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이 담보된 독창성을 찾아서>
윤대녕(소설가)
느닷없이 이렇게 말씀드리면 낯설 텐데, 최근 저는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영화라든가 소설 등에 대해 관심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습니다. 환타지라고까지 부를 수는 없지만, 이른바 공상과학 소설, 미래소설이라고 부르는 일단의 영화들, 예컨대 [블레이드 러너]라든가 열반(涅槃)이라는 의미의 [너바나] 등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소설 쪽에서도 꽤 있는 모양이고, 근래 그런 소설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 典型)이 형성될 시기에 와 있지 않은가 생각되었습니다.
지금은 영상시대가 가고 난 다음, 인터넷과 디지털 시대가 급격하게 다가오고 있는 시점입니다. 디지털화된 세계 속에서의 인간 존재의 정체성의 문제성과 맞물려, 특히 [블레이드 러너]에 나왔던 정체성을 상실한 존재감과 자아(自我)의 문제들은 더 이상 영화 속의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영화들을 접하면서 미국, 일본,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급속히 자본화된 인간을 앞질러 발전되었던 과학 기술, 자본주의 산업 속에서 우리 존재를 증명해야 될 것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들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더 이상 미래소설의 개념이 아니고, 우리 문학과 소설에서도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소설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예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90년대의 우리 소설은 소재의 다양화도 충분치 못하고, 상상력의 측면에서도 가까운 일본 소설에 비해서도 못 미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반성과 함께 폭 넓은 예술적 사유를 포함한 문학 전반의 갱신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봅니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도래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이상 거역할 수 없이 밀려드는 디지털 세계에서 문학 생산자의 고민, 독자의 고민과 맞물려서 새로운 해답,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 한 기둥인 문화 생산자들, 특히 문학 생산자들의 책임을 근래 들어 더욱 절감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진정성과 순정성을 가지고 있던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앞에 말씀드린 부분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미국과 일본처럼 스티븐 킹이라든가 정글리 샴 등과 같은 이들이 소설을 비롯한 문학 독자들을 빼앗아가 버리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런 전망하에서 위기감과 동시에 문학 생산자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내 문학의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저는 1990년도에 작가로서 등단을 했습니다. 소설을 비롯하여 제가 저술한 책들에 국한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80년대에 대학 생활을 보내면서 청년운동이라든가 사회운동에 동참했던 사람의 하나로서 90년대에 등단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동안 심적 압박을 많이 받아 왔습니다. 또한 그 시대가 요구했던 리얼리즘 문학에 동참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패러다임에 바탕하여 소설 쓰기를 해 나갈 것인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등단 후 처음 2, 3년간 작가로서 느꼈던 직무감을 포함한 자기 고민이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 제 생각으로는 리얼리즘 작품들이 사회 변혁과 변화에 기여한 것을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런 작품들이 지닌 체제에 대한 비판적 요소들이 역설적으로 체제 구축의 종속적 요소로 흡수되면서, 그 시대의 체제 자체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도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즉 문학 텍스트라는 것은 정치·사회의 윤리, 즉 인간이 제도적으로 구축해 놓은 것들을 뛰어넘는 우주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시간대를 포함해서 앞뒤로 크게 열린 상징적인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 사회적인 제도 및 윤리·규범을 뛰어넘는 것들을 제 소설을 통해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 후에 몇 권의 책들 속에 그러한 징후가 나타나 있습니다만, 어떤 평론가는 '존재의 시원(始原)으로의 회귀'라는 표현으로 묶기도 했습니다. 