)라는 이름을 새로 주셨었다. 그렇게 하신것은 그에게서 수제자(首弟子)로서의 가능
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 부
인함으로써 '반석'이라는 의미의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질 수 없었다 하겠다. 모든 것은 처음
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은 호명은 단지 베드로의 자격을 박탈
하거나 그의 나약함을 들추어 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겸손을 유도해내고 그에게 다
시 새로운 소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본문에서 '이사람들'은 개역성경의 난하주
(註)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것들'로도 해석될 수 있다(RSV에서는 these로 되어 있
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네가 다른 사람들
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2)'네가 이 사람들(함께 있던 제자
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3)'네가 이것들(배와 기타 기잡는 도
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모든 해석이 다 가능하며 타당성을 갖는다고 보여진
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가장 타당한 해석은 첫번째 것이라고 본다. 비록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열성에 우열(優劣)을 가린다는 것이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베드로
가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뛰어난 충성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는 사실을 감안할 때(막14:29) 그러한 결론은 무리가 되지 않는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 )였는데 베드로는 '필로'(* )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흔히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며 후자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
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데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아니면 위에서 구분한 대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이다. 혹자
는 두 단어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무
조건적인 사랑을 물었는데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고 해서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단지 그보다는 다소 차원이 낮은 사랑 즉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했다고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다른 학자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3:16;5:20;14:21;16:27)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렇게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질문
에 대해 변경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런만큼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그르다
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절에서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가 비록 실패
를 하기 했지만 아직도 예수에 대한 애정과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7절 주석
참조).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본절에서부터 17절에 이르기까지 '먹이라', -'치라' -'먹이
라'는 명령이 연속되고 있는데 혹자는 첫번째와 세번째는 양들응 목초지로 인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는 양들의 모은 활동을 돌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구분하기
도 한다(Tenney). 그러나 이처럼 뚜렷이 구분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먹이는 것과 돌
보는 것이 크게 보아 같은 범부에 든다고 할 때 오히려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는 것
이 나을 듯하다. 한편 '어린 양'에서 '어린'이라는 표현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소명은
힘이 들고 많은 사랑을 요하는 것이다.
=====21:16
두번째 가라사대...내 양을 치라 - 두번째 질문은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첫번째 질문은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 베드로의 호언장담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자 했던 것같다. 이제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
과 베드로 사이의 관계를 묻고있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과의 비교 차원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일대일 차원의 관계에 있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앞의 것과 동일하다. 적어도 베드로는 이 시간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과장없이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번 모두에 걸쳐 '주께서 아시나이
다'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주께서 아십니다'가 주절로, '내
가 주를 사랑한다'는 말이 종속절의 형식으로 진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21:17
사랑하느냐 - 앞의 두 번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사랑'을 '필레오'(* )
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읕 베드로가 계속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진
실성과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수용(受容)하겠다는 마음의 표시로 볼 수 있을 것이
다. 혹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친근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과 관련
하여 Living Bible은 본절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진정 나의 친구이냐?"
(Simon, Son of John, are you even my friend?)로 번역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근심하여 가로되 - 베드로는 예수의 세번째 질문을 받고는 근심에 빠졌다. 베드로
가 근심하게 된 이유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인 바 어쩌
면 자기가 세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예수께 대한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예전처럼 자신있게 호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은 것을 아시오매...아시나이다 - 그러나 베드로는 허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
를 사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는 하나의 기독론적(基督論的) 고백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말 속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신적 통찰력을 갖
고 계시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2:25;16:30). 베드로는 이것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그
분 앞에서는 오직 진심을 이야기해야 함을 악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베드로의
세번에 걸친 대답 가운데 세번째의 '아시나이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어상 바뀌고 있
는 점에 주목한다. 즉 앞의 두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오이다'(* )의 번역
으로서 어떤 사실에 대한 직관적인 앎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그에 비해 세번찌의 '아시
나이다'는 헬라어 '기노스코'(* )의 번역으로서 이 말은 '오이다'보다
더 갗한 의미를 가지며 경험을 매개로 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
한 분석이 옳다고 한다면, 베드로는 비록 근심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대답을 했지
만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것을 담대히 그러
나 교반하지 않게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내 양을 먹이라 - 예수는 베드로의 사랑을 세번 확인하였고 그에게 동일한 사명을
세번 반복하여 주셨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하나는 베드로가 예
수를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써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 주는 의미가 있고(Barrett),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의 베드로의 지도권이 다시 위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
(Bultmann). 특히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위는 교회 바깥으로 향하는 전도에 초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의 지도권과 목회적 돌봄에 초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본서의 분뷰는, '우리 밖'의 잃어버린 양떼에게 관심을 갖는 공관복음의 선교
지향적 분부(마28:19, 20;막 16:15-18;눅 24"46-48)와 비교된다.
