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氏族의 연원 |
| 성주이씨(星州李氏)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문성왕조(文聖王朝, 839 -857)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신라명신(新羅名臣) 이순유(李純由)로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의 32대손(代孫)이다. 일설(一說)에 따르면 공께서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이 고려(高麗)에 항복함에 망국의 한을 남기게 되자 고려조(高麗朝)에 나아가 벼슬하지 않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치고 지금의 성주읍(星州邑)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살았으나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인물됨을 아깝게 여겨 "나의 신하는 아니나 나의 백성임에는 틀림없다"하며 호장(戶長)을 삼으니 후손(後孫)들이 대대로 호족을 이루고 살았다. 호장(戶長)이란 향직(鄕職)의 우두머리로 지방의 성주(城主)나 호족(豪族)을 포섭하기 위해 설치한, 말하자면 지방통치의 수장(首長)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곳에서 대대로 호족(豪族)을 이루며 고려조에 호장(戶長)을 맡아왔다. 고종 때의 인물 이장경(李長庚)이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중시조가 될 만큼 뛰어난 분이었다. 아버지 이득희(李得禧)가 태몽에 문창성(文昌星)이 경산(京山)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름을 장경(長庚)이라 지었다. 호장(戶長)으로도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 좌시중 흥안부원군 도첨의 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 경산부원군(三重大匡 左侍中 興安府院君 都僉議 政丞 知典理司事 上護軍 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元)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적을 세웠으므로 원(元)의 황제(皇帝)가 선칙(宣勅)으로 그의 조부를 농서군공(隴西郡公)으로 추봉하였다. 이장경(李長庚)을 중시조로 삼게 된 연유는 이러했다. 따라서 중흥시조 이장경(中興始祖 李長庚)이 농서군공(隴西郡公)이 되었기에 혹은 농서이씨(隴西李氏)라고도 하였는데 그 뒤 가세(家勢)가 크게 일어나 충렬왕 이후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星州 李氏)라고 하게 되었다. |
| 본관지 연혁 |
| 성주(星州)는 본래 신라의 본피현(本彼縣)인데, 경덕왕이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주군(星州郡)에 붙였고 고려 태조가 경산부(京山府)로 고쳤으며 경종 때는 강등되어 광평군(廣平郡)으로 되었다. 충렬왕 때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목(牧)을 만들었고 충선왕 때 강등시켜 경산부(京山府)라 하였는데 조선에서도 인습하였다. 태종 때 목(牧)으로 고쳤고, 이후 여러 번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군(郡)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주요 성씨로는 이(李) · 김(金) · 도(都) · 여(呂) · 배(裵) · 시(施) · 초(楚) · 현(玄) · 석(石)씨 등이 있었다. |
| 파명록 |
| 종파(宗派) : 밀직공파(密直公派)·참지공파(參知公派)·시중공파(侍中公派)·유수공파(留守公派)·문렬공파(文烈公派)· 지파(支派) : 초은공파(樵隱公派)·광평군파(廣平君派)·판서공파(判書公派)·도은공파(陶隱公派)·경무공파(景武公派)·평간공파(平簡公派)·문경공파(文景公派)·총제공파(摠制公派)·판윤공파(判尹公派)·동지공파(同知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간성공파(杆城公派)·고은공파(孤隱公派)·장절공파(章節公派)·도정공파(都正公派)·문과공파(文科公派)·봉례공파(奉禮公派)·첨추공파(僉樞公派) |
| 주요 세거지 |