가령 저는 계량주의적 시간,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시간대가 아니라 우주적 시간대, 보다 더 과학적이고 보다 더 정확한 철새의 이동이라든가 연어의 회귀(回歸)와 같은 우주 생리적 시간대와 풍경의 흐름 속에 인간 존재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아무리 자본주의하에서 제도와 규범과 시대의 흐름이 바뀌더라도, 변함없이 그것이 환원되고 있고, 회귀하고 있고, 윤회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저의 그런 세계관으로 인해서 제 소설이 7, 80년대의 소설들과 구분되기를 바랐습니다. 초기 2, 3년 동안에는 이런 고뇌들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작품들을 써내기 시작했습니다. 등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예민한 신인작가의 조그만 목소리가 작품으로 담겨, 어떻게 읽히고 어떻게 평이 되고 하는 것들에 주목하면서,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매번 어려운 자기 고민에 휩싸여야 했습니다. 이러다가 아무도 읽어 주지 않거나 받아들여 주지 않아서, 문단 안에서조차 독자가 없는 작가가 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조차 느끼면서 작품을 써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운이 좋았던 탓인지, 작가가 되기 시작한 후부터 일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서부터 문화적 기호에 따라 매니아 그룹을 형성한 분출력과 맞아떨어진 부분이 있었는지, 제 작품들이 읽혔다는 걸 지금도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닮은 두 연주자 필요 없듯, 새로움을 들고 나와야
특히 신인 작가의 출현, 또 연대가 바뀔 때마다 그 둘 다에 요구되는 것은 새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의 경우, 아무리 뛰어난 연주라도 누군가와 닮은 연주를 하게 되면 두 사람의 똑같은 연주자는 필요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문학 안에서 개성이 담보되지 않고 여타의 작품들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독창성이 없다면 그 문학의 존재 가치는 별로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각각의 독특한 자기 양식과 자기의 새로움을 갖고 있어야만 같은 규범 안에서 제도 안에서 다행하게 그것들이 반응하고 합의하여 어떤 것들을 변형시키면서 사회적인 발전, 인간적인 질의 향상을 가져온다고 봅니다. 반면에 너무 비슷비슷한 리얼리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와서 같은 양상으로 문학을 제한한다든가 하는 것은, 그 사회의 문화 토대가 약한 탓도 있지만 작가들이며 문화 생산자들이 타파해야 할 몫일 것입니다.
현대문학에서 흔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1인칭 소설, 즉 사소설'이 주류를 이루는 것의 위험성입니다. 그러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등한시, 또는 무관심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우리 문단의 경우 일본의 '사소설(私小說)'과 구별되는 '사적 소설'로 전락시킨 책임을 저를 포함하여 우리 작가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2, 3년간의 고민을 통해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일반 소설과 같은 경우에는 예술미학적인 기준을 두고 양산되었던 데 비해서, 우리 문학은 많은 문화적 패러다임이 생산되고, 매니아 집단이 형성되고, 칠팔십년대의 억눌렸던 문화적 요소들이 튀어나오면서 휩쓸린 나머지, 영화라든가 영상 등 다른 문화 코드들에 따라가는 요소가 있었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이것은 90년대 문학을 해온 한 사람으로서의 자평(自評)입니다.
장편 속에도 서사성 못지않은 시의 정서가
저는 그 동안 제 장편에 서사성의 얼개가 약하지 않느냐, 타인에 대한 관심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평가들을 들어 왔습니다. 저 자신을 그런 지적들에 대해 공감하기 힘들었고, 또 그를 두루 포함할 수 있는 소설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좀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느냐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는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타자 즉 저를 둘러싼 범사회적인 문제를 포함한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와의 관계가 구체화되면서 작품이 좀 달라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은 드러나지 않더라도 성숙하게 달라져야 되지 않나 하는 요구들을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대학생 시절 이래 소설을 쓰면서도 시를 지나치게 많이 읽은 탓인지, 문장에 많이 집착해온 편입니다. 그래서 단편 한편을 쓰면서도 여러 번 고쳐 쓰는 통에 탈고할 즈음에는 상당히 지치게 됩니다. 제 경우에는 단편을 두 편 정도 탈고하고 나면 장편 한 편을 썼을 때와 마찬가지의 에너지가 소모되곤 합니다.