=====21:18
진실로 진실로...젊어서는...데려가리라 - '진실로 진실로'라는 도입 문구는 현재
분위기의 엄숙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도입 문구의 엄숙함에 걸맞게 베드로의 순교(殉
敎)가 예고되고 있다. 혹자는 본절이 '어릴적에는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갈 수 이
었으나 성인이 되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속담을 배경에 두고 있다고 보는
데(Bultmann) 분명한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본절이 베드로의 순교 외에
구체적인 그의 죽음 방식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불트만
(Bultmann)같은 학자는 본절이 '그가 전에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택했으나, 그의 마지
막 길은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다음절(19절)과 관련시켜 볼
때 베드로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방식 즉 순교의 형태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본다. 그러나 그 죽음이 곧 십자가의 죽음을 뜻한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1)'팔을 벌리다'가 십자가 처형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손으로 잡으려고 또는 지도자를 향해 팔을 내미는 노인의 절망을
묘사하는 것이고, (2)'띠를 띠우다'(* ,존뉘나이)는 '묶다'는 뜻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렛(Barrett)같은 학자는 본절
에서 베드로의 순교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현되리라는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
다. 여기서도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팔을 벌리리니'와 '띠 띠우고'라는 문구인데
바렛은 불트만과 반대의 논리를 전개시킨다. (1)먼저, '팔을 벌리다'는 사65:2의 '내
가 종일 손을 펴서'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데, 사65:2는 바나바 서신12:4, 저스틴(
., I 35), 이레니우스( ,79) 그리고 키푸
리안( ,II, 20) 등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힘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2)'존뉘나이'( ,'띠를 띠우다')가 묶는 것을 의미하지 않
으므로, 십자가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불트만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
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사전적 의미보다 넓은 개념으로 확대되어 사용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의 두 학자들의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옳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후대 교부들의 전승에 의하면 (2)의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소명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자기
의 삶을 자의적(自意的)으로 살 수 없다. 그는 주님께 붙잡힌 바 되었는데 그것은 억
지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말미암아(20:22) 자발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예고된 죽음을 자취한 것처럼 베드로도 노쇠하여 힘
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15-17절) 죽음의 길을 자발적
으로 걸어가게 될 것이다.
=====21:19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 여기서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복음을 증
거하고 양들을 돌보는 목회적(牧會的) 직무를 수행하다 강제적으로 부과된 죽음 곧 순
교를 가리킨다. 이 순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베
드로는 이런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성경에는 베드로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순교를 당했는
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마지막 행적은 헤롯 아그
립바I세(Herod Agrippa I, 37-44)의 박해를 받아 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
한 후(행 12:1-19) 예루살렘 공의회에 나타난 것으로 끝을 맺는다(행15:1-11). 성경
외의 초기 문헌들에는 베드로의 최후 생적에 대한 기록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다.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Clement, 88-97)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클레멘트1서)
에는 베드로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서 순교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터툴리안
(Tertullian)은 베드로가 네로(Nero) 황제의 통치 하에서 바울과 같은 십자가에 처형
되어 순교했다고 말했으며 그는 베드로의 십자가 죽음에서 '남이 네게 띠 띠우고' 라
는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15).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의 십자
가 처형과 관련하여 그가 자청하여 머리를 아래로 두는 형태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
었다고 전한다(HE, III, i. 2).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진술의 배경에는 '주님이
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바른 자세로 처형되었는데 내가 어찌 주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베드로의 겸손하고도 철저한 순종(順從)을 시사하는 뜻이 들
어있다. 또한 신약 외경인 '베드로행전'에는 비록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
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는데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분는 "네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
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을 들은 베드로
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로마로 되돌아가 사역을 계속하다 체포당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처형당하였다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 - 본문은 13:36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결국 그 말씀은(13:36)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시사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미 베드로가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베드로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시는 능력으로 가능하다. 순교에
까지 이르도록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철저히 복종하는 것 그것이 사도직의 진정한
의미이다(12:25, 26;막8:34, 35)
=====21:20
베드로가 돌이켜...따르는 것을 보니 - 소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계속해서
베드로에 버금가는 중요한 인물로 서술되고 있다(7절;20:2-8). 이 제자가 예수에게 사
랑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라는 13:23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본문의 의미에 대하여 혹자는 베드로에게 방금 내려진 명령을 요한이 이미 수행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베드로에 대한 요한의 우월성이 암시된 것이라고 한다
(Barrett).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베드로가 아직 따르기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한
이 먼저 따랐다는 것을 전제한 듯하나 본문은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를
베도로가 먼저 따르고 있고 그 뒤를 요한이 따라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
다. 개역 성경에는 '따르는 것을 보니'로 되어 있어 상황에 대한 불명확한 이해를 유
발(誘發)시키는 데 공동 번역에는 "뒤따라 오고 있었다"로 되어 있어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따르기 전에 베드로가 이미 행동을 나타낸 것을 암시한다. RSV의 번역을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해지는데, 거기에는 "Peter turned and saw following them"으로 되어
있어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따르는 대상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them)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them은 예수와 베드로라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결국 본절은 베드로
에 대한 요한의 우월성을 암시한다기 보다는 다만 요한도 베드로에 못지 않게 예수를
따르는 일에 뛰어났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21:21
이 사람은 어떻게...되겠삽나이까 - 베드로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동기를, 많은 학
자들은 요한에 대한 질투에서 찾는다(Olshusen, Lucke, Meyer, Baumlein). 즉 베드로
는 자신의 순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듣고서, 그렇다면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
도 당연히 순교를 당함이 마땅하다는 식의 바램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
로 베드로는 요한의 장래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정심에서 이런 질문을 했을 수도 있다
(Godet).
