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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夜瞻鄕路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浮雲颯颯歸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日南無有雁 일남에는 기러기 마저 없으니 誰爲向林飛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 혜초의 오언詩 - ※ 日南 → 베트남 . 林 → 계림 : 신라의 다른 이름.
- < 慧超 往五天竺國傳 > 小考 -
新羅가 三國을 통일한 뒤 新羅 사람으로서 入唐하는 使臣 . 商人 . 留學生求道高僧들이 많았던 그 무렵 唐에서는 天竺으로 가는 學僧들이 많았다. 義淨은 [大唐西域求道法僧傳] 序文에서 " 그가 아는 五十餘法師가 長安을 떠나 天竺으로 갔지만 살아서 돌아 온 사람은 두 서넛밖에 못된다 (去者數盈半百留者僅有幾人) " 고 하였다. 그때 新羅사람으로서 天竺에 간 사람들은 대개 唐僧 들과 동행하였다. [大唐西域求道法僧傳]에 의하면 新羅사람으로서 天竺에 간 사람은 阿離耶跋摩 . 慧業 . 玄太 . 玄恪 . 慧輪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두 사람을 더하여 모두 七人이다.
" 아리야발마 " 는 7세기 頃(貞觀年中)에 長安을 떠나 인도의 라지그리하(王舍城)등 佛蹟을 참배한 후 나란타寺에서 抄寫衆經 하다가 병들어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70세에 죽었다. 慧業도 역시 貞觀年中에 西遊하여 부뜨하가야의 마하보드寺 와 나란타寺에 거주하면서 聽讀하다가 60세에 나란다에서 죽었다. 玄太는 인도 말로 그 이름이 살바갸데와(sarvajnadva)인데 7세기 頃(永徽年中)에 唐으로부터 陸路로 中印度에 도착하여 부뜨하가야의 보리樹를 참배한 후 經論을 연구하다가 唐가지는 돌아 왔으나 그뒤 소식은 모른다. 玄恪은 貞觀年中에 唐僧 玄照法師와 같이 마하보드히寺에 이르러 참배한 후 40餘歲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慧輪은 인도 말로 그 이름이 쁘라갸발마(prajnavarma)인데 玄照法師와 같이 印度에 갔다가 이곳 저곳 인도佛寺 에서 주지 노릇도 하면서 40歲까지 살았으나 그 뒤 소식은 모른다. 이 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사람이 長安에서 떠나 海路로 인도에 갔으나 모두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百濟의 謙益은 6세기 初에 인도에 가서 5년동안 있다가 많은 律部經典을 갖고 돌아와서 우리나라 律宗의 始祖가 되었다. 慧超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入唐하여 8세기 初(720年頃)에 海路로 인도에 가서 인도(五天竺) 뿐만 아니라 인도 주변의 여러나라로 여행 하고 唐의 西北변방 龜玆國에 도착한 때가 바로 727년(開元五年) 11월 上旬이었고 그후 그는 계속 唐에 머물렀는데 그의 生卒年, 入唐한 때, 인도로 출발한 때 등을 정확하게는 모른다.
慧超의 [往五天竺國傳]의 原本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現存하는 것은 없고 다만 그 原本이 있었음을 考證할만한 歷史적 文獻 으로서 唐代의 慧琳이 지은 [一切經音義 卷 100]과 1909년에 프랑스 사람 東洋學者 펠리오(P . Peliot)가 敦煌石窟에서 발견한 寫本으로서 題名도 著者名도 찢어져 없어진 殘簡이 있을 뿐이다. 이 殘簡은 9세기 경 것으로 推定된다고 한다. [一切經音義]에는 <慧超往五天竺國傳 三卷>이라는 題目과 거기에 들어있는 낱말 고유명사등의 낱말풀이가 들어있을 뿐이다.
< 往五天竺國傳 > 원본.
[天竺]이라는 말은 [大唐西域記] 卷二의 첫머리에서 玄奬法師는, 그 語源에 대하여서는 異說이 많다고 前提하고 天竺을 그전에는 " 身毒 " 혹은 " 賢 豆 " 라고 하였지만 지금의 正音대로 발음한다면 <印度>라고 한다고 하였다. 본래 梵語에서 " 신두(sindhu 身毒)는 큰 강(江) 혹은 바다(海)를 뜻하며 실제로는 현재의 인더스江과 그 유역을 " 신두 " 라고 불렀고지금도 印度에서 이 지방을 " 신두 " 라고 부르고 있다. 신두를 페르샤 사람들은 힌두(Hindu 賢豆)로 발음하였고 페르샤를 거쳐서 인도에 왔던 그 옛날의 그리스 사람들은 <신두>나 <힌두>를 " 인더스(lndus 印度) " 로 발음하고 인더스라는 말에서 현대 英語의 " 인디아 lndia "가 파생되었다.(Dr . B. L. Atr-eya : What is Hinduism 세계 힌두종교대회에서의 발표논문 1965, 뉴델리) 이상과 같은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신두>라는 범어가 中國漢字로 身毒 . 賢豆 . 天竺 . 印度 등으로 音譯되었음을 알 수 있다.
