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아 들으라(암3:1-8)-2023.9.17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관계입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대리인들을 내세워서 언약을 선포하셨고 때로는 갱신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숱한 언약들이 많습니다. 구약에는 아담언약으로부터 시작해서 노아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 모세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 같은 굵직한 언약들이 나오고, 시대마다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켜줍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모든 언약들이 새 언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요, 새 언약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히 성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이 복음입니다.
물론 언약도 크게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나눌 수 있지요.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뉘는 것이지요. 이른바 율법으로 맺어진 언약이 옛 언약이요, 복음으로 맺어진 언약이 새 언약인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나를 묶는 띠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나를 하나되게 하는 벨트인 셈이지요. 그래서 언약은 파기될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신실하신 하나님은 절대 파기하실 수 없는 불변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고 언약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효력은 상실된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을 파기한 전적인 책임은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취소하시거나 변개시키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언약을 지킬 수 있도록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보이십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바보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쉽게 약속하고 쉽게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해도 하나님은 당장 우리와의 관계를 끊어버리시거나 파기하지 아니하십니다.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이는 비록 망나니 같은 자식이라도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 없는 원리입니다. 하물며 사람도 그리할진대 하나님은 오죽 하시겠습니까? 실제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모습을 보면 더욱 실감이 납니다. 시대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사고뭉치 같은 역할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물론 징계는 있었을지라도 그들을 완전히 심판한 적은 없습니다.
(1)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했던 그 이름으로 지구촌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주변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열방들은 자기들의 고유한 이름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심판을 받은 것이지요. 물론 그 땅은 그대로 남아 있을지라도 그들의 이름이 없어진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아슬아슬한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오뚝이처럼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본문 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방과 열방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오직 이스라엘만 배타적으로 사랑하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지요.
그만큼 하나님은 이스라엘 대해 바보이셨던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들도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는 바보 중에 바보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변변치 않아 보여도 부모 눈에 보이는 자식은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흔히 딸 바보, 아들 바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바보이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사랑하신 이유는 사랑받을만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른바 잘나고 똑똑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작고 볼품없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이방과 열방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2장9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지요. 그들을 그렇게 여기시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들을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죄와 사망과 세상 어두운 곳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가장 어두웠던 시간, 어두웠던 장소는 어디일까요?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어두웠던 장소와 시간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였을 것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역사 가운데 가장 어둡고 힘든 곳이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시간과 장소를 말할 수 있지만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웠던 장소는 애굽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곳에서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래서1절에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하나님’이라고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공동체와의 첫사랑인 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두운 곳에서 불러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입니다.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기이한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 어떤 빛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빛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탄생부터가 기이한 빛이셨습니다. 주님은 동방박사들을 인도하던 이상한 별이요, 기이한 빛이셨던 것입니다(마2:9). 그 빛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눅2:32). 그 빛은 생명의 빛이셨습니다(요1:4).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이한 빛이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어둠에 있는 우리를 불러냄은 하나님의 기이한 빛이신 예수님께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어두운 데 거하는 영혼을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이요, 또한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는 말은 오직 그분의 말씀을 전하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분의 변화와 함께 그 신분에 합당한 사명을 부여해주시겠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만들어 이끌어 가시겠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대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회초리가 아니라 몽둥이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경고하십니다. ‘들으라’는 말은 아모스서에 3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래서 세 번의 ‘들으라’는 설교가 등장합니다(3:1,4:1,5:1). ‘들으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너무나 친숙한 단어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들으라’는 표현은 신명기6장4절의 쉐마입니다. 거기에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말이 나옵니다. ‘들으라’는 말은 쉐마입니다.
