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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통한 유다의 축복(신33:7)-2023.9.24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3.09.23|조회수360 목록 댓글 0

모세를 통한 유다의 축복(신33:7)-2023.9.24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후 광야 40년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펼쳤던 모세가 드디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번의 부르심은 지상사역을 마무리하고 소천하라는 부르심이지요. 오직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던 모세는 정작 본인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직행하는 것이지요. 모세의 지상 사명은 거기까지였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모세를 느보산으로 초청하십니다(신32:48). 느보산은 모압 땅 아바림산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인 셈이지요.

 

그리고 그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는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모세는 지난 40년의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 40년을 무사히 통과했음에 감사했을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다시 한번 고지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도 재천명하십니다. 아마도 모세에게 남아 있을 수 있는 미련의 아쉬움을 단념시키시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시 모세는 눈도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도 쇠하지 아니한 상태였거든요. 비록 나이는 120세가 되었지만 아직도 근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거든요.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왜 없었겠습니까? 다시 욕심을 낼만한 법이지요. 누구든지 그렇게 이스라엘을 위하여 헌신했던 모세의 수고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 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모세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였을는지 모릅니다. 물론 모세의 믿음으로 보건대 이미 들어갈 수 없음을 단념하고 있었을 테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한번 모세에게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상기시킵니다.

 

신명기32장51절을 보면,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밝힙니다.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고 밝힙니다. 이 말씀을 보면,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모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자기 백성들의 잘못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민수기서20장을 보면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 직접적인 원인이 모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신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는데 또 다시 물이 없다고 모세와 아론을 공박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두번 쳐서 물을 내게 하지요. 모세가 자기 통제력을 잃은 것입니다. 이유는 물 때문에 불평하는 자기 백성들로 인하여 모세가 계속 속이 상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마라에서 그랬고, 르비딤에서 그랬으며, 므리바에서 또 다시 그런 것입니다. 결국 모세가 혈기를 부린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여 내가 준 아름다운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모세의 교만(민20:10)과 불순종(민20:11)이 원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보다 더 결정적인 원인은 모세의 불신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민수기20장12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물론 모세와 아론이 불신앙을 가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사실 불신앙과 불순종은 다른 것입니다.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은 불신앙이요, 믿음은 가졌으나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불신앙으로 망하고, 믿는 자는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기분과 감정대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었던 모세의 불순종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로 볼 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신명기서는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원인을 자기 백성들에게서 찾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모세도 그런 주장을 계속 해 왔습니다. 신명기1장3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런 주장을 되풀이합니다. 신명기3장2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못들어 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명기4장21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너희로 인하여 내게 진노하사 나로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이런 주장을 계속하는 것은 자기의 억울함을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모든 책임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처럼 민수기서와 신명기서가 분위기가 다른 것처럼 비춰지는 것은 역사를 보는 사관 때문입니다. 둘 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그 말씀이지요. 모세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최고의 통수권자였습니다. 지도자는 백성들과 함께 하는 자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는 자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저지른 죄악에 대해 모세는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했습니다. 책임자는 권리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임을 져야 할 일 있다면 본인이 먼저 책임을 질 수 있는 지도자가 진정한 리더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차원에서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공동체적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범죄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율법의 한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도 사람입니다. 왜 그가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은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사실 모세도 한때 가나안에 들어가는 문제로 하나님께 간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명기3장25절에 보면,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26절에서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섭섭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절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제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마지막 미션을 소화해 냅니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자기에게 맡겨주신 자기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33장은 모세가 죽기 전에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1) 유다

 

