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이씨 익양군 이극인 장군

작성자[유장]행암공파[영양군24세]|작성시간08.12.25|조회수297 목록 댓글 0

 

익양군 諱이극인(李克仁) 선조님:

 ?~1224년(고종11,甲申), 조선 중기의 무인

시조(始祖) 할아버지의 7세손(七世孫)으로,

1202년(신종5,壬戌)에 동경(東京=慶州)의 반간때 영주(永州=永川)에서 일어나 내침한 경주 별초군(別抄軍)이 경북 청도군 운문(雲門)지방의 도둑떼와 부인(符仁), 동화(桐華) 양사(兩寺)의 승도(僧徒)를 이끌고 일으킨 반란(反亂)을 격파하고자, 할아버지 스스로 도군수(都軍帥)가 되시어, 아우 휘 수(守)자 춘(椿)자 할아버지와 함께 정병을 지휘하여 이를 대파하셨다. 그후 상장군(上將軍)이 되시고,

광록대부(光祿大夫)의 벼슬에 오르셨다.

1217년(고종4,丁丑)에 북방에서 침입한 거란족(거丹族)을 박달재에서 김취려가, 할아버지와 장군 신덕위(申德威)로 좌측을 담당하고, 최준문(崔俊文), 주공예(周公裔)로 우측을 담당하게 하여, 적을 섬멸하는 큰 공을 세우셨고, 위주(渭州)에서는 장군 노순우(盧純祐), 신덕위(申德威), 박유 등과 함께 적과

싸우시다가 패전하셨다.

1224년(고종11,甲申) 7월에 대장군으로 상장군 최유공(崔愈恭), 장군 김계봉(金季鳳) 등과 더불어

당시의 실권자로서, 정권을 함부로 농락하며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던

권신(權臣) 최우(崔瑀)의 전횡(專橫)에 분개하시어,

이를 제거하려고 모의 하시다가 일이 발각되어 동료 장수들과 함께 최우에게 피살되셨다.

 

할아버지는 후일 복권되어 익양군(益陽君)에  (선3대조와 함께) 봉군되셨다.

 

(영천이씨 익양군파(직계)와 영양군파(직계 혹은 1대늦음)는 이 분의 직계후손으로 추정된다.)

 *익양=영양= 영천의 옛이름

 

【참고문헌】高麗史제103권-열전 제16, 고려사절요 제14권 신종 임술 5년(1202년), 고려사절요 제15권 고종 정축 4년(1217년), 고려사절요 고종 갑신 11년(1224년), 고려사절요 고종 정해 14년(1227년), 동문선 제69권 김평 장행군 기(金平章行軍記), 동사강목 제10상정사 임술년 신종 5년, 동사강목 제10하 갑신년 고종 11년, 동사강목 제10하 정해년 고종 14년, 동사강목 제10상정사 정축년 고종 4년, 익재난고 제6권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증시(贈諡) 위열공(威烈公) 김공(金公) 행군기(行軍記), 高麗史11(世家 卷第11),

 

고려사  :최이  

최이는 10년에 황라성(隍羅城)을 수축하면서 자기 집의 가병을 동원해서 역군으로 삼고 은병 3백 개와 쌀 2천여 석을 내어서 그 비용을 지출하였으며 또 황금 2백 근을 내서 13층 탑(塔)과 화병(花甁)을 만들어서 흥왕사에 두었다.
 상장군 최유공(崔愈恭)이 일찍이 추밀 부사 오수기(吳壽祺), 장군 김계봉(金季鳳), 낭장 고수겸(高壽謙) 등과 함께 중방(重房)에 속한 제 장군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고 문간들을 모조리 살해하여 개인의 원한을 풀어 볼 것을 모의했는데 일이 발로되어 오수기를 백령진장(白翎鎭將)으로 강직시켰다가 이어 사람을 파견해서 죽였다. 최유공은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김계봉은 명주 부사(溟州副使)로 보내고 고수겸은  섬으로 유배 보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최유공이 김계봉과 대장군 이극인(李克仁)과 함께 최이를 살해하려고 도모하였는데 최이가 그것을 알고 최유공, 이극인,김계봉, 산원(散員) 박희도(朴希道), 이공윤(李公允) 등을 죽이고 그의 일당 50여 명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또 그 일당을 국문한 결과 추밀 부사 김중구(金仲龜), 상장군 함연수(咸延壽), 이무공(李茂功), 대장군 박문비(朴文備)도 연루되었으므로 모두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12년에 백관이 최이의 집으로 가서 정부(政簿)를 올리니 최이는 대청에 앉아서 그것을 받았으며 6품관 이하는 재배하고 당(堂) 아래 엎드려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최이는 이때부터 정방(政房)을 자기 집에 두고 문사(文士)를 선발해서 소속시켰는데 그들을 ‘필도적’이라 불렀다. 백관의 전주(銓注)를 하고 비목(批目)을 써서 바치면 왕은 단지 그것을 내려 보낼 뿐이었다.


 

고려사 :김중구 [金中龜]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무신. 1217년(고종 4) 2월에 거란군 3만명이 쳐들어와서 방책을 불사르자,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도공역(陶公驛 : 지금의 경기도 양주)에서 힘겹게 싸우다가 패하였다.

1222년 병부상서·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서 최우(崔瑀)의 정용군(精勇軍)·보승군(保勝軍) 징발을 저지하여 민폐를 줄이는 데에 힘썼으며, 1223년 추밀원부사 상서좌복야(樞密院副使尙書左僕射)가 되었다.

이듬해 7월에는 최우를 몰아내기 위한 이극인(李克仁)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이내 소환되어 서경유수로 임명되었다. 공변되고 충직한 인물로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업적이 높았다. 1228년 지추밀원사가 되었고, 1232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왕경유수병마사가 되어 수도를 지키는 일을 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참고문헌≫ 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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