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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기쁨(빌1:12-18)-2023.11.12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3.11.11|조회수254 목록 댓글 0

바울의 기쁨(빌1:12-18)-2023.11.12

 

전도자 바울은 오직 복음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도 한때 율법아래서 살 때는 복음을 핍박하는 일등공신이었지요. 남다른 열심으로 복음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복음을 영접하고 복음이 없으면 살수 없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앉으나 서나 복음밖에는 모르는 사람이 된 거예요. 오직 복음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된 것이지요. 사실상 그는 복음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제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울에 의해서 뼈대가 세워지고 완성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복음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 체 복음을 믿는다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하지만 막상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러는 정리되지 못한 복음의 몇 조각의 파편들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지요. 복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복잡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말로 설명하면 무지 복잡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면 정말 단순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막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지요. 복음은 가장 기쁜 소식이지요. 세상에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기쁜 소식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습니다. 죽음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죽음이후의 삶입니다.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의 유무에 따라 달라집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죽음이후의 영원한 세계를 인정하지만, 믿음이 없는 자들은 자의적으로 생각합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있다 혹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결정하는 길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이라고 말하면 무조건 예수를 믿는 믿음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으로 마련해 놓으셨다는 사실부터 믿는 믿음으로 출발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작정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를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성품 모든 것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이지요. 그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구원의 계획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이루시는 방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초적인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원의 계획을 믿는 것이지요. 이른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복된 소식, 이른바 가장 기쁜 소식은 죽음이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영생과 영벌이 있거든요. 그중에서 영생은 가장 기쁜 소식이고, 영벌은 가장 슬픈 소식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이 가운데 하나를 취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살아생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영생이요, 믿지 않는 자는 영벌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믿음의 유무에 따라 영원한 세상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은 영생을 얻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에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고, 복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할까요?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죽은 자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우리 조상 아담으로부터 유전받은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로 말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와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이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의 상태로 방치하신다면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이 되실 수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입혀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함입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고 실패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고자 하심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죽음의 상태로 방치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할 방도를 마련해 놓으셨던 것이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을 창세기3장15절을 통하여 공개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계획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한 구원계획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인간이 당할 죄의 옷을 입히신 후에 우리의 죄 값을 대신 담당케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 가운데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신 이유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이유 말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영접하는 가장 중요한 단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1) 복음은 최고의 기쁨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아십니까? 그것은 복음을 수용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 물론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마다 얼마든지 다르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물론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죄를 없이 함도 필요하고, 병 고침도 필요하며, 귀신을 좇아냄도 필요하고, 복을 받아 사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가 강조하는 복음의 퍼즐을 가지고 복음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그런 것들도 복음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퍼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복음의 결론은 아닙니다. 복음을 위한 강조점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의 결론은 무엇일까요? 복음의 결론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장10절을 보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복음의 결론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려하심입니다. 복음은 우리 구원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노래하면서도 복음을 누리며 살지 못합니다. 이는 복음의 미래적인 역사는 믿는데 복음의 현재성을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즉, 미래적인 구원은 믿는데 반하여 현재적인 구원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현재 삶속에서 구원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구원은 마치 죽음이후에 누려야 할 선물로만 생각하는 것이지요. 현재의 삶속에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주어질 미래적인 구원마저도 그때 그때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요. 구원이 붙었다 떨어졌다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세상말로 영적으로 컨디션이 좋을 때는 구원의 확신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자신 없는 삶을 살다보면 구원의 확신이 불투명해진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믿는 자들 가운데 죽어봐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나 같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을 거라고 비관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이유는 복음을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율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복음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믿는다면 지금 육신이 살아있는 이곳에서도 복음을 믿고 복음을 누리며 살아감이 마땅합니다. 그런 사람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자신감을 갖고 삽니다. 지금 내안에 주님이 그리스도로 나와 함께 살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현재적인 구원에도 감사하고 감격하며 사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 들어와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안에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때문에 내안에 있는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속죄가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속죄를 받는 길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반드시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지요. 죽음으로 끝나면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의 값을 지불하고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는 방법이요, 죄인을 구속하시는 방편입니다. 다만 그 구원을 이루시는 통로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계셨던 것입니다.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이신 예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인간의 옷을 입혀서 우리 가운데로 보내신 것이지요. 인간의 옷을 입혀 보내신 것은 죽음을 염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로 보내신 것이지요. 그분은 세례요한의 고백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오셔서 십자가에서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제물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내심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셨습니다. 만일 그것으로 끝났다면 당연히 그분은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는 것이지요. 그분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사 우리 모든 죄를 영원히 속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시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로, 영으로 다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가 나를 성전 삼으시고 심령 안에 왕으로, 주인으로, 전부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과 한 생명이 되어서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나는 몸이 되어 예수님이 주는 마음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영접한 자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당연히 지금 이 땅에서도 말입니다.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삶의 현장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복음을 믿는 자들이 진짜 복음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복음 안에서 복음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 의와 평강과 기쁨을 줍니다. 진짜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면 내안에 있는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함은 물론이거니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산다는 말이지요. 그것이 사도 바울이 가진 복음입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복음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의 기쁨은 복음의 기쁨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쁨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는 유난히 기쁨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일로 인하여 혹시라도 빌립보 교인들이 불안해하거나 마음 쓰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안심시키는 차원에서 자기의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일이라고 설득하지요. 바울이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가 당한 일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된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내세워 로마 황제에게 항소했습니다.

