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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20:1-13)-2024.1.7(신년주일)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4.01.06|조회수263 목록 댓글 0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20:1-13)-2024.1.7(신년주일)

 

여호사밧은 남유다의 4대 왕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올바르게 섬긴 비교적 선한 왕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선한 왕이라고 부를만한 왕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왕국 유다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이 몇 사람 등장하지요. 대표적으로 아사 왕과 여호사밧, 그리고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여호사밧 왕입니다. 여호사밧은 아사왕의 아들로서 35세에 왕이 되어 25년을 집권했습니다(왕상22:41-44). 그는 아버지 아사왕의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왕이었지요. 그래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흠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산당을 폐하지 아니하므로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게 했던 것입니다. 산당은 혼합종교의 상징입니다. 산당은 주로 푸른 나무 아래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용도로 사용했던 곳이지요. 하지만 가끔씩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곤 했었지요. 솔로몬의 일천번제 역시 기브온 산당에서 드려진 제사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쉬운 점은 산당을 타파했어야 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편리함을 위함이었던 것이지요.

 

무엇보다 여호사밧 왕은 부친 아사의 시대에 남아있던 남색하던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습니다(왕상22:46). 사실 부친 아사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 유다는 비교적 정국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사왕이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여호와를 의지하기보다는 정치적인 전략을 우선하다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동안 유다를 정결하게 했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원인 중에 하나는 북 이스라엘과 가까워지다가 바알과 아세라를 다시 유다 땅에 퍼트리게 된 거예요.

 

그런 부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율법을 모든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오래가지 못하거든요. 말씀이 없으면 본질적인 변화가 어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여호사밧은 제사장들과 레위사람과 방백들을 세워 전국을 순회하면서 율법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정한 개혁임을 알았던 것이지요. 아버지 아사왕을 통해 터득한 것이지요. 그래서 여호사밧은 율법교육을 강화했던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통해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정의로운 국가건설을 주도한 왕이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여호사밧 정권을 강력하게 지지하사 번성케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여호사밧도 완전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하나가 강하면 하나가 약합니다. 하나를 잘하는데 분명히 하나를 못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호사밧도 북 이스라엘과 가까이하다가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은 가장 악명 높은 왕 아합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자기 아들 여호람을 위하여 아합의 딸 아달랴를 며느리로 맞이합니다.

 

(1) 여호사밧의 연속된 실수

 

아무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아합 왕과의 연혼은 여호사밧에게는 치명적인 위기가 되었던 것이지요. 나라의 존망이 달린 위기에 처한 것이지요. 왜냐면 하나님은 악한 자와의 연합을 기뻐하지 않으시거든요.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자손들이 동맹을 맺고 남 유대를 쳐들어온 것입니다. 큰 무리가 바다 저편에서 유대나라를 치러 온 것입니다. 그 전쟁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여호사밧이 북 이스라엘을 찾아갑니다. 아마도 사돈관계에 있기 때문에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아합왕은 다른 야욕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호사밧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아람나라에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되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북 이스라엘은 독자적인 힘으로 빼앗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왕에게 길르앗 라못을 치러 같이 올라가자고 제안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는 남이 아니라는 논리로 약조합니다(대하18:3). 그러면서도 여호사밧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찜찜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 물어보자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아보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미 하나님을 떠난 아합에게는 진실한 선지자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명분만 갖고 있던 선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아합왕의 들러리들입니다. 아합은 4백명의 선지자들을 불러서 자기가 원하는 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호사밧은 뭔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물을 선지자가 없느냐고 묻습니다. 아합은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첨언합니다. 미가야는 항상 자기에게 흉한 것만 예언한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여호사밧은 그를 불러달라고 주문합니다. 그런데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이에 아합 곁에 있던 시드기야라는 자가 이스라엘 연합군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며 4백명의 선지자들을 충동합니다. 이른바 선지자들을 부추기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곳에 미가야라는 선지자를 남겨 두셨습니다. 남은 자입니다. 그는 참 선지자였습니다. 왕 앞으로 소환된 미가야는 이 일이 아합 왕을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올라가라고 주문합니다(대하18:14). 마치 4백명의 선지자들과 같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미가야 선지자에게 장차 되어질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가야는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경륜을 말합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여호사밧은 깨닫지만 아합왕은 자기에게 흉한 것을 예언했다고 옥에 가두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여호사밧에게 전쟁참여를 독려합니다. 여호사밧은 불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못해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결국 여호사밧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주도하시기 때문에 아합은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치러야합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적인 꼼수를 부립니다. 아주 간사한 방법을 제안합니다.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지요. 자기는 왕복을 벗고 군중속으로 들어갈 테니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전쟁에 나가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람군대의 총알받이 역할을 떠맡기는 것이지요. 얼마나 간사한 생각입니까? 아람군대는 왕복을 입은 자를 타켓으로 삼아 공격할 것입니다.