| 2세손 이백년(李百年)의 자손들인 밀직공파(密直公派)는 대체로 관향(貫鄕)인 성주(星州) 일원에 살다가 9세손 이세영(李世榮)의 후계가 전남 곡성(谷城)의 옥과(玉果)로 옮겨갔던 것 같고, 역시 9세손 이석견(李碩堅)의 후계가 성주(星州)에서 경북 영천(永川)의 와촌(瓦村)으로 이거했던 것을 비롯하여 고령 · 금릉 · 칠곡(高靈 · 金陵 · 漆谷) 등지에 흩어져 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지공파(參知公派)는 6세손 이종실(李從實)이 정평부사(定平府使)로 좌천되었던 사실과 8세손 이기(李琦)가 정평(定平)으로 유배되었던 사실이 ‘을묘보(乙卯譜)’에 보이고 이 무렵부터 정평 · 함흥(定平 · 咸興) 등지가 세천지(世阡地)로 지켜졌던 점으로 미루어 이곳에 세거하였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10세손 이천충(李天忠)은 경남 거제(巨濟)로 들어가 아주(鵝洲)에 살게 됨으로써 그 후계(後系)가 이 지역에 정착했던 것 같다. 한편 시중공파(侍中公派)는 5세손 이사분(李思芬) 이래로 충주 · 중원(忠州 · 中原) 등 충북 일원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이며, 6세손 이지활(李智活)이 단종 3년에 벼슬을 버리고 경남 거창(居昌)에 퇴거하여, 자손들이 거창 · 함양(居昌 · 咸陽) 등지에 나뉘어 거주하게 된 것으로 믿어진다. 또한 문렬공 이조년(文烈公 李兆年)의 후계(後系)에서 5세손 이용(李容)이 태조조에 정도전(鄭道傳)의 미움을 사 평북 영변(寧邊)의 오리(梧里)로 유배되었던 것 같고 아들인 이익번(李益蕃)의 대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6세손 이사형(李師衡)의 자손들이 강원도 고성(高城)에 속해 있는 간성(杆城)에 자리잡았던 것 같고, 7세손의 대에 와서 이순년(李舜年)의 자손들이 밀양(密陽)에, 이맹창(李孟昌)의 자손들이 평남 성천군(成川郡)에 각각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세손 이숙순(李叔淳), 8세손 이흥로(李興老) 이래로 그 후손들이 경남 산청 · 남해(山淸 · 南海)와 충북 옥천(沃川)에서 세거해온 것 같다. 이들 지역에 여러 대에 걸쳐 성주이씨(星州李氏)의 묘롱(墓壟)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30년에 이르러, 자손이 번창하여 세거의 범위도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으며, 특히 충북 옥천군 동이면(沃川郡 東二面), 전북 정읍군(井邑郡) 일원, 전남 곡성군(谷城郡), 목사동면 · 보성군(木寺洞面 · 寶城郡) 일원, 경북 성주군(星州郡) 일원, 칠곡군 · 금릉군 · 상주군(漆谷郡 · 金陵郡 · 尙州郡) 일원, 경남 산청군 · 남해군(山淸郡 · 南海郡) 일원, 함양군 병곡면(咸陽郡 甁谷面), 평남 성천군(成川郡) 일원, 함남 정평군 정평면(定平郡 定平面) 등지에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에는 경북 성주 · 금릉 · 고령 · 달성(星州 · 金陵 · 高靈 · 達城) 등지, 경남 거창 · 합천 · 거제 · 함양(居昌 · 陜川 · 巨濟 · 咸陽) 등지, 전북 전주 · 익산 · 옥구(全州 · 益山 · 沃溝) 등지, 충남 부여 · 논산 · 당진 · 보녕(扶餘 · 論山 · 唐津 · 保寧) 등지, 경기도 안성 · 광주 · 용인(安城 · 廣州 · 龍仁) 등지, 강원도 명주 · 강릉 · 홍천(溟州 · 江陵 · 洪川)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 씨족史 | |||
| ‘을묘보(乙卯譜)’ 서문에는 “성주 이씨(星州 李氏)가 삼한(三韓)의 큰 성씨로 우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겨 왔다.”는 등의 종세(宗勢)를 자랑하는 귀절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문형(文衡)이 8명, 봉작(封爵)을 받은 이가 11명, 상신(相臣)이 15명, 또 식읍(食邑)을 받은 분은 5명, 부마(駙馬)는 2명, 8세 안에 문과급제자는 75명, 생원과 진사, 그리고 음보(蔭補)로 출사(出仕)한 분은 손으로 꼽을 수 없다는 점 등을 들 수가 있다. 뿐만아니라 원사(院祠)만 하더라도 24우(宇)나 된다고 하면서 성산군지(星山郡誌)에는 “성주(星州)에 오이(五李)가 있는데 성주이씨(星州李氏)가 가장 현창(顯昌)하다고 했다.”는 내용도 소개하였다. 성주이씨세진록(星州李氏世眞錄)에는 또 이런 말도 있다. “우리 성주 이씨(星州 李氏)는 멀리 신라말의 명신(名臣)인 시조공으로부터 1천여년에 걸쳐 훌륭하고 빛나는 조상들의 공덕으로 면면히 이어왔고 오늘의 번성(繁盛)을 가져 왔다.” 