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최고의 선물(엡2:8-9)-2023.11.26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구원의 선물입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선물보다 내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야말로 선물 중에 선물이요, 최고의 선물이지요. 무엇보다 그 선물은 아무나 줄 수 없는 선물이요, 누구나 받을 수도 없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선물도 아닙니다. 본문은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자격과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그 최고의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 선물을 받을 자는 합당한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요, 그 선물은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선물이라는 것이며, 그 선물을 받은 자라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진 자라야 최고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선물은 하나님이 그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선물이 있습니다. 먼저 주어지는 선물이지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셈이지요.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도 선물이며, 구원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절대 세상이 줄 수 없는 선물입니다. 믿음과 은혜, 그리고 구원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의 3종 세트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모두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보완재요, 필수재와 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선물 꾸러미들인 것이지요. 패키지 선물이에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이 주어지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믿음을 이루고, 믿음은 구원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서로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은 믿음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주신 목적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을 말입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이 가능할 터이나 은혜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 거예요.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하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지요. 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면 당연히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은혜를 주신 목적은 바른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기 위함인 것이지요. 다만 은혜도 보편적인 은혜가 있고,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보편적인 은혜는 믿음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맛볼 수 있는 혜택이지만, 특별한 은혜는 믿음을 가진 자만 맛볼 수 있는 혜택인 것입니다. 물론 보편적인 은혜나 특별한 은혜 모두가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자기 계시인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세상의 주권자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사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이 믿음을 갖고 살게 하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믿음의 최종목적은 영혼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이 구원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나님이 장차 하실 일을 모두 다 믿는 것이지요.
이른바 그 믿음을 가진 자라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믿는 믿음도 있고, 포괄적으로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성품이나 행하심에 대해서 말입니다. 부분적인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믿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 주변에 믿음이 있다할지라도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행적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믿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포괄적인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믿는 것이지요. 통으로 믿는 거예요. 그 믿음은 하나님 자체를 신뢰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행적을 모두다 의심 없이 받아드리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포괄적 믿음이요, 진짜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목적은 포괄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 구원을 이루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본문9절에서 구원을 자랑치 못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구원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출처에 대한 잘못된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자랑하되, 구원이 우리에게서 난 것처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분명히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구원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를 보면 구원에 대한 진정성과 확실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은혜는 자랑하고 행위는 자랑치 말아야 합니다
본문8절에 나오는 은혜와 믿음과 구원은 서로를 지지해주는 보완재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하나님이 패키지로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서로를 떼어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누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면 그는 이미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은 사람이요, 은혜의 선물을 받은 사람입니다. 논리적으로 말해 어느 것 한 가지라도 받지 못했다면 온전한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닌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은혜를 받았다 말하면서 믿음이 없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지요. 아마 그는 은혜를 받지 못했든지, 혹은 믿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도 역시 문제가 심각한 것이지요. 반대로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면서 은혜가 없다면 이 또한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은혜와 믿음과 구원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거든요. 서로가 떨어져서는 설명할 수 없고, 적용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은혜를 떠나서는 믿음을 설명할 수 없고, 믿음을 떠나서는 구원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선물이요,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우리의 믿음을 담보해주고,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담보해주는 것입니다.
이른바 은혜는 믿음을 낳고, 믿음은 구원을 낳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구원의 근본은 믿음이요, 믿음의 근본은 은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실상 나머지는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주시는 부가적인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육체의 건강도 선물입니다. 혹은 부귀와 영화도 선물입니다. 명예와 권세도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최종의 선물은 아닙니다. 최고의 선물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내 영혼을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부수적인 선물들입니다. 혹은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부가적인 선물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선물의 본질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 덤으로 주어지는 선물들인 것이지요. 모든 선물의 최종은 구원입니다. 나머지는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주어지는 선물이요,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은혜가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최종의 목적은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때문에 베드로전서1장9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말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신 목적이 영혼구원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는 은혜를 주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혜와 믿음, 구원,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이 주신 3종 세트 선물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독자적으로 적용하면 안됩니다. 은혜의 선물을 받았다면, 믿음의 선물도 받았고, 구원의 선물을 받았음을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요, 구원은 믿음으로 얻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세상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스스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행위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구원이 마치 자기에게서 난 것처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요.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 구원을 자기 관점에서 바라보면 안됩니다. 구원을 은혜의 시각으로 접근해야지 행위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 차원에서 누구든지 구원을 자랑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것입니다(9절).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자기의 종교적인 열심이나 열정으로 쟁취한 것처럼 자랑합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자랑들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자손손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난 것을 자기 구원의 빙거처럼 자랑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을 구원의 증거로 자랑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각종 예배나 모임에 빠짐없이 참여했음을 구원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은 것으로 자기 구원의 확신을 삼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자기의 헌신으로 교회를 세웠다고 자랑하며 자기 구원에 대한 과시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자는 자기 가족 중에 있는 성직자나 교회 직분자들을 은근히 자랑하며 자기 구원을 그것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모두 다 잘못입니다.
