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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탈진한 목회자들을 위하여

작성자박나무|작성시간26.06.21|조회수0 목록 댓글 0

탈진한 목회자들을 위하여

목 차

서 론

제 1 장 목회 탈진 : 특수한 문제점 / 13

제 2 장 끝없는 업무의 문제 / 31

제 3 장 허공을 치는 것 같은 목회자의 일 / 39

제 4 장 끝없는 반복 / 45

제 5 장 사람들의 기대를 다루는 것 / 53

제 6 장 관계를 통한 도움 / 65

제 7 장 영혼을 만족시키기 / 77

제 8 장 자아 중심성의 문제 / 93

제 9 장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 / 111

제 10 장 엘리야의 문제 / 119

제 11 장 지쳐버린 자아의 문제 / 131

제 12 장 에너지를 회복하기 /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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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와 옮긴이 소개

지은이 존 샌포드(John A. Sanford)

미국의 융 분석가이며 (Jungian Analyst)이며 목회 상담가로서 지금 샌디에고에서 개업하고 있고 성공회 신부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을 융 심리학의 빛에서 해석한 책을 여러권 저술하였는데,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몸과 영혼의 치유 :신약성서와 정신치료에 있어서의 질병의 의미 Healing Body and Soul : The Meaning of Illness in New Testment and in Psychotherapy>와 유명한 <꿈 : 하나님의 잊혀진 언 어 Dreams : God's Forgotten Language>외 다수가 있다.

옮긴이 심상영

감리교 신학대학과 동 대학원, 미국 개려-복음주의 신학교,샌프란시스코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시카고 융 연구소를 수료했다. 현재 한국 분석심리학회 회원이며, 강릉 중앙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 서 론

탈진(脫盡 : burnout)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 자기 직업 이나 중요한 삶의 활동에 지쳐 버렸을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행동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어떤 상태의 뚜렷한 증상들을 탈진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잠이 잘 안 온다든지, 체중 감소, 식욕부진, 그리고 우울 상태가 계속되든지, 아니면 권태감 때문에 항상 괴롭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탈진"은 어떤 직업에서나 일어 날 수 있다. 의사들, 교사들, 가정 주부들, 그 어느 누구라도 그들의 삶의 중요한 활동에 지쳐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주로 교회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전문인들1)을 위해 쓰여졌다. 먼저, 나는 성직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탈진"이라는 말은 새로운 단어가 아니다. 웹스터 사전에는 이 말을 설명하면서 세 가지의 특수한 예를 들고 있다. 첫째로, 이 말은 어떤 건물 같은 어떤 것의 내부나 내용물이 타는 것을 지칭할 수 있다. 둘째로, 전기학 분야에서 볼 때, 이 말은 고온으로 인한 발화로 기인한 회로의 고장을 가리킬 때 사용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전도체가 전기가 흘러서 생긴 고온 때문에 타버린 것이다. 셋째로, 임학(林學)에서 이 말은 엄청난 산불이나서, 숲의 바닥 위에 있는 생명력 있는 부식토를 파괴하게 되어 결국 숲이 황폐하게 될 경우에 사용될 수 있다.

우리가 "탈진"의 사전적인 정의를 인간에게 적용해 본다고하면, 우리는 불에 다 타 버린 집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격렬한 에너지로 인해 마음이 완전히 지쳐 버린 남.녀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때 정신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을 전달해 주기까지 했으나 지금은 타 버린 전도체처럼 더 이상 힘을 공급할 수 없는 사람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이 책의 과제는 목회자를 탈진시키기 쉬운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또한 탈진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영적인 해결책으로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제 1 장 목회 탈진 : 특수한 문제점

나는 목회자가 목회를 통해 직면하는 아홉 가지의 특수한 문제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목회자의 일은 결코 끝이 없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각기 어떤 업무를 수행하면서 그 일을 완성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렇지 못하다. 그의 일은 결코 끝이 없다. 목회자는 마치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러 올려 미처 꼭대기에 닿기도 전에 다시 그것을 아래로 굴리고, 또 다시 그걸 산 위에 굴러 올려야 하는 운명을 지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와 같은 사람이다. 일의 끝이 없다는 것 즉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산꼭대기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이러한 느낌이 결국 목회자를 지쳐 버리게 한다.

2. 목회자는 그의 일에 항상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지를 말할 수 없다.

일이 완성되는 것을 보면서 만족해할 수 없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나서 어떤 결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더욱 실망스러운 일이다.

목회자의 일이 사람들을 돌보고(pastoral care)영적으로 양육하는(spiritual nourishment)데에 우선적으로 바쳐지기 때문이다.

그의 목회가 과연 교인들에게 도움이 되었는가? 그러나 어떤 때는 그가 아무것도 성취한 게 없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즉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무엇인가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참담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3. 목회자의 일은 반복적이다.

목회자의 일은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 반복이 된다. 매년 성탄절이 돌아오면 예배를 드려야 하고, 목회자는 그 때마다 설교 준비를 해야 하고 전혀 새로운 성탄 메시지가 담긴 성탄편지를 교인들에게 보내야 하고 동시에 사람들에게 성탄 헌금을 따로 드리도록 권면하기도 해야 한다.2)

4.목회자는 교인들이 기대하는 일들을 끊임없이 다루어야 한다. 성직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상황은 특히 어려운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사제나 목사가 위대한 교사이길 기대하며, 다른 이들은 그가 무엇보다도 성실한 목회자이길 바라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가 재정을 다루는 데 비상한 재능을 가진 목회자가 개인 상담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면 유명한 설교가이기를 바란다. 교인들의 기대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라도 이렇게 많은 교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많은 은사를 가진 이도 없고, 또 그럴 만한 충분한 에너지를 가진 이도 없고 그만큼 다양한 관심을 가진이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목회자가 그들의 기대를 무시한다면 목회하는 데 힘이 들 것이다. 반대로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려고 한다. 하더라도 힘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 줌으로써 그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만큼 사람들의 반대와 비판과 저항과 씨름하는 데도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5. 목회자는 매년 똑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교구일 이란 마치도 결혼과 같다. 즉 목회자가 어껀 일을 하기 시작하면 거기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목회자는 이러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목회자는 그의 교구 안에 골치 아픈 사람이 있더라도 그를 부득이 만날 수밖에 없으면 그와 부딪히는 문제를 다루지 않을 길이없다.

6. 목회자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일하기 때문에 특히 에너지 소모가 많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 때문에 생기는 에너지의 소모를 알아채기란 참 어렵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하루에 목회자가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돌보아 주고자 할 때 생기는 문제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공급해주고자 할 대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써 버리게 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정성을 쏟았는데도 아무 소용없이 전에 말썽을 일으키고 까다롭던 사람 그대로 남아 있을 때 우리는 지치고 허탈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7.목회자는 딱딱한 "영적인 음식"(spiritual food)이 아닌 "어루만져 주는 것"(strokes)을 바라서 그에게 혹은 교회에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다룬 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양식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해려 그들은 자기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나 장소를 찾으로, 혹은 자기들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서, 혹은 살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숨기기 위해, 혹은 우쭐댈 수 있는 여지가 있나 보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네를 항상 돌봐 주길 바란다.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의 당연한 권리라고 느낀다. 그들이 바라던 쓰다듬음(strokes)을 받지 못하면, 그들은 돌을 내거나 아니면 권리 주장을 할 수도 잇다. 그런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계속 쓰다듬다보면, 목회자는 지쳐 버리고 만다.

어떤 의미에서 두리는 "거인들"이다. 왜냐하면 사제나 목회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러러 보이는 어떤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8. 목회자는 그의 "폐르조나"(persona)3)를 위해 많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다.