쉐마는 이스라엘의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것입니다. 신명기의 쉐마는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어감으로 들립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친숙하기 위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것이지요. 마치 어머니의 인자한 가르침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아모스서에 나오는 ‘들으라’는 단어는 분위기가 심각합니다. 매우 무겁고 엄중합니다. 금방이라도 호통을 치고 벌이 내려질 것 같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벼르고 벼르다가 앞으로 나오라고 하시는 분위기입니다. 당장 잘못을 추궁하며 문책할 것 같습니다.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 앞에서 호흡이 곤란할 지경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들을 이스라엘 가운데 보내셔서 당신의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수많은 선지자들의 외침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귀머거리 독사처럼 귀를 막아버린 것이지요. 선지자들을 때리고 잡아 죽였습니다. 심지어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의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더러운 귀신들의 소리를 듣는데 민감했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모스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아모스는 남 유대 출신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분 또한 그렇게 내놓을만한 신분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신분을 감추지 않고 발설합니다. 그는 드고아의 목자출신입니다. 그러면서도 뽕나무를 재배하는 농부라는 것입니다(암7:14). 아모스서7장14절과15절에서 자기 신분을 이렇게 밝힙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에 아마샤라는 거짓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모스를 향해 북 이스라엘에서 예언하지 말라고 겁박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선지자로 발탁하셔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자기 스스로 선지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를 북 이스라엘로 보내신 이유는 그곳에 선지자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선지자가 있는데 참 선지자가 아니라 거짓 선지자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모스라는 평신도 선교사를 발탁하여 북이스라엘 선지자 파송을 하신 것입니다. 물론 북 이스라엘을 타킷으로 하여 보내신 것이지요. 그러나 북 이스라엘만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의 죄악을 동시에 겨냥하여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글로벌 선지자였던 셈이지요. 그래서 아모스서는 1장부터 주변 나라들의 죄악을 심판하시겠다는 경고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주변에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던 이방 나라들의 서너 가지 죄악을 폭로합니다.
구체적으로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악, 가사의 서너 가지 죄악, 두로의 서너 가지 죄악, 에돔의 서너 가지 죄악, 암몬의 서너 가지 죄악, 모압의 서너 가지 죄악입니다. 한마디로 다들 이스라엘과 깊은 관련이 있는 주변 나라들이요, 그들의 죄악을 경고하신 후에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서너 가지 죄악이라는 것은 죄에 죄가 더해진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에 3이라는 수는 완전수입니다. 그런데 서너 가지 죄악이라 함은 죄의 관영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죄에 죄가 덧입혀져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궁극적인 경고는 이스라엘에 관한 것입니다. 비록 자기 백성들이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묵과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편파적일 정도로 사랑하신 것은 맞으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의 죄악까지 덮어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은 맞으나, 이스라엘의 죄악을 사랑하신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른바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은 분명하나 이스라엘의 죄악은 보응하시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을 그대로 전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성품을 적절하게 사용하십니다. 사랑을 거절하는 자는 공의로 다스리고, 공의를 수용하는 자는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이른바 사람은 사랑으로 다스리시나, 죄악은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두 가지 성품을 적절하게 효과적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지요.
아모스를 이스라엘 선지자로 보낸 당시 이스라엘은 비교적 안정과 부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여로보암 2세때 번영과 부요로 교만해진 것이지요. 사치와 안락은 물론이요, 부의 분배가 균형을 잃은 때였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종교적인 부패가 심각한 때였었지요.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고 심판을 촉구한 것입니다. 사실상 아모스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스라엘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선포한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이 자기의 비밀을 아모스 선지자의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본문 7절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선지자는 결코 무서울 것도 없고 거칠 것이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이스라엘아 하나님이 쳐서 이르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들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점잖은 표현이 아닌 것이지요. 매우 격앙되어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1절에서 ‘쳐서 이르시는 말씀’은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말씀이요, 매우 심각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히브리어 원본에는 이 단어가 없습니다. 원문에는 ‘너희 위에서’라는 말로 되어 있지요. 이 말은 하나님이 위에서 내리누르시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엄한 아버지처럼 명령하시는 것이지요. 혹은 잔뜩 화가 나신 선생님처럼 말입니다. 경고조의 말이에요. 우리는 이 간단한 단어 속에 담긴 분위기를 직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당장 불호령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의도를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을 보응하시겠다는 것입니다(2절).