그 동안 저에게 장편적인 서사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했고, 그것이 장편 역량의 한 요소일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가능하면 말을 줄여야 하지 않는가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이 제 소설 쓰기의 기본이었습니다. 어떤 작품이든지 밀도와 반향, 울림의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문장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문장의 미학적 요소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문장과 절제된 문장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나치게 작용해서, 단편이나 중편 하나씩을 탈고할 때마다 지나치게 피로감을 느껴오곤 했습니다. 단편 하나를 마친 다음에는 한 달씩 여행하는 식의 과도한 투자를 하면서 지금까지 중·단편들을 써 왔습니다.
그래서 근래에는 문장에서 놓여나면 좋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편한 문장을 쓰자는 게 아니라, 문장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표현 대상이라거나 인물의 성격이라든가, 또는 세계 자체의 변질이 심해지지 않나 하는 성찰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 경우에 언어를 함부로 쓸 수 없었던 이유는 불교 취향의 책들에 심취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깃들인 무궁(無窮)이라든가 선문답(禪問答) 들에서는 침묵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바슐라르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받은 이미지, 기호의 영향 때문에 말을 글로 옮길 때 상당히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적 글쓰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소설의 문장이기보다는 산문적인 요소, 인문학적인 요소가 많을 글이어서 제 소설 쓰기에서 받아들이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었습니다. 자기만의 문체를 만들어내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지만, 이제 문장에서 놓여나 직접적인 세계성, 직접적인 타인, 현사회적인 것들에 바탕한 작품이 저에게 나왔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가 언어를 여전히 쓰기 어려웠던 부분은 글을 쓰면서도 언어 자체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이라는 건 의미를 지우는 장치이기도 하고, 흔히 곧잘 왜곡되어 듣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인상파 화가들이 빛의 각도에 따라 사물이 달라 보임을 지적했듯이 언어 자체가 순간적으로 변형을 거듭하기 때문에, 과연 이것이 진실이나 본질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늘 하면서 글을 써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가진 느림의 미학을 십분 발휘할 때
옛날에 영국의 한 유명한 배우가 잠자는 역할을 맡았는데, 언론으로부터 연일 찬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그 배우는 정말 잠을 자 버리고 말았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연일 찬양 일색이던 신문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악평이 실렸답니다. 과연 실제로 잠을 자는 주체, 그리고 이쪽에서 보는 관찰자 측, 연기를 하고 글을 써야 하는 언어라는 프리즘을 통한 창작 실제와의 간격… 이런 것들 때문에 많은 갈등을 하게 마련입니다. 과연 언어가 진실이나 실체를 포착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일상 생활에서도 말을 줄이는 편입니다. 그 대신 영상이라든가 음악에서 전달되어 오는 진실의 효과, 순간적인 효과 같은 것들과 제 언어라 일치되는 순간을 기다리거나 찾는 데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리고, 삶의 입장에서 보면 거기에 너무나 많은 투자를 하면서 글을 써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혹시 재능이 없는 사람이 부질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지 않는가 하는 고민에 휩싸일 때도 적지 않습니다.
다행히 여행을 통해서 다른 말을 쓰는 민족이라든가 다른 풍습, 다른 신화 체계, 다른 관습, 문화의 유형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저도 이제 한국인이고, 한국어를 갖고 있으므로 이 방법밖에 없지 않느냐는 걸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언어에 대한 신뢰감이 회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상 문제는 써야 한다는 것이고, 지금까지 내가 써왔던 것과 어떻게 다르게 쓸 것인가, 다른 젊은 작가들이 쓰는 것과 어떻게 다른 텍스트를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귀착됩니다. 그리고 좀더 의미를 넓혀 간다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들어낸 작품을 읽어주는데, 그 사람들에 대한 갚음으로서의 새로운 부분, 새로운 지향, 새로운 성격,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할 수 없을까로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 작품이 얼마만큼 읽히고 사후에도 남고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데, 동시대를 살아가고 저보다 전시대거나 몇 십년을 간격으로 아우를 수 있는 이들에게 잘 읽히는 작품을 써낼 수 없을까 늘 고민하게 됩니다. 자꾸 시간이 갈수록 많은 독자분들이 읽어 주었던 작품 그 자체에 부담도 느껴지고, 더 좋은 새로운 작품을 써낼 수 있다면, 혹은 더 많은 독자들이 읽을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의 충돌 속에서 고민하는 일이 근래에는 즐거워졌습니다. 또 글쓰는 일이 조금씩 행복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이게 저에게 가장 적합하고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요령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텐데, 저는 작가로서 책임을 느낀다는 걸 아주 부담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가령 작가의 죽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텍스트를 생산해 내면 그것은 이미 공유체가 되기 때문에 작가의 것도 아니고, 이미 사회의 생산물이 되는 것입니다. 비평가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이 일고서 소화하고, 버리고 하는 텍스트 자체를 생산해 내고 나서 작가는 잊혀지고 떠나 버리는 무형한 존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소설가라는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기도 하지만 내 삶의 부분이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문단이라든가 공개적인 자리를 꺼려 왔습니다.
