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다산유적지를 찾았을까?
꽃과 잎피는 4월의 23일, 안성문인협회가 문학기행으로 다산유적지를 찾아가니 규모와 괸리가 흡족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봉건시대에 75년 생애를 파란만장한 삶을 치열하게 사셨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그 학문의 산맥과 사상은 높고 깊고 다양하여 헤아리기조차 힘든 사상의 바다를 시간이 부족했지만, 팔당호수와 함께 살피며 즐겼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안성은 문향과 예향의 고장으로서 자부심과 함께 지금 ‘동아시아 문화도시’로 선정될 만큼 자부심을 가졌었는데 오늘은 새로운 세계에서 또 다른 생각을 하려고 마음 먹고 문화관광해설사(진혜령)의 설명에 귀가 쫑긋한 것은 조리있게 해설하여 기억이 새롭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산에 심취한 사람들은 다산을 가리켜 “조선 후기 대표적인 개혁사상가, 모범지식인, 성리학(주자학)에 매몰된 조선 지식인들을 강력 비판하며 경전과 전통유학을 실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집대성하여 주자에 견주는 위대한 사상가, 가장 많은 540여 권을 저술하여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판하며 중국 역사서를 역 추적해 『아방강역고(我邦彊域考)』에서 우리 고대사를 재정립한 역사지리학자, 동학혁명의 실마리를 제공한 역성혁명론자, 베트남 통일의 아버지 호찌민의 정신적 스승, 서학 사상의 개척자, 세계 지성사에 내놔도 부족함이 없는 동양의 사회계약론자, 기중기를 창안한 조선의 엔지니어, 혁명을 꿈꾼 시인, 법학자, 의학자 등” 다산을 압축, 소개받으며
우리는 왜 이토록 다산에 열광하며 삶과 사상을 배우고 싶어 하는가? 수많은 활동 중 다산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다산은 타고난 천재에다 5대에 걸쳐 옥당을 지낸 금수저 가문에서 태어나 훌륭한 문중의 아내를 만나고 정조대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삶의 절반 가량은 굴곡 없이 승승장구하며 성공적이었다. 특히 20대에 수차례 과거시험에 수석 합격했고 수시로 성균관 유생들과 신료들 앞에서 열린 정조의 책문(策問)장에서 국가 정책과 정치 현안을 놓고 정조와 스스럼없이 밤샘 끝장토론을 벌이면서 대책을 제시하는 등 정조대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등등 해설은 끝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감동과 새로움에 마음을 가라앉히며 깊은 생각에 침장중인데 시간이 부족하였으며 아쉬움을 남기며 다음 일정으로 다산유적지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만해기념관으로 이동하면서 민족의 젖줄인 한강을 중심으로 남양주시와 광주시의 자연환경과 근현대사에서 역사적 위치를 살피며 여러 생각에 잠기다가 어느덧 남한산성에 도착하여 제107주년 3·1절 기념 ‘3·1정신 선양 애국지사전’(3~4월)을 기획, 전시답게 볼 수 있어 폭넓게 관람 아닌공부하는 기회를 가졌다.
스님!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1879~1944, 충남 홍성출신)은 민족의 선각자로서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 옥중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독립은 인간의 기본정신이요, 민족의 자존심이며
일제의 회유와 압박을 끝내 거부하였고 불심으로 애국하신 흔적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전시물마다 관장님의 세세한 해설은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으며 일제치하의 암울할 때 『님의 침묵』으로 우리 정신과 한글 운률로 표기하여 불후의 명저이며 불교개혁을 위해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을 저술하셨고 『유심』을 창간하여 언론을 통해 불교 대중화에 앞장섰으며 진지하신 해설에 더 보고싶고 듣고싶은 아쉬움은 훗날을 기약하면서 손을 흔들었으니 4월의 청명한 하늘 아래 삼라만상이 우릴 반기는 기쁨에 경기도는 우리나라의 허리로써 역경과 발전을 지탱하여 왔다는 사실에 자부심과 머리가 숙여진다
사상과 실천으로서 나라를 지키시며 글로써 대중을 교화시킨 선각자의 행적을 살피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안성맞춤의 고장, 안성을 더 살피고 새기며 다듬어야 하는 소명이 우리 문인에게도 있다는 작은 다짐도 해보았다.
(문화관광해설사, 안성문인협회 고문 임충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