[五天竺]이라 함은 往五天竺國傳의 내용을 여러모로 미루어 보면 東天竺은 현재의 비하르지방과 구시나가르를 포함한 우따르지방의 北半部, 中天竺은 스라와스띠(舍衛城)을 포함한 우따르지방의 남반부와 마드햐지방의 北端, 南天竺은 안드르하르지방, 西天竺은 라자스탄지방의 북부와 빤쟙지방의 남부, 그리고 北天竺은 히마챨지방과 빤쟙의 북부를 가리킨다고 보면 대략 틀림이 없을 것 같다.
慧超가 海路로 가서 인도에 상륙한 곳이 현존하는 기록에는 직접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러나 현존하는 기록의 여행순서로 보면 먼저 裸形國과 平原지대를 거쳐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곳인 구시나가르에 도착하였는데, 구시나가르는 인도의 남쪽 바다인 인도양, 서쪽 바다인 아라비아해, 동쪽 바다인 벵갈만 등 그 어느 바다에서도 가장 먼 곳이며 우따르지방에서도 현재 네팔과의 국경지대에 가까운 북쪽 끝이다. 慧超가 海路로 중국쪽에서 인도에 갔다면 벵갈만 쪽으로 상륙했음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약 벵갈만 쪽에서 인도 에 들어서서 마하보드히寺 . 라자그리하 . 베나레스 . 나란다 . 스라와스띠 . 빠뜨나 . 구시나가르 등 佛蹟地를 순례하자면 지리적 조건 때문에 현재에도 불편하지만 부득이 그런 순서가 되듯이 먼저 마하보드히寺 . 라자그리하 . 나란다를 한몫에 보고난 다음, 서쪽으로 훨씬 떨어져 있는 베나레스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동북쪽으로 와서 빠뜨나를 보고 거기서부터 서북쪽으로 훨씬 떨어져 있는 스리와 스띠로 갔다가 다시 북상하여 구시나가르와 룸비니바나 까빌라바스뚜 까지 가면 거기서 일단 佛蹟巡禮는 끝나고 거기서부터 中部 印度로 오자면 부득이 대략 같은 길로 빠뜨나를 거쳐서 베나레스까지 다시 돌아와서 중부인도로 南下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마하보드히寺 . 라자그리하 . 나란다를 한몫에 보고 나면 곧장 북상하면서 빠뜨나 . 스라와스띠 . 구시나가르 . 룸비니바나 . 까빌라바스뚜까지 갔다가 돌아서서 같은 길로 일단 빠뜨나까지 왔다가 거기서 서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베나레스를 들린다음 中部印 度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慧超의 현존하는 기행문에서는 東天竺이야기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라자그리하 . 나란다 . 빠뜨나 . 스라와스띠 등 유명한 佛蹟地 로서 慧超가 반드시 가 보았으리라고 생각되는 곳들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없고 東天竺여행의 제일 마지막 목적지로 추정되는 베나레 스와 마하보드히寺 이야기만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혜초는 벵갈만쪽, 지금의 東파키스탄의 간지스강 하류지역으로 인도에 들어 서서 西北쪽으로 북상하면서 라자그리하 . 나란다 . 빠뜨나를 한몫에 보고 계속 북상하면서 스라와스띠 . 구시나가르 . 룸비니 바나 . 까빌라바스뚜 까지 갔다가 다시 동남으로 내려와서 베나레스에 들려서 거기서 마하보드히寺에 갔다가 다시 베나레스로 돌아 와서부터는 기행문의 내용 그대로 지금의 알라하바드(中天竺王住城)를 지나서 남하하여 3개월만에 안드하르지방(南天竺王住城)에 이르르고 다시 서북으로 북상하여 라자스탄 북부 지방(西天竺王住城)에 2개월만에 이르고 다시 북상하여 3개월만에 히먀찰지방(北 天竺王住城)에 이르렀다. 그 다음 북상하여 카슈밀에 가서 거기서부터 대략 지금의 西파키스탄 . 이란 . 아프카니스탄으로 갔다가 동북으로 돌아서서 티베트 . 몽고 지방을 지나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구시나가르는 현재에도 거의 황무지이며 臨終하는 누운 佛像이 있는데 혜초는 이 臥佛像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大唐西域記]에도 臥佛像이야기가 나온다. 다음 베나레스의 드하르마챠끄라寺(初轉法輪寺라는 뜻)에서 " 위에 獅子像이 있고 그 幢이 매우 아름답고 굵기가 다섯 아람드리나 되고 그 文里가 가늘다.(上有獅子彼幢極麗五人合抱文里細) " 라고 있는 것은 아쇼카王이 세운 獅子像이 그 꼭대기에 있는 石柱인듯 하다.
