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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의 국난 극복방법(왕하19:1-19)-2023.11.19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3.11.18|조회수377 목록 댓글 0

히스기야의 국난 극복방법(왕하19:1-19)-2023.11.19

 

남왕국 유다 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비교적 선하고 경건한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25세에 왕에 등극하여 29년을 치리하였습니다. 질병 전에 14년과 질병에서 치유 받은 다음에 15년을 합하여 29년을 유다 왕으로 봉직한 것이지요. 그는 여러 산당을 제하고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어서 숭배하던 놋뱀을 부수었습니다. 성경은 히스기야에 대하여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고 칭찬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떠나지 않았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케 하셨던 것입니다(왕하18:7).

 

무엇보다 히스기야는 선왕들이 섬겼던 앗수르 왕에 대항하여 자주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이 북 이스라엘 사마리아를 침공하여 함락시켰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정아래 자기들을 배척했던 남 왕국 유다에 마의 손길을 드리운 것이지요. 그동안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공격에 방패막이를 해주었는데 북 이스라엘이 무너진 것입니다. 담이 무너진 것이지요. 그리고 노골적으로 앗수르는 남 왕국 유다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것입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1차 침공을 한 것이지요. 그때가 히스기야가 왕이 된지 14년이 될 때입니다.

 

당시 앗수르는 막강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자기들에게 복종하던 유다가 히스기야 왕 때 등을 돌린 것입니다. 그래서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한 것이지요. 산헤립은 라기스로 사자를 보내어 유다의 항복을 종용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쉽게 히스기야가 꼬리를 내립니다.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토해내면서 말입니다. 자기가 앗수르 왕에게 범죄했다는 것입니다(왕하18:14). 믿음의 사람 히스기야의 입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면서 앗수르 왕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수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1달란트는 34.27kg). 당시 금 만해도 1톤이 넘는 거예요.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습니다(왕하18:15). 심지어 성전 문의 금과 모든 기둥에 입혀져 있던 금을 벗겨서 앗수르 왕에게 주었던 것이지요. 집권 초기에 반 앗수르 정책을 펼쳤던 히스기야 왕이 집권 중반에 어찌 이토록 연약해졌을까요? 연약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던 믿음이 어디 갔을까요?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자기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때문에 아무도 자기 믿음을 자랑하거나 큰 소리 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날마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시는 은혜로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지요. 한시도 주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거예요. 주님 없는 삶은 불신자들의 삶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산헤립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고분고분하게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지요. 대군을 거느리고 2차 침공을 단행합니다(18:17). 2차 침공은 고도의 심리전술이었습니다. 랍사게라는 장군을 통해 유다를 겁박합니다. 상한 갈대 같은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도 의지하지 말며, 히스기야 왕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히스기야는 애굽에는 매우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거든요. 거기다가 랍사게는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내며 유다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전술을 계속했습니다. 심지어는 히스기야 밑에서 똥오줌 먹지 말고(18:27), 앗수르 왕의 밑으로 들어와서 떡과 포도주와 물을 마시고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18:31-32). 항복하라는 것이지요. 고도의 심리전술을 펼친 거예요.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나라는 심리전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민족입니다. 지금은 중단된 상태지만 그동안 남북한 병사들이 휴전선에서 고성능 확성기를 통해 고도의 심리전을 벌여왔지요. 대북방송과 대남방송을 했다는 말이에요. 특별히 대북방송은 북한군에게 치명적 전술이었던 것입니다. 남한의 정보를 얻을 수 없는 북한 병사들로서는 생각만해도 아찔한 전술이 대북방송이었다고 합니다. 북한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대북방송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북한이 남북평화협정을 담보로해서 가장 먼저 철거를 요구한 것이 대북방송 도구였다고 해요. 지금은 남북이 모두 철거한 상태지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입니다. 사기가 떨어지면 아무리 화력이 좋아도 싸울 힘이 없어집니다. 때문에 상대방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 가장 좋은 전술인 것이지요.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면 전쟁은 싸우나마나하거든요. 그런데 유다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한 것입니다. 랍사게는 열국의 어떤 신들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질 자가 없다고 떠들어댔습니다. 심지어 유다 백성들이 믿는 여호와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주지 못한다고 엄포를 놓은 거예요(18:35).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자초한 결과물인 것이지요.