=====21:22
내가 올 때까지...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베드로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는 요
한도 자신과 같은 순교의 운명을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던 듯하
다. 그의 마음을 읽은 예수는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즉 요한은 순
교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 있을 수도 있다. 그렇
다고 하더라도 베드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베드로는 다만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
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너는 나를 따르라'는 강조적 명령문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난
다. 여기서 '너'(* , 쉬)가 강조적인 위치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쉬 모이 아콜로이데이). 본절에서는 두가지 사실을 추출해 낼 수 있는데 하나는 베드
로나 요한이나 그들 모두의 운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은 각각 독립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그들의 종국
(終局)에 의해 그들의 비중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21:23
형제들에게...죽지 아니하겠다 - 본절은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19-22절) 상당히 오해되어 전파되었음을 보여준다. '형제들'이라는 호칭은 잘못 이해
된 이야기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형제들'이라
는 칭호는 초대 교회 시절부터 동료 그리스도교인들을 부를 때 사용했던 것이기 때문
이다(행1:15, 16). 예수의 말씀은 요한이 당신의재림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을 것이
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약 주님께서 당신의 재림 때까지 요한을 살려둔다 하더라도 베
드로는 아무런 신경을 쓸 것이 없다는 의미였는데 전자의 의미로 오해되었다는 것이
다. 이 오해는 본서의 저자로 하여금 바로잡아야 한다는 필요를 느낄만큼 심각한 문제
였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 사이에 이런 오해가 설득력 있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매우 가까이 임박한
재림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바 그들은 자기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주의 재림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마16:27, 28;행 1:11;고전 115:51;살전4:15;계2:16;3:11).
렌스키(Lenski)에 의하면 요한이 죽어 장사된 다음에도 그가 죽지 않고 무덤 속에 살
아있다는 전설이 유포(流布)되었었다고 하는데, 이는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오해된 말
씀이(22절)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능히 짐작케 한다.
=====21:24
이 사람이라 -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그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고 본서의 저
자로서 복음을 증거하였을 뿐 아니라 기록으로도 남겼다. 예수의 생전에 그와 함께 하
였던 제자, 더구나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애제자가 이 복음서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그 증거하는 내용이 신뢰할 만큼 권위있음을 시사한다.
우리는...참인줄 아노라 - 본문은, 요한이 쓴 이 복음서가 진실되고 신뢰할 만한
것임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우리'라는 보증인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일찍이 알
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이 복음서가 어떤 의미에서 공저(共
著)로 된 창작물이었으며 저자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복음서에 대해 책임을 졌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지 본문을 표면적으로 이해한 데서 온 것일뿐 어떤
증거에 근거한 얘기가 아니다. 최근의 주석 학자들은 이 '우리'라는 표현에 대해 '에
베소의 장로들'이라고 보기도 하고(Lenski), 사도의 증거를 확증할 수 있는 사도 교회
라고 보기도 한다(Barrett). 혹은 요한이 자신과 동역자들 그리고 본서의 독자들응 공
동체 의식속에 묶어 본서의 진정성을 함께 확증시키려는 의도로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
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옳다고 확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
이건 본문이 이 복음서의 진정성을 받아들이도록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도 이미
인정하고 있는 복음서의 권위를 확증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부족할 줄 아노라 - 요한은 20:30에 이어
다시 한번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이 자기가 기록한 것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많다는 사
실을 과정법적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강조하려 애쓰고 있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공동
번역)는 표현은 확실히 모리스(L. Morris)가 '유쾌한 과장법'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여
유있는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없는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다. (1)그리스도가 행하신 놀랍고도 수많은 일들을 다 기록하기에는 저
자인 요한의 힘이 너무 달린다든 것,(2)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계시된 복음은 몹시도
심원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 둘 수는 없다는 것(Lenski)이 그것이다.
=====21:1
시간을 나타냈던 20:26의 표현과는 달리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법
이다. 이 문구로는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의 발생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학
자들은 20:26-29의 현현 이후 그리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고 본다
(Tenney).
<디베랴바다>
디베랴 바다 - 요한은 제자
들이 갈릴리 바다로 내려갔음을
따로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본문은
이를 간접적으로 발해주고 있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6:1),
'긴네렛 바다'(민 34:11), '긴네롯
바다'(수 12:3), '게네사렛 호수'
(눅 5:1) 등의 이름으로 불리어
지기도 했는데, '디베랴 바다'로 불리어진 까닭은 '디베랴'가 갈릴리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타내셨으니 - 여기에 서술되는 예수의 현현은, 요한의 말대로 하면 세번째이나
정확하게는 네번째이다. 첫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내셨고(20:16, 17), 두번째
는 도마 외의 다른 제자들이 모여있을 때(20:19-23) 세번째는 도마를 포함하여 제자들
이 모였을 때(20:26-29), 그리고 지금이 네번째이다. 아마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만을 구별하였던 듯하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현현(顯現)의 이야기는 장소가 갈릴리 바다라는 점, 소재가 물고기라는 점에서 눅
5:1-11과 유사하다는 견해(Harnack, Bernard)가 있으나 다음과 같은 분명한 차이 때문
에 결코 동일한 사건이라고 볼 수 없다. 첫째, 눅 5장에서는 제자들이 고기글 잡지 못
하여 밖으로 나와 있다가 예수의 명령을 따라 다시 바라로 나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계속 바다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 눅 5장에
는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자이 찢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에는
153마리에 달하는 많은 고기가 잡혔지만 그물른 찢어지지 않았다고 보도된다. 셋째,
눅 5장은 예수의 공생애 시작 부분에서 발생한 것이나 여기에 오는 이야기는 지상을
떠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21:2
함께 잇더니 - 함께 있던 제자들은 모두 7명이었다. 이중 '세베대의 아들들'이란
요한과 야고보를 가리킨다.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세베대의 아들'
로 표현한 것은 아마 그의 겸손한 성품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제자는 빌립과 안드레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J. Haubleiter). 또한 여기에
나온 제자들이 왜 갈릴리에 내려왔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킨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
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바보고 혐의점을 찾아 핍박하려 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갈릴리로 갔을 것이다(20:19 주석 참조). (2)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자
실망에 빠진 나머지 과거에 자기들이 거주하였던 갈릴리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3)갈
릴리로 가서 예수를 만날 준비를 하라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하였을 것이다
(마28:10, 16주석참조). 이 가운데 첫번째와 두번째 추측은, 현재의 상황이 이미 제자
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라는 점에서 다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며 세번째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결코 하찮은 일이라 할 수 없는 갈릴리에
서의 재회 약속이 언급되지 않은 점과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 보지 못한 점 등능 이해
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21:3
물고기 잡으러...잡지 못하였더니 - 본문을 통해 제자들이 과거의 직업으로 되돌아
갔다고 추론하는 것은 20:26-29와 쉽게 조화되지 않아 보인다. 혹자는, 최초에 베드로
가 물고기를 잡으로 간다고 했을 때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무료함을
달래거나 정신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는지 불확실하다 하더라고 이 이야기가 복
음서의 현 위치에서 갖는 의미는 사도의 사명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즉 사람을 낚는
것으로서의 사도적 사명은 예수의 명령과 도와주심에 의해서만 온전(穩全)하게 수행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Sanders). 본문 가운데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는
표현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그의 동료 제자들이 주님과 관계없이 일을 시작했을 때 그
들은 완전한 실패에 부딛힐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주며 예수께서 직접 관여하여 성공을
거둔것과(6절) 좋은 대조를 이룬다. 사도적 사명은 온전히 주님의 지시를 따를 때만
좋은 결과를 얻들 수 있다. 하편 본문의 '이 밤에'는 갈릴리에서 고기잡이에 가장 좋
은 시간이 밤이었음을 감안할 때 더욱 잘 이해되는 부분이다(Barrett).