그것뿐이었고 다른 일은 할 수도 없었고, 만약 제게 다른 재능이 있었다 해도 아마 글쓰는 쪽으로 다 고여 들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읽히는가는 열외로 치고 역시 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지 않는가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최근 2, 3년 사이에 늦되게 찾아왔다는 것이 저로서도 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입니다. 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전혀 처음부터 글쓰기를 시작하는 느낌도 듭니다.
지금의 속도감, 현란함, 그리고 상당한 역량을 가진 문화매체들 사이에서 이 느림의 속성을 가진 문학, 언어 기호라는 것이 얼마나 작용을 할 수 있고 인간 삶에 보탬이 되고 의미를 생산할지 아직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걸 떠나서 나한테 글을 써야겠다는 정염과 열정이 남아 있다는 부분과 다른 아무 재주도 없어 오직 이것만 해야 된다는 당위와 단순한 결론이 사람을 오히려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더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고 봅니다. 그래서 문학적인 자기 관리를 하면서 좋은 글을 생산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한국 문화예술 진흥원 2000 금요일의 문학이야기 강연내용)
위 내용을 유첨하오니 출력해서 보셔도 됩니다.
윤대녕(소설가)
느닷없이 이렇게 말씀드리면 낯설 텐데, 최근 저는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영화라든가 소설 등에 대해 관심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습니다. 환타지라고까지 부를 수는 없지만, 이른바 공상과학 소설, 미래소설이라고 부르는 일단의 영화들, 예컨대 [블레이드 러너]라든가 열반(涅槃)이라는 의미의 [너바나] 등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소설 쪽에서도 꽤 있는 모양이고, 근래 그런 소설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 典型)이 형성될 시기에 와 있지 않은가 생각되었습니다.
지금은 영상시대가 가고 난 다음, 인터넷과 디지털 시대가 급격하게 다가오고 있는 시점입니다. 디지털화된 세계 속에서의 인간 존재의 정체성의 문제성과 맞물려, 특히 [블레이드 러너]에 나왔던 정체성을 상실한 존재감과 자아(自我)의 문제들은 더 이상 영화 속의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영화들을 접하면서 미국, 일본,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급속히 자본화된 인간을 앞질러 발전되었던 과학 기술, 자본주의 산업 속에서 우리 존재를 증명해야 될 것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들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더 이상 미래소설의 개념이 아니고, 우리 문학과 소설에서도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소설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예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90년대의 우리 소설은 소재의 다양화도 충분치 못하고, 상상력의 측면에서도 가까운 일본 소설에 비해서도 못 미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반성과 함께 폭 넓은 예술적 사유를 포함한 문학 전반의 갱신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봅니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도래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이상 거역할 수 없이 밀려드는 디지털 세계에서 문학 생산자의 고민, 독자의 고민과 맞물려서 새로운 해답,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 한 기둥인 문화 생산자들, 특히 문학 생산자들의 책임을 근래 들어 더욱 절감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진정성과 순정성을 가지고 있던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앞에 말씀드린 부분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미국과 일본처럼 스티븐 킹이라든가 정글리 샴 등과 같은 이들이 소설을 비롯한 문학 독자들을 빼앗아가 버리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런 전망하에서 위기감과 동시에 문학 생산자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내 문학의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저는 1990년도에 작가로서 등단을 했습니다. 