으례 종문(宗門)을 이야기할 때면, 자손의 처지에서 조금은 과장스럽게 표현한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선대에 대한 후손된 당연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과거 성주이씨(星州李氏)의 관환(官宦)이나 열력(閱歷), 또 오늘의 씨족세를 감안할 때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관력(官歷)부터 살펴 보자 . 중시조로 추앙받는 이장경(李長庚)은 이득희(李得禧)의 아들이다. 고려 고종 때 태어나 학문에 정통하였고,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元나라에 들어가 벼슬이 높았고 큰 공을 세워 농서군공(隴西郡公)이라 선칙(宣勅)되었다. 이백년(李百年)은 호를 묵옹(묵翁)이라 했는데, 이장경(李長庚)의 큰 아들이다. 충렬왕 11년 문과에 올라,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으며 안유(安裕) 등과 더불어 유교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정절(貞節)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천년(李千年)은 요재(樂齋)라 호하였다. 농서군공(隴西郡公)의 둘째 아들로 충렬왕 11년 형과 함께 문과에 급제, 봉선대부 전객부령(奉善大夫 典客副令)이 되었을 때 둘째 아들 이승경(李承慶)이 元신분이 되었기에 선칙(宣勅)으로 영북등처행중서성참지정사 농서군공(嶺北等處行中書省參知政事 隴西郡公)에 봉해졌다. 고려 조정에서는 정승(政丞)에 추봉하고 원효(元孝)라 시호(諡號)하였다. 유명한 이여송(李如松) 장군은 그의 7세손이다. 이만년(李萬年)은 호가 창고(蒼皐)이며 농서군공(隴西郡公)의 세째 아들이다. 충렬왕 11년 문과에 올라 견룡(牽龍)이라는 무관직(武官職)을 지낸 뒤 낭장(郞將) 겸 중군지후(中軍祗候)를 역임하면서 큰 도량이 인정되어 시중(侍中)에 추증되었다. 시호(諡號)는 숙헌(肅憲)이다. 이억년(李億年)은 요산재(樂山齋)라 호하였다. 농서군공(隴西郡公)의 네째 아들로, 회헌 안유(晦軒 安裕)의 문인(門人)으로 문과에 급제, 개성류수(開城留守)를 지냈다. 이조년(李兆年)은 농서군공(隴西郡公)의 다섯째 아들로, 호는 매운당(梅雲堂)이다. 회헌 안유(晦軒 安裕)의 제자로 17살의 나이로 형들과 함께 문과에 올라, 안남서기(安南書記), 진주목(晋州牧), 사록사(司錄事), 통문서전첨(通文署典籤), 강릉부사(江陵府使),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 합천치(陜川治) 등을 역임한 뒤 37세 때 비서승(秘書丞)이 되었다. 충숙왕의 부위(復位)에 공을 세워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이 되었다. 성근익찬경절(誠勤翊贊勁節)공신이 되어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고 문렬(文烈)이라 시호(諡號)되었고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로 추증과 함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이승경(李承慶)은 이천년(李千年)의 아들이다. 元나라에서 문과에 합격,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었고 어사(御史)를 지낸 뒤 요양성참지정사(遼陽省參知政事)로 올라 많은 공적을 쌓았다. 그리하여 元의 조정으로부터 아버지 이천년(李千年)과 조부 이장경(李長庚)에게 농서군공(隴西郡公)이 추봉되었다. 귀국한 뒤 공민왕조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홍건적을 물리쳤으며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忠勤勁節協謀威遠功臣)이 되었으나, 신돈(辛旽)의 간계로 죽음을 당했다. 이포(李褒)는 이조년(李兆年)의 아들로 벼슬이 벽상 삼중대광 검교문하대중 겸 판선부사(壁上 三重大匡 檢校門下待中 겸 判選部事)가 되고 광정대부(匡正大夫)로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지냈다. 또 이원구(李元具)는 이린기(李麟起)의 아들로 우탁(禹倬)과 더불어 역이학(易理學)을 공부했고, 문과에 올라 대호장군(大護將軍)에 이르고 강릉찰방(江陵察訪) 등을 지낸 뒤 추성좌명공신(推誠佐命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고려조에서 뚜렷한 인물이 된 이인복(李仁復)은 이포(李褒)의 아들이다. 