=====21:4
날이 새어갈 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이아스(* )인데, 이 단
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1)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으나 아직은 어두운 상태를 가
리킨다고 보는 견해와(Barrett). 이렇게 보는데에는 다른 곳에서 사용된 '프로이'(*
)의 용법을 고려하였기 때문인 바 마 20:1에서 이 단어는 그날의 일이 시작되는 시간
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
금의 상황은 다음과 같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지금 갈릴리 바다에는 여명이 밝
아와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밝아졌다. 그런데 바닷가라는 특성상 자
주있는 일인 것처럼 어느 정도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런데다 제자들은 설마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곳에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예수를 제대로 알
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두번씩이나 예수릎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니면 눅 24:16의 상황처럼 제자들의 눈이 가리워져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바닷가에 서셨으나 - 여기에는 예수께서 어디서부터 또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
설명이 없다. 다만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다고 언급될 뿐이다. 아마 이것은 20-:19에
서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아무런 물리적 작용없이 제자들 사이에 서셨던 것과 같은 차
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1:5
애들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아'(* )는 '아이'를 뜻하는 '
파이스'(* )에서 온 말인데 현재의 문맥에서 이에 호칭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
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로 갈린다. 혹자는 '어! 여보게들!'의 뜻으로 보며
(Robertson) 또 어떤 학자는 '젊은 이들!'의 의미로 본다(Lenski). 현대 헬라에서는
성인(成人)들에 대하여 그 칭호를 사용한다고 한다(Barrett). 본문에서 예수께서 제자
들을 향하여 '애들아'(Children, RSV)라고 불렀을 때 그것이 부모가 아이들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였든 아니면 젊은이들로 부르는 것이었든, 적어도 매우 친밀하고 애정
이 담긴 부르심이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예수께서는 이런 마음으
로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9절).
고기가 있느냐...없나이다 -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
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물음은 18:35에서처럼 당연히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물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라기온'(*
)은 '먹다'라는 의미의 어근 '파그'(* )와 '....와 함께'를 뜻하는 '프로스'(*
)가 결합된 것으로'떡과 함께 먹는 양념'(특히 생선과 함께 요리함)을 가리키기도 하
고 '일용 양식의 하나'를 가리키기도 하였으나 후에는 생선을 가리키는 '아폰'(* )
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Robertson). 그러니까 본문의 '고기'는 '생선'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없나이다'라는 부정의 대답은 제자들이 철저한
실패의 상황에 직면하였음을 말해 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은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21:6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한 것에 대해
(1)갈릴리에서 어부 생활을 했던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던 고기잡이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거나 (2)아니면 위치상 예수께서 물고
기의 떼를 더 잘 식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등의 추측이 있으나 그러
한 추측은 본절에 접근하지 못하는 피상적(皮相的)인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배 오
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했을 때 이는 제자들이 밤이 새도록 헛수고한 행위를 다
시 한번 반복해 보게 하는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
구하고 제자들이 그 명령에 순종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한 혹자는 '오른쪽(* , 뎌시오스)이라는 단어의 이차적인 의미가 '행
운'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행운'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지만, 요한이 이 사건을 통해
독자들이 깨달아 알기를 기대했던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명령에 대한 제자
들의 즉각적인 복종 그리고 그에 따른 놀라운 결과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순종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그물을 들어올
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끌어 올리다'(* ,여퀴에인)는 말이 사람
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오는 것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음을 감안한다면
(6:44;12:32), 여기에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 또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즉 고기는 개종자를, 고기를 잡는 행위는 사도직의 수행을 뜻한다고 볼때 제자
들이 예수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했응 때 단 한 사람의 개종자도 이끌어 낼 수 없
었으나 예수의 명령에 따라 했으때 그들은 놀라우리 만큼 많은 개종자를 만들수 었었
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절대 의존읜 관계에있으며 그들의 능력
의 원천(源泉)은 오직 예수에 대한 절대적 복종에 있었다.