페르조나는 우리가 외부 세계, 특히 다른 사람들의 세계와 만나고 또 그것과 관계를 맺기 위해 나타내 보이는 겉모습이나가면(mask)이다. 페르조나는 이중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기능은 우리가 우리의 인격을 효과적으로 투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다른 기능은 우리가 우리의 어떤 외적인 모습을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해 주거나,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 온 우리의 다른 측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 줌으로써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사제인데 지금 몹시 피곤하다. 결혼식 주례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당신은 바닷가에 가서 좀 쉬고 싶다. 그러나 당신은 결혼식을 준비해서 주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페르조나로 인해 너무나 오랫동안 원하지 않는 어떤 일(기능)을 해야 할 때나 페르조나가 진정한 인격과 관련을 맺지 못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될 때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취하게 되면 에너지는 자연스롭게 우리 속에 흐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감정을 숨기거나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닌 전혀 엉뚱한 모습을 보이려고 할 때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제 2 장 끝없는 업무의 문제

목회자의 일은 결코 끝이 없다.

앝에서 얘기한 대로, 목회자의 일은 결코 완성되는 법이 없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점은 목회자가 탈진할 정도로 에너지를 고갈시킬 수 있다. 그러한 끝이 없는 일에 직면하게 될 때,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거기에 대한 적절하면서도 도움이 되는 태도를 계발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자기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목회자 자신밖에 없다.

어떤 작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원고를 끝내지 않고 팽개쳐 둘 때가 많다."

여기서 이 작가가 말하는 원고는 마치 교구와 같다. 즉 목사의 일에는 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원고를 여러번 들여다봐도 손질해야 할 부분이 있고 다시 고쳐 써야 할 문장이 있는 법이다.

때때로 목회자는 자기가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우쭐해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때는 자기가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도 계속 일만 하시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은 일상적인 일을 전혀 하지 않고 거룩히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날은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쓰여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과 평상시의 업무로부터 당신 자신을 벗어나게 해 줌으로써 새로운 의식이 자리잡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주 중의 하루만이라도 자신들과 가족들을 위해 거룩히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없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유야 어떻든 그 하루는 꼭 지켜야 한다. 그일은 결코 연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주일 내내 일하진 않을 수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하는 것을 좋아할 때가 많다.

우리가 아주 열심히 일을 할 때 비로소 우리가 하는 일이 중효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일을 멈추자마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목회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하는 의심이 들고, 결국에는 그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일속에 파묻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로 인해, 깨어진 인간관계 때문에, 혹은 올바로 살지 못한 삶으로 인해 후에 탈진(exhaustion)이라는 형태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제 3 장 허공을 치는 것 같은 목회자의 일

목회자는 그의 일에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지 항상 말할 수 없다.

영적인 일은 마치 허공을 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현실적인 일이다. 하지만 육체적인 감각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노력한 결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우리 안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 다른 사람을 손과 몸으로 일하는 육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심한 우울증에 걸린 음악가가 있었다. 그 당시 그에겐 심리학적인 치료나 기도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오는데 타이어가 펑크 났다. 차에서 나와서 그는 타이어를 점검해 보고, 트렁크를 열고 자동차를 들어올리는 잭을 찾았다. 타이어를 바꾸느라 한 시간 넘게 애를 썼다. 그가 타이어를 다 갈아 끼웠을 때 그는 돌연 그의 우울증이 씻은듯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도무지 그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새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는 화육(Incarnation)의 종교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증언한다. 사실 우리의 영적인 측면은, 마치 우리의 육체적인 측면이 우리의 영적인 삶에 의해 활기를 띄게 되었듯이, 육체적인 존재를 개발시킴으로써 강화되고 증진되었다. 사실 우리는 하나의 통전적인 유기체인 셈이다.

예수님 자신도 이땅에 발을 딛고 사신 분이셨다. 공관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 어느 것이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며 어느것이 초대 교회의 첨가인지를 아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의 현세적인 성격(earthiness)을 컴토해 보는 것이다. 그것이 현세적인 말씀이라면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현세적인 성격을 띄지 않은 말씀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예수님의 "쟁기를 가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정말 하신 말씀을 읽고 있다는 걸 의심할 수 없다. 또"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는 말씀을 보아도 우리는 이것이 정말 예수님의 말씀임을 확실히 알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초대 교회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현세적인 성격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육체적인 인격을 개발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영적으로 나태하기 때문인 것같다.

 

제 4 장 끝없는 반복

목회자의 일은 계속 반복된다.

우리의 일은 우리가 그리스 시놔에 나오는, 영구히 회전하는 수레바퀴에 묶인 익시온(Ixion)처럼 느끼게 한다. 이것은 특이한 문제다. 왜냐하면 반복되는 일은 창의력이 없기 때문이다. 일을 처음데 할 때는 신나게 할 수 있지만 자꾸 반복되면 결국에는 일의 창의력이 없어지고 만다.

비록 목회자가 일의 반복을 전적으로 피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자동적으로 일정한 일의 양이 있는 법이다. 대체로 목회자는 자기의 시간과 정력을 어디에 쏟을 것인지를 취사 선택 할 특권이 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얼마간 열심히 일하시고 나서, 홀로 있으시려고 광야로 물러가신 내용을 자주 읽는다.

내가 지금 얘기하는 것은, 하루를 단순히 쉬는 게 아니라 회전하는 수레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에서 물러나서, 자신의 활동과 만나는 사람들과 주거 환경을 완전히 변화시킴으로써 특별히 새롭게 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한 교구에서 23년을 일하시고 목회에서 은퇴하셨다. 그분은 새로운 교구로 부름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때 우리 아버지는 교구 위원회의 동의를 얻는 데 신중을 기하셔야 했다. 왜냐하면 일주에 나흘을 일하시고 나머지 사흘은 뉴 햄프셔에 있는 아버지의 농장에 자유롭게 가시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회전하는 수레바퀴 같은 교구 내의 생활 때문에 지쳐 버릴 수 있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규적으로 일정한 기간 "광야로 물러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인정하셨다.

"휴가"란 말과 "비우다"라는 말은 둘 다, 라틴어 vacare에서 왔는데 "비우게 하다"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휴가는 단순히 공허한 시간이 될 수 잇다.

이런 이유로 휴가 대신에 순례 여행을 계획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흥미 있는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고, 어던 특별한 나라나 사람들을 보려고 여행을 하기도 하고, 어떤 특별한 연구를 하기 위해 출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순례를 하기 위한 노력이다.

반복되는 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창조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창조적인 해결책만이 도움이 된다.

이 동화는 우리가 주시하고 있는 관심사 - 그 일이 기계적인 것이어서 한 때는 번창했으나 지금은 침체되어 버린 사람의 상황 - 를 정확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창조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기 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전의 기계적인 방식을 계속 유지하려고 자꾸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잠깐 동안은 겉으로 보기에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이 보여도, 결국 그들은 그런 와중에서 그들의 영혼을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의 삶에서 창조력을 잃어 버렸을 때 우리는 과연 보다 나은 해답을 찾을 길은 없을까?

목회자의 문제로 돌아가 생각해 볼 때 그의 문제는 그가 하는 일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에게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만인의 칭찬을 한 몸에 받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견딜 만하다고 생각하는 "인기 배우" 같은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불안한 나머지 우리의 힘을 유지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려는 충동에 사로 잡혀 있진 않은가?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우리의 내적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창조적인 것에서 찾으려 하기 보다, 우리의 불확실한 가치 감각에 손상을 입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쇼를 하게 된다. 우리의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하는 게 매우 현명하게 보일지는 몰하도 결국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물론, 우리 자신도 속이는 것이 된다.

제 5 장 사람들의 기대를 다루는 것

목회자는 사람들의 기대를 계속 다루어야 한다.

목회자는 사람들이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각기 다른 수많은 기대에 직면하게 된다. 목회자는 이러한 기대를 만족시키려고 애쓰다가, 또는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불안 때문에 지쳐 버릴 수 있다.