초은(樵隱)이 그의 호다.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올라 예문수찬(藝文修撰) 등을 지낸 뒤 언지제교(言知製敎)가 되고 元나라에 들어가 제과(制科)에 합격, 귀국하여 기거주(起居注)가 되었다. 공민왕 8년 상서좌복사 어사대부(尙書左僕射 御史大夫),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첨의평이 삼사우사(僉議評理 三司右使)를 역임했고, ‘금용(金鏞)의 난’ 뒤에 도첨의찬성 겸 우문관대제학(都僉議贊成 겸 右文館大提學)이 되고 공신이 되었다.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고 문충(文忠)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인임(李仁任)은 그의 아우인데 호는 승엄(勝嚴)이다. 충숙왕 1년 전객사승(典客寺丞)을 거쳐 강릉존무사(江陵存撫使)가 되어 쌍성(雙城)을 정벌 항복받았다. 홍건적을 정토하여 2등공신이 되었고, 재차의 홍건적 침입 때는 왕을 배종(陪從)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공민왕 17년 좌시중(左侍中)을 거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과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를 겸하여 동녕부(東寧府)를 토벌,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우왕책봉(冊封)에 앞장섰으며 친원정책(親元政策)을 지켰다. 임견미(林堅味) 등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어 문숙(文肅)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인립(李仁立)도 그의 아우다. 공민왕 3년 문과에 올라 밀직사사 · 진현관대제학 · 서경부원수(密直司事 · 進賢館大提學 · 西京副元帥)가 되었고 고려 국운이 다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고 말았다. 이포(李褒)의 여섯째 아들은 이인민(李仁敏)으로, 공민왕 9년 문과에 올라 문하평리 겸 대제학 밀직사사, 판개성부사(門下評理 兼 大提學 密直司事, 判開城府事)에 이르렀다. 공양왕 2년 윤이(尹彝) 등의 무고사건에 관련되어 이색(李穡) 등과 청주옥(淸州獄)에 갇히기도 했으나 풀려나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추충익대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령의정 겸 경연 판리조사감 춘추관사 성산부원군(推忠翊戴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겸 經筵 判吏曹事監 春秋館事 星山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대제학 문충공 이숭인(大提學 文忠公 李崇仁)은 성산군 이원구(星山君 李元具)의 큰 아들로 호는 도은(陶隱)이다. 공민왕 11년 문과에 급제, 숙옹부승(肅雍府丞)과 태학교수(太學敎授)로 있으면서 주자학(朱子學)의 소개에 앞장섰다. 전이총랑 겸 보문각 직제학(典理摠郞 겸 寶文閣 直提學)을 지냈고 친명책(親明策)을 주장하다 귀양가기도 했다.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실록을 편수했고, 조선개국 뒤에는 초야에 묻혔는데 황거정(黃居正)에게 살해되었다. 태종 1년 복직되고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 문충(文忠)이라 시호(諡號)되었다. 문경공 이직(文景公 李稷)은 이인민(李仁敏)의 큰 아들로 호는 형재(亨齋)이다. 우왕 12년 1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 밀직사우부언 · 예문제학(密直司右副言 · 藝文提學)을 지냈다. 조선개국에 공헌, 지신사(知申事)가 되고 개국공신 2등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으며 도승지 · 중추원학토(都承旨 · 中樞院學土)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정종 1년 서북면도순문찰이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로 왜구의 침입을 막았고,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랐다. 2차 王子의 난 때는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오기도 했다. 