=====21: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주시라 -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
가 잡힌것은 하나의 이적이었고 그 이적은 요한으로 하여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
라' 명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게 하였다. 20:8에서도 그랬거니와 여기서도
요한은 남달리 빠른 직관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제일 먼저 주님을 알아보았고 그
사실을 베드로에게 말해 주었다.
시몬 베드로...겉옷을 두른후...뛰어 내리더라 - 20:6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
의 적극적이고 급한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배를 끌고가자니 잡은 고기를 처리
해야 하는 사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냥 물에 뛰어내려 헤엄으로 예수께 가고자 했다.
그런데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고 뛰어내렸다는 것은 그가 일하는 동안 활동을 편안히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있었거나 거의 벗은 상태로 옷을 느슨하게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
다. 여기서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이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옷을 벗어야 했지만 그래도 주님 앞
에서는 옷을 벗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의 벗겨지다시피 헐렁하게 걸쳐져 있던 겉옷
을 수영하기 위해 제대로 동여맸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옳든 중요한 것은 열정
(熱情)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15절 주석참조).
=====21:8
오십간-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콘디아코시온'
은 직역하면 '이백 규빗'이라는 뜻이다. 1규빗이 약 45cm에 해당된다고 볼 때 뭍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약 90m(공동 번역은 100미터로 번역함)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작은 배...끌고 와서 - 베드로외에 물로 뛰어내린 제자는 없었다. 그물에 잡힌 물
고기를 운반해야 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앞절에서(6절) 밝힌 바대로 너무
많은 고기가 잡혔으므로 그물을 들어올릭 수 없어 뭍에까지 끌고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작은 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로이아리온'(* )은
'플로이온'(* )에 비해 작은 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큰 배는 뭍
에 밑창이 닿기 때문에 작은 배로 고기 그물을 예인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이 앞의 두 단어를 같은 뜻으로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
고 있음을 지적하면서(6:17, 19, 21, 22, 24), 여기서도 3절의 '배'와 동일한 배를 가
리킨다고 본다(Barrett, Robertson).
=====21:9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제자들이 배를 뭍에 대고 예수에게로 왔을 때 거기에
는 제자들의 예상을 초월하는 장면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을 위하
여 식사를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고기잡이를 하느라 피곤하
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세심한 배려(配廬)를 보여주신
다. 예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 생선과 떡을 구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준비되
어 있었다는 사실만이 언급되며 그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와 제자들이 함
께 나눈 이 아침의 공동 식사는 서로의 마음을 여는 친밀한 교체의 시간이며(15절 주
석 참조), 소명을 부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151-19절).
=====21:10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
라 명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예수께서 미리 준비해둔 생선
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물에 걸린 생선을 가져오라 하셨다(L.
Morris). (2)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와서 함께 식사를 하기 전에 고기 잡은 것을 처리하
고 오라고 하신 것으로 본다(Lenski). 전자의 해석은, 그것이 예수께서 마련한 식사의
불충분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에서도 볼 수
있었던 바(6:1-13), 예수께서는 단 한 마리의 생선으로도 충분히 제자들을 먹일 수 있
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의 해석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의 상황에서 잡은 물고기를 처리하는 것은 시급하다고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는 여기에서 제3의 해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체험할 수 있었는가를 주의깊게 상기시킴으
로써 그들이 감당해야 할 소명(召命)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21:11
시몬 베드로가...큰 고기가 일백 쉰세 마리 - 그물에 든 고기를, 끌아올려 셈하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제사는 역시 베드로였다. 본문에는 베드로 혼자 그 일을 다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게 묘사되어 있으나 6절과 관련지어 볼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했다
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한편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잎뒤스'(*
)는, 묘하게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글자를 모은 것과 일치하
는데 이런 이유로 해서 초대교회에서는 물고기를 기독교 또는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부
호로 사용하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거주지였던 곳에서 물고기 그림이 발견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한편 요한은 여기에서 잡힌 물고기의 숫자가 153마리였다고
기록하는데 이 153이라는 숫자는 기독교 역사상 많은 해석을 야기시켜 왔다. (1)어거
스틴(Augustine)은 율법을 상징하는 10을 구약으로, 성령을 상징하는 7을 신약으로 보
고 이 둘을 합한 수인 17에 이르기까지 1부터 더해 나가면(1+2+3+4+5...+17) 153이라
는 숫자가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엿붙여서 이 153이라는 숫
자는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게 될 자들의 수
를 가리킨다고 했다. (2)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100을 이방인의
수로, 50을 유대인의 수로 그리고 3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수로 보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렇게 볼 때 100+50+3=153이라는 수가 도출되며 이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
이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고 한다. (3)고대의 동물학자
들은 생선을 153종으로 분류했는데 본문의 이 숫자는 인류 전체의 인종(人種)을 상징
한다고 본다(Hieron). (4)사도들에 '낚인' 즉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Barrett). (5)단지 많은 수의 고기가 잡혀다는 것 그리고 153이라는 숫자는 다만 사
실의 보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TYemple, Leski). 위에 열거한 학자들
의 제 견해들은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엄청나게 많은 물기가 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6절).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이 표현은 적어도 그 정도의 물고기가 잡혔다면
당연히 그물이 찢어졌어야 마땅했음을 암시한다(눅 5:6). 그럼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이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편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다고는
것에 대해 학자들은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통일성(unity)을 말해준다고 보기도 한다.