 

그는 로마로 압송되면서 풍랑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원치 않는 옥살이를 해야 했지요. 바울은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자기의 당한 일이라고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인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대부분은 마음 졸이면서 안타까워했지만, 일부는 바울의 매임에 대하여 고소해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분명히 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그런 것들은 바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응원하며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바울 사도가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면서 기쁨의 서신입니다. 바울은 당시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감옥 안에서 기쁨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갇혀 있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바울이 가진 복음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이 주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복음의 기쁨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기쁨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직 복음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리고 사는 자였던 것이지요. 복음이 주는 기쁨은 인간적이거나 환경적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주는 기쁨은 하늘의 기쁨입니다. 근본적인 기쁨인 것이지요. 누구든지 복음을 가진 자라면 이 기쁨이 갖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은사가 다르고, 은혜의 깊이가 다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기쁨은 같습니다. 때문에 복음을 가진 자는 바울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빌립보서의 수신자는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유럽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이지요. 바울이 2차전도 여행시에 마게도냐의 한 사람이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고 건너가서 세운 교회입니다. 자주장사하는 루디아라는 여인을 통해서 탄생한 교회이지요. 빌립보 교회는 분열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연합할 것을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대율법주의 영향에서 벗어날 것은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 자신이 옥중에 갇힘으로 인하여 실망할 수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도리어 자기의 갇힘은 복음의 진보를 이루기 과정이라고 가르칩니다.

 

절대 자기로 인하여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뻐하라는 것이지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바울을 감옥에 보내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전도하러 감옥에 들어갔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기뻐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 곳에서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18, 2:18, 4:4). 대표적으로 빌립보서4장4절을 보십시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복음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소유한 자는 이런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소유한 기쁨은 복음의 기쁨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바울의 인격이나 성품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울이 그런 정도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때로는 매서울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요,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물론 바울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바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거든요. 바울의 기쁨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바울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바울 안에 있는 복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모든 초점을 복음에 맞추었습니다. 기쁨의 근거도 복음 안에서 찾은 것이지요. 복음 안에서 기뻐하지 못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가진 자라면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요, 세상의 어떤 것보다 존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복음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복음의 기쁨을 대체할 수 없고, 복음의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바울은 소유한 것입니다.

 

