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에 대한 생활보장책의 변화 조선은 양반 관료를 기축으로 운영되는 관료제 국가였고, 관료들의 경제적 처우에 관련된 규정도 세심하게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도 조선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고 운영상 문제점이 발생하면서, 그 대우 방식은 바뀌어갔다. 즉 조선을 건국한 초기에는 요즘의 봉급과 비슷한 녹봉(祿俸)과 함께 과전(科田)이라는 토지도 지급하였고 과전이 갖는 비중이 컸다. 과전은 그 토지에 부과된 토지세[田稅]를 국가 대신 과전을 지급받은 관료가 받는 것이고, 아울러 그 토지를 경작하는 백성에게 일정한 양의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과전은 현직 관료만이 아니라 전직 관료에게도 지급하였고, 다양한 명목으로 상속도 가능하였다. 때문에 시간이 흐르자 새로 임용되는 관료에게 지급할 과전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1467년(성종 12)에는 현직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職田法)으로 바뀌었고, 1470년(성종 원년)에는 관료가 직접 수세하지 않고 관에서 세금을 받아서 관료에게 지급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관료가 자신의 직전에서 수세하는 과정에서 폐단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흉년이 거듭되고 외환이 겹치면서 국가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1556년(명종 11)에는 직전법도 폐지되고 말았다. 그 이후 국가가 관료에게 지급하는 주된 생활보장책은 녹봉 밖에 없었다.
녹봉의 양과 지급 방식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 관료에게 주어지던 녹봉이 먹고 살기에 충분한 액수는 아니었다. 요즘의 공무원들처럼 조선시대 관료들도 직급의 고하에 따라 받는 액수가 달랐다. 그 액수는 조선정부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후기로 내려갈수록 줄어들었다. 영조 연간 관료들의 녹봉 액수를 보면, 대신에 해당되는 정1품 관료는 매달 미(米) 2석(石) 8두(斗)[38두]와 황두(黃豆) 1석 5두[20두]를 받았던 반면, 최하위직에 해당되는 종9품은 미 10두와 황두 5두를 받았다. 최고위직과 최하위직의 녹봉은 약 4배 정도 차이가 있었다. 이 액수에서 보듯 관료가 녹봉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규정된 액수대로 지급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흉년이 들거나 하면 재정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녹봉의 양을 줄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녹봉이 관료의 생활보장이라는 의미는 지니기 어려웠다. 한편 녹봉은 초기에는 1년에 두 번 지급하다가, 세종대에 1년에 4번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계절이 시작되는 첫달, 즉 정월, 4월, 7월, 10월 초(이를 사맹삭(四孟朔)이라고 한다)에 실직(實職)에 따라 녹봉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다시 숙종 연간부터는 매달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 이후 녹봉은 매달 25일부터 29일 사이에 지급하였는데, 한꺼번에 사람이 몰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 품계가 높은 관료부터 먼저 녹봉을 받도록 규정하였다. 즉 25일에는 정1품부터 정3품 당상까지, 26일에는 당하관 3품에서 5품, 27일에는 6품에서 7품, 28일에는 8품, 29일에는 9품에게 주는 것으로 하였다. 만약 이 기간에 녹봉을 받아가지 못한 관료는 100일 이내에 받아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녹봉은 관료 자신이 직접 한강변에 있는 광흥창에 가서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곳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나가서 받았다. 대신을 제외한 모든 관료는 실명을 직접 부르는 것이 관례였다. 물론 아주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당시 대신들은 사직한다는 표현으로 녹봉을 받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때 왕명에 의해 광흥창 관리가 직접 대신의 집까지 배달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원칙은 관료가 직접 받아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대리인이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이유는 녹봉을 받는 일이 번거롭기도 하였지만, 금적적 이익과 관계되는 일이므로 선비가 직접 나설 수 없다는 당대의 통념이 작용했던 것 같다. 더욱이 녹봉을 거부하고 관직생활을 하여 자신의 청렴함을 드러내 보이고자 했으므로, 관료가 직접 녹봉을 받는 것을 기피하는 관행이 있었다. 통상적으로는 단골리(丹骨吏)라고 불리는 이들이 대신 녹봉을 받았다. 단골리는 관료와 서로 오래 도록 깊은 신용을 쌓아 그의 행정상의 자문,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이조 등에 소속된 서리들이었다. 단골리가 녹봉을 대신 받으면 관료의 하인들이 가서 집까지 운반하였다. |