교회는 많고도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지만 그 통일성이 보전되어 언제나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1:12
조반을...묻는 자가 없더라 - '조반'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리스테사테'(*
)는 하루 중 첫 식사를 뜻하는데 후대에는 눅 11:37에서처럼 '만찬'의 의미로 사용되
기도 하였다. 참고로 어떤 학자에 의하면 1세기의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두끼의 식
사를 했다고 하는데(L. Morris), 본문의 '아리스톤'(* )이 바로 그 첫
번째 식사로 대개는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먹었지만 때로는 이른 점심으로 먹
기도 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 먹는 두번째 식사는 '데이프논'(* )으로
저녁 식사에 해당한다. 식사를 위해 제자들이 와서 숯불 주위에 둘러 앉았을 때 이미
제자들은 자기들을 식사에 초대하신 이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자기들에게
두번이나 나타난 바 있던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53마리의 생선이 분명한 현
실이듯 지금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려 하신 주님의 현존(現存)도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현실이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이제 더 이
상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놀라움과 감격이 뒤섞여 감히 예수께 선뜻 말을 건네
지 못한 듯이 보인다(Godet).
=====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생선도 - 본절에서 '예수께서 가셔서'라는 표현 가운데
'가셔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분의 떡과 생선을 가져오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
이 머뭇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갔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셨다'는
의미가 특수한 어법인지 분명치 않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
누어 주셨다. 어떠한 축복의 말씀도 없고 함께 식사를 했다는 언급도 없다. 따라서 이
식사를 굳이 성만찬과 관련시켜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한편 혹자릉 이 식탁에서
오병이어의 이적(6:1-13)과 같은 형태의 이적이 또 한번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본절
의 '생선'에 해당하는 말은 9절의 '와사리온'(* )과 동일하다는 점 그
리고 11절의 '큰 고기'(* , 잎뒤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
해 준다는 것이다(Hendriksen). 예수께서 이적적인 방법으로 생선을 가져오라 명하신
목적이, 예수께서 준비한 생선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잡은 것을 더 가져오기 위함이
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21:14
세번째로 나타나신 것이라 -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있다(20:15-17;19,20;26-29).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서 뺀 것은
그녀가 제자가(* , 메데테스)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arrett). 그런
데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세번의 현현은 다른 신약성경들과 관련시켜 볼 때 정확한 것
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요한은 자신이 쓰고 있는 복음서에서의 순서만 고려하
고 있는 듯하다. 신약성경이 보도하고 있는 바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에 관한 기사들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21:15
요한의 아들 시몬 - 이 이름은 1:42에 나오는데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게바(베드
로)라는 이름을 새로 주셨었다. 그렇게 하신것은 그에게서 수제자(首弟子)로서의 가능
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 부
인함으로써 '반석'이라는 의미의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질 수 없었다 하겠다. 모든 것은 처음
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은 호명은 단지 베드로의 자격을 박탈
하거나 그의 나약함을 들추어 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겸손을 유도해내고 그에게 다
시 새로운 소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본문에서 '이사람들'은 개역성경의 난하주
(註)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것들'로도 해석될 수 있다(RSV에서는 these로 되어 있
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네가 다른 사람들
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2)'네가 이 사람들(함께 있던 제자
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3)'네가 이것들(배와 기타 기잡는 도
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모든 해석이 다 가능하며 타당성을 갖는다고 보여진
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가장 타당한 해석은 첫번째 것이라고 본다. 비록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열성에 우열(優劣)을 가린다는 것이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베드로
가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뛰어난 충성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는 사실을 감안할 때(막14:29) 그러한 결론은 무리가 되지 않는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 )였는데 베드로는 '필로'(* )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흔히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며 후자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
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데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아니면 위에서 구분한 대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이다. 혹자
는 두 단어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무
조건적인 사랑을 물었는데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고 해서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단지 그보다는 다소 차원이 낮은 사랑 즉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했다고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다른 학자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3:16;5:20;14:21;16:27)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렇게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질문
에 대해 변경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런만큼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그르다
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절에서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가 비록 실패
를 하기 했지만 아직도 예수에 대한 애정과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7절 주석
참조).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본절에서부터 17절에 이르기까지 '먹이라', -'치라' -'먹이
라'는 명령이 연속되고 있는데 혹자는 첫번째와 세번째는 양들응 목초지로 인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는 양들의 모은 활동을 돌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구분하기
도 한다(Tenney). 그러나 이처럼 뚜렷이 구분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먹이는 것과 돌
보는 것이 크게 보아 같은 범부에 든다고 할 때 오히려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는 것
이 나을 듯하다. 한편 '어린 양'에서 '어린'이라는 표현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소명은
힘이 들고 많은 사랑을 요하는 것이다.
=====21:16
두번째 가라사대...내 양을 치라 - 두번째 질문은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첫번째 질문은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 베드로의 호언장담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자 했던 것같다. 이제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
과 베드로 사이의 관계를 묻고있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과의 비교 차원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일대일 차원의 관계에 있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앞의 것과 동일하다. 적어도 베드로는 이 시간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과장없이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번 모두에 걸쳐 '주께서 아시나이
다'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주께서 아십니다'가 주절로, '내
가 주를 사랑한다'는 말이 종속절의 형식으로 진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21:17
사랑하느냐 - 앞의 두 번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사랑'을 '필레오'(* )
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읕 베드로가 계속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진
실성과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수용(受容)하겠다는 마음의 표시로 볼 수 있을 것이
다. 혹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친근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과 관련
하여 Living Bible은 본절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진정 나의 친구이냐?"
