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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3장 강해

작성자예수사랑|작성시간20.12.11|조회수3,011 목록 댓글 0

계시록 3장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의 사자

 

사데(Sardis)는 두아디아에서 남쪽으로 약 48Km 지점에 있던 성읍이다. 에게해 주변 무역의 요충지로 헤르무스(Hermus)강과 트몰루스(Tmolus)산 사이의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계곡으로 지나는 도로를 끼고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사데의 사람들은 여신 시벨레(cybele)를 주신으로 섬겼는데 그 신전은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과 규모가 비등하다. 예언적 사데 교회는 예언 성취된 분파교회로서 종교개혁 시대이다. 사데라는 말은 개혁이란 뜻으로 종교개혁 시대를 예언하고 있다.

 

1)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 일곱 영은 성령이고, 일곱 별은 우주적 교회를 지키는 하늘의 일곱 천사이다. 예수께서는 성령과 천사를 동원하여 이 시대의 종교개혁을 이루어 나간다.

 

2)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 외형상으로는 교회 건물을 세우고 형식상 예배는 드리나 실제로는 죽은 교회로 판정받는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상태임을 말한다. 이처럼 사데 교회가 생명력이 없는 교회가 된 것은 아마도 지리적 안정과 물질적 풍요만을 믿고 안일과 부도덕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데라는 말의 뜻은 개혁으로 그 뜻대로 개혁은 이루어졌지만 이후에 교회가 여러 분파로 나뉘어 개혁으로서의 모범이 되지 못했다.

 

 

계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행위의 온전함

 

종교개혁 시대에는 교리문제를 앞세우다가 행위의 온전함을 드러내지 못했는데, 결국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바로 개혁 시대의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루터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으로 근본적인 것을 잘 지적하고 개혁을 시도했으나, 교리문제로 교파가 나뉘어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행위부분에서는 온전함을 이루어 나가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잘 시작하였으나 행위부분이 약화되다 보니 죽은 믿음으로 끝나 버렸다. 믿음은 살았는데 행위가 죽었다(약2:14, 17, 18, 20)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1) 일깨워 - 한순간의 일깨움이 아니라, 계속적인 일깨움을 표시해 주고 있다. 어원적으로는 꺼져 가는 불씨를 되살려 계속적으로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가리킨다. 또 이 말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태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2)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 사데 교회는 실상은 죽었으나 그 중 죽지 않은 자 몇 명이 남아 있으니 그 남은 자들마저 죽지 않도록 지켜 보존하라는 의미이다.

 

3)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 여기서의 온전함이 하나님의 수준에 다다르는 절대 완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표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데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와는 대조되게 이러한 수준에 있어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계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회개하라

 

1)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회개하라 - 종교개혁은 일곱 영이신 성령과 일곱 천사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들이 말씀하시고 사역을 이룸으로 개혁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을 희석시키는 교파주의나 온전한 행위를 이루지 못함은 회개해야 한다.

이때 감리교를 창시한 영국의 존 웨슬리는 성령을 받음으로 성령을 통한 개혁을 이루어 영국 사회를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표어로 세계 선교의 길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었다.

 

2)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 이는 예수 재림의 임박성보다 돌발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주께서 도적같이 임하겠다는 표현은 언제 임하실지 모른다는 의미이다. 도적은 예고도 없이 잠든 사이에 와서 해를 입힌다. 그러나 깨어 있는 자는 도둑을 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깨어 있어 도적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 교회의 칭찬

 

이 시대에 종교개혁을 이룬 소수의 무리는 깨어 있는 무리로 변화의 주체 역할을 하였으나, 대중들은 개혁의 사역에 부응하지 못했고 따라 주지 못했다.

 

1)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 - 옷은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더럽혔다는 것은 죄로 물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고, 신앙의 정절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명이라 한 것은 소수의 무리인 종교개혁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2)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 흰 옷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도가 거룩한 성에 들어가기 위해 입은 혼인 예복이다. 그러므로 흰 옷은 성도가 죄악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결과 주님으로부터 받을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성화의 영광과 영생을 가리킨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

 

이기는 자는 혼인 예복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이 유지한 자들이다. 예수를 믿어 예복을 받았어도 그 예복을 희게, 깨끗이 빨지 않았다면 그들은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흐려질 것이다. 이기는 자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 계속 성화의 생활을 통해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야만 믿음의 승리자가 된다. 그리고 승리자들의 이름이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인정을 받게 된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주님은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잃지 않는 자들에게는 세 가지의 선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1) 흰 옷을 입을 것이다 - 흰 옷은 그리스도의 옷으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 입는 혼인 예복이다.