 

그 상황에서 히스기야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입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대꾸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18:36). 히스기야가 이제야 이 전쟁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히스기야는 그동안 믿음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을 쳤었거든요. 하지만 이 문제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문제만 복잡하게 만들고 꼬이게 할 뿐이었지요. 히스기야는 초심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초심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대적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가 잠간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요. 어쩌면 이것이 모든 인간의 연약함일 것입니다. 아무 인간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큰 소리를 쳐도 순간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행동이나 생각, 행동을 할 때가 있다는 말이지요. 믿음의 사람 히스기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의 위대한 점은 바로 19장에서 나타납니다. 믿음의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모든 삶에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을 했을지라도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충분히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한 이후의 자세입니다. 비록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을 했을지라도 깨닫고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라고 너무 완벽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완벽하려고 하는 자체가 교만이고 불신앙입니다. 또한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아무 의식 없이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당연히 영적 긴장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도 넘어지니까요. 넘어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지라도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믿는 자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보다는 잘못된 선택을 깨닫고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9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장은 히스기야가 이 어려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하고 승리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앗수르 왕 산헤립의 공격은 단순한 국제적 분쟁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영적전쟁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유는 산헤립의 공격적인 발언의 대부분이 히스기야를 포함한 유다백성들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들었습니다. 영적인 부분을 말입니다. 그들은 히스기야의 하나님을 건들었던 것입니다. 사단의 최종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요. 사단은 하나님의 영광에 약간의 흠집은 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당신 스스로 지켜내십니다. 앗수르를 등에 업은 사단이 하나님의 대리인인 유다백성들을 건들지라도 절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단의 패배는 이미 작정되어 있었습니다. 창세기3장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되지만 결국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던 사례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부수고 승리한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2천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성취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고, 역사가 증명하며, 모든 민족이 경험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최후 종말도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성취하신 승리를 확인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전에 들어갔습니다(1)

 

그런 차원에서 앗수르의 공격도 영적전쟁의 성격이 강한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나라와의 전쟁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공격하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전쟁을 영적전쟁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합니다. 물론 이 땅의 모든 전쟁이 그러하지요. 그러나 특별히 이스라엘의 전쟁은 단순한 전쟁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시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대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도 이스라엘에 관련된 모든 전쟁은 영적인 이해가 필요하고 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민족입니다. 지금 잠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고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상태로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사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국가들을 보면 그들의 정체가 선명해집니다. 히스기야 당시 앗수르 왕 산헤립의 공격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전쟁은 군사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술이나 전략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영적 전쟁입니다.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히스기야가 간파한 것입니다. 늦게나마 철이 든 것이지요. 그래서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1절). 만일 히스기야에게 그런 분별력이 없었더라면 참모들을 소집하거나 군대를 징집해서 전쟁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우호적으로 생각했던 애굽같은 나라의 도움을 요청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동원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히스기야는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도움을 받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지요.

 

마치 전에 선대왕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소년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때려잡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솜털이 뽀송뽀송한 애송이 소년 목동 다윗은 3미터에 육박하는 거구 골리앗을 무엇으로 이기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골리앗 앞에 나아가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무엘상17장47절입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입니다. 온몸을 철갑으로 두른 골리앗 앞에서 다윗은 한치의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분명히 알았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승리는 자명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자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원수마귀 악한 영들과의 싸움인 것이지요. 전쟁의 배후에는 악한 것들이 반드시 도사리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육신의 전쟁처럼 보일지라도 뒤에서 그 전쟁을 조종하는 흑암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믿는 자는 어떤 전쟁이든지 단순한 전쟁으로 보지 말고 영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영적인 싸움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싸운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전쟁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전황을 보고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에요.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앗수르의 무차별한 공격 앞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 왕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적인 꼼수를 부려 봐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밖에는 이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한때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했었지만 믿음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초심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역시 히스기야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가끔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본바탕이 좋은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그 본 성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성품이 올곧은 사람은 곤경에 빠지더라도 본질이나 생각이 변치 않는다는 말이지요. 역시 히스기야는 썩어도 준치가 맞습니다. 믿음의 사람 히스기야가 믿음의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참모들로부터 랍사게의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들이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와서 랍사게가 겁박한 것을 그대로 보고한 것입니다(18:37). 만일 히스기야가 믿음이 없었다면 낙심하며 어찌할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분명한 답을 얻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먼저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1절). 물론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은 채로 말입니다. 이는 극한 슬픔과 겸비함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자세입니다. 믿는 자는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간 것은 랍사게가 왕이신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사기가 떨어짐도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이방인들에 의해 모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믿는 자의 아픔은 우리 개인이 당하는 고통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에 의해서 모욕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불신자들에 의해 난도질을 당할 때가 가장 아픕니다.

 

(2) 선지자의 기도를 요청했습니다(2-7)

 

히스기야는 앗수르라는 이방인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함을 더 이상 지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히스기야가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히스기야는 이 문제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는 참모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지요. 당시 이사야 선지자는 누구보다 진실한 하나님의 참 선지자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만 대언하는 선지자였지요.