이는 마치 그 옛날 야곱이 죽으면서 12명의 자기 아들들을 축복하는 것처럼 모세도 이스라엘의 12지파들을 축복합니다. 물론 야곱의 축복기도나 모세의 축복기도가 다르지는 않습니다. 순서가 다를 뿐이지요. 야곱의 축복기도는 출생순서를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축복기도는 야곱의 부인들의 순서를 따른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두 명의 정실 부인이 있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입니다. 그리고 그 부인들에게는 몸종이 있었는데 레아의 몸종은 실바요, 라헬의 몸종은 빌하입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가장 먼저 레아의 아들들부터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르우벤으로부터 시작해서 유다와 레위를 축복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으로 라헬의 두 아들 베냐민과 요셉, 그리고 여종들의 자녀들을 축복하는 순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유다의 축복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유다의 축복이 구속사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유다는 야곱의 네 번째 아들입니다. 레아가 낳은 여섯 명의 아들가운데 네 번째 아들이지요. 유다는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창세기49장에서 야곱이 유다를 축복하는 내용의 골자는 형제들의 찬송이 된다는 것입니다(창49:8-10). 그보다 더 결정적인 축복은 왕권에 대한 축복입니다. 유다가 형제들을 통해서 찬송이 된다는 것은 형제들 가운데 칭찬과 존귀함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왕권의 축복은 유다지파를 통해 땅의 임금도 나올 것이지만 결정적으로는 만왕의 왕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 뉘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실제로 유다지파 다윗의 줄기를 통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 것이지요.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축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지파를 좇아 나신 것은 최고의 축복이지요.

 

그렇다면 본문 신명기서를 통해 모세는 유다지파를 어떻게 축복하는 것일까요? 모세가 유다지파를 축복하는 내용을 보십시다. 7절입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축복의 선봉장에 섰던 지파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복의 통로로 사용하신 지파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야곱이 유다를 축복해서 그들이 복을 받은 것이 아니요, 모세가 유다를 축복함으로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유다를 복의 통로로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축복이나 모세의 축복이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모세의 축복은 야곱의 축복을 재확인하는 셈이지요. 유다의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야곱도 모세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선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다의 과거적인 사건을 추억해 보면 유다는 분명히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그릇으로 준비되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유다가 복을 받을만한 사람이었다는 증거가 무엇인지 성경으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유다는 하나님의 복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육신의 복보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 사람이지요.

 

창세기 38장을 보면, 유다는 평생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릅니다. 자기 며느리 다말과의 간통입니다. 참으로 민망한 스캔들이지요. 유다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과 오난과 셀라입니다.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며느리를 취하였습니다. 다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장자 엘을 데려가 버리십니다. 다말은 졸지에 과부가 된 것이지요. 그러자 유다는 둘째아들 오난에게 형수 다말에게 들어가서 씨를 잇게 합니다. 그러나 오난이 형수 다말에게 들어가서 씨를 제공하지 않고 땅에다가 설정하지요. 그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난을 죽이십니다.

 

이제 유다의 집에 남은 아들은 셀라입니다. 유다는 자기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셋째 아들을 다말에게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두 아들이 죽었으니 유다의 마음이 무척 불편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다말을 친정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이유는 셋째 아들이 아직 어리다는 것입니다. 그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셋째 아들이 장성해도 다말을 부르지 않습니다. 다말은 그런 유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유다가문의 계대를 이어줄 계산을 합니다. 유일한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유다 가문의 유일한 남자 시아버지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꼼수를 계획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말은 자기의 계획대로 거사를 추진합니다. 그리고 임신에 성공합니다. 물론 시아버지 유다는 전혀 모른 채로 말입니다. 결국 나중에 다말의 임신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러자 유다가 발끈합니다. 며느리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이지요. 가문의 수치로 여긴 것이지요. 그래서 다말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죽음 직전에 다말은 임신의 비밀을 유다에게 공개합니다. 자기가 시아버지 유다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물을 제시합니다. 유다는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빼박 증거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다음 동작이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역시 유다는 복을 받을만한 준비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유다는 자기가 아니라고 발뺌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의 변명은 당시 남자 편에 있는 유다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요, 특별히 시아버지이기 때문에 충분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부정한 며느리로 취급해서 죽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달랐습니다. 그는 매너 있게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며느리 편을 들어줍니다. 오히려 자기 며느리가 자기보다 옳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숨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정의 앞에 자신의 수치를 공개하는 승부수를 던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을 받을만한 유다의 자질이요, 덕목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실수나 약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존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육신의 복보다는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존귀히 여겼던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우선시 했던 것입니다. 이런 성품이 유다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덕목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유다는 육신의 복보다는 영적인 복, 하나님의 복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던 셈입니다.