 

사실 아람군대는 왕복을 입은 자를 공격합니다. 결국 여호사밧은 아람군대의 공격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는 전쟁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저를 도우사 아람군대를 떠나게 하십니다(18:31). 그러나 군중 속에서 평상복을 입고 싸우던 아합은 한 사람이 우연히 쏜 활에 갑옷 솔기를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되지요. 갑옷 솔기는 갑옷 비늘의 이음새 사이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아합왕의 최후가 이렇게 끝이 난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판 웅덩이에 스스로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꼼수에 속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몇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 여호사밧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사실 여호사밧에게는 몇 번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경고를 믿음으로 받아드렸어야 합니다. 돌이켜야 했었지요. 그런데 여호사밧은 그 경고를 무시한 거예요. 여호사밧에게 하나님의 경고가 몇 번이나 있었는지 확인해 보십시다. 여호사밧이 아합과 연혼한 것이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리고 아합과 길르앗 라못을 치기로 동맹한 것도 경고입니다. 4백명의 거짓 선지자의 예언도 역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도 경고입니다. 아합 왕이 왕복을 벗고 자기만 왕복을 입히게 한 것도 경고입니다.

 

그런 숱한 경고등이 자기 앞에 켜졌는데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은 뜻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영적 사인인줄을 알면서도 진행한 것이지요. 다만 하나님의 오래참으시는 성품으로 인하여 순간의 위기에서 건져주십니다. 하나님이 여호사밧의 선행을 기억하사 악한 길에서 그를 막아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길르앗 정벌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실패했습니다. 아합은 그 전쟁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여호사밧은 선지자 예후를 통해 따끔한 질책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도와준 징벌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대하19:2). 물론 하나님이 왕의 선한 일을 추억하사 긍휼을 잊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말도 추가합니다. 그동안 여호와의 말씀으로 살아왔던 여호사밧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신 것이지요. 그는 겸허히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여호사밧의 제2차 종교개혁입니다.

 

그는 종교개혁에 그치지 않고 사법개혁도 단행합니다. 대하19장에 보면, 종교개혁은 대제사장 아마랴가 관장하고, 사법이나 입법, 행정은 스바댜가 관장합니다. 그리고 레위사람들을 관리로 삼은 것입니다(대하19:11). 하나님은 여호사밧의 실수와 연약함 속에서도 여전히 다윗의 등불을 보존하시기 원하셨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러나 아합이 죽은 후에 북 이스라엘은 급속한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그리고 유다도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이라는 담이 흔들려서 남 유대도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모압과 암몬과 마온 족속들이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한 것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다윗시대에 정복되어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지요. 그러나 아합이 죽고 이스라엘이 쇠퇴하자 독립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약체로 보이는 유다를 공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미 예후 선지자를 통해 예고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반응으로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19:2). 너무나 갑작스런 모압과 암몬 연합국의 침공으로 여호사밧은 적잖이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침착하게 이 위기를 극복합니다. 그는 이 위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먼저 전국에 금식을 선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성전으로 나아갑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이 사실을 전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조치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사밧의 신관입니다. 여호사밧이 믿는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오,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는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먼저 기도했습니다(6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을 알고 기도한 것이지요. 그리고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했습니다(7-9절). 무엇보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 약속의 땅을 주셨고, 성전을 통해 간구하면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압이나 암몬이나 에돔을 공략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친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동맹을 맺고 공격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여호사밧은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2) 실수 때문에 위기를 맞은 여호사밧

 

그리고 그는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12절). 여호사밧이 이 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살펴보십시다. 12절입니다. 지금 여호사밧 앞에는 큰 무리가 있습니다. 큰 무리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실 여호사밧이 큰 무리라고 고백한 것은 적군들의 수효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금 큰 문제에 봉착했다는 것이지요. 여호사밧이 큰 무리를 큰 문제로 보는 것은 이 전쟁이 단순한 전쟁이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을 국가간의 전쟁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진노의 한 방편으로 생각한 것이지요(19:2).

 

그래서 그는 이 큰 무리를 큰 문제로 본 것입니다. 만일 모압과 암몬 연합군의 숫자만 가지고 큰 무리라고 했다면 여호사밧은 두려워하지도 않았을는지 모릅니다. 왜냐면 당시 여호사밧 군대의 숫자는 어마어마했거든요. 무려 116만명이나 되었어요(17:13-19). 아마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막강한 화력을 갖춘 군대였습니다. 거기다 크게 용맹한 군사를 많이 두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의 두려움은 단순히 전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어떤 두려움이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이미 자기가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것에 대한 진노가 있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때문에 무릎을 꿇은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만 금식한 것이 아니라 전국민을 대상으로 금식령을 선포한 것이지요. 이 전쟁을 국가 비상사태로 인식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새롭게 복원시킨 성전 새 뜰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자기는 이 큰 무리를 대적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앙을 누가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라는 것이지요. 그는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 인줄을 알았습니다(15절).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전쟁을 사람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른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만일 여호사밧이 이 전쟁을 단순한 국가전으로만 생각했다면 가장 먼저 참모들을 소집하고 전군동원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전쟁임을 알았기에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부복한 것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이요, 전술이었는지 모릅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이것이 이 큰 문제를 풀어가는 최고의 열쇠입니다. 이 고백 속에 여호사밧의 신앙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믿음의 눈으로 접근하고 해결하기 원했습니다. 오직 주안에 답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온 백성으로 더불어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그러자 하나님은 레위 사람 야하시엘을 통해 즉각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17절).

