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능력(딤후3:15-17)-2023.12.10
종교를 인문학적인 측면으로 분류해보면 두 종류가 있습니다. 계시종교와 자연종교입니다. 계시종교는 신의 계시에 의해 태동하고 신의 계시에 의존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자연종교는 부패한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당연히 인위적인 종교이지요. 그러나 계시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계시종교로는 유대교나 기독교가 있습니다. 혹은 이슬람도 계시종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믿는 신도 인간의 이성적인 본능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계시종교라고 말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교나 기독교는 분명히 계시종교입니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인간이 어떤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만든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세워진 종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교나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고 선포하신 것이지요. 사실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종교의 영역으로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른바 인간들에 의해 종교화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종교적인 범주에서 보면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종교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고 신과의 관계를 맺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절대 종교인의 자리에 안주하면 안됩니다. 종교인이 되어버리면 세상 모든 종교와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종교적인 틀에 갇히게 되면 생명 없는 종교인으로 전락해 버리지요. 그러면 기독교는 더 이상 생명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냥 세상 속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요. 수없이 많은 자연종교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알다시피 종교의 기능은 다양합니다. 어쩌면 인간의 욕망을 성취해주는 모든 것들이 종교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기능들인 셈이지요. 부귀 영화 장수 같은 것들을 만족시켜주는 기능 말입니다. 혹은 착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기능도 종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능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모든 자연종교에서는 그런 것들을 강조하고 그런 것들을 기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기능 가운데 가장 으뜸된 기능은 뭐니뭐니해도 죽음이후의 세계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자연종교도 마찬가지이지요.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자연종교에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감히 창조주 외에는 주장할 수 없는 영역이지요. 세상 모든 만물의 창조주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 창조자이십니다. 결론적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해결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종교의 기능 중에 가장 으뜸된 기능인 영생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하나님뿐이라는 말이지요. 결국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만 영생을 주십니다. 그리고 영생을 해결할 수 없는 종교는 모두 자연종교입니다. 자연종교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필요를 위해 스스로 만든 종교이지요. 그런 종교를 가지고는 절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 영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1)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성경을 통해서 계시해주셨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권위가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오류가 없습니다. 때문에 세상 그 어떤 것도 성경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어떤 책도, 어떤 사람도, 혹은 어떤 신도 성경을 앞설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면 안됩니다.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면 기독교 신앙은 무너지고 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사 우리 인간에게 계시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절대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성경은 수많은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자기 멋대로 농단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겁박하고 자기들의 밥벌이 수단으로 악용했습니다. 중세 카톨릭의 타락도 성경을 농단했던 죄가 가장 컸던 것이지요. 중세 카톨릭은 교황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를 성경보다 앞세웠습니다. 결국 성경을 홀대함으로 인본주의 신앙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회복이 종교개혁의 슬로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e)라는 기치를 걸고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지키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이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성경은 기독교의 상징물이 아닙니다. 성경이 기독교의 장식품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요, 하나님 자신을 우리 가운데 문자로 계시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무시함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은근히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무기삼아 교회를 공격하고, 영혼을 사냥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갈수록 지능적으로 성경을 왜곡하고 부정하며 성경을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무기로 활용하는지 모릅니다. 굳이 이단으로 정죄받은 집단이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은근히 기독교 신앙을 자처하는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고 부정합니다. 마치 성경을 신앙생활 하는데 악세서리 정도로 이용합니다.