태종 10년 천릉도감제조(遷陵都監提調)로 활약했고 뒤에 성산부원군, 우의정(星山府院君, 右議政)이 되었고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星州에 귀양가기도 했다. 세종 4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문경(文景)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제(李濟)는 이인립(李仁立)의 큰아들이다. 이성계(李成桂)의 셋째딸과 결혼, 조선 건국에 앞장서 순충좌명개국공신(純忠佐命開國功臣)이 되어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절도사지겸 서경연사(義興親軍衛節度使知兼 書經筵事)를 거쳐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에 올랐다. 제 l 차 王子의 난 때 목숨을 잃었는데 세종 3년에 신원(伸寃)되어 경무(景武)라 시호(諡號)되었고 불조묘(不祧廟)를 세웠다. 이발(李潑)은 이인립(李仁立)의 둘째 아들로 태종조에 문과, 세종1년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었다.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평간(平簡)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사후(李師厚)는 이직(李稷)의 첫째 아들로 한성부윤에 올랐으며, 이정녕(李正寧)은 이사후(李師厚)의 둘째 아들로서 세종 7년에 태종의 딸 숙혜옹주(淑惠翁主)와 결혼, 부마(駙馬)가 되어 성원위 자헌대부(星原尉 資憲大夫)에 제수되었다. 이집(李집)은 장절공 이정녕(章節公 李正寧)의 큰아들이다. 성종조에 돈녕부정, 봉상정, 황해도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이조참의(敦寧府正, 奉常正, 黃海道觀察使, 司諫院 大司諫, 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연산조에 대사헌 이조참판, 경기도관찰사, 호·공양조판서(大司憲 吏曹參判, 京畿道觀察使, 戶·工兩曹判書)가 되어 춘추관사 세자좌빈객(春秋館事 世子左賓客)을 겸했다. 연산조에 삭직(削職)되기도 했으나, 중종반정으로 재기용,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뒤에 공숙(恭肅)이라 시호(諡號)되었다. 그보다 선대 인물로 이사형(李師衡)은 이직(李稷)의 넷째 아들로 호를 감당(監塘)이라 했다.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 효도와 덕기(德器)가 컸다고 한다. 단종 손위(遜位)를 당해 벼슬을 버리고 화진포(花津浦)로 퇴거하였다. 벼슬은 숭록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崇祿大夫 吏曹判書 弘文館 大提學)에 이르렀고, 간성군(杆城君)에 봉해졌으며 충열(忠烈)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안성공 이견기(安城公 李堅基)는 이수(李穗)의 아들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 우정언, 지평(右正言, 持平) 등을 거쳐 우승지 · 호조참판 · 충청도관찰사 · 예문관제학 · 판한성부사(右承旨 · 戶曹參判 · 忠淸道觀察使 · 藝文館提學 · 判漢城府事)를 역임했고, 호조판서 · 이조판서(戶曹判書 · 吏曹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가 단종손위(遜位)에 따라 벼슬을 버렸고 세조의 여러 차례에 걸친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안성(安城)이라 시호(諡號)된 분이다. 이성량(李成樑)은 이경(李涇)의 아들이다. 요동철령위학생원(遼東鐵嶺衛學生員)을 거쳐 지휘첨사(指揮僉事)가 되었고 태보 겸 태자태보(太保 겸 太子太保)를 지낸 뒤 봉천익위 선력무신녕원백(奉天翊衛 宣力武臣寧遠伯)에 봉해졌다. 충렬공 이여송(忠烈公 李如松)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그 분이 성주이씨(星州李氏)의 후손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 역시 드물 것이다. 그는 요양성 참지정사 이승경(遼陽省 參知政事 李承慶)의 후손으로 이성량(李成樑)의 아들이다. 진사(進士)를 거쳐 상주국 광록대부(上柱國 光祿大夫)에 오르고 제독진수 요계보정 산동등처방모어왜군무총병 태자태보 중군도독 부좌도독 소보녕원백(提督鎭守 遼薊保定 山東等處防侮禦倭軍務摠兵 太子太保 中軍都督 府左都督 少保寧遠伯)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제독(提督)으로 출전, 큰 공을 세웠다. 