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가 말한 "오직성경(sola dcriptura)"의 의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루터의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표어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반가우면서도 염려가 된다. “오직 성경”의 원리를 자기 입맛대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루터가 “오직 성경”을 말했을 때, 무엇을 의미했는지 간단히(?) 적어본다.
1. 루터와 성경
루터는 수도사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추구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영적 시련(Anfechtung, tentatio)”을 해결하지 못했고, 성경을 탐구하는 가운데 “하늘 문이 열리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다. 그의 영적, 학문적 탐구에 전제가 되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근거로 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재론, 윌리암 오캄의 유명론, 인문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그가 몸 담았던 어거스틴파 수도원에서 접했던 어거스틴 등이었다.
어거스틴 신학의 배경은 신플라톤주의였다. 루터는 많은 면에서 어거스틴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반면 어거스틴의 신플라톤주의적 사고 체계를 넘어서고 있다. 어거스틴이 유전죄를 정욕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한 예이다.
그들은 모두 루터에게 온전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 루터는 성경 가운데서 비로소 참된 신앙과 신학의 해답을 얻는다. 간단히 이렇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전의 전제들의 공통된 입장은 인간론, 존재론에서 출발한다. 인간 스스로 의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그것은 “주입된 은혜(infused grace)”이고 그 은혜의 도움으로 인간은 스스로 존재론적 의와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죄는 육욕이다. 거룩함은 금욕으로 성취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존재론적 의를 판단하시는 심판자이다. 열쇠는 인간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루터는 “오직 성경”을 기초로 철학적, 존재론적 신학이 아닌 “관계론적” 신학을 발견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관계 회복이 구원이고, 그 올바른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인간의 의로움이다. 죄는 존재론적 죄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죄이다.
이 진리를 위해 루터는 모든 해석의 전통들을 넘어서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희랍어 번역(Septuagint)을 근거로 한 로마교회의 라틴어 정경(Vulgate)를 거부하고 구약의 히브리어 원전과 신약의 희랍어 원전을 근거로 성경을 번역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 말씀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선포되기 위해 자국어(독일어)로 번역되어야 했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납치되었을 때(1522), 73일 만에 희랍어에서 신약성경을 번역한다. 그리고 1534년에 구약성경을 번역하고 그 후에도 수정 작업을 계속한다.
루터에게서 “오직 성경으로”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그의 모든 신학과 개혁 작업의 동기이자 목표가 되었다. 성경 번역, 살아 있는 말씀(viva vox)로서의 설교의 강조, 성경주석을 기초로 한 설교 교육 등. 루터는 신학자로서가 아니라 설교자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오직 성경으로”를 주장하였고, 실제로 그의 “오직 성경으로”의 구호는 성경의 번역과 해석과 설교와 적용을 통해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종교개혁의 동력이 될 수 있었다.
2. 전통과 성경, 그리고 성경 이해의 변천사
“오직 성경”은 전통을 부인하는 것인가? 루터도 전통의 위치를 무시하지 않는다. 사도들의 전통이 먼저이고 성경은 필요에 의해서 나중에 쓰였음도 인정한다. 전제 없이 성경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루터는 한 편으로는 교황 교회의 전통 가운데서 성경을 해석하는 권리를 부인한다. 또 한 편으로는 열광주의자, 심령주의자(spritualist)들이 성경 해석의 전제가 되는 모든 전통을 거부하며 영적이고 내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때로 그러한 체험이 성경을 벗어나서도 하나님 말씀으로 역사한다는 주장하는 것을 반대하며 공동체적 성경해석 지침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루터는 인간적 전통도, 인간의 주관적 체험도 성경을 구속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자체가 말하게 하자!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전이해(前理解)를 가지고 성경 읽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결국엔 성경이 우리를 읽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을 근거로 “오직 성경”을 강조한 루터에 반대하며 로마 가톨릭은 로마 교회만이 성경해석의 권리를 갖는다는 교리를 더 확고하게 확인한다(트렌트 공의회). 이러한 가톨릭의 객관적 권위 주장에 대해서 개신교측은 그 권위에 필적하는 객관적 권위를 찾을 필요를 느끼게 되고, 성서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이고, 모든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는 일종의 성경주의(Biblicism)를 발전시킨다. 정통주의가 발생한 배경이다. 이들은 성경은 모든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기에 성경은 절대적 권위를 갖고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성경론을 발전시킨다. 루터가 성경의 본질적인 내용인 그리스도에 근거하여 “오직 성경”을 말한 것에 반해, 정통주의는 성경 그 자체에 권위를 부여하며 “오직 성경”을 주장한다.그들은 성경 자체에 신성을 부여하며 성경의 속성교리를 발전시킨다. 성경의 완전성, 무오류성, 명백성, 효험성 등이 그것이다.