그런 것은 전혀 내가 받은 구원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구원을 눈에 보이는 행위로 인정받으려는 심리적 보상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이 구원을 이루는 믿음의 최대의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구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이 노리는 꼼수입니다.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합니다. 우리의 구원마저도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행실로 얻어진 결과물이라고 물 타기를 시도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게 하는 것이지요.
사단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의 공로로 바꿔치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이 도둑질하도록 부추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독교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단의 놀이터인 셈입니다. 사단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자기들의 수하에 놓고 장난을 치는 것이지요. 때문에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기들의 노력과 공력으로 자기들이 원하는 구원에 이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종교는 행위종교요, 자력종교입니다. 자력 종교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기들이 원하는 구원에 이른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타력종교라고 말합니다. 타력종교라는 것은 어떤 절대자의 힘으로 되어지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 절대자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어떤 행위도 자기 구원에 도움을 줄 수 없고, 어떤 영향력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 자랑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2) 자랑의 함정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9절은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이르게 하는 믿음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믿음을 주시는 은혜도 포함되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 인간이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서 자기들의 믿음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믿음이 대단한 것처럼 자랑합니다. 어떤 목사는 자신이 금식한 것을 명함에 새겨가지고 다니는 것을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그분은 사십일 금식을 몇 번, 세이레 금식을 몇 번, 십일 금식은 수시로 했다고 자기 명함에 새겨가지고 다녔습니다. 과연 그것이 명함에 새겨서 다닐만한 자랑거리일까요? 어떤 성도는 평생 비가 오나 눈이오나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았음을 자랑합니다. 물론 자랑할 만한 믿음일 테지요. 그런데 여기에 자랑의 함정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자랑하기보다는 눈으로 드러난 자기들의 행실을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결국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자기들이 다 가로채 버린 것이지요. 그것도 아주 지능적인 방법으로 말입니다. 말로는 믿음을 자랑하는 것 같지만 들어보면 결국 자기자랑으로 끝이 납니다.
어떤 사람은 받은 은혜를 자랑합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라고 간증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자랑하는 것을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비판할 수 없고, 비판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한번쯤 우리가 자랑하는 은혜에 대하여 정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는지, 아니면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 자랑하는지를 말입니다. 사실 은혜를 자랑하는 것인지, 혹은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도 많습니다. 은혜라는 명목으로 은근히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자식을 자랑하기 위하여 은혜라는 단어를 빌려 자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들어보면 결국은 자기 자식 자랑이더라구요.
대부분 은혜를 자랑한다고 하면서 은혜의 결과물만 자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은혜의 결과물을 자랑하는 것을 나무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은혜의 결과물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눈에 보이는 것만 은혜라고 자랑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런 결과물들이 모두 다 자기 기준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지요. 자기들이 세워놓은 결과물대로 되어진 것만 은혜로 여긴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 것이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은혜의 기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결과물은 인간의 잣대로 판정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을 은혜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게 만족할만한 건강의 결과물이 주어졌을 때만 그것을 은혜라고 말한다는 것이지요. 만일 지금 내가 원하는 수준의 건강상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은혜는 비록 지금 나의 건강이 무너졌을지라도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결과를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데 인색하다는 말입니다. 노골적으로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말이지요.