이여매(李如梅)는 그의 넷째 아우로 황명진수요동 총병관 도독 첨사(皇明鎭守遼東 摠兵官 都督 僉事)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는 부총병(副摠兵)으로 맏형 제독공, 중형중협대장공 이여백(提督公, 仲兄中協大將公 李如栢)과 더불어 큰 공을 세웠다. 문경공 이항(文敬公 李恒)은 호가 일재(一齋)이다. 이자영(李自英)의 아들로 명종조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를 뽑을 때 수석으로 합격, 사정전(思政殿)에 들어가 왕에게 진학(進學)과 정치를 논했다. 선조조에 의빈경력 · 선공부정 · 사옹정(儀賓經歷 · 繕工副正 · 司饔正)을 거쳐 장령(掌令)이 된 뒤 다시 장악정(掌樂正)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순조 때 문경(文敬)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이충건(李忠健)은 세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직(李稷)의 현손(玄孫)이며 정자공 윤탁(正字公 允濯)의 아들이다.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학문(學問)을 닦아 중종 10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수찬(修撰)과 교리(校理)를 역임한 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이 때 남곤 심정(南袞 沈貞) 등의 미움을 사 배척을 당하였으나 뒤에 호당(湖堂)에 뽑혀 문명(文名)을 남겼다. 그의 아우 이문건(李文楗)도 중형(仲兄)인 충건(忠楗)과 함께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고 중종 14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죽게 되었을 때 형인 충건(忠楗)과 함께 조문(弔問)하고 통곡(痛哭)하였으며 중종 23 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 사간원정언 병조좌랑(承政院 左承旨겸 經筵參贊官 司諫院正言 兵曹佐郞) 등을 지냈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대윤(大尹)으로 몰려 성주(星州)에 유배(流配)되었다. 그는 성품이 순후하고 청백(淸白)하기로 유명했으며 글씨에 뛰어났고 당대의 석학 이황, 조식, 이이(碩學 李滉, 曺植, 李珥) 등과 주고받은 내용을 엮은 ‘묵휴창수(默休唱酬)’가 전해온다. 이조판서 이욱(吏曹判書 李稶)은 이의로(李義老)의 아들이다. 선조조에 문과에 올라 훈련도감사(訓練都監師)가 되고 뒤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예조좌랑 승정원부승지(禮曹佐郞 承政院副承旨)에 이어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과 춘추관 수찬관(春秋館 修撰官)이 되었고, 광해군 9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있을 때 관(官)에서 별세했다. 성주이씨족보(星州李氏族譜)를 간행하기도 했다. 이준구(李俊구)는 이언직(李彦直)의 아들로 인조 15년 문과에 올라 정언 · 지평(正言 · 持平)을 거치고 효종 때는 인조실록(仁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이른바 제1차 예송(禮訟)사건 때는 송시렬(宋時烈)과 함께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고, 예조참판 동지춘추(禮曹參判 同知春秋)로 있을 때인 현종 15년 제2차 예송(禮訟)사건 때는 예관(禮官)으로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파직(罷職)되었다. 이름난 청백리(淸白吏)였다고 한다. 공조판서 정헌공 이광적(工曹判書 靖憲公 李光迪)은 이세미(李世美)의 아들이다. 효종 7년 문과에 올라,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와 전적(典籍), 예병조좌랑(禮兵曹佐郞)을 거쳤다. 현종 5년 호조정랑(戶曹正郞)이 되었다가 뒤에 병조정랑 · 사헌부 지평(兵曹正郞 · 司憲府 持平)을 지냈다. 숙종 1년 영월군수(寧越郡守)로 장릉(莊陵)을 정성들여 모시다 파직되기도 했다. 