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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현대인은 영성을 갈망한다.

작성자박나무|작성시간26.06.18|조회수0 목록 댓글 0

 

교회와신앙

목창균 교수 / 서울신대 신학전문대학원장

영성은 성장 산업(growth industry)의 하나로 취급될 만큼,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영성 훈련 및 세미나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기독교 출판사들은 영성에 관련된 원고가 아니면,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렇듯 영성의 의미가 재발견되고, 영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게 된 것은

현대 사회, 즉 ‘대중적이며 도시 중심이요 기술 중심적인 사회에서 형성된 가치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된다.

많은 사람들이 양적이며 물질적 기준 혹은 기능에 의해 삶을 평가하는 것에 회의적인 반면, 질적이며 정신적

가치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들은 무미 건조한 삶에 대한 반작용으로 종교적 경험을 갈망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영성이란 말은 항상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육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과 대비되는 내적, 정신적 본질을 뜻하지만, 시대와 정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경건, 기도, 금욕주의, 신비주의 등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어떤 종교 정신, 혹은 어떤 인물의 사상이나 삶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신학의 한 분야, 즉 영성신학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성(spirituality)이란 말은 본래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18~19세기에

수덕신학(ascetical theology)과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으로 구분되었다.

따라서 수덕과 신비라는 두 별개의 초점을 가진 영성신학이 형성되었다.

수덕신학은 일상적인 기독교인의 영성 훈련에 대한 것이라면, 신비신학은 신비가들의 가르침을 다룬 것이다.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의 구분은 영성에 이르는 두 가지 접근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금욕주의라는 저차원의 길과 신비경험이라는 고차원의 길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이 두 학문이 통합되어 영성신학 혹은 영성이 되었다.

현대 복음주의의 가장 큰 약점 가운데 하나요, 복음주의의 밝은 미래를 위협하는 위험스런 요소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독특한 영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현대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영적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신비주의, 금욕주의, 세속주의와 같은 다른 전통으로부터 영성 추구 방법을 빌려오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영성에 대해 논하고는 있으나, 그들 자신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수도원운동과 신비주의운동을 중심으로 영성의 전통적 의미를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복음주의적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신약성서에는 세상과의 분리와 세상 속에의 참여를 교훈하는 두 다른 경향이 있다.

전자는 자기 부정, 금욕적 삶, 이 세상 보다 저 세상,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강조하며, 바울 서신이

이를 대변한다. 후자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긍정적 태도, 창조 질서 내의 하나님의 활동, 행동하는 영성을 강조하며, 이를 대변하는 것이 마태복음, 특히 산상수훈이다. 이 중에서 세상과의 분리를 강조하는 부정적 영성은

수도원운동과 신비주의운동을 통해 고대 및 중세교회에 널리 확산되었다.

기독교의 영적 훈련 가운데 하나는 덕을 닦고 악을 피하는 것, 육체의 욕망을 제압하여 정결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 훈련들을 금욕 또는 수덕이라 부른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에 방해되는 장애물을 제거하거나 그 반대되는 것과 투쟁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금욕 훈련을 중요시했으며, 교인 중에는 수덕사 또는 금욕주의자들이 많았다.

세상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하고, 육과 영, 현실과 내세를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세상을 부인하는

것이 초대 교회의 일반적 전통이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인간의 노력으로 세속적, 육적 상태와 행위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동방교회의 영성의 특징은 묵상과 침묵이다.

특히 해치키아(hesychia) 즉 침묵은 홀로 거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세상을 피하여 은거하는 것을 영성 훈련과 연관시키는 사상이다.

3세기 후반, 일부 금욕주의자들은 엄격한 금단을 통해 기독교적 완전을 이루려 했으며, 금욕과 고해의 표시로

은둔생활을 했다. 특히 그들은 세상을 완전히 피하여 마귀가 살고 있는 곳으로 여겼던 사막으로 들어가

영적 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의 훈련에는 침묵, 기도, 금식 및 복종 등이 포함되며, 훈련과정은 은둔, 정화, 변화로 이어진다.

한편, 사람들이 사막으로 그들을 찾아가 교훈을 받게 됨에 따라, 이들 사막교부들의 영성 이해가

고대 교회에 널리 수용되었다. 그들의 금욕생활 형태는 점진적으로 발전되었으며, 4세기에 출현한 수도원

제도와 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서방의 수도원 운동은 동방과 같은 형태로 발전된 것은 아니었다.

서방은 은둔적 형태 보다 공동체적 수도원이 발전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서방의 기후 조건이 홀로 은둔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동방의 수도원은 마을주민들이 사막에 들어가 금욕생활을 한데서 시작되었으나, 서방의 수도원은 감독들이나 유식한 엘리트 계층 기독교인들이 자신들과 성직자들을 위한 고상한 형태의 삶을 장려한데서 시작되었다.

수도원 운동은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참회와 기도, 성경연구,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체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데 그 큰 의의가 있다. 또한 그것은 서방교회의 신비주의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초기 기독교의 수덕적이고 신비적 경향을 신비주의를 전달하기에 적합한 생활방식과 교리 전통으로 전환시켰다.

한편, 금욕주의가 기독교 영성의 일면인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와 피조물사이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극단적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무시하는 태도로 이어지며, 율법적 금욕주의는

개인의 공로를 중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시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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