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1-5)-2024.1.14
본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최후의 권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내어진 편지입니다.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이 주로 1차전도 여행을 통해서 결실한 교회들이지요. 교회구성원들은 대부분 이교도에서 개종한 지 얼마 안되는 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울이 전한 복음을 지켜낼 믿음이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왜냐면 유대주의 선동자들이 가만히 침투하여 할례와 율법준수를 요구하는데 그것을 방어할 분명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지요.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가르침을 확증하셨고, 요구하는 순종을 깊게 만드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거짓교사들의 유혹에 빠져 할례와 율법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지요.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힘써 강조하는 것이 구원론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짧은 책이지만 기독교 신앙에 가장 중추적인 교리인 믿음으로 받는 구원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성숙한 삶에 대하여 심도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은혜의 복음을 변호하는 내용(1-2장)과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는 내용(3-4장), 그리고 은혜의 복음을 적용하는 내용(5-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은혜의 복음을 적용하는 내용입니다. 이른바 이신득의 신앙의 실천과 적용을 다루는 내용인 것이지요. 바울 사도는 본서 5장 후미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을 대비시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5:16-26절). 은혜의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서 6장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자들의 실제적인 행동지침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두 개의 주제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이요(2절),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7절). 즉, 은혜의 복음을 가진 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들이요, 그런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 2절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의 큰 법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주신 법입니다. 그 법은 돌비에 새겨주신 법이요, 의문에 기록해주신 법입니다. 우리는 그 모세의 율법을 통상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한정된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억지로 모세의 율법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율법의 정신에 맞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억지로 강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또 하나의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은 그리스도의 율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각 사람의 마음 판에 성령을 통해 새겨주신 심비의 법이지요. 그리스도의 율법은 각 나라와 족속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법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을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갈라디아 교회에는 모세의 율법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이 이끌어가는 교회인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법을 소개했고, 가르쳤으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법
그리스도의 법은 예수 안에 있는 법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오직 생명의 성령의 법만이 우리를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십니다. 이른바 천국백성으로 삼으신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이루라는 말이지요. 천국시민으로 살라는 말이에요. 천국시민으로 살려면 당연히 천국법을 준수해야합니다. 천국법이 그리스도의 법이에요. 빌립보서3장20절은 말씀하십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나니”라고 말입니다.
비록 우리 육체가 이 땅에 머물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소속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처소인 것이지요. 이 땅은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임시정류장인 셈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영원한 장막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영원한 장막은 무너지지 않는 하늘장막이지요. 믿는 자는 거기서 영화로운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는 그 장막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잠시 머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땅에서도 천국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천국시민답게 사는 것은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의 과정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절대 우리는 이 땅에서 영화로운 삶을 살수 없습니다. 다만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화로운 삶(영화)과 거룩한 삶(성화)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영화는 죄가 없는 무결점의 상태를 말함이요, 성화는 죄 중에 있을지라도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상태를 말합니다. 좀 더 쉬운 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화가 완전한 상태라면 성화는 온전한 상태인 것이지요. 완전함은 한 점의 오류나 흠과 점과 티가 없는 상태입니다. 퍼펙트한 상태인 것이지요. 그러나 온전함은 다릅니다. 완전을 향해 가는 것이 온전입니다.
비록 우리 인간이 완전함을 향하여 달려갈지라도 연약한 인간은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깨어지고 부서집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완전함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지요. 때로는 비틀거리면서 완전함을 향해 나아갑니다. 넘어졌던 그 자리에서 몸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어내고 다시 전진하는 것입니다. 완전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것이 온전함입니다. 그 온전함이 거룩이라는 성품과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도 육체를 입고 사는 한 영화의 과정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화의 과정은 얼마든지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화는 거룩함을 좇아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예수를 푯대로 삼아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없고 예수만 있는 삶입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입니다(레11:45). 이로 볼 때 우리는 충분히 거룩한 삶을 살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가능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스스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친다할지라도 불가능합니다. 내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요, 왕이시며 전부가 되셔서 나를 이끌어 가실 때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세상 어떤 이도 만들어낼 수 있는 성품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내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성품도 아닌 것입니다. 거룩은 절대 하나님께 속한 성품이요, 그분의 속성인 것입니다.