이것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 경건주의다. 그들은 정통주의가 루터의 “오직 성경”을 교리화 시킴으로 왜곡하였다고 느끼고, “내적인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교리 체계를 거부하고, 성경을 내적인 경건 생활의 규범으로서 중시한다. 경건주의로 인해 개인적인 성경읽기와 성경연구가 부흥하게 된다. 정통주의가 “오직 성경”을 기반으로 은혜의 객관성을 강조하였다면, 경건주의는 주관적 체험 없이는 성경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이 둘의 긴장은 항상 존속하게 된다.
정통주의는 경건주의에서 개인주의, 주관적 체험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경건주의는 정통주의에서 율법주의, 교리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경건주의가 루터교 내에 일어날 즈음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성서를 계약의 역사로 읽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스도 사건을 역사의 중심으로 보는 그리스도 중심성을 회복시킨 이 운동은 후에 구속사 신학(Heilsgeschichte)의 선구자 역할을 한다.
“오직 성경”은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 커다란 도전에 직면한다. 그것은 역사-비평적 성경 해석 방법론의 등장이었다. 그들 역시 루터를 자기편으로 삼았다. 루터는 기독론을 중심으로 정경을 자유롭게 다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판이했다. 그들로 인해 전통적인 교리, 특히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가 무너지고, 성경의 통일성이 도전을 받았다. 주변 종교의 영향을 비교 연구하며 성경의 유일성과 독특성도 위협하였다.
신학자들은 그들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당시 철학을 성경읽기의 도구로 삼았다. 리츨학파는 성경에서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였고, 튀빙겐 학파는 헤겔의 변증법으로 성경 내 이념들의 발전과정을 분석하였다. 하르낙은 종교성을 내세워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와 그리스도 자신의 종교를 구분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는 고대의 상징 언어로 규정하고, 그것을 현대적 용어로 바꾸는 신학 작업도 유행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통틀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자유주의 운동에 전환점을 이룬 것이 소위 “말씀의 신학”이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이라고 규정하고, 말씀과 계시에서 출발하는 신학을 주장한 것이 말씀의 신학이다. 말씀의 신학은 성경 자체에서 출발점을 찾으려 하였다는 점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신정통주의(Neo-orthodoxy)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여전히 역사-비평적 해석을 수용한다는 측면에서 자유주의로 분류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성경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담겨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책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책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성경 이해 변천과정을 배경으로 루터의 성경 해석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3. 루터의 해석학
1) 문자적-역사적 해석
루터는 “오직 성경”의 신학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유의 성경 해석학을 발전시킨다. 먼저 그는 중세에 만연했던 알레고리 해석을 거부한다. 중세 교회는 성경 본문은 문자적, 도덕적, 영적, 신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알레고리를 사용한다. 루터는 알레고리를 완강히 거부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알레고리를 사용하면 해석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알레고리를 반대하며 루터는 성경 본문은 한 가지만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성경 자체가 말씀하는 그 본문을 문자적으로 역사적 배경 가운데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2) 그리스도 중심적-비평적 해석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조심스럽게 구분한다.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경이 참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 이것이 루터의 성경해석의 중심이고 이것을 정경 내 정경(canon within canon)이라고 부른다.
루터는 이것을 기준으로 성경을 자유롭게 비평한다. 요한복음과 갈라디아서, 로마서 등을 중시한 반면, 야고보서와 요한계시록 등을 혹평하기도 한다. 구약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책이라고 규정한다. 루터의 이러한 비평적 입장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그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말씀이고, 성경의 중심이고, 이 중심을 통해 성경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적, 전통적 전제들을 넘어서 성경 말씀을 본래적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전제는 그리스도뿐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읽지 않는다면, 다른 인간적인 관점들이 사용될 수밖에 없다. 창조의 말씀 자신이 성육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역사 한 가운데서 오셨다는 증언이 성경의 중심이고, 신약은 물론 구약의 율법, 예언의 말씀, 지혜의 말씀, 찬양들 모두도 그리스도를 통해 해석될 때만 본래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서 루터의 “말씀론”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루터에게서 말씀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태초에 창조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 참 말씀 그리스도이다. 그분을 직접 만난 사도들의 증언이 이차적인 말씀이고, 그 말씀은 다시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만난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 살아 있는 말씀으로 선포된다. 루터에게서 설교는 쓰여진 성경보다 더 중요시 된다. 말씀은 선포를 통해 현재적으로 살아 있는 말씀(viva vox)으로 역사하신다.