때로는 목회자가 그의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책이 있을 수 있다. 교인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의 일 중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목사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 그 일치점을 찾아보는 것이다. 교인들의 의견이 목사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개방적으로 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간에 있을 수 있는 긴장 관계를 완화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 속으로 불만을 가지고 끙끙거리는 것보다는 개방된 자세를 갖고 함께 논의해 보는 것이 낫다.

해결책은, 사람들이 우리 목회자들에게 바라는 업무 가운데 어떤 것은 우리가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목회자가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려고 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요구들을 피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그의 책<왕자 The Prince>에서 자칭 폭군들에 들려준 충고가 여기에 꼭 맞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슬기롭다"(누가 16:8). 역기서 마키아벨리가 한 말은, 권력을 얻으려고 하면 지독한 일을 저질러야 한다는 뜻이다. 지독한 일을 저지르려면, 단번에 애초부터 저지르는 게 낫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지독한 일을 하려거든 질질 끌지 말라고 그는 경고했다.

우리가 담임 목사라면 우리에겐 우리를 가장 잘 도와 줄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 결과가 생길 수 있다. 즉 보조하는 사람들이 유능하면 담임 목사의 평판을 떨어뜨리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평판을 높여 주게 될 것이다.

 

목회자는 그들의 내면을 먼저 치유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걱정하는 기대 가운데 어떤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긁게 하도록 계속 촉구하며 모든 실패와 태만을 조심스럽게 추적하게 만드는, 우리 안에 있는 "기대의 목소리"(Voice of Expectation), 즉 "내면의 감독자"(Inner Monitor)또는 "내면의 비서"(Inner Secretary)가 있는 것 같다. 이런 내면의 목소리는 죄책감과 불안을 일으키는 일련의 자율적 사고 속에서 그 존재를 뚜렷이 느끼게 한다. 내면의 감독자는 외부인들에게 투사되기 쉽다.

이것은 투사(投射)이다. 즉 부정적인 생각이 X씨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그 목사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내적 감독자의 목소리는 그 이면에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이 목소리와 대화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생각에 귀 기울일 수도 있고, 또 거기에 대답할 수도 있다. 감독자가 목회자에게 파괴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대부분의 종교 전문가4)들이 엄청난 죄책감을 지니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적 감독자 때문에 그림자, 즉 충동과 욕구를 가진 어두운 측면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못한다.

다음의 예를 볼 때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아무리 꾸미려해도 솔직함만큼 효과적인 치료는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

목회자는 어떠한 죄책감으로 인해 남의 조종도 받기가 쉽다. 이는 곧 목회자들의 약점이며, 콘 아티스트들5)을 포함하여 머리를 쓰는 사람들은 목회자를 그들의 희생물로 만드는 데 이러한 약점을 이용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목회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외적인 삶의 변화와 관련된 실제적인 해결뿐민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안에 있는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회자가 내적 성장을 이루게 되면 지쳐 버리지 않고 목회의 문제점을 처리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교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제 6 장 관계를 통한 도움

목회자는 매년 똑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당신은 그들에게서 떠날 수 없다. 여행할 동안에 싫든 좋든 당신은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신이 그배의 승객이 아니라 선장이라고 상상해 보라. 그 배의 모든 사람들은 선장인 당신의 능력 안에서 당신과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어떤 성직자는 그가 성직 칼라(clerical collar)를 자주 하지 않는 것이 그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인간으로서의 모습 그대로 보다는 우리의 직업에 의한 관계를 가질 때, 그 관계를 "전이"(transference)라고 말한다. 전이는 정신 치료의 실험에서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발전하는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생긴 용어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 관계를 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파서 의사에게 간다면 당신은 분명히 그에게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갈 것이며 심지어는 그 의사를 구원자나 치료자의 원형적 이미지로 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의사에게 전이를 가지고 있는 만큼 당신은 그의 순수한 인간적인 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투사할 때 부정적인 전이도 있게 된다. 실제로 긍정적인 전이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때는 부정적인 전이가 자주 일어난다.

정신 치료자들과 성직자들과 의사들은 이런 위험성에 빠지기 쉽고 그들이 신 같은 존재이면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만약 그들이 우리에게 구세주 상(像)을 남기게 된다면, 이것은 잠깐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이 자신 안에서 믿음과 희망의 근원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신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강박적인 관계에 빠져들게 된다.

첫째로, 일반적인 인간 관계는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에로스, 즉 인격적인 따스함과 애정은 전이가 일어나지 않는 관게에서만 만개(滿開)할 수 있는 희귀한 꽃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둘째로, 우리는 일반적인 관계를 통해 성격이 "견고해 진다."(즉 튼튼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러한 관계들을 필요로하는 다른 이유이다.

우리가 튼튼하고 견고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려면, 우리의 어두운 측면을 인식해야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 어두운 측면을 그림자(Shadow)라고 부른다. 이 민담에서, 이사람은 악마가 만약 그의 야망을 성취하도록 돕는다면 악마에게 그의 그림자를 팔겠다고 했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후 그는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땅취를 배회하게 되었다. 우리의 어두운 내적 인격과 연결이 없이 우리는 실제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그 때 견고한 인겨(solid personality)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없으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대로 보일 수도 없다.

목회자는 그림자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우리가 견고한 삼차원적 인격이 되도록 우리를 돕는 어두운 측면이 없이 활력 있는 삶을 살 수 없다.

제 7 장 영혼을 만족시키기

목회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에너지 소 모가 많다.

앞에서 우리는 타인을 돕는 일을 수혈에 비유해서 말하였다.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목회자가 도움이 필요하거나 곤궁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일하면서, 심각한 에너지 고갈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때 누군가에게 에너지를 쏟은 후에 그가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그 때는 그가 당신이 쏟아준 에너지를 취하여 보다 효율적인 사용을 했을 경우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많은 에너지를 그들에게 쏟아 부었는데도 그들이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그때 그들은 언제나 당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런 경우엔 다른 사람을 돕는 걸 포기하는 것이 최선이다. 당신은 에너지를 끝없이, 무분별하게 그에게 부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목회자는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그들의 에너지를 아무성과 없이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또는 위험한 목회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그러한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에너지를 쏟는다 해도 효과가 나지 않는 사람과 우리의 도움을 건설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두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그 첫 번째 유형으로 충분한 생명력을 결핍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프리츠 쿤켈이 "달라붙는 넝쿨"(Clinging Vine)이라고 불렀던 사람이다. "달라붙는 넝쿨"이란 인생을 살아가는 그의 특별한 자아중심적 방법을 가진 사람, 즉 자신의 두발로 서기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어떤 기관에 착 달라붙어 사는 의존적인 사람을 뜻한다. 이 사람은 자신의 힘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사람은 그저 다른 사람의 힘을 이용하려고만 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우리는 "달라붙는 넝쿨"의 좋은 예를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가를 지나고 있었다. 사람이 연못가에 38년간 있었지만 아직도 치료받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 사람은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변명을 했다.

"선생님! 물이 동할 때 나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직 길에 있는 동안 다른 이가 나보다 먼저 그리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말씀하셨다.

"일어나 너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즉시 침상을 들고 걸어나갔다. 그는 "달라붙는 넝쿨"이 되기를 더 좋아했고, 그래서 가련하게도 연못가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가 그렇게 의존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정신 치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요소는 치료자의 인격과 내담자의 인격의 관계라고 말할 적이 있다. 이러한 두인격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더욱 의식화되과 통합되 치료자의 인격이 상대적으로 엉클어진 내담자의 인격에 영향을 미쳐서 후자의 인격이 긍정적으로 영향을 받아 나아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목회자의 목회적인 관계와 상담 관계에서도 해당된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내담자의 인격이 반대로 목회자의 인격에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내담자가 점점 나아지는 대신 목사가 점점 나빠지게 된다.

이 이야기는 상담을 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 특별한 문제를 제기해 준다.

남을 돕는 전문가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 때문에 고갈되는 에너지 문제를 최종덕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영양 상태를 적절하게 유지해야 한다.