소설을 비롯하여 제가 저술한 책들에 국한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80년대에 대학 생활을 보내면서 청년운동이라든가 사회운동에 동참했던 사람의 하나로서 90년대에 등단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동안 심적 압박을 많이 받아 왔습니다. 또한 그 시대가 요구했던 리얼리즘 문학에 동참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패러다임에 바탕하여 소설 쓰기를 해 나갈 것인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등단 후 처음 2, 3년간 작가로서 느꼈던 직무감을 포함한 자기 고민이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 제 생각으로는 리얼리즘 작품들이 사회 변혁과 변화에 기여한 것을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런 작품들이 지닌 체제에 대한 비판적 요소들이 역설적으로 체제 구축의 종속적 요소로 흡수되면서, 그 시대의 체제 자체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도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즉 문학 텍스트라는 것은 정치·사회의 윤리, 즉 인간이 제도적으로 구축해 놓은 것들을 뛰어넘는 우주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시간대를 포함해서 앞뒤로 크게 열린 상징적인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 사회적인 제도 및 윤리·규범을 뛰어넘는 것들을 제 소설을 통해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 후에 몇 권의 책들 속에 그러한 징후가 나타나 있습니다만, 어떤 평론가는 '존재의 시원(始原)으로의 회귀'라는 표현으로 묶기도 했습니다. 가령 저는 계량주의적 시간,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시간대가 아니라 우주적 시간대, 보다 더 과학적이고 보다 더 정확한 철새의 이동이라든가 연어의 회귀(回歸)와 같은 우주 생리적 시간대와 풍경의 흐름 속에 인간 존재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아무리 자본주의하에서 제도와 규범과 시대의 흐름이 바뀌더라도, 변함없이 그것이 환원되고 있고, 회귀하고 있고, 윤회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저의 그런 세계관으로 인해서 제 소설이 7, 80년대의 소설들과 구분되기를 바랐습니다. 초기 2, 3년 동안에는 이런 고뇌들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작품들을 써내기 시작했습니다. 등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예민한 신인작가의 조그만 목소리가 작품으로 담겨, 어떻게 읽히고 어떻게 평이 되고 하는 것들에 주목하면서,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매번 어려운 자기 고민에 휩싸여야 했습니다. 이러다가 아무도 읽어 주지 않거나 받아들여 주지 않아서, 문단 안에서조차 독자가 없는 작가가 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조차 느끼면서 작품을 써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운이 좋았던 탓인지, 작가가 되기 시작한 후부터 일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서부터 문화적 기호에 따라 매니아 그룹을 형성한 분출력과 맞아떨어진 부분이 있었는지, 제 작품들이 읽혔다는 걸 지금도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닮은 두 연주자 필요 없듯, 새로움을 들고 나와야
특히 신인 작가의 출현, 또 연대가 바뀔 때마다 그 둘 다에 요구되는 것은 새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의 경우, 아무리 뛰어난 연주라도 누군가와 닮은 연주를 하게 되면 두 사람의 똑같은 연주자는 필요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문학 안에서 개성이 담보되지 않고 여타의 작품들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독창성이 없다면 그 문학의 존재 가치는 별로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각각의 독특한 자기 양식과 자기의 새로움을 갖고 있어야만 같은 규범 안에서 제도 안에서 다행하게 그것들이 반응하고 합의하여 어떤 것들을 변형시키면서 사회적인 발전, 인간적인 질의 향상을 가져온다고 봅니다. 반면에 너무 비슷비슷한 리얼리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와서 같은 양상으로 문학을 제한한다든가 하는 것은, 그 사회의 문화 토대가 약한 탓도 있지만 작가들이며 문화 생산자들이 타파해야 할 몫일 것입니다.