(3) 복음의 기쁨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복음이 주는 기쁨은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때문에 감옥 속에 갇혔을지라도 자기 안에 있는 복음의 기쁨을 상실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비록 바울의 육신이 감옥에 들어갔을지라도 바울 안에 있는 복음이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육신이 매였을지라도 복음이 매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성도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복음의 기쁨보다는 세상의 기쁨으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복음의 기쁨을 누리고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세상이 알 수 없는 참 기쁨을 줍니다. 세상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줍니다. 당시 감옥에 갇힌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복음만 줄 수 있는 기쁨 때문입니다. 복음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지요. 가끔 너무나 배가 고파서 감옥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감옥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인권을 들먹거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죄수들도 인권이 있지요. 그리고 그들의 인권도 보장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 바울이 들어갔던 감옥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당연히 인권 운운할 곳도 아니지요. 진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곳이 감옥입니다. 결코 기뻐할 상황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곳이 감옥인 셈이지요. 그런데 바울이 그런 감옥에서 어떻게 기쁨을 전달하는 전도사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 안에 있는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은 육체의 매임보다 영적인 자유를 훨씬 크게 확장합니다. 복음은 육체의 매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그 진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내안에 있으므로 나는 어디서나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이 주는 자유요, 기쁨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복음의 기쁨을 전하고 싶은 것이지요. 세상의 기쁨보다 복음의 기쁨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대부분의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갇힘에 대하여 염려와 우려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 안에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환경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기쁨이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항상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을 가진 자들의 특권입니다.

 

바울은 어떤 방도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당시 빌립보 교인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 말입니다. 첫째 부류는 투기와 분쟁으로 전합니다(15절상). 이런 자들은 바울이 감옥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더욱 열심히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바울이 갖고 있었던 유명세와 모든 관심을 자기들에게 돌리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의도가 불순했던 것이지요. 그동안 바울이 갖고 있었던 전도의 주도권을 자신들이 빼앗고 싶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바울에게 주목했던 시선을 자신들에게 돌리고자 했던 거예요. 결코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교적 착한 뜻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15절하). 이들은 바울에 대한 호의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아마 대부분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은 전도자 바울과 동역하는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던 것이지요.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파한 거예요. 이른바 바울이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전파한 것이지요(16절). 이들은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힌 것은 단순히 바울 자신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방어하고 변호하기 위해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매인 것은 하나님의 섭리속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달랐습니다(17절). 저들이 어떤 사람일까요? 15절에 나오는 투기와 분쟁으로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목적이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실상은 바울보다 자신들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드러내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자기 이익에 집착한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저들은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17절). 순전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 아니라 다툼으로 전했던 것이지요. 마치 저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유익과 영달을 위한 정략적인 목적을 갖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합니다. 바울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들이 아닙니다. 저들도 아닙니다. 물론 자신도 아닙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입니다. 외모로 하든지 혹은 무슨 방도로 하든지 그리스도만 전파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비록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할지라도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리스도만 전파되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이지요. 바울의 관심사는 자신에게 대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우선순위는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이지요.

 

솔직히 대부분의 주의 종들과 바울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초점을 우리에게 맞추기 위해 은근히 애를 씁니다. 그래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고 불평합니다. 때로는 자기를 몰라준다고 은근히 성도들을 미워하는 일도 있습니다. 표현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는 몰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오늘날 교인들이 목회자를 몰라준다고 영적 고통을 주는 사례가 많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목회자인 목사들에게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의 시선을 주님을 향하게 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자로서 자신의 선전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주만 선전되는 것을 기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한 목회자들이 은근히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직 한 가지 푯대만 바라보고 달려온 사람입니다. 그 푯대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주님이십니다(3:14).

 

바울은 고난을 통해서도 복음이 진보됨을 기뻐했습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을 일부러 초청할 필요는 없지만 내게 주어진 고난을 박대할 이유도 없습니다. 고난은 분명히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난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이룬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12절).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물론 빌립보 교인들은 일찍이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하며 교회를 개척할 때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준 사건으로 빌립보 감옥에 투옥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일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바울의 매임에 대하여 걱정보다는 안도감을 가졌을는지 모릅니다. 오래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행하셨던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일들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다시 한번 그들은 하나님이 로마 감옥에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도를 감옥으로 보내셨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감옥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감옥으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예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의 사람 바울을 로마의 감옥으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때문에 그들 중에 다수는 바울의 매임으로 인하여 바울을 더욱 신뢰하였습니다(14절). 그리고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믿음의 담력이 생긴 것이지요. 한마디로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유하는 몸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의 담력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매임으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감옥 안에서는 바울을 통해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을 것이며, 감옥 밖에서는 바울을 지지하는 동역자들을 통해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바울은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기뻐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바울은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던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 모든 성도들의 꿈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울이 가진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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