 

2)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흐리지 않을 것이다 - 생명책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아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라는 개념으로 확정된 것이다. 여기 생명책에서 이름이 흐려질 가능성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한 번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영원히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그 이름이 흐려지고 지워질 수 있기에 정신을 차리고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 이름을 시인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종들인 천사들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인정받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계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

 

빌라델비아(Philadelphia)는 사데에서 동남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헤르무스(Hermus)강과 인접한 코가미스(Cogamis)계곡의 고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알라세히르(Alasehir), 하나님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지고 터키의 한 성읍으로 남아 있다. 이 도시는 서머나와 서북 아시아, 브루기아를 잇는 도로를 끼고 있어 동과 서를 잇는 지리적 요충지로 크게 번성하였다. 주전 2세기 경 버가모 왕조의 앗탈루스 2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그는 자기 형제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형제 사랑이라는 뜻의 필라델푸스(Philadelphus)를 이 도시의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예언적인 빌라델비아 교회는 역사 속에서 성취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이룬 근대 선교시대이다. 여기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시고 문을 여시는데, 이 문은 선교의 문이다.

예수께서는 근대시대에 선교의 문을 열어 하늘의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길을 이루어 주신다.

골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1) 거룩하고 진실하사 - 여기서 ‘거룩하다’란 하나님의 대명사이다. 그러므로 이 용어를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한 것은 그의 신성을 나타낸 것이다. 또 ‘진실하다’란 불완전에 대해 완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2)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 구약 성경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예표하는 그림자이며 다윗의 집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예표하는 그림자였다. 그리고 여기서 열쇠란 통치권 또는 주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인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계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열린 문

 

1)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 빌라델비아 교회시대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린 하나님의 선교 시대임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2)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 네가 적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빌라델비아 교회 예언 성취시대에 선교회를 조직하여 복음을 전파하였고, 예수를 배반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나감을 말해 주고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 예언 성취시대에 선교회라는 작은 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787년에 모라비안 교파 해외 선교기관인 이교도를 위한 복음 전도회 창설.

1795년 런던 선교협의회 조직.

1799년 교회 선교협의회 조직.

1815년 바젤 복음주의 선교회.

1817-1818년 영국의 웨슬리 감리교 선교협의회.

1821년 덴마크 선교회와 파리 선교회.

1828년 라인강 지역 선교회.

1836년 라이프찌히 복음주의 루터 선교회.

1891년 대학생 자원 해외 선교운동 제1회 전국대회.

1892년 북미주 해외 선교대회.

 

 

계 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하나님의 선교

 

자칭 유대인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하면서 실상은 사단의 종 노릇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대적하고 그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교가 이방인들에 의해 이루어질 때 믿지 않던 유대인 중에서 일부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에로 들어올 자들이 있을 것을 가리키는데 이 유대인 중에서 소수가 이방인의 발 앞에 절하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사랑하는 줄을 알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교가 이방인들에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을 말씀하신다.

롬 11:11-1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롬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엡 2:11-18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계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인내의 말씀

 

마지막 때에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예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킴으로 시험의 때를 면케 하신다는 뜻은 대환난을 당하지 않고 환난 전에 휴거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의 때에 보호해 주시고 양육해 주시는 하나님의 각별하신 은총이 있을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환난 전 휴거는 있지 않고, 피난처로 옮겨 주시는 약속은 계시록 12장에 기록되어 있고, 부활사건은 마지막 나팔인 일곱째 나팔 불 때 한 번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1)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 예언적인 말씀으로는 요한 당시의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것이지만,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빌라델비아 선교시대에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희생된 자들로 인내의 말씀을 지킨 자들이다. 더 나아가서 장차 대환난 때 다섯달 황충 환난을 이긴 성도들도 말하고 있다.