성경에는 이러한 영적인 요구가 음식과 식사에 대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통해 많이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진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로 먹이셨으며 우리ㅇ가 다음 장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게 될 엘리아는 아합을 피하여 시내 산으로 여행할 때 까마귀를 통해 음식을 얻었던 것이다.

복음서르 보면 음식의 이미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잇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그의 능력을 사용하여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시험을 받았을 때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태 4:4)

이런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은 육신을 위해 양식이 필요하듯이, 영혼을 위해서도 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주 기도문에서 가장 중심적인 간구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이다.

요한 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늘로부터 온 빵에 비유하셨다. 그분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늘의 양식이다.

많은 무리를 먹인 이야기는 물론 성찬 이야기의 예시(豫示)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헹서 성찬을 통해 매개(媒介)된 인류를 위한 양식이 되셨다. 오늘날 영국 성공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예배를 드리는 이에게 주어질 때 사제는 이렇게 권면한다.

"마음으로 믿고, 감사함으로, 주님의 몸을 받으십시오."

치료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치료가 그들 자신의 치유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충만해 지도록 도우려 할 때 자신의 에너지가 고갈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정신 치료 전문가로서 일할 때 그들이 심리적인 위험에 빠질 수 있으며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강건해지기 위해 영혼의 양식을 발견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타인을 양육하고 돕기 위해 부름을 받은 목회자들도 자신의 영적 능력을 유지하고 에너지를 새롭게 배양하기 위해 자신을 양육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필요한 영적 양식을 얻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 볼 것이다.

 

제 8 장 자아 중심성의 문제

목회자는 딱짝한 영의 양식이 아닌, "어루만져 주는 것"(strokes)을 바라서 그에게 혹은 교회에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다룬다.

우리는 어루만져 주는 것(strokes)이 참된 영혼의 양식이 아니고 사탕처럼 사람들을 다만 순간적으로 기분 좋게 하는 일시적인 완화제와 같은 것임을 살펴보았다. 목회자에게서 진정한 영혼의 양식 대신에 어루만져 주기를 원하는 것은 자아 중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목회자가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자아 중심적 욕구를 어디서 충족시킬수 있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쓰다듬어 주려고 한다면 목회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쿤켈은 자아 중심성의 근원과 성격을 깊이 탐구하되, 자아 중심적 태도가 하나님의 개개인의 인격 성장을 위해 갖고 계신 뜻과 어떻게 배치되는 가르 탐구하였다. 어린아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을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이러한 본능적 신뢰감은 일차적으로 부모(또는 부모를 대신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 사랑과 신뢰감이 부모의 성숙성, 사랑, 신실성과 만날 때 쿤켈이 "우리"라고 부른, 아이와 어른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개개인의 성장과 인격을 배제하지 않는 비 자아중심적 연합(non-egocenitric association)이다.

바로 아이가 태어나게 될 이상적 상태적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본능적으로 적합한 영원한 우리 관계(We-relationship)를 제공해 줄 만큼 그렇게 지각 있고, 사랑이 충만하며, 신실한 어른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조만 간에 우리 관계는 부머의 자아 중심적인 태도 때문에 파괴되고 만다. 우리 관계가 파괴되면 아이의 자아 중심성을 촉진시키게 되며 중심성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아를 보호하려고 한다. 그 자아 중심적 태도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아를 중심으로 한 사람이 되게 하며, 그 사람의 에너지를 자아를 지탱하고 방어하는 데 쏟게 만든다. 자아 중심적인 사람은 참된 삶을 발견하게 위해 세상 속으로 나가는 대신에 자신의 시간을 주로 성벽을 쌓고 방어하는 데 보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때 자신의 성(城)을 방어와 안전의 장소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사실 감옥과 같은 것이다.

어떤 사림이 자신의 자아 중심성을 위해 에너지를 쓰면 쓸수록 그는 창조적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창조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자아(ego)가 아닌 진정한 자기(Real Self)를 실현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본래 악하다는 것은 아니다. 자아가 인격 안에서 적절한 역할을 찾게 될 때 자아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자아 중심적 자아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목적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아가 자아 중심적 태도로부터 해방되고 인생살이에서 자아의 적절한 역할을 감당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제 사는 것은 내(즉, 자아 중심적자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진정한 자기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2:20)

아이의 자아 중심성과 어른이 된 후의 자아 중심성은 몇 가지 형태 가운데 하나를 취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성격 유형이 생긴다.

1. 활기와 진취성이 모두 없는 아이, 활기와 진취성 중 하나가 없는 아이, 또는 지나치게 예민한 아이는 부드럽고 관대하고 지나치게 응석을 받아 주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아이는 응석받이가 된다.

2. 상당히 활달하고 진취적인 아이 그리고 몇 가지 재능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아이는 부드럽고 관대하고 지나치게 응석을 받아 주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아이는 사람들이 감복할 만한 아이가 된다.

3. 활기와 진취성이 부족한 아이는 거칠고 형편없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아이는 거절당하고 상처 입은 아이이다.

4. 활기와 진취성을 충분히 지닌 아이는 거칠고 형편없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아이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가 된다.

이 네 가지가 서로 결홧하게 되면 네 가지 유형의 자아 중심적인 사람이 되는데, 쿤켈은 이런 유형을 각각 달라붙는 넝쿨, 스타(Star), 거북이, 네로(폭군)라고 불렀다. 우리는 달라붙은 넝쿨에 대해서 이유형에 대해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이런 아이는 무엇을 하려는 의욕이나 활기가 부족하다. 그러나 이런 아이는 부드럽고 관대하고 아이에게 무언가를 거듭 요구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 준 부모를 가진 아이이다. 부모의 자아 중심성이 바로 아이에게 자아 중심성을 갖게 만들며 그 아이가 나중에 커서 부모가되면 이번에는 자신의 자아 중심성을 자기 자식에게 전해 주게 된다.

후에 어른이 되었을 때 그런 아이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사람들에게 의존적으로 짝 달라붙는 인생을 살아가는 달라붙는 넝쿨이 된다.

그타(Star)는 관대한 환경에서 자라난 보다 활기 있는 아이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응석을 마땅히 받아 주고, 그들이 감탄해 마지않을 만큼 부모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들은 자신을 개발하고 실현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은 하지 않고, 대신 자기네 아이를 자꾸 부추기기만 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얻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기에, 자연히 그년느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활동을 선택하게 된다. 칭찬 받고 싶은 나머지 이런 사람은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잘했다 칭찬 받는 일에 쏟아 붓게 된다.

거북이는 거친 환경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활기나 공격성을 결여하고 있는 아이이며, 극단적으로 민감하여서 상처를 입기 쉬운 아이이기도 하다.

이런 아이는 부모가 야만적이고, 거부하기르 잘하고, 폭군과 같은, 거친 가정 환경이나(빈민가와 같은), 거친 사회적 환경 때문에 상처를 입기 쉽다.

거북이는 될 수 있으면 움츠리려 하고, 살아가면서 위험한 일을 당할까봐 심리적으로 물러나서 은신처를 찾으려고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거북이형의 사람은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세요. 내 등딱지에서 나와 위험을 무릅쓰거나 상처받게 하지 마세요. 그 좋은 예가 복음서의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한 달란트를 받고 그것을 땅에 그냥 묻어 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인을 처음으로 박해한, 잔인한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네로가 있다. 거북이와 마찬 가지로 네로 혹은 폭군은 거친 환경에 접해서 생기는 유형이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공격적이 되고, 그 주변에 있는 포악한 사람들보다 더 야만적이고 무자비하게 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는 힘이 있을 때만 자기가 안전하다고 느끼며 비로소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힘이 없어지면 그는 패배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몰살시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중심성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이라는 점에서 원죄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임무는 우리 부모들을 비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심리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우리의 자아 중심적 일탈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하나님이 우리 삶에 대해 갖고 계신 뜻을 이루어 드리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쿤켈이 자아 중심성을 분석한 것이 너무 단순하고 개략적인 것이 사실이다. 모두가 각기 다른 개인이며 아무리 심리학적으로 잘 묘사해도, 이것으로 우리의 독특한 심리를 다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개념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ㅇ르 이러한 범주 안에서 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유형들이 겉으로 보기에 비슷하다고 해서 이들을 혼동해선 안된다. 예를 들어 스타와 네로가 어떤 때는 엇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스타는 남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고, 네로는 힘을 얻으려고 한다.