이 獅子像은 지금 印度의 國章이며 베나레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石柱 밑통은 아직 본 자리에 남아있다. 다음 佛敎 아닌 다른 敎徒들이, 옷을 입지 않고 몸에 재를 바르고 다닌다고 하는데(外道不着衣服身上塗灰) 현재에도 베나레스市 아씨街의 간지스강가의 보리수 나무 밑 에서 아주 홀랑 벗은 道人이 살고 있는 것을 필자도 보았다. 역시 몸에는 재를 바른다. 인도에 있는 裸形外道는 古今을 통하여 자이니즘(耆那敎)의 空衣派로 인정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들이 " 事於大大 " 라고 [往五天竺國傳]에 쓰여있음은 " 事於大人 " 의 誤寫일 것이다.
" 大人 " 은 두말할 것도 없이 쟈이니즘의 敎祖 마하아비이라(大雄)의 意譯이다. 그리고 마가 다국 뿐만 아니라 五天竺에 大乘佛敎와 小乘佛敎가 모두 행해지고 王들은 모두 불교를 신봉 하며 감옥도 없고 죄인을 때리는 법도 없고 다만 벌금만을 받고 사냥하지 않으며 도둑은 있으 나 물건만을 빼았을 뿐 사람을 상해하지 않고 항상 더워서 녹음이 우거지고 눈서리가 오지 않고 土器 냄비에 맵쌀밥을 지어 먹으며 간장없이 소금만 사용하며 세금없고 곡식으로 왕에게 바치며 가난한 사람이 많고 부자는 적고 부자는 아래옷 윗옷을 다 입고 가난한 사람은 아래옷 한 조각만 입으며 소젖을 짜 먹는다고 했는데 이런 이야기는 인도 현재의 생활풍습에 견주어 보아도 모두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들이다. 한말로하여 菜食主義 . 無抵抗主義 . 不殺生主義가 지배적 思想인 社會的 風土를 의미할 뿐이다.
왕이 마치 우리나라 원님 모양으로 백성들의 여러 가지 소송 싸움을 가만히 앉아서 들으면서 그들이 아무리 서로 떠들어도 성내지 않고 차근 차근 말로 타일러서 시비를 가려주면 백성들은 다시 두말하지 않고 왕의 말에 따른다고 하였는데 이는 인도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論理的이고 말을 좋아하는 성질을 그냥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印度 論理學은 사실상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왕이나 수령들 부자들은 이층 삼층집을 짓고 지붕은 평탄하게 하고 기타 백성들은 모두 우리나라 초가집 지붕처럼 비가 잘 흘러내리도록 풀로 덮고 잇음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코끼리 . 말 . 소가 많고, 금 . 은은 별로 나지 않고 소젖만 마시며 사람들이 착해서 도살할 줄 모르며 고기를 팔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뉴델리에서 쇠고기 통조림을 사려면 여간 찾아 다니지 않고서는 사기 힘들다.
까빌라바스뚜의 부처님 나신 곳에서 無憂樹를 보았다고 했는데(無憂樹見在) 무우수는 인도에서 옛날부터 梵語로 아쇼까(Aso ka)라고 불러 왔는데 아쇼까王(阿育王)을 無憂王이라고도 하듯이 아쇼까 나무를 無憂樹라고 漢字로 意譯하였다. 아쇼까의 [아]는 無를 뜻하고 [쇼까]는 슬픔 혹은 근심을 뜻한다.