한마디로 자기들이 유리한 것만 믿고, 유리한 것을 뽑아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합니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만 믿으며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로부터 성경은 철저히 권위가 부정당하고 홀대를 받는 것이지요. 문제는 성경의 뜻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고, 더러는 성경을 모르면서도 자기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확신을 갖고 악용하는 사례들도 많습니다. 성경은 절대 사사로이 풀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다르게 자신의 수준에서 풀어서는 안된다는 말이지요.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풀어야 가장 정확합니다. 반드시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입맛대로 풀려고 합니다. 그냥 자신들이 배운 상식이나 경험, 혹은 이론이나 학문으로 풀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무식하면 용감하듯이 성경을 자기 믿음의 수준에서 용감하게 풀이하며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기 고집이 대단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풀어야 합니다. 절대 성경은 머리로 풀리는 책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학문의 대가라 할지라도 성경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도올 김용옥이라는 사람이 TV에서 성경을 풀이하는 데 정말 기분 나빴습니다. 자기 학문과 지식으로 성경을 가르치는데 거품을 내듯이 가르쳤습니다. 아주 괴상한 톤으로 떠들며 가르치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그는 자기만의 개똥철학으로 성경을 풀어나갔습니다. 그냥 잡학수준의 지식으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의식하듯 재미로 가르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풀어주셔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성령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가장 이상적이고 확실합니다. 신구약 66권은 서로 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66권은 서로가 서로를 증거해 주고, 보충해주며, 설명해줍니다. 때문에 성경보다 확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지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성경이 성경을 풀어준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으로 성경을 푸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만 성경을 해독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으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만 많이 읽는다고 성경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의 지혜를 구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 성령의 감동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많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감동으로 지혜의 영이 부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말하는 성경이 풀린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풀린다함은 성경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비밀을 깨닫는 자라만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라만 성경대로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입니다. 신구약66권으로 된 정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에 다른 어떤 것을 붙이거나 빼는 것은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 어떤 것도 가감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기독교의 경전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좋은 책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좋은 글이나 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경전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이유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만이 경전이요, 생명이 있는 말씀이 되는 것이지요. 기독교 신앙의 경전인 성경 66권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40명에 가까운 저자들에 의해 1,600년이라는 엄청난 기간 동안에 걸쳐 완성된 책입니다. 1,500년의 구약과 100년의 신약, 도합 1,600년의 기간 동안 집필된 한권의 책인 것이지요.
이 엄청난 세월이라면 솔직히 짝이 맞을 수 없습니다. 그것도 한 사람의 집필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무수한 세월동안 수많은 저자들에 의해 집필된 성경이 오직 하나로 통합니다. 수많은 세월과 수많은 저자들 속에서 변함없이 개입하셨던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개입하셨던 하나님, 인간을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절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기록된 책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 각권의 저자들은 동시대를 살았던 저자들이 아니요, 같은 지역에서 거주하던 저자들도 아닙니다. 동일한 직업을 가진 자들도 아닙니다. 물론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것도 아닙니다. 서도 다른 시대, 다른 지역, 다른 배경을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책을 조합해보니 동일한 목적을 가진 성경이라는 한권의 책이 나왔고, 66권이라는 각권의 책의 내용을 보니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주고 보충해주며 해독해주더라는 것이지요. 상상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말입니다.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성경을 하나님이 기록케 하셨다는 방증인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반드시 하나님이 풀어주셔야만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믿음의 유일한 표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2)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윤리교과서가 아닙니다. 혹은 도덕경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성경보다 정직하고 꾸밈없는 책은 없습니다. 솔직히 종교의 경전이라면 의도적이라도 좋은 내용만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세상의 희귀한 스토리들이 즐비합니다. 혹시 어린아이들이 보면 어떨까 싶은 기사들도 꽤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말 감추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남사스러운 기사들도 많습니다. 솔직히 자연종교의 경전이라면 좋은 내용만 발췌해서 수록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사를 정직하게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기록하여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을 터이나 가장 부합한 목적은 요한복음20장31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물론 이 말씀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는 것이요, 또한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입니다. 이른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5장12절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생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을 묵상하는 가장 중요한 의도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보는 이도 있고, 성경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성경을 반박하기 위해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믿음을 알고 배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통해 영생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5장39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로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성경을 묵상하는 이유, 즉 성경을 읽는 이유가 성경에 영생을 얻는 도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성경을 대하든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은 영생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이지요.