사실 순수하게 자아 중심적인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의 인격 안에는 자아 중심적인 면과 진정한 자기가 늘 뒤섞여 있다. 바람직한 성품들과 바람직하지 못한 성품들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이웃하여 각기 자신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자아 중심성이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살펴 보기로 하자. 자아 중심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싫증나게 하고, 속이며, 때로는 놀라게 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진정한 자기(Real Self)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우리의 칭찬의 대상이 된다.

다른 기구와 마찬 가지로 교회 안에도 자아 중심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실사 많은 목회잗르이 무척 자아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중심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살려는 그들의 신실한 욕구가 종교적 전문가로 살아가려는 그들의 바램과 뒤섞여져서 자아 중심적인 삶을 살 게 되는 것이다.

달라붙은 넝쿨은 교회를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관으로 생각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관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품을 지닌 이들을 잘 참아 주는 교회에 그들이 머물러 있게 될 때, 교회가 계속 그들을 도와 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스타도 역시 교회를 좋은 곳으로 생각할 것이다. 만약 그가 능력 있는 설교자라면, 그는 교회르 그가 빌붙을 수 있는 멋진 무대하고 생각할 것이다.

거북이 유형으로 확인된 사람은 통례적으로 병원을 교회보다 더 좋아할 것이다. 교회가 그를 둘러싸 위협하는 적대적인 세상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네로들은 아마 스타들 보다 적게 교회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 일단 들어오면, 그들은 작은 웅덩이 속의 큰 개구리처럼 제멋대로 하려고 할 것이다.

이제 목회자가 하나님을 섬기며 동시에 자아 중심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게 분명해 졌다. 이렇게 볼 때 목회자가 어떤 자아 중심성의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 무엇을 하려 하는 가를 알아내는 것이 그들의 영적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자아 중심성을 유지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요된다. 우리가 창조적인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력 있는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자아 중심적 삶은 우리에게서 에너지를 빼앗아 간다. 이러다 보면 머지않아 우리는 탈진되고 말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 전통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가 8:34)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요, 궁극적으로는 신생(rebirth)의 장소이다. 죽어야 하는 것은 자아 중심적인 자아이다.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은 창조적인 자기와 관계를 맺는 새로운 자아이다. 그래서 융은, 자기의 실현은 늘 자아의 패배(the emergence of the Self is always the defeat of the Ego)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서 패배 당한 것은 우리의 자아 중심성이다. 우리를 자아 중심성에 빠지게 만드는 정신적 위기를 우리가 두려워하고 애써 피하지만 그런 위기속에서 우리는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주제는 기독교 전체에 얽혀 있는 실타래와도 같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그것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표현하려 했던 바로 그 주제이다. 그러므로 자아 중심적 삶의 상실은 진정한 자기의 회복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표상들(images)은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길 안내 해 준다.

 

제 9 장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Mask)

목회자는 그의 '페르조나(persona)'를 위해 많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목회자가 페르조나를 유지하려고 애쓰다가 에너지를 빼앗길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일하러 갈 때 어떤 페르조나를 취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우리의 페르조나가 우리 자신인양 생각할 수 있다. 진정한 우리 자신과 페르조나를 쓴 자기(persona-self)를 인식하는 데 훌륭한 영적 지도자나 정신 치료자의 도움을 받는 것은 괘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우리는 페르조나를 사용할 필요하 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페르조나를 사용하지 않고는, 수백 명의 사람들과 인사한면서 그 누구도 페르조나를 사용하지 않고는, 수백 명의 사람들과 인사하면서 사람들을 가기 유쾌하게 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제를 실제 보다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지내세요' 보다는 '안녕하세요'라고 사람들에게 인사할 수 있다. 전자(前者)는 우리가 우리가 정말로 그들이 어떠한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한 인사말 '안녕하세요'는 이러한 문제를 피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에게 그런 집단적인 상황에서 가능한 한 페르조나를 피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페르조나를 취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우리에게 페르조나를 건네줄 수 있다는 것을 언급했다. 여기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그 당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어떤 사람으로부터 페르조나를 건네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매우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하셨다.

어떤 지도자가 예수께 묻기를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나를 선하다.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누가 18:18-19).

그 부자는 예수에게 선하다는 페르조나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예수께선 이것을 즉시 되돌려 주었다. 예수께선 이 사람의 선하다는 관념을 충족시키려고 할 때 생기는 부담을 지고 싶지 않으셨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으셨기에 즉시 그 사람에게 페르조나를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 예수가 현대 목사라면 그 사람에게 "오! 당신은 돌아와야 합니다. 당신은 중요한 분이십니다. 또 우리는 당신을 몹시 필요로 한답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으시면 교회에 기부금을 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귀하에게 교회의 중요한 일을 맡기겠습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복음서에서는 가장 역설적인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용서받고 사랑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악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바로 보고, 또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페르조나를 벗어 버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이 여자가 그렇게 한 것이다. 반면에, 의로움에 있어서 '스타'라고 할 수 있는 시몬은 바리새인의 완전한 페르조나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난 받지 않고 살 수 있었지만, 진정으로 사랑할 수는 없었다.

목회자인 우리에게 페르조나에 순응해야 한다는 집단의 압력은 바리새인 시몬에게 주어졌던 외로워야 한다는 압력만큼 큰 것이다. 앞서 언급한 그의 책<전문 직업에서의 권력의 문제>에서 구겐뷔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것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목사에게 있어서 모르는 사이에 그의 어두운 형제(역주:그림자를 말함)를 활발하게 만드는 것은 흔히 교인들이다. 교인들은 목사가 위선적인 행동을 하도록 은근히 상당한 압력을 가한다. 의심(doubt)과 믿음(faith)은 한 짝이다. 그러나 목사가 의심스런 말하는걸 듣고 싶어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실 우리들은 모두 의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사제(목사)는 자신의 의심을 숨기고,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내적 공허감을 과장된 말로 바꾸기 위해, 계속해서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목사가 바른 행동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설파하는 믿음을 증명해 주길 바란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목사의 어두운 형제(darkbrother)-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이기 보다, 세상에(또한 자신에게)더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의 또 다른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이제까지 언급한 목회자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 가운데서 페르조나로 인해 제기되는 문제가 아마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참된 사람(genuin e people)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페르조나와의 동일시르 위험시하셨다. 이공격은 주로 바리새인들에 대한 것이었고 이렇게 해서 예수님에겐 많은 적이 생겼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이다. 목회자의 섬김을 받는 사람들은 목회자에게 자꾸 페로조나를 덮어씌우기 때문에 목회자는 자신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상실한다면 우리의 에너지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자아가 만약 본래적인 인격(genuine part of personality)과 분리되어진다면 자아는 점점 공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반면에, 인격의 참된 에너지가 무의식 속에 쌓이게 될 것이고, 그림자의 활동이 촉진되고, 자아와 내적으로 반목하는 상태가 될 것이다. 이 때 자아는, 페르조나와 동일시되어 점점 이차원적이 되고, 생기를 잃고 말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불안과 낙담의 상태에 빠지고, 창조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제 10 장 엘리야의 문제

목회자는 실패로 인해 지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수년간 일하고서 자기가 실패자 일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면 사기가 떨어져서 계속 그 일을 해 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많은 교회들의 규모와 영향력이 자꾸 줄어드는 요즈음에 있어서 목회자가 목회에 실패했다고 결론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때 목회자는 자신과 자기 일에 대한 부정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힐 수 있다.