현대문학에서 흔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1인칭 소설, 즉 사소설'이 주류를 이루는 것의 위험성입니다. 그러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등한시, 또는 무관심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우리 문단의 경우 일본의 '사소설(私小說)'과 구별되는 '사적 소설'로 전락시킨 책임을 저를 포함하여 우리 작가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2, 3년간의 고민을 통해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일반 소설과 같은 경우에는 예술미학적인 기준을 두고 양산되었던 데 비해서, 우리 문학은 많은 문화적 패러다임이 생산되고, 매니아 집단이 형성되고, 칠팔십년대의 억눌렸던 문화적 요소들이 튀어나오면서 휩쓸린 나머지, 영화라든가 영상 등 다른 문화 코드들에 따라가는 요소가 있었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이것은 90년대 문학을 해온 한 사람으로서의 자평(自評)입니다.
장편 속에도 서사성 못지않은 시의 정서가
저는 그 동안 제 장편에 서사성의 얼개가 약하지 않느냐, 타인에 대한 관심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평가들을 들어 왔습니다. 저 자신을 그런 지적들에 대해 공감하기 힘들었고, 또 그를 두루 포함할 수 있는 소설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좀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느냐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는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타자 즉 저를 둘러싼 범사회적인 문제를 포함한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와의 관계가 구체화되면서 작품이 좀 달라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은 드러나지 않더라도 성숙하게 달라져야 되지 않나 하는 요구들을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대학생 시절 이래 소설을 쓰면서도 시를 지나치게 많이 읽은 탓인지, 문장에 많이 집착해온 편입니다. 그래서 단편 한편을 쓰면서도 여러 번 고쳐 쓰는 통에 탈고할 즈음에는 상당히 지치게 됩니다. 제 경우에는 단편을 두 편 정도 탈고하고 나면 장편 한 편을 썼을 때와 마찬가지의 에너지가 소모되곤 합니다.
그 동안 저에게 장편적인 서사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했고, 그것이 장편 역량의 한 요소일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가능하면 말을 줄여야 하지 않는가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이 제 소설 쓰기의 기본이었습니다. 어떤 작품이든지 밀도와 반향, 울림의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문장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문장의 미학적 요소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문장과 절제된 문장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나치게 작용해서, 단편이나 중편 하나씩을 탈고할 때마다 지나치게 피로감을 느껴오곤 했습니다. 단편 하나를 마친 다음에는 한 달씩 여행하는 식의 과도한 투자를 하면서 지금까지 중·단편들을 써 왔습니다.
그래서 근래에는 문장에서 놓여나면 좋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편한 문장을 쓰자는 게 아니라, 문장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표현 대상이라거나 인물의 성격이라든가, 또는 세계 자체의 변질이 심해지지 않나 하는 성찰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 경우에 언어를 함부로 쓸 수 없었던 이유는 불교 취향의 책들에 심취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깃들인 무궁(無窮)이라든가 선문답(禪問答) 들에서는 침묵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바슐라르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받은 이미지, 기호의 영향 때문에 말을 글로 옮길 때 상당히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적 글쓰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소설의 문장이기보다는 산문적인 요소, 인문학적인 요소가 많을 글이어서 제 소설 쓰기에서 받아들이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었습니다. 자기만의 문체를 만들어내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지만, 이제 문장에서 놓여나 직접적인 세계성, 직접적인 타인, 현사회적인 것들에 바탕한 작품이 저에게 나왔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가 언어를 여전히 쓰기 어려웠던 부분은 글을 쓰면서도 언어 자체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이라는 건 의미를 지우는 장치이기도 하고, 흔히 곧잘 왜곡되어 듣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인상파 화가들이 빛의 각도에 따라 사물이 달라 보임을 지적했듯이 언어 자체가 순간적으로 변형을 거듭하기 때문에, 과연 이것이 진실이나 본질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늘 하면서 글을 써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가진 느림의 미학을 십분 발휘할 때
옛날에 영국의 한 유명한 배우가 잠자는 역할을 맡았는데, 언론으로부터 연일 찬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그 배우는 정말 잠을 자 버리고 말았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연일 찬양 일색이던 신문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악평이 실렸답니다. 과연 실제로 잠을 자는 주체, 그리고 이쪽에서 보는 관찰자 측, 연기를 하고 글을 써야 하는 언어라는 프리즘을 통한 창작 실제와의 간격… 이런 것들 때문에 많은 갈등을 하게 마련입니다. 과연 언어가 진실이나 실체를 포착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일상 생활에서도 말을 줄이는 편입니다. 그 대신 영상이라든가 음악에서 전달되어 오는 진실의 효과, 순간적인 효과 같은 것들과 제 언어라 일치되는 순간을 기다리거나 찾는 데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리고, 삶의 입장에서 보면 거기에 너무나 많은 투자를 하면서 글을 써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혹시 재능이 없는 사람이 부질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지 않는가 하는 고민에 휩싸일 때도 적지 않습니다.