때문에 우리는 자기의 무너진 건강을 은혜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혹시 잃어버린 건강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랑하는 사람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혜의 속성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대한 속성을 잘 아는 사람만 자랑할 수 있습니다. 절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을 삼가야합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쏠리는 것을 은혜라고 주장하거나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것을 신중히 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은혜의 결과물을 가지고 자랑하지 말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물질로 인하여 자랑하려들지 말고 비록 지금 내게 주어진 물질이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지라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물질이 궁핍한 상태에 처했을지라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혹시 주변에서 시험에 떨어진 것을 자랑하는 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혹은 부도가 난 상태에서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하는 자를 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자랑이 위험한 것은 대부분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 도달한 것만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랑도 신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랑도 함정이 있거든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당부하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그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숫자가 모여야 하고, 재정적으로 풍족함을 자랑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예배당 건축한 것을 은혜라고 자랑하고 다닙니다. 물론 자랑할 만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배당을 건축하기 전에도 당신은 그런 자랑을 하고 다니셨는지요? 이처럼 우리들의 자랑거리가 제한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적인 것이나, 자기들이 원하는 수준의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만 은혜라고 생각하는 성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은혜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이지요. 은혜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은혜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합니다.
그러다보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주의 신화에 쫓깁니다. 그래서 교회도 세상적인 비즈니스를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은혜에 대한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랑거리를 찾는다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가 문제를 삼는 것은 대부분의 자랑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 제한되어 있고, 자기들의 원하는 목적을 이루었을 때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본문은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9절).
우리 한번 정직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실패는 자랑거리가 못됩니까?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자랑해서는 안됩니까? 넘어짐은 자랑할거리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까? 혹은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까? 그러면 장애인들은 평생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은혜를 자랑하는 것은 보이는 증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증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은혜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은혜도 있고,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인 은혜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은혜는 보이는 은혜보다 보이지 않는 은혜가 훨씬 더 깊고 다양하고 넓습니다. 진짜 은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자랑함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를 자랑함에 있어 우리가 돌아볼 대목입니다. 감히 누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자랑하는데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마음 놓고 자랑하십시오. 다만 은혜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랑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당부하는 의도는 자랑의 영광이 인간에게 돌아갈까 봐서 그런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랑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움을 당할까봐서 말입니다. 솔직히 자랑의 목적과 영광이 하나님께만 있다면 어찌하여 바울 사도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랑해야겠지요. 그런데 인간은 대부분 좋은 의도를 갖고 있을지라도 자칫하면 선을 넘어가는 속성이 있거든요. 물론 그것이 구원에 대한 자랑을 염두해 두고 말한 것이지만 믿음이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 자랑한다면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내게 은혜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하나님 당신을 자랑의 근거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굳이 자랑할 목록을 내가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것이 자랑거리일 테니까요. 모든 것을 자랑하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을 자랑하십시오.
(3) 복음은 자랑하고 율법은 자랑치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은혜와 믿음과 구원, 이 세 가지를 상호 보완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은혜도 선물, 믿음도 선물, 구원도 선물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는 믿음과 행위, 은혜와 자랑, 선물과 수고를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과 행위, 은혜와 자랑, 선물과 수고를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과 은혜와 선물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행위와 자랑과 수고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행위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은혜는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자랑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또한 선물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수고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는 매우 중요한 단초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은 복음이요, 사람의 뜻대로 하려는 것은 율법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나 율법이 다 하나님께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다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고, 율법은 자신의 행위를 체험하게 만듭니다.
결국 복음과 율법을 누가 주도해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복음은 내게 있는 모든 힘을 빼게 만듭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율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안에 있는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그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젖 먹던 시절의 힘까지 동원하여 용을 쓰게 만듭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나의 힘으로 나의 열심으로 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믿음을 결정하는 중요한 분깃점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죽은 믿음입니다. 율법과 복음을 분별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요, 믿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의 신앙이냐, 율법의 신앙이냐를 말입니다. 만일 누군가 복음의 신앙을 가진 자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자랑하며 살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자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자랑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자랑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 율법의 신앙을 가진 자라면 분명 그는 자기 스스로를 자랑하며 살 것입니다.
물론 당신도 모를 정도의 교묘한 입술로 당신의 구원을 자랑할 것입니다. 그 구원이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과 열정을 통해서 나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마치 자기 믿음의 소산물인 것처럼 말입니다. 혹은 그것이 당신의 믿음에 대한 은혜의 보상물인 것처럼 말입니다. 거기에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줄도 모른 체 말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함정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런 위험한 함정에 빠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지 못한 채 무조건 자랑한다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라면 은혜와 믿음과 구원, 이 세 가지 선물을 모두 다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인식하고 모든 범사에 하나님만 자랑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