실패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할 필요가 잇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결점 때문에 실패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실패하는가? 우리는 정말로 실패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성공을 측정하는 기준이 잘못되어 있어서 다만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뿐인가?

우리가 자신의 몇몇 결점 때문에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발전을 위해 좀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도움을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건강하다는 표시이다. 반명에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는 사람은 정말 병든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몇 가지 걸 맞지 않는 이유로 교회는 영혼을 돌보는 일을 세속적인 전문가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안에서 영혼을 잘 돌볼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종교적인 전문가들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증대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싸움에 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50년대와 60년대에는 성장하는 교회를 어디서나 몰 수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뀐 것 같다. 목사들은 교인들이 줄고 있는 걸 인식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되었다. 무엇이 목회를 실패하게 하는 것일까? 이제까지 우리는 성공이나 실패를 교인이 얼마나 되고, 교회 재정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으로 측정해 왔다.

영적인 일의 성공 여부를 측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교인 수와 예산액을 보고 목회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것은 겉으로 보는 것이며 이것으로 영적인 성공을 측정할 수 없다.

물론 큰 교회라고 다 자아 중심적인 것도 아니고, 작은 교회라고 반드시 영적인 것도 아니다. 교회의 진정한 영적 성장과 힘은 반드시 그 규모로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척도은 사람의 척도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자아 중심성을 유지하게 해 주는 기구(organization)를 위해서라면 아주 특별한 일도 기꺼이 한다. 그러므로 그런 기구는 그 규모가 늘어나고 영향력이 커지게 마련이다. 물론, 그런 집단의 지도자는 자신의 자아 중심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일반적으로 스타가 아니면 폭군이다. 그리고 그가 속한 기구는 자신의 자아 중심적 욕구에 꼭 들어맞기에 잘되어 나간다. 그런 열심은 전염성이 있으며 그의 그런 열심 때문에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실제로는 그들의 자아의 뜻에 따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회에 실패하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의 상황을 자세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실패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려 할 때 하나님은 개개인이 당신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에 관심 하시지,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가 하는 일을 얕잡아 볼 필요는 없다.

열왕기상 18장 - 19장에 나오는 엘리야 이야기는 실패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기 때문에 이 장의 결론을 삼는 데 적합하다. 엘리야는 그가 야웨께 드리는 제물이 물에 흠뻑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제사장들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야웨가 주신 무서운 가뭄도 엘리야가 기도하니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승리에는 커다란 패배가 뒤따라서 엘리야는 풀이 죽고 당황하여 광야로 도망하였다. 왜냐하면 여왕 이사벨이 엘리야가 자기 제사장들을 죽인 것에 분개하여 야웨종교를 다시 박해하기 시작하고 외톨이가 되고 집을 잃은 엘리야를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냈기 때문에 엘리야는 탈진 되었다. 그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 했다. 그는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헛 수고였다. 모든걸 잃어버린 것 같았다. 자신이 이젠 완전히 실패자가 되어 야웨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자 못한 이전 사람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야웨는 이런 엘리야의 실패에 대한 생각을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상황을 보시되 사람처럼 보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엘리야를 깨우고 먹이신 후, 그가 시내산을 향해 먼 여행길을 떠나도록 하셨다. 엘리야는 그 동굴에 들어가 어두운 구석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는 우리가 앞에서 논의한 대로 순례여행을 한 것이다. 엘리야는 이제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Vision Quest6)를 구하는 것 처럼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길 기다리게 되었다.

"엘리아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나?"

그러자 낙심한 예언자는 하나님께 자기 이야기를 한다.어떻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야웨를 버렸고, 어떻게 그가 실패했는지를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제가 생존해 있는 마지막 사람인데, 이제 그들이 저를 죽이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어버린 것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엘리야는 마음이 새로워지고 실패감을 극복한 후,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완성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걸 가르쳐 준다. 이 이야기는 실패감이 어떻게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또 고갈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또한 우리가 실패했다는 의식이 잘못된 생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신실한 칠 천명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고 이것으로 충분히 당신의 일을 계속하실 수 있다고 보셨다. 단지 엘리야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기에 자기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 대화함으로써 엘리야는 새로운 에너지롤 재 충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 11 장 지쳐버린 자아의 문제

엘리야의 이야기는 지쳐버린 자앙에 대한 이야기이다. 완전히 지쳐버린 엘리야는 시내산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걸음으로써 그리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 새로워짐으로써 비로소 고침을 받을 수 있었다.

탈진의 문제와 지쳐버린 자아의 문제는 별개가 아니다.

목회자는 지쳐버린 자아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목회자는 하나님과 늘 접촉하고 있고 늘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삶에 만족을 느낄 것이며 그러기에 목회자는 늘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사랑과 도덕이 지배하는 삶은 우리를 지치게 하는 성격이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삶은 참된 관계를 맺지 못하고 겉돌 뿐만 아니라 돌보는 노력을 요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쳐버린 자아의 문제는 훨씬 복잡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거의가 융이 "우월기능"(superior function)이라고 부른 게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본래부터 어떤 강점과 약점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알면 된다. 우리가 본래부터 타고난 이러한 기능을 사용할 때 그 보답으로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재정적으로 성공하고, 또 무언가를 성취함으로써 만족하게 된다.자연히 이러한 발달과정에서 자아는 자신의 강점과 옹일시하고, 그러한 강점을 가지고 자아를 확립해 나가며, 삶을 형성해 가면서 그런 강점을 이용한다.자아는 우리 안에 있는 약점을 기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우월한 재능을 사용하고, 그런 것으로 우리의 삶을 형성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가장 활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잠시동안 활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우월한 정신 기능들이 소모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기능들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다 써버리고 말면, 그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그러한 우울한 재능을 사용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자아에 에너지를 공급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35세나 40세, 또는 50세가 되면 우얼 기능속에 있는 에너지가 다 소모되고 만다. 이제까지 우리는 과학자로서, 부모로서, 심리학자로서, 또는 교사로서의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활동으로는 우리가 더 이상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가 온다는 사실이다.

이제 <파우스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파우스트>는 파우스트 교수의 곤경과 그가 악마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 곤경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다룬 괴테의 유명한 시극이다. 파우스트 교수 만세! 그는 읽을 가치가 있는 모든 책을 읽었다. 그는 탁월한 지식인이요, 자기 나라에서 가장 명성 있는 교수요, 그러나 그는 그것으 참을 수 없었다.그는 자신을 견딜수 없었으며 또 자기 생활에 진력이 났다.

아아! 이제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거기다 심지어는 신학까지도 열심히 노력하고 철저하게 연구하였다. 그러나 이 모양이 꼴로 나라는 인간은 과거와 비교해서 여전히 불쌍한 바보다.

파우스트의 곤경은 자신을 다 소모해서 지쳐 버린 자아의 곤경이며, 그에게 나족을 가져다 줄 힘 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자신의 근원적인 기능을 다 써 버린 사람이 겪는 곤경이다. 그의 훌륭한 지성은 한때 그의 삶에 빛을 던져 주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상황이 아주 심각하게 되었다. 파우스트는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어디로 떠나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괴테는 문학 속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 하나를 창조해 냈는데, 그는 교활하고 비열하며 유머ㅓ스한 메피스토펠레스이다.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의 대화는 둘 사이의 계약에서 정점에 이른다.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의 대화는 둘 사이의 계약에서 정점에 이른다. 메피스토펠페스는 이승에서 파우스트의 종이 되기로 한다. 그 대신에 파우스트는 그가 죽을 때 그의 영혼을 악마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한다.

파우스트는 대담하게 그렇게 하기로 계약을 하고, 피로 서명을 한다. 여기서 파으스트가 구한 것은 무엇인가. 감정이 있고, 화려하며, 활력이 넘치는 삶이었다.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끓어오르는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파우스트가 요구한 것이었다.