(Simon, Son of John, are you even my friend?)로 번역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근심하여 가로되 - 베드로는 예수의 세번째 질문을 받고는 근심에 빠졌다. 베드로
가 근심하게 된 이유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인 바 어쩌
면 자기가 세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예수께 대한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예전처럼 자신있게 호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은 것을 아시오매...아시나이다 - 그러나 베드로는 허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
를 사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는 하나의 기독론적(基督論的) 고백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말 속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신적 통찰력을 갖
고 계시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2:25;16:30). 베드로는 이것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그
분 앞에서는 오직 진심을 이야기해야 함을 악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베드로의
세번에 걸친 대답 가운데 세번째의 '아시나이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어상 바뀌고 있
는 점에 주목한다. 즉 앞의 두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오이다'(* )의 번역
으로서 어떤 사실에 대한 직관적인 앎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그에 비해 세번찌의 '아시
나이다'는 헬라어 '기노스코'(* )의 번역으로서 이 말은 '오이다'보다
더 갗한 의미를 가지며 경험을 매개로 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
한 분석이 옳다고 한다면, 베드로는 비록 근심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대답을 했지
만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것을 담대히 그러
나 교반하지 않게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내 양을 먹이라 - 예수는 베드로의 사랑을 세번 확인하였고 그에게 동일한 사명을
세번 반복하여 주셨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하나는 베드로가 예
수를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써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 주는 의미가 있고(Barrett),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의 베드로의 지도권이 다시 위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
(Bultmann). 특히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위는 교회 바깥으로 향하는 전도에 초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의 지도권과 목회적 돌봄에 초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본서의 분뷰는, '우리 밖'의 잃어버린 양떼에게 관심을 갖는 공관복음의 선교
지향적 분부(마28:19, 20;막 16:15-18;눅 24"46-48)와 비교된다.
=====21:18
진실로 진실로...젊어서는...데려가리라 - '진실로 진실로'라는 도입 문구는 현재
분위기의 엄숙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도입 문구의 엄숙함에 걸맞게 베드로의 순교(殉
敎)가 예고되고 있다. 혹자는 본절이 '어릴적에는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갈 수 이
었으나 성인이 되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속담을 배경에 두고 있다고 보는
데(Bultmann) 분명한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본절이 베드로의 순교 외에
구체적인 그의 죽음 방식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불트만
(Bultmann)같은 학자는 본절이 '그가 전에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택했으나, 그의 마지
막 길은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다음절(19절)과 관련시켜 볼
때 베드로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방식 즉 순교의 형태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본다. 그러나 그 죽음이 곧 십자가의 죽음을 뜻한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1)'팔을 벌리다'가 십자가 처형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손으로 잡으려고 또는 지도자를 향해 팔을 내미는 노인의 절망을
묘사하는 것이고, (2)'띠를 띠우다'(* ,존뉘나이)는 '묶다'는 뜻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렛(Barrett)같은 학자는 본절
에서 베드로의 순교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현되리라는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
다. 여기서도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팔을 벌리리니'와 '띠 띠우고'라는 문구인데
바렛은 불트만과 반대의 논리를 전개시킨다. (1)먼저, '팔을 벌리다'는 사65:2의 '내
가 종일 손을 펴서'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데, 사65:2는 바나바 서신12:4, 저스틴(
., I 35), 이레니우스( ,79) 그리고 키푸
리안( ,II, 20) 등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힘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2)'존뉘나이'( ,'띠를 띠우다')가 묶는 것을 의미하지 않
으므로, 십자가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불트만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
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사전적 의미보다 넓은 개념으로 확대되어 사용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의 두 학자들의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옳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후대 교부들의 전승에 의하면 (2)의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소명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자기
의 삶을 자의적(自意的)으로 살 수 없다. 그는 주님께 붙잡힌 바 되었는데 그것은 억
지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말미암아(20:22) 자발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예고된 죽음을 자취한 것처럼 베드로도 노쇠하여 힘
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15-17절) 죽음의 길을 자발적
으로 걸어가게 될 것이다.
=====21:19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 여기서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복음을 증
거하고 양들을 돌보는 목회적(牧會的) 직무를 수행하다 강제적으로 부과된 죽음 곧 순
교를 가리킨다. 이 순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베
드로는 이런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성경에는 베드로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순교를 당했는
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마지막 행적은 헤롯 아그
립바I세(Herod Agrippa I, 37-44)의 박해를 받아 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
한 후(행 12:1-19) 예루살렘 공의회에 나타난 것으로 끝을 맺는다(행15:1-11). 성경
외의 초기 문헌들에는 베드로의 최후 생적에 대한 기록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다.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Clement, 88-97)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클레멘트1서)
에는 베드로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서 순교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터툴리안
(Tertullian)은 베드로가 네로(Nero) 황제의 통치 하에서 바울과 같은 십자가에 처형
되어 순교했다고 말했으며 그는 베드로의 십자가 죽음에서 '남이 네게 띠 띠우고' 라
는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15).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의 십자
가 처형과 관련하여 그가 자청하여 머리를 아래로 두는 형태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
었다고 전한다(HE, III, i. 2).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진술의 배경에는 '주님이
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바른 자세로 처형되었는데 내가 어찌 주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베드로의 겸손하고도 철저한 순종(順從)을 시사하는 뜻이 들
어있다. 또한 신약 외경인 '베드로행전'에는 비록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
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는데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분는 "네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
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을 들은 베드로