 

또한 유다에게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덕목이 있었다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요셉이 자기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형제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서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자 유다가 나서 자기 형제들을 설득합니다.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하겠느냐’(창37:26)는 것이지요. 결국 요셉은 유다의 중재로 미디안 상고에 팔려서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역시 유다는 달랐습니다. 그는 형제의 고통을 몸소 체휼한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아버지 야곱의 슬픔을 헤아려드린 사람입니다. 미디안 상고에 요셉을 팔아넘긴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태연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거짓 증거물까지 만들어서 아버지를 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아버지를 모시고 한집에서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마음을 졸이고 아파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유다입니다. 유다는 도저히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속이며 살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유다의 살아 있는 양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유다는 아버지 집을 나오게 됩니다. 그만큼 유다는 비교적 선한 양심을 가진 자였던 것입니다.

 

유다의 희생정신은 창세기42장에서 빛이 납니다. 창세기42장을 보면, 야곱의 형제들이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갑니다. 당시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인 요셉은 이미 하나님이 애굽으로 보내셨지요. 하나님은 애굽에서 요셉을 총리대신으로 높여 두신 것입니다. 이는 장차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양육프로그램의 일정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섭리를 전혀 알지 못한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떠난 것이지요. 요셉은 이미 애굽에 들어가 있고, 막내아들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의 품안에 있었기에 열 명이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굽에서 정탐꾼이라는 누명을 받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기들의 신분과 가족사를 고백하게 되지요. 그래서 둘째 아들 시므온을 인질로 잡힌 후에 막내아들 베냐민을 데려오는 조건으로 식량을 구해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베냐민을 도저히 보낼 수 없다고 야곱이 버팁니다. 그러자 다시 유다가 중재자로 나섭니다. 유다는 궂은일을 마다치 않고 앞장선 인물입니다. 자기보다는 남을 위한 희생정신이 강한 인물이지요. 결국 유다가 자기 생명을 담보하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한 후에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식량을 구해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난관에 부딪힙니다. 그들의 식량꾸러미에 은잔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 의도적으로 숨겨 놓았던 것이지요. 그것도 가장 사랑받는 베냐민의 식량자루에 말입니다. 그들은 뒤를 따라와서 검사하는 요셉의 청지기들에게 들통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꼼짝없이 그들은 도둑으로 몰리게 된 것이지요. 요셉이 꾸민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요셉에게 끌려가서 취조를 받아야 했습니다. 과연 무슨 재주로 이 일을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암담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도 유다가 해결사로 나섭니다. 요셉 앞으로 잡혀온 형제들 가운데 유다가 총대를 메고 증언합니다. 자기들의 죄악이 적발되었으니 종이 되겠다고 자처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자기의 종이 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유다가 나서 자기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창44:33). 이것이 바로 유다의 희생정신입니다. 유다는 자기 가족과 형제들을 위해 희생을 자처한 것입니다.

 

(2) 유다를 향한 모세의 축복

 