파우스트가 열망한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명상하는 삶을 행동하는 삶으로, 안락한 삶을 분투하는 삶으로, 자기만족의 삶을 열망하는 삶으로 바뿌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감정을 위해 그의 지성을 포기한다. 진정 그는 이렇게 선언하기까지 한다. "감정은 모든 것이다."

이것은 악마적인 메피스토펠레스의 본성은 물론, 파우스트가 자신을 새롭게 하려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의 낡은 자아가 추구하던 것을 포기하고, 또 그의 우월한 사고 기능을 포기하고 열등한 감정 기능을 통해 그가 이제까지 살아보지 못했던 삶 속으로 뛰어든다. 더 이상 그에게 메마른 사막이 되어 버린 지성(知性)의 해변에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없어서, 흉융하는 감정의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과 같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 안에 있는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을 인격화한 존재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약속을 지킨다. 그는 파우스트에게 싱싱한 젊음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약을 만드는 마녀에게로 데리고 간다. 파우스트는 그것을 마시고 20세의 청녕이 된다.차우스트는 이제부터 수많은 외향적인 모험을 하게 된다. 사랑과 행동과 감정의 측면이 부족하여 여기에 대한 분별력도 없고 경험도 없는 파우스트는 자연히 큰 불행을 겪게 된다.

파우스트가 마침내 노인이 되었을 때, 그는 결국 경험과 죄와 죄책감과 영광스러운 업적으로 가득 찬 죽음을 맞게 된다. 악마는 그를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의 영혼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의 시체 위를 불안하게 떠돌고 있다. 분명히 악마는 상을 받을 만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약속을 지켰고, 신실하게 파으스트에게 그의 종이 되어 봉사했으며, 그에게 그가 원하던 경험들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우스트의 영혼이 나타나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은 메피스토페레스의 주의를 흩어 버리고, 그 순간 급하게 덮쳐서 파우스트의 영혼을 안전하게 가지고 가 버린다.

파우스트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그렇게 많이 파괴했으며, 메키스토펠레스와 같은 악마의 친구로 살아왔는데도 신이 파우스트의 삶을 구원해 주었다는 것은 인습적인 도덕 주의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일지 모른다. 괴테는 제1부에서 어떻게 파우스트가 삶의 반대편으로 뛰어듦으로써 지쳐 버린 자아의 곤경을 해결하려 샜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제 2부에서는 다른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지쳐 버린 자아의 문제를 푸는 데는 일정한 규칙이 없기 때문에 이 방법도 옳다고 본다. 본대로, 파우스트와 같이 지쳐 버린 자아의 문제에 직면한 사람은, 누구라도 집단적인 해답을 찾을 수는 없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한가지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살아보지 못한 내면의 삶과 접촉한다면 그는 새로운 에너지와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지쳐버린 자아는 새로운 삶을 평안과 휴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적으로 표현되는 외적으로 표현되는, 전혀 다른 그리고 새로운 활동을 통해 발견한다. 볼 두 번째 이야기, 즉 위대한 중세의 성배(聖杯)전설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성배의 성은 상처 입은 피셔 왕(Wounded Gisher King)이라과 알려진 성배 왕에 의해 다스려 진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해 전에 우연히 물고기를 한 입 먹으려고 손을 대었다가 요리하던 불에 손을 데어 상처를 압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성배만이 그 왕을 치료할 수 있었지만 성배의 성의 왕인 피셔 왕은 성배를 마실 수 없었다. 왕이 치료되려면 누군가 다른 이가 성배의 성을 찾아서 그에게 성배를 주어야만 했다. 병은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그 나라는 왕의 병만큼 심한 불안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아무것도 자라는 게 없었고, 동물들은 새끼를 낳지 못했으며,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이 전설에서 상처 입은 피셔 왕의 모습은 지쳐 버린 자아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것은 병들어서 생명력을 상실한 의식적인 인격의 지배적인 힘을 나타낸다. 그 결과 모든 생명이 손상을 입게 되었다. 나라에 널리 퍼진 불안과 백성들의 물행은, 우리가 지쳤을 때 우리에게 스며드는 우울증과 비슷하다. 피셔 왕의 치료할 수 없는 상처는, 지쳐버린 자아가 다른 근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배의 전설에서는 도움이 색다른 근원으로부터 온다.왕을 치료하고 그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숨은 능력을 지닌 영웅은 자기 어머니와 함께 숲속에서 살고 있는 이상하리 만치 비천하고 세련되지 않은 젊은이였다.

그 젊은이의 이름은 파르시팔(Parsifal)인데 이것은 "젊은 바보"라는 뜻이다.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이러한 사용되지 않은 자원들을 경험하게 될 때, 때로 우리는 바보처럼 느껴진다. "성배 왕"이라고 하면, 올바른 대답이며, "나 자신"이라고 하면 그것은 틀린 답이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격이 개조되지 않고, 자아(Ego)가 중심이 되는 것에서 자기(Self)가 중심이 되는 것으로 바뀌어지지 않으면 치료가 될 수 없다.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듯이 인격의 중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배의 전설은 지쳐버린 자아가 치유되려면, 어떤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즉 새로운 에너지는, 어리석게 보이는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무의식의 영역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리고 인격의 새로운 중심은 자아와 자아의 관심의 중심보다 더 위대한 인격으로부터 인저을 받아야 한다. 이것을 성취하는 것은 기념비적인 영적 여정을 의미하며 성배의 전설 안에 있는 많은 이야기드른 우리에게 이 여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주며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말해 준다. 지금 우리에게는 우리가 겪는, 보다 심각한 고갈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가 종교적 언어로, 영적 순례(spiritual pilgrimage) 또는 하나님을 찾는 것(search for God)이라고 부르는 것, 현대 심층 심리학자가 개성화(indivi여 ation) 또는 전일성(wholeness)의 추구라고 부르는 것에 착수하는 것이다.

제 12 장 에너지를 회복하기

서론에서 우리는, "탈진"(burn-out)이라는 말이 불의 상징적 의미와 관계가 있고, 불은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것을 언급했다. 불은 자신을 다 소모하고 나서 결국 꺼지게 된다.

물리하에는 에너지의 연소적인 감소를 나타내는 엔트로피(entropy)7)라는 용어가 있다. 엔트로피는 결합된 형태의 에너지가 분산된 형태로 그 자체를 분산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에너지가 분산된 형태로 있으면, 그것은 별 쓸모가 없다. 예를 들어, 통나무 안에 있는 에너지는 연소될 수 있다. 그러나 연소 과정에서 에너지는 열과 가스의 형태로 통나무에서 나오며, 그때 그 에너지는 더 이상 사용될 수가 없다. 만약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엔트로피 현상으로 고통을 겪게 된다면 세계는 파멸하고 말 것이 분명하다.

다행하게도, 자연 역시 더 분산된 형태에서 더욱 결합된 형태로의 에너지 결합이라는, 역(逆) 과정의 예(例)몇 가지를 가지고 있다. 식물의 생활에서는 이것을 광합성이라고 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세포가 만들어지고, 또 식물이 자라는 것이다. 사람은 물론, 동물도 살아가면서 신진대사를 하는데, 이 과정은 몸이 음식을 먹음으로써 얻어진 다양한 영양분으로부터 복잡한 생명 원형질을 조성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같은 식으로, 정신적 에너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즉 정신적 에너지는 늘 소모되기 때문에 항상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인생에서 밖으로 흐르는 시냇물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넘쳐서 삶 속으로 들어가는 에너지의 흐름과 같다. 대부분 이러한 에너지는, 일이나 놀이, 혹은 관계를 맺는 데 사용된다. 정신적 에너지의 흐름은 중단되고, 우리는 에너지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를 위한 적절한 출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잃게 되고, 그때 우리는 멍하고 공허한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는 죽어 버린 물이 담긴 호수 같게 된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에너지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에 대한 위협이 된다.