루터의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늘과 땅, 영과 물질, 거룩과 세속의 통일을 토대로 읽어야 한다. 문자와 영은 분리될 수 없다. 영은 문자 속에서 질식되어서는 안 되지만, 문자를 무시한 영의 강조는 하나님의 구원의 현실적인 방식을 무시하는 것이다. 성경을 떠난 직접적인 계시를 말하는 것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예컨대 방언을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의 소통이 가능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구속은 특수한 영적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루터는 (한국어로) 쓰여진 성경 말씀과 (한국말로) 선포되는 말씀, 그리고 (물과 빵과 포도주라는 일상적인 물질을 표지로 하는) 성례전을 통하지 않고 역사하는 영은 마귀의 영이라고 규정한다. 때문에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인의 삶의 유일한 근거이고 규범이다.
3) 성경의 명료성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권위 있는 교회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로마 교회의 주장에 대해 루터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고 주장한다. 우선 구체적인 성경 해석 방법으로 루터는 모호한 성경 구절은 명백한 성경구절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루터의 성경의 명료성 주장은 신학적으로 두 개의 토대를 근거로 한다.
첫째는 소위 “외적인 명료성”인데 이것은 앞서 말한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해석을 근거로 한 명료성이다. 말씀은 곧 성육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건에 집중되어 있고, 성경은 이 말씀을 증거하는 데 모호함이 없다.
둘째는 “내적인 명료성”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들은 신자들 심령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확인되는 명료함이다. 복음 선포에 “아멘”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자질이 아니다. 오직 성령만이 아멘을 창조하신다. 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성경 말씀은 스스로 명료함을 나타낸다.
4) 율법과 복음으로서의 성경
루터는 성경을 언제나 율법과 복음으로 읽을 것을 주문한다. 루터의 성경론은 곧 “율법과 복음” 신학이다. 이것은 루터 신학의 핵심이고, “오직 성경으로”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여기에서 율법은 인간이 지켜야 할 율법조항들이 아니다. 루터가 말하고자 하는 율법은 소위 영적 용법의 율법이다. 여기에서 율법은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역할을 한다. 비록 우리의 선행이 남보다 뛰어나고 사회에 도움이 되었다 할지라도, 궁극적 권위이신 “하나님 앞에(coram Deo)” 서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무책임과 교만과 이기심과 악한 본성을 숨길 수 없다. 율법의 영적 기능은 이렇게 우리를 궁극적 권위인 “하나님 앞에(coram Deo)”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변명할 수 없다. 성경 말씀 중 특별한 구절을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오용이다. 성경 말씀은 총체적으로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율법이다. 그러기에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참 모습을 비추어 준다. 그리고 그 절망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주어지는 죄사함의 말씀을 듣는다. 이 음성은 “오직 성경” 안에서만 들을 수 있다. 루터는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율법과 복음으로 만난다.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시에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오늘날 성경의 권위는 여러 측면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 성경은 교리적 싸움과 온갖 동기에 의한 분열의 근거, 교회 생활의 율법적 교본, 자기변명과 타인 정죄의 기준,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의 토대로 이용되고 있고, 무엇보다 설교자들의 자기중심적인 자의적인 성경 해석으로 대내외적으로 신뢰를 잃고 있다. 기존 전통적인 교회가 건전한 공동체적 성경해석의 바탕을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신도들이 사사로운 성경해석에 머물러 개인주의적 영성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쉽게 이단에 빠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성경이 교회들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경멸이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오직 성경”의 원리의 참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1) 성경은 전체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성서 스스로 말씀하게 해야 한다.
2) 우리가 성경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는지, 성경 말씀이 우리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깨뜨리도록 허용하는지 늘 살펴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성경의 기본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영이 되어야 한다.
3) “오직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 중심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성경은 단지 가르침, 읽기, 들음, 연구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언급되는 물질적, 영적 은혜는 사유화되고, 그리스도를 떠나서 말해지는 믿음은 율법적 요구가 된다.
4) 성경은 교리적 전통에 얽매이거나, 개인적 주관적 체험에 의해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살아 있는 공동체 가운데서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읽혀져야 한다.
5) 설교자의 메시지가 “오직 성경” 원리 회복의 출발점이다. 설교자의 선포를 통해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viva vox)”이 된다. 오늘날 강단에서 복음이 살아야 한다. 설교 메시지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6) 성경의 권위는 교회들의 “공동체 형성의 능력”, 연합의 모습 가운데서 세워져야 한다. 성경의 권위는 무엇보다 교회의 분열 가운데서 훼손되어 왔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 되게 하시는 능력이다.
7) 성경은 단순한 교회 생활 지침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역에서의 삶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날마다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능력의 말씀이다. 성경의 권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세워져야 한다.
박일영 목사/http://tanhyeon.lck.or.kr/소망자료/루터신학/?mod=document&uid=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