 

2)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 7년 대환난에서 전삼년 반 때에 성도의 인내를 통해 황충 환난을 이긴 자는 후삼년 반 때에 하나님께서 독수리 두 날개로 피난처 즉 양육처로 옮겨주실 것을 계시록 12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근대 선교시대에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일한 자들에게 각별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서 시험도 없게 해 주신다는 약속이다.

 

3)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 계시록의 말씀은 예언적인 말씀이지만 성취되고 실현될 말씀으로, 여기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선교시대를 예언한 것이고, 이 시대를 거쳐 대환난 때까지 언급한 것으로 본다. 대환난은 마지막 때에 교회를 향한 시험이기에 교회는 이 시험을 이겨야 한다. 마귀는 불신자들을 시험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귀의 밥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신자들을 시험하여 넘어뜨린다.

벧전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마 24: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벧후 2: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계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빌라델비아 교회가 실현되었을 때, 주님은 속히 오시겠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이룸으로 복음이 다 전파된 이후에 끝이 오리라 하신 말씀이 실현되는 때이기에 주님의 재림을 언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어 나가는 자들에게 좌절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 선교를 하도록 힘을 실어주고 위로해 주는 말씀이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1)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선교이다. 이 일을 초지일관하여 굳게 잡고 이루어 나가라는 메시지이다.

 

2)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면류관 상급을 받는 것인데, 이같이 귀하고 귀한 일을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말고, 면류관 상급 받기까지 굳게 잡아 이루라는 것이다. 면류관 상급은 순교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받는 상급이고, 세마포 상급은 성도들이 받는 상급이다. 그리고 성도가 순교하여 면류관 상급을 받는다면, 그도 하나님의 형제의 반열가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

 

예언 성취된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김은 선교의 작은 힘으로 이김인데,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교에 충성하고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는 상급을 주신다. 여기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의 새 이름이 쓰여진 경우와 계2:17에서 흰 돌에 나의 새 이름이 쓴 것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흰 돌 위에 나의 새 이름이 기록된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어린 양의 아내(신부)로서 섬기는 일을 이루는 자이고, 이마에 예수의 새 이름이 쓰여진 자는 순교 사도로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 같은 자요 왕 같은 제사장이고,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나아갔다 들어갔다 하면서 성밖에 백성들을 다스리는 사역을 이룬다.

계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1)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 하나님 성전 안에서 그 역할과 위치가 기둥과 같이 흔들림이 없는 존재가 되고, 그의 몸도 부활체에서 변함없는 영생체로 활동함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 왕 같은 제사장이 되면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하는데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쫓겨나지 않는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

 

라오디게아(Laodicea)는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던 도시이다. 리쿠스(Lycus)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깊은 계곡 위에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골로새(Colossae)와 히에라볼리(Hierapoli)가 자리잡고 있었다.

예언적 라오디게아 교회는 역사 속에서 성취된 종말교회요 말세시대를 말하는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나타나신 예수는 아멘이시오, 충성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시다. 여기서 예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교회의 근본은 처음 교회인 에베소 교회인데,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로 모든 교회의 모범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운동을 펼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이다.

 

1)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 - 아멘이란 낱말은 ‘진실한’ ‘확실한’이란 뜻으로 대개 문장 끝에서 ‘그대로 될지어다’는 말로 쓰인다.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나타내 주는 낱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한 충성된 분이심을 말해 주는 것이다.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히 3: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히 3:5-6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2) 창조의 근본이신 이 - 창조의 시초, 시작이신 분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뜻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의 첫 번째 피조물이란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란 뜻이다.

 

 

계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

 

하나님의 원하시는 교회는 초대 교회와 같이 뜨거운 사랑의 교회이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다고 한다. 여기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차가운 교회가 되라는 뜻은 아니다. 신앙적인 교회는 뜨거운 교회이고 세상의 문화적인 교회는 차가운 교회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교회를 뜨겁게 하지만 문화는 교회를 차갑게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문화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됨으로 말세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다.

눅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신앙적인 뜨거운 교회가 되려면 말씀을 풀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말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는 성경공부로 뜨거움을 회복해야 한다.