(2) 언약을 파기하는 이스라엘
하나님이 보응하시겠다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세상 어떤 민족과도 맺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당신의 존재를 부각시키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는지를 밝히시는 것이지요. 첫사랑을 언급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첫사랑은 언제부터일까요? 물론 신학적으로는 태초부터이겠지요.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애굽에서부터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아무런 존재감 없이 살아가던 민족이었습니다. 당시 아무도 이스라엘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민족도 이스라엘에 관심이 없었고,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의 인권에 대하여 편들어주는 나라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같이 UN이라는 기구만 있었다면 그들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언감생심이지요.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그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계신 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시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음소리를 듣고 계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인권에 대해 너무나 가슴 아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별 볼일 없던 민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시선을 집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민족은 아닙니다. 일찍이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들어간 것도 하나님의 신묘한 섭리가 작동된 것이지요. 하나님이 먼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고, 나중에 야곱의 일가족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지요. 하나님의 특수한 목적을 따라 야곱의 일가족이 애굽으로 들어간 거예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야곱의 일가족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들어갔지만 하나님의 거시적인 플랜은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애굽에 들어간 요셉도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요, 그곳으로 들어간 야곱의 일가도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하나님 없는 민족들처럼 살아온 것입니다. 요셉이 죽은 이후로 그들이 애굽에서 살아왔던 삶을 보면 하나님을 의식했던 부분이 전혀 없어요. 한마디로 신앙의 계대가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지요.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은 없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피해의식만 갖고 살았던 것이지요.
아무리 조상들이 신앙생활을 잘 했을지라도 자신들이 신앙을 갖지 못하면 불신앙인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불신자나 다름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주목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수많은 시간동안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포기하시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출애굽이 이스라엘의 첫사랑인 셈이지요. 물론 개인적으로 첫사랑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경험한 첫 사랑이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나라, 어느 민족이 그런 사랑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출애굽은 이스라엘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첫 사랑과 같은 것이었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신혼살림을 차릴 곳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가나안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출애굽하자마자 원망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그들의 첫 사랑은 하나님의 짝 사랑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맙니다. 첫사랑을 잊어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해도 하나님은 바보 같은 사랑, 짝사랑을 하시는 것입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역시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의 죄악이 서너 가지 죄악이라고 지적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유다의 서너 가지 죄악(24)과,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악(2:6)을 폭로하십니다.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오히려 심각했던 것이지요. 이방인들은 율법을 몰라서 범죄할지라도 이스라엘은 율법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지능적으로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하나님의 같은 사랑을 받은 자기 동족들끼리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솔직히 부모의 입장에서 형제끼리 싸우고 사랑하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은 시린 정도가 아니라 찢깁니다. 특별히 아모스 당시의 이스라엘의 죄악은 도를 넘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죄악을 참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그들의 죄악을 보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보응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보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3절을 보십시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고 세상과 짝하고 살았다는 것이지요. 믿음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동행은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같은 꿈을 갖고 같은 보폭으로 움직이는 것이지요. 동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목적지가 동일하다는 것이요, 비전이 동일하다는 것이며, 속도가 같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뜻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동행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을지라도 뜻이 하나되지 못하면 동행자체가 안됩니다. 세상살이도 그렇고 믿음생활은 더욱 그러합니다. 동업을 하다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파산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라도 뜻이 하나되지 못해 깨어지는 것입니다. 같은 목적지를 가다가도 뜻이 하나되지 못하여 가던 길을 포기합니다. 믿음은 더욱 그렇습니다. 믿음에 있어 마음이 하나되는 것, 이른바 뜻이 하나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목적을 가지고 전도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함께 1차전도 여행을 무사하게 마쳤습니다. 그런데 2차전도 여행을 준비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가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추천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단번에 반대합니다. 이유는 마가 요한이 그들과 함께 1차전도 여행을 떠났다가 중도에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물론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 입장에서는 너무나 황당했을 것입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다투는 일이 종종 있지요.
그래서 여행은 뜻을 같이 하는 자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행할 수 없습니다. 설령 여행을 같이 할지라도 여행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런 여행은 얼마나 피곤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여행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같이 가야 합니다. 결국 바울의 전도 여행은 새로운 팀이 결성되었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바나바는 마가요한을 데리고 2차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동행은 어려운 것입니다. 솔직히 믿음 안에서도 마음이 하나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믿음의 개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교회사역을 하다보면 의도는 좋으나 뜻이 하나되지 못해서 갈라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적은 같은데 뜻이 하나되지 못하면 동행이 어렵기 때문이지요.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있지요. 같은 침대를 쓰고 함께 잠을 자는데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몸 따로 마음 따로’인 것이지요. 그러면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이지만 믿음은 더욱 그러합니다. 몸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면서 마음이 딴 곳에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간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어떤 것입니까? 영적인 간음입니다. 영적간음은 하나님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죄악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영적상태를 비유로 고발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하면서 세상의 더러운 우상들과 의합하며 살았다는 것이지요. 세상과 짝하며 살았던 거예요.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폭로합니다(4-8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응하실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폭로하는 것이지요. 그는 자기를 마치 포효하는 사자에 빗대어 설명합니다(8절). “사자가 부르짖은 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는 것이지요.