다행히 여행을 통해서 다른 말을 쓰는 민족이라든가 다른 풍습, 다른 신화 체계, 다른 관습, 문화의 유형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저도 이제 한국인이고, 한국어를 갖고 있으므로 이 방법밖에 없지 않느냐는 걸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언어에 대한 신뢰감이 회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상 문제는 써야 한다는 것이고, 지금까지 내가 써왔던 것과 어떻게 다르게 쓸 것인가, 다른 젊은 작가들이 쓰는 것과 어떻게 다른 텍스트를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귀착됩니다. 그리고 좀더 의미를 넓혀 간다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들어낸 작품을 읽어주는데, 그 사람들에 대한 갚음으로서의 새로운 부분, 새로운 지향, 새로운 성격,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할 수 없을까로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 작품이 얼마만큼 읽히고 사후에도 남고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데, 동시대를 살아가고 저보다 전시대거나 몇 십년을 간격으로 아우를 수 있는 이들에게 잘 읽히는 작품을 써낼 수 없을까 늘 고민하게 됩니다. 자꾸 시간이 갈수록 많은 독자분들이 읽어 주었던 작품 그 자체에 부담도 느껴지고, 더 좋은 새로운 작품을 써낼 수 있다면, 혹은 더 많은 독자들이 읽을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의 충돌 속에서 고민하는 일이 근래에는 즐거워졌습니다. 또 글쓰는 일이 조금씩 행복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이게 저에게 가장 적합하고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요령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텐데, 저는 작가로서 책임을 느낀다는 걸 아주 부담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가령 작가의 죽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텍스트를 생산해 내면 그것은 이미 공유체가 되기 때문에 작가의 것도 아니고, 이미 사회의 생산물이 되는 것입니다. 비평가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이 일고서 소화하고, 버리고 하는 텍스트 자체를 생산해 내고 나서 작가는 잊혀지고 떠나 버리는 무형한 존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소설가라는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기도 하지만 내 삶의 부분이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문단이라든가 공개적인 자리를 꺼려 왔습니다.
그것뿐이었고 다른 일은 할 수도 없었고, 만약 제게 다른 재능이 있었다 해도 아마 글쓰는 쪽으로 다 고여 들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읽히는가는 열외로 치고 역시 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지 않는가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최근 2, 3년 사이에 늦되게 찾아왔다는 것이 저로서도 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입니다. 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전혀 처음부터 글쓰기를 시작하는 느낌도 듭니다.
지금의 속도감, 현란함, 그리고 상당한 역량을 가진 문화매체들 사이에서 이 느림의 속성을 가진 문학, 언어 기호라는 것이 얼마나 작용을 할 수 있고 인간 삶에 보탬이 되고 의미를 생산할지 아직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걸 떠나서 나한테 글을 써야겠다는 정염과 열정이 남아 있다는 부분과 다른 아무 재주도 없어 오직 이것만 해야 된다는 당위와 단순한 결론이 사람을 오히려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더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고 봅니다. 그래서 문학적인 자기 관리를 하면서 좋은 글을 생산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한국 문화예술 진흥원 2000 금요일의 문학이야기 강연내용)
위 내용을 유첨하오니 출력해서 보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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