 

 

계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미지근함은 토하여 내친다

 

라오디게아 지방은 지역적으로 북쪽에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가 흘러 내려오고 있고, 동쪽에서는 골로새 지방에서 흘러내리는 냉천수가 있다. 온천수와 냉천수가 하나가 되어 미지근한 물이 되는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신앙과 문화가 혼합되어 미지근한 말세교회의 모습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1) 미지근하여 - 말세교회는 차가운 문화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와서 미지근하여 뜨거운 교회로서의 본질이 많이 희석되어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주님도 이러한 교회를 역겨워함으로 그 입에서 토해내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미지근함은 주님께서 토하여 내치는 악한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

 

2) 토하여 내치리라 - 맛이 없거나 역겨운 것을 먹으면 사람은 대개 토해 버린다. 불신앙이나 가증스러운 미지근한 신앙은 주께서 가차 없이 정죄할 것을 말한다. 내침을 당한다는 것은 끝까지 참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면 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므로 천국 구원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자칭 부자

 

1) 나는 부자라 - 스스로 부자 됨이요, 자칭 부자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실상은 영적인 모습인 것이다. 우리의 육적이고 외형적인 것은 허상이라면 영적이고 내적인 것은 바로 실상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겉으로는 부자라고 말하지만, 주님이 진단하시는 영적인 면은 곤고함이요, 가련함이요, 가난함이요, 눈멀음이요, 벌거벗음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서 교훈하심은, 사람을 볼 때 외형적으로 보지 말고, 영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도 알려준다.

 

2) 곤고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 곤고하다는 말은 비참하다, 불행하다라는 뜻으로 전쟁 때문에 모든 것이 파괴되고 약탈당했기 때문에 겪는 생활의 어려움을 연상시켜 준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 해도 그 옷을 더럽히면 누더기옷과 같이 되어 곤고하고 비참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권고

 

1) 내가 너를 권하노니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 금을 믿음이라 할 때, 연단된 믿음은 환난과 핍박을 이기는 믿음을 말한다. 연단은 물과 바람으로 되는 경우도 있지만, 불로 연단되면 존재의 근본까지 새롭게 되는 연단이다. 그것은 바로 돌 같이 버려진 우리가 금 같은 귀한 존재로 변하는 것이다.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히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2)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 흰 옷은 혼인잔치 때 입고 들어가야 할 예복인데, 예복이 없다는 것은 회개의 생활에 문제가 생긴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수를 믿을 때 곧 세례를 받을 때에 구원의 표를 받는다. 그 구원의 표는 그리스도의 옷이요, 흰 옷이다. 흰 옷은 대개 의와 정결과 승리를 상징인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칭의의 옷과 선하고 의로운 행실의 옷을 입어 수치를 가리라고 권면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산 자가 되어 구원을 얻어 천국까지 이르렀다고 하지만 회개의 생활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흐려져서 지워질 수 있음을 말한다. 생명책에 이름이 흐려지고 지워지는 경우는 회개를 온전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치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옷이 더러워진 자이다.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혼인 잔치하러 들어갈 수 없고, 예복이 상실됨으로 벌거벗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계 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3)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라오디게아 지방은 의학이 발달하였으며 그 중 특히 안약과 고약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육신의 눈은 밝게 했을지 모르나 영적인 것 신령한 것은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는 것, 육신의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영적인 것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육신의 눈만 위하지 말고, 성령의 신령한 은사를 받아 영적인 일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라고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풍자적으로 권면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람이 천년왕국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의 몸의 실상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은 복 있는 자의 모습이다. 천년왕국이 실현되면서 그때에 가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 때는 늦는다. 자신의 모습을 영적으로 미리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지금 안약을 사서 발라 영안이 열어져야 함을 말한다.

사람의 몸의 등불은 눈이고, 마음인 혼의 등불은 영이고, 영의 등불은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여기서 안약을 사서 바르라 함은 영의 등불인 성령의 기름을 사서 발라 영안을 뜨게 하라는 말이다.