 

그가 이사야 선지자를 찾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고, 말씀을 깨닫기 원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의 동역자가 내 주변에 있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의 도움을 받기 원했습니다. 그는 왕이었지만 영적 지도자인 이사야 선지자를 존중히 여기고 신뢰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만큼 믿음을 소중히 여겼고, 시대를 보는 탁월한 안목을 가진 자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선지자를 존귀히 여기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만큼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당시 상황을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고 진단했습니다(3절). 당시 자기들이 처한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분별한 것이지요. 히스기야는 당시 상황을 매우 복합적인 상황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첩첩산중처럼 얽혀진 것으로 본 것이지요.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위기로 본 것입니다. 제대로 본 것이지요. 여기서 ‘곤란의 날’이라 함은 전쟁의 재난을 당해 곤경에 처했다는 말이요, ‘책벌의 날’이라는 말은 유다 백성들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이 징계하셨음을 의미하며, ‘능욕의 날’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유다 백성을 징계하셔서 원수들에게 모욕을 당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들의 상황이 진퇴양난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자기들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당시 상황을 해산할 힘이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 것이지요. 임산부가 해산할 힘이 없으면 임산부도 죽고, 태속에 있는 아이도 죽습니다. 둘 다 죽는 거예요. 결국 자기들을 살리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얻기를 원했던 것이지요(4절). 히스기야의 고백은 랍사게가 했던 말을 하나님이 다 들으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랍사게의 소리를 다 들으셨지요.

 

그러면서도 히스기야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랍사게의 말처럼 자신과 자기 백성들은 심판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랍사게의 말을 들으시고 자기들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비록 자신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일지라도 말입니다. 책망의 말씀이라도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것이지요.

 

믿는 자는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도 두렵지 않고 겁나지 않습니다. 역시 기도하는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중보기도 요청에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것이지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언하는 것이지요. 6절을 보면, 앗수르 왕의 신복들로부터 하나님을 능욕하는 말을 들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6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딤후1:7).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사 친히 해결해주신다는 말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한 영을 저의 속에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영은 어떤 영일까요? 두려워하는 마음이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마음입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하나님이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사 풍문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 풍문은 자국 내에 일어난 좋지 않는 소문을 의미할 것입니다.

 

정확히 어떤 소문인지는 모르지만 산헤립을 충동질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칼에 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산헤립의 문제는 정리해 주신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자기들 힘으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하심만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산헤립은 본국 앗수르로 돌아가서 죽었습니다. 그가 자기가 믿는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저를 칼로 쳐 죽인 것입니다(37절). 그런데 아드람멜렉과 사례셀은 에살핫돈과 함께 산헤립의 아들들입니다.

 

이와 동일한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이사야서37장38절을 보면 산헤립의 아들들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아들들의 손에 암살을 당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죽음입니까? 결국 하나님을 모독한 산헤립의 죄악은 하나님이 친히 갚아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절대 우리는 원수 갚는 일에 몰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대적 원수를 갚아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면 됩니다. 그러면 후환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범죄치도 아니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수를 자기 손으로 갚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일로 인하여 내가 또 다른 죄를 범합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하여 또 다른 앙갚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죄가 죄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때문에 어떤 원수도 내가 갚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그러면 그 일로 인하여 내가 더 이상 범죄치 아니할 터이요, 죄의 후환도 있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찾은 믿음의 결론입니다. 믿는 자는 그래야 합니다. 히스기야처럼 문제를 부둥켜안고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도우심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3) 자기 스스로도 기도했습니다(14-19)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이 모든 것을 중단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랍사게는 히스기야를 괴롭히는 망발을 쏟아냅니다(9-13절). 심지어 히스기야에게 편지를 써서 겁박을 한 것이지요. 이처럼 사단은 악착같은 존재입니다. 절대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더 이상 히스기야는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히스기야는 다시 하나님의 전으로 올라갔습니다(14절). 그리고 랍사게로부터 받은 편지를 하나님앞에 펼쳐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14-19절). 그는 기도 외에는 다른 유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기도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였지요. 우리가 히스기야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이사야에게 기도부탁하고 자기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역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중보기도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중보기도보다 더 위대한 기도는 내가 직접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드리는 기도가 가장 정직하고, 가장 정확하며, 가장 절박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내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믿는 자 스스로가 각자 기도하기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중보기도를 부탁하면서 자신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중보기도를 부탁했으면 나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중보기도가 역사하는 능력을 발합니다. 사실 중보기도도 중요하지만 내가 직접 하는 기도보다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내가 직접 드리는 기도가 가장 파워플한 기도입니다. 내가 드리는 기도는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스기야 기도의 핵심은 19절입니다. 그는 앗수르의 손에서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열방 가운데 드러나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은 우리만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도 복음의 기도가 있고, 율법의 기도가 있거든요. 복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인 반면에 율법의 기도는 오직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당연히 복음의 기도를 찾으십니다. 복음의 기도를 가장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복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인 것이지요. 히스기야의 기도 역시 천하만국이 여호와 하나님이 홀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만민이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심은 물론이요, 하나님이 가장 빠르게 응답하시는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풍전등화 같은 유다의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가 어떻게 국난을 극복하고 승리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한마디로 십팔만 오천명이나 되는 앗수르 군대를 어떻게 이기고 승리했는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룻밤에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송장으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19:35). 히스기야가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19:31). 우리 모두 어떤 어려움이라도 하나님이 하실 줄을 믿고 하나님만 찾고 구하십시다. 결국 하나님이 하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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