 

우리가 살다보면 큰 문제가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때로는 크게 보이지 않는 간단한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큰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문제가 다 큰 문제입니다. 내가 보기에 작아 보이는 문제일지라도 그 사소한 문제가 내 인생을 파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사소하게 보이는 작은 구멍을 가볍게 여기다가 큰 구멍이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별것도 아니면서 내 눈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문제처럼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문제든지 해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이 큰 문제의 해답이 주안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이 있을지라도 모든 성도가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믿음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주님도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며,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저 평범한 수준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큰 기대는 안할지라도 그동안 갈고 닦은 신앙 양심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는 수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런 수준의 믿음이 아닐까요?

 

그런데 주님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주님도 바라보지만, 자기가 의지할만한 또 다른 믿음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 사람은 어느 상품이 좋은가 비교하여 종교보험을 드는 사람과 같은 셈이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다양한 믿음의 대상 중에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일종의 종교다원주의자들일 것입니다. 말을 하자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다른 것은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직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께 자기 시선을 고정하고 자기 마음을 집중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3) 위기 앞에 선 여호사밧

 

본문의 여호사밧이 그랬습니다. 그는 큰 문제 앞에서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문제만 일으켰지만 지금은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삶을 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행동을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믿는 자는 결국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여호사밧을 보십시오. 그는 큰 문제 앞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것이지요.

 

큰 문제 앞에서 그가 얻은 최고의 깨달음은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는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찾은 것이지요. 때문에 하나님은 큰 문제를 통해 큰 은혜를 부어주신 것이지요.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큰 문제를 풀면 보상도 큽니다. 은혜가 크다는 말이지요. 세상일도 그렇습니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면 보상도 큰 편이지요. 예를 들어 사법시험을 통과한 사람과 말단 공무원시험을 통과한 사람의 대우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영적인 원리도 그렇습니다. 큰 문제를 풀면 큰 은혜가 공급된다는 말입니다.

 

여호사밧 앞에 있는 큰 무리들은 큰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큰 문제를 자기 스스로 풀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해결하심을 목격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여호사밧과 유대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엎드려 경배하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18-19절). 하나님은 그들의 노래와 찬송을 들으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복병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전쟁을 주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대끼리 치고받는 일까지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죽이게 하신 것이지요.

 

유다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들 망대에 이르러 그들의 시체만 확인할 뿐이었지요(24절). 그들은 피한방울 흘리지 않은 채 전쟁을 이겼던 것입니다. 큰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었더니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여호사밧과 유대백성들은 적군들의 물건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전리품을 거두는 것이지요. 문제는 큰 무리들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전리품들도 상당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큰 문제를 해결하면 주어지는 보상도 크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얻은 전리품은 엄청난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었습니다. 전리품이 얼마나 많은지 가져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무려 사흘 동안 거두어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소식은 금방 이방 모든 나라에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게 된 것이지요. 그로 말미암아 여호사밧이 통치하던 유대나라는 더욱 태평성대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큰 문제 곁에는 반드시 큰 응답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아무리 큰 문제가 엄습할지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안에 하나님이 없는 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두려운 것입니다. 내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큰 문제도 겁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스가랴서4장6-7절을 보면,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금년 한해 우리교회를 이끌어 가실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주님을 찾으십시다. 그리고 그분만 바라보십시다. 그분을 통해서 도움을 받으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말은 내안에 계신 주님께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먼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지금 내안에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른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것이지요. 그 임마누엘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인 것이지요.

 

예수님이 임마누엘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육체를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살전5:10). 그분이 우리 심령속에 오셔서 함께 살려면 반드시 우리 죄를 없이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여 하늘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속량하신 것이지요. 그 예수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과 함께 오신 것입니다. 이른바 내안에 나를 성전삼고 왕과 주인으로 다시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지요.

 

나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주님이 주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나는 그분의 몸이 되어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것이지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 사는 자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사는 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내안에 계시는 주님께 민감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안에 생수가 부어져야 합니다. 이 생수는 하나님의 생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생수는 성령을 통해서 내안에 부어집니다. 그리고 이 생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줍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수를 부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안에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수가 부어집니다. 생수가 부어지되 풍성히 부어져야 합니다. 내안에 하나님의 생수가 고갈되면 메말라갑니다. 메말라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고갈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적인 냄새만 날뿐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 없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인생은 죽은 것입니다. 사나마나한 인생인 것이지요. 우리는 주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날마다 성령의 생수를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금년 한해 반드시 주안에서 주님만 바라보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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