마 25:8-9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잠 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삼하 22: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계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사라’는 말씀 가운데서 값을 지불하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의 피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이 말은 예수의 피값을 우리가 지불할 능력도 없고, 지불할 수도 없다. 그저 우리에게 선물로,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기 위해 사들일 때, 거저 산 것이 아니다. 값을 당당하게 지불하고, 우리를 피값으로 산 것이다. 그러므로 값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지불해 주시는 차원에서 행하신 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어떠한 값도 지불할 능력도 없고, 지불할 수도 없다. 단지 여기서 ‘사라’라고 하는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성령을 받을 때 우리의 사모함과 노력의 대가가 필요함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피의 은혜는 우리가 값으로 살 수 없으나, 성령은 값으로 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과 힘과 정성과 사모함을 들여서 기도하고, 말씀 듣고, 찬양할 때, 성령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 금을 사고, 흰 옷을 사고, 안약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노력을 말해 주고 있다. 금은 믿음으로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수고해야 할 필요성이 있고, 흰 옷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표로서 옷을 말하기에, 이것을 얻기까지는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안약은 성령을 상징함으로 성령을 받기까지 수고가 필요하기에, 값을 지불하고 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책망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다. 예수를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책망이 없다면 그는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다. 책망을 통해 회개의 생활과 진리 안에서의 생활, 거룩함에 참예하는 생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생활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책망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않고 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세이다.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히 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 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열심을 내라는 말은 뜨거워지라는 말로 성령을 받으라는 내용과 같다. 하나님의 일이란 성령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으며 죄를 회개해야 죄용서 받고 성령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성령을 받아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로 하나님의 열심과 열의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것이다.

빌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 아버지와 식사

 

아버지의 식사에 함께 참예함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최고의 축복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식사에 참예함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축복이다. 예수께서 유월절 성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최후 승리한 자의 식사를 예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거행되는 성만찬은 배고픈 자가 배부름을 얻기 위한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자의 거룩한 식사로서 성도가 하나 됨을 경험하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와도 하나 되는 성만찬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1)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문은 사람의 마음의 문을 지칭한다. 신실하고 충성되어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던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선 주님께서 계속 찾아가실 필요없이 선교의 문만 여시면 되었으나 영적으로 죽어 있어 자신들이 계속적으로 짓고 있는 죄에 대하여 회개조차 하지 못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친히 찾아가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는 사랑의 수고를 하셔야 했던 것이다. 사랑의 주님은 당신이 택하신 죄인을 찾아오시며 지금도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결국 주님은 극진하신 사랑으로 아직 회개치 아니한 자기 백성들의 마음 문에 인내하는 자세로 서서 문을 열 때까지 죄인을 위해 끈질지게 두드리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죄인이 회개하고 주님을 받아들이면 주님은 매우 기뻐하며 반가이 맞이하신다. 여기서 더불어 먹는다는 표현은 그러한 때의 기쁨의 잔치를 염두에 둔 것으로 회개하고 마음 문을 연 성도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친밀한 영적 교제를 의미한다.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자

 

이기는 자는 성도로서 이기는 자가 있고 사도로서 이기는 자가 있는데, 여기서는 사도로서 이기는 자를 말한다. 사도는 하나님의 종이라 말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로 복음서에서 달란트나 므나를 받은 자들이다. 이러한 달란트를 받아 사명을 잘 감당하면, 그들은 부지런한 자들로 충성되다고 인정받는 종이 될 것이기에 이들에게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진다. 마태복음에서는 5달란트 사명을 잘 감당한 종에게 잘 하였다 하면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 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므나 사명을 잘 감당한 종에게 열 고을 권세를 주었다. 이 내용은 계시록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됨을 말하는데, 이들은 천년왕국에서 왕이신 예수의 분봉왕으로 예수와 함께 보좌에 앉아 사명을 감당함을 말한다.

성도로서 이기는 자는 열 처녀 비유의 말씀으로 알려주고 있고, 하나님의 종으로 이기는 자는 달란트와 므나 비유로 알려주고 있다.

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눅 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리라 - 여기서 보좌는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서 만국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계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과 교회

 

성령과 교회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서, 교회는 성령의 소리에 민감해야 한다. 교회가 성령의 소리를 들으면 촛대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는데, 성령의 소리에 둔하고 듣지 못하면 음녀교회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영의 귀가 있고 영의 눈이 있고 영의 입이 있다. 영의 귀가 열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늘 듣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영의 눈이 열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하고 영의 입이 열려 하늘의 신령한 만나를 내려주실 때 받아 먹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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