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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림리 본래의 지명을 되찾아야 한다.

작성자사무국장|작성시간12.12.05|조회수281 목록 댓글 0

본래의 지명을 되찾아 민족정기를 바로잡자.

수치스런 이름의 역사를 가진 군남면 왕림리(旺林里)

연천군 군남면 왕림리(旺林里)의 본래 이름은 왕림리(王臨里)이다. 현재의 왕림리(旺林里)라는 지명으로 변경된 시기는 일제시대인 1914년 조선 총독부에서 실시한 행정구역 통, 폐합 때 붙여진 이름으로 수치스럽게도 임금왕(王)자의 앞에 일본(日本)을 상징하는 날일(日)자가 들어 있다. 즉 “일왕(日王)”을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 이는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국가의 자존심을 짓밟은 일제시대의 잔재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비단 이곳 왕림리만은 아니다.

 

비슷한 예로 경기도 의왕시가 있다. 경기도 의왕시(儀旺市)가 현재의 이름인 의왕시(義王市)로 한자 명칭을 되찾은 것은 옛 문헌과 금석문을 토대로 전 시민이 한마음이 되어 2004년 실시한 주민의견 조사에서 전세대의 83.4%가 한자 명칭을 당시의 의왕시(儀旺市)에서 현재의 한자 명칭인 의왕시(義王市)로 변경할 것에 대하여 찬성함으로서 시의회와 도의회의 의결을 거쳐 2005년 11월 관련 법률안을 입법예고 하였으며 2006년 2월 국회에 제출한 법률안이 2006. 12. 22일 통과됐고 2007년 1월 19일 법률이 공포(경기도 의왕시 한자 명칭 변경에 관한 법률 시행:2007. 2. 20)되어 고유지명인 “義王”을 되찾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의왕시가 명칭을 변경한 것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의왕시민이 한마음으로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의왕시 역시 일제시대인 1914년 행정구역 통. 폐합 시 수원군 의왕면(儀旺面)으로 개정이 되면서 거동의(儀)자와 왕성할왕(旺)자를 붙임으로서 마치 일왕이 거동한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우리 땅의 풍수적 기운을 말살하려는 시도는 서울의 인왕산과 포천의 왕방산(王方山)에도 있었다.

 

서울의 인왕산(仁王山)을 인왕산(仁旺山)으로 날조하듯 왕방산(王方山)도 일본을 상징하는 일(日)자를 덧붙여 왕방산(旺方山)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포천시 지명위원회에서는 이러한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지난 2009년 8월 19일 왕방산(旺方山)을 지금의 이름인 왕방산(王方山)으로 확정 고시하였다.

 

왕림리(王臨里)가 치욕스러운 왕림리(旺林里)로 변하게 된 배경

군남면 왕림리라는 지명을 가지게 된 것은 조선의 3대 임금 태종 이방원과 고려 진사 금은 이양소에 의해서이다. 원래의 왕림리(王臨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이 어릴 적 동문수학하던 옛 친구인 금은 이양소를 만나기 위해 연천을 찾게 된다. 금은 이양소는 고려 말의 문신이며 1382년(고려 우왕 3년)평소 친교가 두터웠던 동갑내기 이방원과 함께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태학에도 같이 들어갔다. 결국 이방원과는 동기동창이고 직장동료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이양소는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자 신하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곧은 절개와 신념으로 벼슬을 버리고 연천의 도당골이라는 곳으로 숨어들어 일체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은둔하며 살았다. ‘청구야담’에 의하면 이런 이양소를 태종은 ‘물색(物色)’으로 찾았다 한다. 물색이란 입은 옷이나 생긴 모양으로 더듬더듬 찾아간다는 뜻이다. 요즘말로 하자면 인상착의와 옷 색깔 또는 몽타주로 찾은 셈이 된다.

 

이렇게 어렵게 찾은 옛 친구를 그는 먼 길도 마다않고 서두르다 결국 개천에서 수레가 빠지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차탄천(車灘川)이라 불리는 연천읍 주위에 있는 냇가 이름의 유래가 된 것이다. 차탄천이라는 것은 수레가 빠진 개울이라는 뜻이며 수레울 또는 수레여울이라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론 이와 인접한 동리 이름도 차탄리(車灘里)가 된다.

 

군남면 왕림리(王臨里)라는 마을의 이름도 이때에 붙여지게 된다. 태종이 이양소를 만나기 위해 이양소가 머물고 있던 도당골을 가던 중 이양소가 장진천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타고 오던 어가(御駕)를 다시 돌려 왕림리에 쉬면서 이양소를 기다렸는데, 당시 태종이 친히 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느티나무를 심고 정자터라 명명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왕림리(王臨里:왕이 임하신 동리)라 지었던 것이다.

 

또한 현재 전곡읍 은대리에 있는 어수물(御水井)은 태종 이방원이 이양소(李陽昭)를 만나기 위해 연천으로 친행(親行)하던 중 이곳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마셨다 하여 이 우물을 '어수물'로 명명했다 한다. 이렇게 연천에는 태종 이방원과 금은 이양소에 얽힌 지명이 많은 곳이다. 왕림리(王臨里)라는 좋은 지명을 1914년 조선총독부에서는 현재의 지명인 "旺林里(왕성할旺 수풀林)"라고 표기함으로서 마치 일왕(日王)을 연상하게 한 것이다. 이 수치스럽고 일제의 잔재가 살아 있는 왕림리(旺林里)를 “왕림리(王臨里)”라는 본래의 지명으로 되돌려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우리 연천군민의 자존심을 하루 빨리 되 찾아야 할 것이다.

 

연천문화원 사무국장 이 준용

 

사진은 동두천과 포천 사이에 있는 왕방산의 명칭을 바꿨다는 팻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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