녹봉 받을 때 필요한 것 1 - 녹패(祿牌) 관료가 녹봉을 받기 위해서는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고, 이때 필요한 것이 녹패나 녹표였다. 녹패라는 것은 문관의 경우는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각각 왕명에 따라 관료에게 발급해준 증서로, 해당 관료가 받을 녹과를 적어놓은 것이다. 당시 관료들은 관직에 따라 제1과에서 18과(후기에는 13과)까지의 차등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牌’자가 들어있는 홍패(紅牌), 백패(白牌), 호패(號牌), 마패(馬牌) 등과 같은 문서들은 오늘날 ‘증명서’라는 의미에 가까우며, 곧 이들 문서를 제시함으로써 공식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녹패는 통상 매년 정월에 갱신하였고, 1년간 녹봉을 수령하는 데 이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녹패를 보면 녹패의 본문 부분과 녹봉을 받을 때 지급한 녹봉의 양을 기록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사진이 녹패이다. 사진을 보면 상단과 하단 두 군데에 기록이 있다. 상단은 녹패의 본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1607년(선조 40) 풍저창(豊儲倉) 주부(主簿)인 모씨(某氏)에게 제9과의 녹을 지급하라는 내용과 함께 이조판서와 참판, 참의, 좌랑이 수결하였다. 하단은 녹봉을 받을 때 작성된 것으로, 정월과 4월달에 각각 미 4석과 태 1석을 지급하였다는 내용과 광흥창의 감찰과 관리가 서명하고 수결하고 있다. 녹패는 녹봉을 받을 때 제시하는 문서였으므로 그 당시에도 귀중히 취급되었다. 아울러 후대에도 조상이 관직생활을 하였던 증거가 되기 때문에 소중히 보존되었다. 녹패는 교지(敎旨)와 함께 각 가문에서 소중하게 간직했던 문서였다. 그러나 문서의 수량을 보면 교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적은 수만 남아있다. 이는 녹패가 조상의 업적을 선양하거나 높은 관직을 역임했다는 증거이기는 하지만, 경제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은 것을 기피하는 사족층의 관념도 한 몫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국가 입장에서는 교지와 함께 녹패도 관작을 상징하는 표지로 인식하였다. 때문에 관료의 부정 등으로 교지를 빼앗는 경우에 녹패도 함께 빼앗는 것이 상례화되어 있었다. 그만큼 녹패의 사회적 평가와 비중은 높았다. |
녹봉 받는 날의 풍경 이렇게 지정된 날짜에 녹패 등을 지참한 이들이 녹봉을 받는 광흥창 앞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생각보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녹봉을 지급하는 날의 광경을 『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광흥창에서 녹봉을 지급하는 일이 갈수록 어수선해지고 광흥창 서리들의 농간도 갈수록 심해져서 10여 년 동안에 쌀과 콩 수천 석이 축났다. … 녹봉을 지급할 때는 대신 이하는 이름을 부르면서 지급하고, 새치기를 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규제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상사는 상사대로 사납게 굴고 그 아랫것들은 앞다투어 마구 들어와서 곡식의 좋고 나쁨과 분량의 많고 적음을 놓고 제멋대로 퇴짜를 놓거나 고르기도 한다. 심지어 쌀이나 콩을 흩뿌려 짓밟기도 하고 창고 담당 아전을 두들겨 패기까지 하여 이와 같은 북새통에 무뢰배들은 이를 기화로 섞여 들어와서는 곡식을 도둑질해 간다.
위의 묘사를 보면 녹봉을 지급하는 날 광흥창 앞은 매우 어수선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녹봉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서로 먼저 곡식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녹봉에 충당할 곡식이 모자랐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국가재정이 안정적일 때는 녹봉의 공급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흉년이 들어 녹봉을 제대로 지급할 수 없을 경우 광흥창에서는 수량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되를 시중보다 줄여 사용하였다. 반면 당시 관료들은 녹봉의 양에 매우 민감하였다. 『미암일기』를 보면, 유희춘은 녹봉 양이 줄었을 때는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규정량을 받았을 경우에는 갑자기 큰 부자가 된 것 같다든가, 전에 볼 수 없던 일이라고 하면서 온 식구가 기뻐한다고 쓰고 있다. 때문에 녹봉을 받는 관료들은 곡식이 많이 남았을 때 녹봉을 받기 위해 서로 먼저 받으려고 하다보니 북새통이 벌어졌던 것이다. 광흥창 앞이 북새통이 된 것은 녹봉을 받는 사람들이 되도록 좋은 품질의 쌀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광흥창에 들어오는 쌀들은 그때그때 질에서 차이가 났으므로, 보다 더 좋은 쌀을 차지하기 위해 사전에 정보를 알아보고 녹봉을 받으러 가기도 하였다. 이재 황윤석의 경우 평소 알고 지내던 광흥창 감찰에게 부탁해 광흥창에 갔을 때 쌀의 질을 알아보고 전갈을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광흥창 서리들이 농간을 부려 곡식을 횡령하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당시 광흥창 서리들은 위조녹패를 만들어 곡식을 횡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녹패를 부정 사용하는 경우는 광흥청 서리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미암일기』를 남긴 유희춘의 경우, 충의위 박명성의 녹패를 가지고 선조 원년부터 다음 해까지 그의 녹봉을 받아 유용하고 있다. 유희춘이 다른 사람의 녹패를 소지하고 대신 녹봉을 받아 유용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므로 병조에서 서리가 파견되어 박명성 녹패의 반납을 요구하였고, 며칠 후에는 광흥창에서도 봉사와 부봉사가 나와 재차 이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유희춘은 이를 이행치 않고 다음해 가을까지 녹봉을 받고 있었다. 이처럼 녹패를 위조하거나 부정 사용이 가능했던 것은 앞에서 서술한대로 녹봉 지급 대상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큰 액수도 아닌 녹봉에 연연하는 모습은 조선 관료들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이들이 녹봉을 중시했던 것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이문건은 녹봉을 받자마자 인근에 사는 친인척에게 나누어주고, 또 밥을 지어 서울 청파에 살던 누이댁에 보내고 있다. 이는 이문건이 녹봉에 대해 특별한 의미, 즉 관직생활로 받은 쌀은 보통 쌀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관료들은 더욱 녹봉의 양과 질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안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