호수가 에너지의 원천을 가져야만 하는 것처럼 인간도 역시 에너지의 원천을 가져야만 한다. 인간은 항상 에너지를 내 보낼 수 많은 없다. 거기에는 또한 에너지가 유입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도 삶은 우리에게 많은 에너지의 원천을 제공해 준다. 성배의 전설에서 성배는 결코 고갈될 수 없다. 그것은 계속적으로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삶의 힘을 상징한다. 신약 성경에서 성찬식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음식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것이 있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상징서을 강조한느 것이 있다.거기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에게 있어서 결코 고갈될 수 없는 양식이 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발견할 대 우리는 새로운 에너지의 원천을 찾아내게 된다. 새로운 에너지의 원천을 찾을 수 있는 몇가지 방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 외적 활동의 변화

우리는 앞장에서 외적 활동의 변화가 탈진 상태(Burnout)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도움이 될 수 있는 외적 활동은 일상적인 우리의 일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겅이어야 할 것이다.

2. 창조적인 관계

관계를 맺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관계를 맺음으로써 우리는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도 있다. 진정한 관계는 노력을 통해 맺어진다. 이러한 관계는 에너지를 유동하게 하며, 우리의 에로스8)에 절대 필요한 출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에로스가 없으면 삶은 그 의미를 금방 잃어버리고 만다.

3.몸을 창조적으로 활용하기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지쳐 있다고 얘기할 때, 그것은 그들이 정신적으로 지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때는 육체적으로 활기가 없고 생명력이 결핍된 듯이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육체가 정신적 삶의 물리적 기초인 것처럼 정신이 육체를 활기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과 정신과 감정을 쏟아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지쳤다고 느끼거나, 육체적으로 고갈되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몸에 이상을 느낀다 해도 몸 자체는 소모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우리 몸의 세포들은 글리코겐을 비축해 두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육체적인 작용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이 육체(몸)를 활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몸은 새로운 에너지의 원천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몸을 잘 활용할 때 우리는 에너지를 되찾을 수 있고, 정신적으로도 활력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육체적인 운동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육체적인 활동이 우리에게 흥미를 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인 활동이 심호흡을 필요로 한다.

앞에서 말 한데로 우리가 육체적인 운동을 하면 에너지가 되살아나게 되고, 또 그것은 우리가 정신적인 피로감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

4. 명상

우리가 에너지와 접촉할 수 있는 좀더 내적인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명상은 가장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명상은 영혼에서 떠오르는 생생한 이미지들과 우리가 접촉하도록 하며 이들 이미지들은 그 자체가 힘과 자율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에너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 무의식으로부터 떠오른느 이미지들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관상(觀想)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에너지를 끌어 올려서 자신의 의식 생활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5. 꿈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풍부한 원천이 또 있는데, 이것은 바로 꿈이다. 꿈을 기록하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명상을 통해 꿈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 꿈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는 것, 꿈은 그 안에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굼을 적절히 사용하며, 우리는 무의식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의식에 보탤 수 있다.

6. 일지 쓰기

일지란 우리가 우리의 의식 생활에 중요한 모든 문제를 기록 하는 책이다. 우리는 우리의 꿈과 환상과 충동과 우리의 창조적인 생각들을 기록한다. 우리의 일지 안에 우리의 문제, 걱정시키는 것,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 생각들을 다 기록하기도 한다.또한 우리의 영혼에 중요한 어떤 것도 우리는 일지에 쓸 수 있다. 창조적인 생각들을 적어 두는 것은 정원에 씨를 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단 일지는 그것이 써진 후에는, 그것이 싹이 트고 자라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일지를 써 놓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꿈과 번뜩이는 영감 속에 내재해 있는 창조적인 잠재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일지는 어떤 용기(用器)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담을 용기가 없다면, 물은 바닥에 다 쏟아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일지를 쓰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그러므로 당장 일기 쓰기를 시작해 보라

7. 우리의 환상에 주목하기

환상이란 우리가 초대해 들이지 않았는데도,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와 그들의 길을 찾는, 자율적인 일련의 사고(思考)이다. 환상은 우연히 일어나는 생각, 혹은 일관성 있는 환상적인 이야기들과 대조되는, 예측하기 어려운 충동과는 다른 것이다.

환상은 자아(Ego)의 직접적인 사고와는 대조적으로, 마음의 간접적인 사고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환상을 가질 때, 우리는 그것 배후에 일정량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환상을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에너지인 것이다. 그것은 얼마 안되는 소령의 에너지일수도 있고, 아니면 엄청안 양의 에너지일 수 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에 스스럼없이 대처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사실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약 우리가 대처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운 환상들이 우리를 계속 엄습한다면, 우리는 영성지도자나 정신 치료자의 도움을 받으며, 그 환상들을 풀어 나갈 필요가 있다.

8. 적극적 명상(Active Imagination)

적극적 명상은, 명상과 같은 것이지만, 명상 과정에서 자아의 활약이 더 두드러지기 때문에, 명상을 넘어서는 영적이며 심리학적인 기술이라. 적극적 명상을 통해 우리는, 다만 심상에 초점을 맞추거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상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중하게 그것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아와 무의식이 서로 결별을 고하든지, 아니면 서로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적극적 명상의 두 가지 예를 살펴보았다. 그 첫 번째는 제 5장에서 언급했는데, 거기서 나는 우리가 내적 감독자(Inner Monitor)와 대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두 번째 예는 엘리야의 이야기이다. 시내 산 동굴 속에서 엘리야가 하나님과 한 대화는 적극적 명상이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여기서 제시한 목록이 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이란 다양하고, 복잡하고, 개별적이고, 그리고 끊임없이 창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새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다 묘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 특히 이 마지막 장은, 일종의 요리 책으로 볼 수 있다. 즉, 나는 여기서 어떤 사람들에게 유용하다고 증명되어 온 조리법의 목록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런 책(요리 책)들이 종종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런 책들은 하나님이 삶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탈진 문제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 주신는 상상력, 창조성, 그리고 풍부한 자원과는 결코 대체될 수 없다.

▣ 옮긴이의 말

한국 목회자들은 너무나 교회의 외적 성장에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해 왔고, 너도 나도 목회에 '성공'하려는 노력을 경주하느라 너무 바쁘며, 그러다 보니 가장 본질적인, 내적 중심(inner Center)과의 접촉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인들이나 각 개체 교회가 한국 목사를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가능하면 목회의 짐을, 평신도들이나 부 교역자들과 나누져야 하며, 목회의 방향을 업적 지향의 목회(merit-oriented ministry)에서 영혼을 찾는 목회(soul-search ing ministry)로 전환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보호하고 영적인 집중을 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과 공간을 반드시 정기적으로 가져야 하며, 자기 자신에게 알맞는 나름대로의 목회 철학과 스타일ㅇ르 개발해야 하며, 서로 감정적으로 교류할 수 있고, 이해 할 수 있는 동료 목회자 그룹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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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회자들이나 평신도 사역자들 - 역자 주.

2) 이러한 것은 성탄절 전에 미국 교회의 목사들이 하는 일이다. - 역자 주.

3) 칼 융(Carl Hung)의 심리학 용어로 우리말의 "역할," "체면," '얼굴," "낯"에 해당된다 - 역자 주.

4)성직자를 말함. 이하 성직자로 번역함 - 역자 주.

5) 사기꾼, 똑똑한 아이 - 역자 주.

6) 신화적인 차원에서 볼 때, 모든 뒤로하고 떠나, 홀로 비전, 통찰력, 또는 의미를 추구하는 영웅에 관 한 이야기 - 역자 주.

7) 나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심리학에 왜 중요한지를 내게 가르쳐 준 내 친구 하트웰(Steve Hartwell)에게 도움을 받았다.

8) 여기서는 성애(性愛)라기 보다 생의 본능을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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