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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전도에 대한 정의

작성자박나무|작성시간26.06.08|조회수0 목록 댓글 0

전도에 대한 정의

그렇다면 우리는 전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전도를 어떻게 규정하는 가에 달려 있다. 전도를 성경적인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우리가 전도의 실천을 성경에 맞추는데 도움이 된다. 여러 해 동안 내게 도움을 준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전도는 복음을 가르치는 것으로서, 설득하는데 목적을 둔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이 중요한 신학용어에서 훨씬 많은 사람이 반응을 보였는지 살피는 것보다 이 짧은 정의를 통해 훨씬 더 균형 있게 가름해 볼 수 있다.

존과 내가 멤피스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던 무렵에 나는 존에게 성경을 선물했는데, 핵심 단어들에 대한 동의어들을 자세하게 제공해 주는 성경이었다. 그 성경이라면 전도에 대한 나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확장시켰을 것이다.

전도는 복음(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을 가르치는(전달하는, 선포하는 설교하는) 것으로서, 설득하는(납득시키는, 회심시키는)데 목적(소망, 소원, 목표)을 둔다.

이 정의가 당장 외적인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라. 앞으로 걸어 나가거나, 손을 들거나, 혹은 영접기도를 하는 것이 전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낼 수 있지만, 이런 행동들이 곧 전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위에 있는 정의에 담긴 네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도 빠져 있다면, 아마도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전도가 정말로 무엇인지 멤피스에 있는 교회에 알려주고 싶다. 전도가 아닌 것을 전도라고 부르는 교회들 때문에 전 세계의 교회에 많은 병폐가 있음을 경고해 주고 싶다. 나는 이렇게 당부할 것이다. “초청의 시간에 어떻게 행동할지 가르치지 마세요. 분명하게 가르쳐야 할 것은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께 돌이치기 위해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나는 설득하는데 목적을 두되, 조작 없이 설득하도록 당부할 것이다. 아무리 유혹이 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된 힘든 부분을 빼놓지 말 것을, 인간적인 반응을 성령의 감동과 혼동하지 말 것을, 그리고 결과에 대해 거짓말하지 말 것을 당부할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회심한 제자라는 증거가 없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도록 조심 하십시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기준에 따라 그런 오래된 전도 방식을 비웃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솔직하다면, 우리는 결과와 “성공”을 위해 성경적인 원칙을 희생시키려는 동일한 유혹에 직면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가 비성경적인 전도를 실천하는 형식 외에는 그다지 많이 변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흔히 복음이 가르쳐지지 않고 있고, 또한 비성경적인 단어들이 죄, 죽음, 지옥의 통렬한 의미를 희석시키거나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건강과 부에 대한 약속은 가장 취약한 이들을, 곧 가난한 이들, 사회적인 약자들, 병든 자들을 기만한다. 그리고 많은 교회가 제시하는 비용이 들지 않고 안락하며, 이득을 가져다주는 “복음”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복음은 바울이 “다른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사실은 전려 복음이 아닌 것에 의해 전복되었다(갈1:6-7). 교회들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초점이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있음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성가대의 반복적인 배경 찬양이 레이져 쇼로 대체되고, 글래서 교회 예배가 경배보다는 여흥이 방편이 된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끄셨지만, 결코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하시지는 않았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엄청나고 오늘날의 교회에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회심자들과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동원하는 소셜 미디어는 과거에 2층 좌석에 설치한 텔레비전 카메라와 흡사한 것 같다. 둘 다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정작 그들 앞에 있는 사람들을 못보게 할 수 있다. 힘이 많이 드는 영업이 소비자가 알아서 구매하는 부드러운 판매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종교의 것들은 성경적인 전도를 약화시키는 멤피스에 있는 교회에서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유혹의 결과이기 때문에, 옛 관행들을 비웃을 입장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유혹에 대한 대처법이 있는데, 오늘날 사용할 수 있는 이 대처법은 내가 대학교 1학년 때나 바울 당시에나 다르지 않다. 바로 성경적인 원칙에 따른 복음 중심적인 전도를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온전하게 복음을 가르치고 참된 회심이라는 큰 그림에 늘 유의할지 배우는 것이다.

이제 전도에 대한 나의 정의에 있는 네 부분을 주의 깊게 확장해보자. 그 네 부분은 “가르치는 것”, “복음”, “목적” 그리고 “설득”이다.

 

가르치는 것

첫째, 말 없는 전도는 없다. 결국 예수님은 말씀이시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1:1).

전도에서 말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생각에 보면 이치에 맞는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낼 능력이 없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어야 한다.

가르침은 또한 성경의 방식이기도 하다. 성경은 가르치는 책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우리를 가르친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우리의 자녀, 이웃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있는 외국인들을) 가르치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일 외에 장로들의 유일한 자격 요건은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이다.

성경 어디서나 가르침이 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중요성을 놓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무리가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셨고 따라서 몇 조각의 빵과 몇 마리의 생선으로 수천 명을 먹이셨다. 이 기적들은 우리를 놀라게 하며, 이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각 경우에는 예수님이 긍휼로 베푸신 첫 번째 행위는 가르치는 일이었다.