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로마로 되돌아가 사역을 계속하다 체포당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처형당하였다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 - 본문은 13:36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결국 그 말씀은(13:36)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시사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미 베드로가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베드로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시는 능력으로 가능하다. 순교에
까지 이르도록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철저히 복종하는 것 그것이 사도직의 진정한
의미이다(12:25, 26;막8:34, 35)
=====21:20
베드로가 돌이켜...따르는 것을 보니 - 소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계속해서
베드로에 버금가는 중요한 인물로 서술되고 있다(7절;20:2-8). 이 제자가 예수에게 사
랑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라는 13:23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본문의 의미에 대하여 혹자는 베드로에게 방금 내려진 명령을 요한이 이미 수행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베드로에 대한 요한의 우월성이 암시된 것이라고 한다
(Barrett).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베드로가 아직 따르기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한
이 먼저 따랐다는 것을 전제한 듯하나 본문은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를
베도로가 먼저 따르고 있고 그 뒤를 요한이 따라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
다. 개역 성경에는 '따르는 것을 보니'로 되어 있어 상황에 대한 불명확한 이해를 유
발(誘發)시키는 데 공동 번역에는 "뒤따라 오고 있었다"로 되어 있어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따르기 전에 베드로가 이미 행동을 나타낸 것을 암시한다. RSV의 번역을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해지는데, 거기에는 "Peter turned and saw following them"으로 되어
있어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따르는 대상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them)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them은 예수와 베드로라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결국 본절은 베드로
에 대한 요한의 우월성을 암시한다기 보다는 다만 요한도 베드로에 못지 않게 예수를
따르는 일에 뛰어났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21:21
이 사람은 어떻게...되겠삽나이까 - 베드로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동기를, 많은 학
자들은 요한에 대한 질투에서 찾는다(Olshusen, Lucke, Meyer, Baumlein). 즉 베드로
는 자신의 순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듣고서, 그렇다면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
도 당연히 순교를 당함이 마땅하다는 식의 바램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
로 베드로는 요한의 장래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정심에서 이런 질문을 했을 수도 있다
(Godet).
=====21:22
내가 올 때까지...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베드로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는 요
한도 자신과 같은 순교의 운명을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던 듯하
다. 그의 마음을 읽은 예수는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즉 요한은 순
교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 있을 수도 있다. 그렇
다고 하더라도 베드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베드로는 다만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
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너는 나를 따르라'는 강조적 명령문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난
다. 여기서 '너'(* , 쉬)가 강조적인 위치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쉬 모이 아콜로이데이). 본절에서는 두가지 사실을 추출해 낼 수 있는데 하나는 베드
로나 요한이나 그들 모두의 운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은 각각 독립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그들의 종국
(終局)에 의해 그들의 비중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21:23
형제들에게...죽지 아니하겠다 - 본절은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19-22절) 상당히 오해되어 전파되었음을 보여준다. '형제들'이라는 호칭은 잘못 이해
된 이야기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형제들'이라
는 칭호는 초대 교회 시절부터 동료 그리스도교인들을 부를 때 사용했던 것이기 때문
이다(행1:15, 16). 예수의 말씀은 요한이 당신의재림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을 것이
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약 주님께서 당신의 재림 때까지 요한을 살려둔다 하더라도 베
드로는 아무런 신경을 쓸 것이 없다는 의미였는데 전자의 의미로 오해되었다는 것이
다. 이 오해는 본서의 저자로 하여금 바로잡아야 한다는 필요를 느낄만큼 심각한 문제
였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 사이에 이런 오해가 설득력 있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매우 가까이 임박한
재림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바 그들은 자기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주의 재림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마16:27, 28;행 1:11;고전 115:51;살전4:15;계2:16;3:11).
렌스키(Lenski)에 의하면 요한이 죽어 장사된 다음에도 그가 죽지 않고 무덤 속에 살
아있다는 전설이 유포(流布)되었었다고 하는데, 이는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오해된 말
씀이(22절)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능히 짐작케 한다.
=====21:24
이 사람이라 -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그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고 본서의 저
자로서 복음을 증거하였을 뿐 아니라 기록으로도 남겼다. 예수의 생전에 그와 함께 하
였던 제자, 더구나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애제자가 이 복음서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그 증거하는 내용이 신뢰할 만큼 권위있음을 시사한다.
우리는...참인줄 아노라 - 본문은, 요한이 쓴 이 복음서가 진실되고 신뢰할 만한
것임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우리'라는 보증인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일찍이 알
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이 복음서가 어떤 의미에서 공저(共
著)로 된 창작물이었으며 저자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복음서에 대해 책임을 졌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지 본문을 표면적으로 이해한 데서 온 것일뿐 어떤
증거에 근거한 얘기가 아니다. 최근의 주석 학자들은 이 '우리'라는 표현에 대해 '에
베소의 장로들'이라고 보기도 하고(Lenski), 사도의 증거를 확증할 수 있는 사도 교회
라고 보기도 한다(Barrett). 혹은 요한이 자신과 동역자들 그리고 본서의 독자들응 공
동체 의식속에 묶어 본서의 진정성을 함께 확증시키려는 의도로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
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옳다고 확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
이건 본문이 이 복음서의 진정성을 받아들이도록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도 이미
인정하고 있는 복음서의 권위를 확증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부족할 줄 아노라 - 요한은 20:30에 이어
다시 한번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이 자기가 기록한 것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많다는 사
실을 과정법적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강조하려 애쓰고 있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공동
번역)는 표현은 확실히 모리스(L. Morris)가 '유쾌한 과장법'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여
유있는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없는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다. (1)그리스도가 행하신 놀랍고도 수많은 일들을 다 기록하기에는 저
자인 요한의 힘이 너무 달린다든 것,(2)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계시된 복음은 몹시도
심원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 둘 수는 없다는 것(Lenski)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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