마치 유다의 그런 마음을 염두 해 둔 것처럼 모세는 유다지파를 축복합니다. 본문을 새 번역 성경으로 보면 훨씬 더 실감이 납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 유다가 살려 달라고 부르짖을 때에 들어주십시오. 유다지파가 다른 지파들과 다시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유다를 대신하여 싸워주십시오. 그들의 원수를 치시어 그들을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물론 모세의 축복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유다지파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것이요, 두번째는 유다지파가 다른 지파들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서게 해 달라는 것이며, 세번째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싸울 때 반드시 이기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유다지파는 장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선두에 위치하는 지파였습니다. 가나안 정복 직전에 인구를 계수하고 행진을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선두에 진행할 것을 명받은 지파입니다(민10:14).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어 가심에 있어 유다지파를 모종의 연결고리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순리나 법칙을 따라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운행됨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유다지파를 위해 간구하던 축복이 믿는 자들을 향한 축복임을 믿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필요한 축복이 유다지파를 통한 모세의 축복 속에 다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유다의 음성을 들으신 것처럼 하나님이 믿는 자의 음성을 들어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음성을 들어주시는 축복보다 더 귀한 축복은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소통은 하나님이 우리의 음성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 생활을 잘할지라도 하나님이 내 음성에 귀를 기울여주시지 않는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내 음성을 들어주심이 가장 큰 복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주시면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음성을 들어주심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난리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음성을 들어주심에는 관심이 없는 채로 말입니다.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먼저 내 음성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내가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음성을 들어주심이 없는데 내가 어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내 음성을 들어주시지 않는데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음성을 들어주신다면 나도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음성 듣는 것도 내편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음성을 들어주실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기 음성을 들어 주시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가 하나님 음성을 듣는 데만 골몰합니다. 만일 누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이 내 음성을 들어주실 때에야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내 음성을 들어주심은 내안에 하나님이 계심으로만 가능합니다.

 

내안에 주님이 계셔야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이 안계시는 데 무슨 재주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절대 들을 수 없습니다. 내안에 주님이 계심을 믿는 자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목자가 양을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3) 유다의 축복, 믿는 우리의 축복

 

유다를 향한 모세의 축복은 우리 모두를 향한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의 음성을 들어주시듯이 믿는 자의 음성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는 자의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 음성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다를 향한 또 다른 축복은 무엇입니까? 모세는 유다를 자기 백성에게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유다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멤버라는 것이지요. 물론 유다가 이스라엘임은 맞지만 이스라엘이 유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는 유다가 믿음의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유다는 이스라엘 속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유다가 받을 복은 자기 백성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세는 유다를 자기 백성에게로 인도해달라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의 자녀 됨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말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축복은 정말 우리 시대에도 중요한 축복입니다. 믿는 자가 믿음의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 정말 귀한 축복입니다. 오늘날 믿음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유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인도함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런 축복은 눈에 보이는 그 어떤 축복보다 소중한 축복이지요. 이런 유다의 복이 믿는 자의 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유다를 향한 이 축복은 단순히 믿음의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게 해달라는 간구만이 아닙니다. 유다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리더의 자리로 이끌어 달라는 것이지요. 이른바 유다가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하는 선봉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실제 유다는 그런 복을 받았습니다. 민수기서10장14절을 보면, 수두로 유다자손을 이끌어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수두는 선두입니다.

 

그리고 유다를 향한 또 한 가지의 축복은 무엇일까요? 다시 7절을 봉독해 보십시다.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로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른바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 간구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축복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은 치열한 전쟁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영적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반드시 영적인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도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기를 원하시지요. 특별히 모세는 유다를 향한 기도에서 ‘자기를 위해 싸우게 하시고’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싸우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싸움인 것이지요. 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가는 선두주자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승리인 것이지요. 유다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대표 주자답게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패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유다를 이기게 해달라는 축복의 기도는 유다의 손을 강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사 유다를 강하게 하시어 모든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이런 복보다 더 좋은 복은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믿는 자는 이겨야 합니다.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전쟁에서든지 이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유다를 향한 모세의 축복기도는 믿는 자를 향한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 다 유다의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반드시 유다를 통해 그런 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행복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돕는 방패시오, 영광의 칼이시기 때문입니다(신33:29). 무엇보다 유다를 통해 이루신 크고 놀라우신 축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지파를 통해 오게 하심으로 성취된 것입니다(마1:2-3). 사실 믿는 자의 소속은 유다지파입니다. 믿는 우리에게 유다지파를 통해 주어지는 모든 축복이 반드시 임할 줄로 믿습니다. 유다를 통해 주어지는 모든 복이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질 것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내안에서 나를 성전삼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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