우리 가운데 다수는 전도를 생각할 때 설교를 생각하며, 이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분명히 바울도 전도를 위한 설교를 했다. 그러나 종종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묘사할 때, 그것이 가르치는 사역이라고 말한다(딤전2:7, 딤후1:11). 제임스 패커는 바울의 전도 사역을 개관하면서 바울의 전도 방법이 주로 가르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매주 일요일에 설교하지 않는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다. 우리 모두가 설교자일 수 없지만, 기회가 오면 누구나 복음을 가르칠 수 있다. 종종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설교 시간보다는 점심을 먹으면서 “오늘 설교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어요?”라고 물을 때 믿음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복음을 가르칠 수 있을 때, 위대한 일들이 일어난다.

복음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복음 주제에 따라 살고 있음을 분명히 하므로 우리의 영적인 삶에 유익하다. 성만찬에서 우리가 맨 먼저 해야 하는 일을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삶이 복음에 부합하는 지 점검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라. 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복음의 은혜를 내 주변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있는가? 나는 내게 잘못을 범한 이들에게 희생적인 용서를 베푸는가?

만일 당신이 어떻게 복음을 가르칠지 모른다면 복음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가 자신이 신자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한 적이 결코 없었음을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먼저 복음이 가르쳐져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여러 해 동안 내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대개 기꺼이 비그리스도인이 나와 성경공부를 하려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수련회나 컨퍼런스에서 마가복음을 살펴본 학생들 무리였다. 카페에서 만난 몇몇 사람, 혹은 점심시간에 대화를 나눈 한 사람일수도 있다. 어디서든, 누구와 만나든, 그 과정은 단순하다. 우리는 성경구절을 읽고서 그 의미에 대해 대화한다. 시일이 지나면서 하나둘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그들이 복음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런 가르침이 대규모의 부흥만큼 신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 친구와 더불어 이렇게 한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복음

우리는 수학이나 생물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복음을 가르친다. 복음을 잘 가르치는 일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전 세계적으로 복음에 대해 많은 혼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 할 수 있는 실수는 두 가지다. 우리는 복음을 너무 축소시키든지 혹은 너무 확대시킬 수 있다. 두 가지 실수 모두 복음의 아주 작은 것에 달려 있는데, 바로 복음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오해들이다. 그리고 이 의미들은 복음 메시지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서 흘러나온다.

위축된 복음

우리가 복음을 단지 ‘우리를 구해 주는 것“으로만 생각할 때 복음을 너무 작게 만든다. 복음을 일종의 화재보험 같은 것으로 보고 복음이 삶 전체에 의미하는 것들을 이해하지 않는다.

복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복음의 주제들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 이해된다. 그 주제들은 사랑, 화해, 용서, 믿음, 겸손, 회개 등이다.

복음은 구원의 문이면서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티머시 켈러는 복음 중심적으로 사는 것에 대해 놀랍게 잘 설명했다.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복음 중심적인 삶에 대해서는 4장에서 더 상세히 다룰 것이다.

부풀려진 복음

우리가 복음이 모든 것이라고 할 때 복음을 너무 크게 만든다. 우리가 믿음 그리고 복음에 내포되어 있는 다양한 것들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 이렇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기독교에서 많은 사람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믿음과 선행을 통해서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아마도 대부분은 믿음과 율법 때문이라고 믿는다.

역사 전체에 걸쳐 많은 것이 복음이 첨가되어 왔다. 언제나 같은 실수다. 사람들이 첨가하는 것은 아마도 좋은 것들, 심지어 종교적인 것들이다.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 혹은 세례와 성찬을 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는 게 그런 것들이다. 이들 모두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 특권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복음으로부터 나올지라도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복음에 덧붙여진 것은 아무리 좋거나 선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복음을 오염시킨다.

복음에 대한 적절한 정의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말할 때, 복음의 주제들과 함축된 의미들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에 대해 말할 때 복음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나눌 때, 구원으로 이끄는 메시지에 집중한다. 성경이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신약성경에서는 물론이도 구약성경에서도 언제나 구원과 관련하여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다음은 복음에 대한 좋은 작업용 정의다.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기쁜 메시지로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

이 정의는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다면 구원의 메시지는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메시지는 네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답한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왜 우리가 이토록 엉망인 상태에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잇는가? 세상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으며, 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 반응이라는 개요로 요약된다.

-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이시다. 그분은 사랑하시고,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다. 언젠가 그분이 모든 죄를 완전히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우리는 위엄과 가치를 지닌, 아름답고 놀라운 피조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항하는 고의적이며 죄악 된 반역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의 죄 없는 삶은 그분이 온전한 희생제물이 되실 수 있게 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죄악 된 사람들을 속량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믿음으로 그분에게 나아가는 모든 이의 죗값을 지불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이 주장들이 참됨을 궁극적으로 입증한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반응은 우리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을 따를 것이라는 결심으로 죄로부터, 특히 불신의 죄로부터 돌이키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이켜야 한다.

같은 이야기를 말하는 다른 방식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개요로 말하는 것이다. 복음에 대한 다른 좋은 요약들은 많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기 위해 알아야 하는 메시지를 가르치는 한, 어떤 개요를 사용하든 상관없다.

전도에서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우리가 복음의 진리와 복음의 삶에 흠뻑 잠기고, 또한 복음 연구에 전념해서 복음이 우리 밖으로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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