다시 복귀해서 공조참의(工曹參議)와 형조참의 · 승정원승지(刑曹參議 · 承政院承旨)를 거쳐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다. 숙종 33년 지중추(知中樞)로 기사(耆社)에 들어갔고 뒤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정헌(靖憲)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인물 중에 효자로 알려져 정려(旌閭)된 분이 이몽뢰(李夢賚)이다 . 철종 2년 유생(儒生) 74명의 발의로 상순상서(上巡相書)를 올려 효자정각(孝子旌閣)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대사헌 학암공 이응협(大司憲 鶴庵公 李應協)은 영조조에 문과에 올라 승정원 주서 · 사헌부교수(承政院 注書 · 司憲府敎授)와 지평(持平)을 역임했다. 그 뒤 홍문관교리 경연관춘추관 겸 홍문관 응교(弘文館校理 經筵館春秋館 겸 弘文館 應敎)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와 오조윤(五曹尹)을 여러 차례 역임한 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이 되었다. 특히 그는 성주이씨세보(星州李氏世譜) 7권을 편찬하였다.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역대인물 중 학문으로 이름을 높인 이는 후산공 이도복(厚山公 李道復)이다. 최익현(崔益鉉)문하에서 공부했고, '존화록(尊華錄)' 등 여러 권의 책을 짓기도 했다. 특히 '부수오적문(復讎五賊文)'은 유명하고 융희황제의 승하를 슬퍼하여 지은 '자규사(子規辭)'는 널리 알려진 명문(名文)이라 한다.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인물은 근세에 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황산 이종린(凰山 李鍾麟)은 문필가로도 유명했지만, 항일민족언론투쟁(抗日民族言論鬪爭)에 선도적 역할을 했는데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의 간행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國民勳章 無窮花章)을 추서 받고, 국가유공자로 추서받았다. 경암 이관(敬菴 李瓘)은 천도교령 손병희(天道敎領 孫秉熙)의 명을 받아 이종일(李鍾一) 등과 3 · 1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기초한 분이며 1990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애족장(建國功勞勳章 愛族章)을 추서 받았으며, 국가유공자로 추서 받았다. 옥파 이종일(沃坡 李鍾一)은 경성신문(京城新聞)의 논설(論說)로, 황성신문(皇城新聞) 등의 논객으로 활약했고, 천도교의 지하신문(地下新聞)인 조선 독립신문(朝鮮 獨立新聞)을 창간했다. 유명한 3 . 1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도 그가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찍은 것이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建國功勞勳章 複章)이 추서되고, 국가유공자로 추서 받았다. 그 밖의 죽헌 이교재(竹軒 李敎載)는 경남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제공하고, 국내비밀결사를 통해 애국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해방 후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建國功勞勳章 單章)을 수여받고, 국가유공자로 추서 받았다. 호암 이준용(湖庵 李俊容)은 강원도 춘천(春川) 일대에서 3 . 1 독립만세 운동의 선봉에 서고,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는등 공로로 1992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建國功勞勳章 愛族章)을 추서 받고, 1993년 6월 1일 국가유공자로 추서받았다. 연소 이지한(蓮昭 李芝漢)은 경북 예천(醴泉)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공으로 1993년 8 월 15 일 건국공로훈장 애족장(建國功勞勳章 愛族章)을 수여 받고 국가유공자로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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