동물의 왕인 사자가 으르렁거리면 숲속의 모든 동물들이 두려워하거늘, 하물며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외침에 누가 두렵지 아니하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비밀을 선지자들의 입에 넣어주시니 누가 예언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자기의 예언이 하나님이 넣어주신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8절에 나오는 부르짖는 사자를 자신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사자가 부르짖는 것은 손에 무언가 움킨 것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자는 움킨 것이 있어야 수풀에서 부르짖는 것입니다(4절). 그리고 먹잇감이 죽어야 포효를 멈추는 것입니다. 먹잇감이 살아 있는 한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으르렁거립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사자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넣고서 포효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포효하지 않습니다. 주변에 있는 다양한 성도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외칠 줄 모릅니다. 혹시라도 시험에 들까봐서 눈치 보느라고 잠잠합니다. 짖지 못하는 개와 같습니다. 부르짖지 못한 사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하나님이 그의 입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마치 움킨 것을 가진 사자처럼 말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을 향한 선지자 아모스는 사자처럼 외쳤습니다. 그들에게 맡겨주신 이스라엘이라는 먹잇감이 죽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죽어야 사자의 포효는 멈추는 법이거든요. 그들은 여전히 선지자의 외침에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의 외침에 항복해야만 사자의 울음이 멈출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살아 있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오히려 선지자의 부르짖음에 반항합니다. 자기들이 옳다고 종알댑니다. 한마디로 가관이지요.
계속해서 아모스 선지자는 자신이 사자처럼 포효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말을 이어갑니다. 5절에서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서야 새가 어찌 거기에 치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 것도 잡힌 것이 없는데 어찌 창애가 땅에서 뛰겠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이스라엘로 보내신 이유도 있고, 자신이 담대하게 심판을 폭로하는 이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그들에게 심판의 당위성을 설명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성읍에서 나팔을 불지 않았는데 백성들이 어찌 두려워하겠냐는 것입니다. 나팔을 부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부는 나팔의 의미는 경고입니다. 재앙에 대한 경고의 나팔인 것이지요. 보통 나팔을 전쟁을 알려주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전쟁을 알리는 나팔이 성읍에 불어지면 백성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나팔은 아모스가 스스로 부는 나팔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심으로 부는 나팔이었습니다(6절).
하나님이 지금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심판을 촉구하는 나팔을 불게 하신 것입니다. 이른바 재앙의 나팔인 셈이지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아모스 선지자를 보내셔서 경고하시는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것이지요. 너무나 충격적인 경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입에 물고 포효하였건만, 또한 땅에서 창애가 뛰고 난리가 났건만 그들은 애써 선지자의 외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모스의 경고처럼 BC 721년에 앗수르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아니하십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선지자의 경고처럼 이스라엘은 망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후에 남 유대도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래도 유다에게 소망이 있었던 것은 70년이라는 한시적인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남유대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친 후에 본토로 귀환한다는 것입니다. 남유대는 이스라엘의 그루터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 그루터기를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당신의 섭리를 확대시켜 나가십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소망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당신의 비전을 이루어 가십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장차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심판을 경고하시듯이 지금 우리 시대에도 수많은 종들을 보내사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선포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시간이 지금입니다. 지금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최적의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지금보다 하나님께 돌아가기에 좋은 시간은 없습니다. 지금보다 빠른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이 하나님께 돌아가기에 가장 합당한 시간임을 깨닫고 망설이지 말고 돌아가십시다. 그것은 결국 내안에 계신 주님께 더욱 민감하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내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잠잠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내안에 나를 성전삼고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졸지 아니하시고 주무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온 맘과 뜻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