성경에 들어 있는 영생을 얻는 도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모든 성경은 오직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신구약 모든 성경이 오직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그분께만 집중합니다. 구약성경도 예수님을 가리키고, 신약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왜냐면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행4:12). 그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성경은 간접적으로는 예수님에 관한 책이요, 직접적으로는 예수님의 책입니다. 때문에 성경에 계시된 모든 사건은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또한 성경 인물들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소개하는 책도 있지만, 간접적으로도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어떤 사건이나 어떤 인물들 속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건이나 인물들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어떤 곳을 읽더라도 예수가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모든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를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는 책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여러분에게 매우 친절하고 다정스럽게 구원에 이르는 도를 알려줄 것입니다. 다만 당신이 성경 앞에 진실한 구도자의 마음으로 다가선다면 말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지혜가 부족할지라도 성경은 당신에게 지혜의 영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계시의 정신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묵상하되 먼저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여러분의 간구를 외면치 아니하실 것입니다. 물론 성경도 여러분을 절대 모른 척 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반드시 여러분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소개해 주실 터이요, 구원에 이르는 도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고 분명히 구원의 도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담긴 책이기 때문입니다. 본문15절을 다시한번 읽어보십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은 구원에 관한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쳐주고 깨닫게 하며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핵심은 구원에 관한 도를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 외에는 구원에 관한 도를 찾을 수 없고 만날 수 없습니다. 절대 세상 그 어떤 것에서도 우리는 구원의 도를 배울 수 없고 만날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묵상해야 합니다. 상고해야 합니다.
(3)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은 영혼이 구원받는 일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구원받는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이 궁극적인 목적이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지도해주는 책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폐단은 구원을 죽음 이후에 들어가는 천국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들어가는 천국 정도로만 여기는 것이지요. 천국의 시제는 미래와 현재를 모두 다 포함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미래적인 시제로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재적인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지요.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부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현재적 천국을 누리지 못하면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살지라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간다면 분명히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천국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이거든요. 천국을 죽음 이후에 들어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천국을 통치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지요. 하지만 천국을 통치의 개념으로 여긴다면 지금 이 땅에서의 삶도 충분히 천국을 경험하고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곤고할지라도 말입니다. 가끔씩 사람들은 이런 불평을 토해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무슨 천국이냐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왕궁 같은 집이라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분명히 그곳은 지옥입니다. 그러나 비록 초가삼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곳이라면 그곳은 천국인 것이지요. 어린아이처럼 천국을 마치 눈에 보이는 안락한 공간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의미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지옥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17장20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은 사람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도록 말입니다. 교훈은 가르침이요, 책망은 꾸지람이며, 바르게 함은 뜯어서 고치는 것이고, 의로 교육함은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들 모두는 성경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기능들입니다.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운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어져 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덕목들입니다.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 땅을 살아가는데 온전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아무리 구원받은 성도라도 이 땅에서의 삶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것은 성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좇아가는 과정인 것이지요.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라도 성화의 기간에는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부서집니다. 다만 그런 과정에서도 일어서는 법을 배웁니다. 주안에서 주님의 은혜로 일어서는 것이지요. 때문에 우리는 교훈이 필요합니다. 책망도 필요합니다. 바르게 함도 필요하고 의로 교육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운 교육을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성경을 통해 우리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 성경을 통하여 책망도 받으며, 성경을 통해 바르게 함과 의로운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살아갈 것입니다. 왜냐면 히브리서4장12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의미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말씀으로 역사를 운행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지금도 말씀으로 다스리십니다. 말씀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내안에 나를 성전삼고 나와 함께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내안에서 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장1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요1:14).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님은 지금 내안에서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이십니다.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로고스와 레마로 분류합니다. 통상 기록된 말씀이 로고스요, 영감 받은 말씀이 레마입니다.
로고스는 보편적인 말씀이요, 레마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입니다(마4:4). 그 말씀은 샛별같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말씀입니다(벧후1:19). 이른바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인 것이지요. 샛별은 광명한 새벽별이요(계22: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계2:28).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우리가 성서주일을 지키면서 성경을 상고하고 묵상하여 성경의 위대함과 존귀함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