나가르쥬나(龍樹)의 이야기가 나오는 南天竺이야기는 여러가지로 미루어 보아 지금의 안드하르지방의 이야기 이고, 콩이 나고 벼가 잘 자라지 않으며 銀이 나며 大食國의 침공을 자주 받는다는 西天竺이야기는 라자스탄지방의 이야기이고 카슈밀에게 종종 피습을 당하며 [依山作城而住]한다는 北天竺이야기는 빤잡 북부와 히마챨 지방의 이야기이다. 五天竺을 다 돌아다니면서 술취하여 서로 때리며 싸우는 사람을 못보았다(遍歷五天竺不見有醉人相打之者)고 한다.
혜초는 五天竺과 그 주변 나라들을 여행하고 다시 唐으로 돌아 올때까지 여러 곳에서 견문한 정치 . 종교 . 풍속 등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기록을 [往五天竺國傳]에 남겼고 그 史料로서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 펠리오 " 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1908년에 새로 발견된 이 遊行記는 法顯의 [佛國記]와 같은 文學的 價値도 없고 玄裝의 [大唐西域記]와 같은 精密한 敍述도 없다. ... 그의 文章은 平版스럽고 그의 敍述은 絶望적으로 簡單하고 單調롭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그 때 當時의 時代적 記錄이라는 證據일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8세기 전의 印度帝國에서의 佛敎의 狀況을 전해주고 있다. ..... 西北印度 . 아프카니스탄 . 露領투르키스탄 및 中國領투르키스탄에 관해서는 그 이외의 記錄에서 볼 수 없는 知識을 많이 提供해 준다. ]
- 以上의 글은 元義範교수님의 저서 印度哲學思想(1977年版) 의 글입니다 -
727년 혜초가 기록한 세계 3대 여행기 중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이래 1283년 만에 한국에 최초로 공개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혜초의 여정을 따라 펼쳐진 실크로드 주변 지역 사람들의 삶과 문화, 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704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혜초는 약관의 나이에 바다를 통하여 인도에 도착하였다. 불교의 8대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 혜초가 인도를 향한 목적이었다. 성지순례를 마친 혜초는 서쪽으로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갔다.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 혜초는 파미르 공원을 넘어 727년 11월 상순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는 쿠차에 도착하였다. 인도를 향해 중국을 출발한지 수 년이 지난 후였다. 인도 와 중앙아시아의 40여 곳에 대해 그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혜초는 한 권의 책 "왕오천축국전" 에 남겼다.
1900년 수 백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 의 문이 열렸다. 돈황 천불동에 머물던 왕원록은 우연히 3m가 넘는 높이까지 수많은 두루마리가 쌓여 있는 작은 석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현재 " 17호 굴 ' 또는 " 장경동 " 이라고 부르는 이 석굴 안에는 11세기 이전의 각종 자료들이 가득 차 있었다. " 돈황문서 " 의 발견이었다.
현재 돈황문서는 중국을 비롯한 영국 . 인도 . 프랑스 일본 . 러시아 . 미국 . 한국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 문서의 수량은 확인된 것만 4만 점이 넘으며, 가장 이른 것은 4세기, 가장 늦은 것이 11세기에 해당 한다. 문서의 80% 이상은 한문 문서이며, 90%는 <막고굴 제 17동굴 복제동굴(모형)> 불교관련 문헌이다. 그 외에도 호탄어 . 산스크리트어 . 소그드어 . 티베트어 . 위구르어로 된 자료가 포함되어 있으며, 유교와 도교, 마니교, 경교 및 관청문헌 등이 전한다. 돈황문서는 돈황의 역사뿐 아니라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한 많은 돈황문서들이 이 막고굴 제 17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지면에서 동굴 꼭대기까지 높이는 3m이고 정면 벽에는 사각형의 낮은 단이 붙어 있다. 단 위에는 실제 사람과 같은 크기의 像이 조소되어 있다. 가사를 입고 장엄한 표정을 한 지혜로운 승려의 형상을 하고 있다. 절에서는 오랫동안 대량의 불경과 불화 . 법기 . 기타 종교문서와 사회문서 등을 가지고 있었다. 11세기 그것들을 이 동굴에 몰래 숨겨 두고, 담을 샇아 굴 입구를 막고 벽면에 벽화를 장식했다. 속칭 " 장경동 ' 이라 한다.
- 호미숙님 블로그의 글 " 실크로드와 둔황 "에서 사진과 글을 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往五天竺國傳> ※ 1908년 펠리오가 처음 두루마리 상태의 " 왕오천축국전 " 을 발견하였을 당시 이 책은 앞 뒤가 떨어져 나가 책의 명칭이나 지은이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펠리오는 예전에 읽었던 혜림의 " 일체경음의 " 에 인용되었던 왕오천축국전의 단어를 기억하고, 이 문서가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막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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