제아무리 고결한 삶을 사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 안에 예수가 없다면 그는 절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만한 착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사람의 눈에 보이는 착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준에 따라 성인, 성자, 위인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적 판단이 아니라 상대적 판단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단순히 언어적인 유희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비록 사람들 보기에는 거룩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그는 거룩함을 좇아가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실제로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향해 성도라고 부르십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룩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이나 양심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분리와 분별과 구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을 성도라고 말하고, 죄로부터 떠나는 삶을 성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거룩은 하나님만 결정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인 것이지요.
(2)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방법
그러므로 가장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방법은 내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요일5:12).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구주삼고 그분의 성전이 되어 사는 자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시간 본문 2절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씀을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준수하라는 말씀이요,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계명을 다 지키라는 말씀이지요. 감히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안에서 나로 하여금 하게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가르침은 성령을 통하여 내게 전달이 되고 성취가 됩니다(요14:26).
때문에 내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 믿음을 가진 자라야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지요. 내안에 주님이 임재하심을 인정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요. 제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큰 소리를 칠지라도 내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지 못한다면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13장5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시로 우리는 내안에 계신 예수님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안에 계신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죄로부터 자유입니다. 죄에서 자유함이지요. 누차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인은 3대 자유를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죄에서 자유, 사망에서 자유, 율법에서 자유입니다. 믿는 자는 이 세 가지 자유함으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자유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죄에서 자유입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함이 가장 급선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목적은 다양하지요.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오신 목적 가운데 죄를 없이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인간의 가장 시급한 문제가 죄의 문제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꼬인 것이지요. 죄 때문에 병도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이지요. 때문에 죄의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 받아야 합니다. 죄의 문제가 풀려야 사망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지요. 당연히 죄를 죄로 정죄하는 율법도 완성이 되는 것이구요.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함이 가장 우선적인 일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가장 먼저 죄에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는 자라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집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한 첫 번째 단추가 죄의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죄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죄의 문제를 거론합니다. 물론 본문에서 거론하는 죄는 다른 사람에게 드러난 죄의 문제이지요. 만일 다른 지체에게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3)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방안
지금 본문의 바울은 공동체적인 관계속에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방안을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는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바울 사도는 자신의 죄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범한 죄가 드러났을 때 대하는 자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 문제가 그리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막상 이런 문제가 교회 안에서 발생하면 교회와 성도들이 적잖이 당황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빈번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상정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제시하는 방법을 보십시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눈여겨 볼만한 대목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신령한 너희’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범죄한 형제들에 비해서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범죄한 자들을 일방적으로 정죄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한 갈라디아 성도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화법인지 모릅니다. 가끔씩 우리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툼을 중재할 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다툼이 일어난 당사자들을 향해 둘 다 똑같다고 부채질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한쪽을 추켜세움으로 인하여 타오르는 불을 진정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범죄한 일이 드러나면 은근히 즐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치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이 염장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구요.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충고하는 사람들도 있고, ‘내가 그럴 줄 알았다’고 은근히 압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범죄한 형제를 바라보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신령한 너희’라고 추켜세운 후에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아 주라고 권면합니다. ‘바로 잡아주는 것’은 원상회복을 시키는 것입니다. 일종의 치료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사건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하여 시험을 받지 말라는 것이지요. 가끔 우리 주변에 형제가 범한 죄로 인하여 자신이 시험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죄는 다른 사람이 짓고 죗값은 자신이 치르는 셈이지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실제로 믿는 자들의 범죄한 행위를 보고 듣고 정작 자신이 시험에 빠져 믿음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소리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무개 때문에 실망해서 교회를 안 다닌다’ 혹은 ‘아무개 때문에 시험에 들어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은 자신의 직접적인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형제가 범죄한 일에 대하여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제의 죄를 다루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죄에 대한 인식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법을 통해 죄를 인식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나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인식이 같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죄를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죄를 자각하는 것이지요. 반면교사로 삼는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각 사람이 인식하는 죄의 문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양심입니다. 양심을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않는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드러납니다. 양심보다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 양심이 어떤 양심이냐는 것이지요. 믿는 자의 양심과 믿음이 없는 자의 양심은 다릅니다. 믿는 자의 양심은 자기 안에 있는 믿음의 기능을 대신하고, 믿지 않는 자의 양심은 율법의 기능을 대신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양심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양심을 잘 관리하고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양심이 무너짐은 신앙이 무너짐입니다.
또한 남들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요? 그것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착한 일입니다. 착한 일은 나눔에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짐이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도 있고, 불신자에게도 있습니다. 짐이 없는 자는 없지요. 짐도 가벼운 짐도 있고, 버거운 짐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짐을 대신 져주시겠다고 자청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짐이라도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대신 져주십니다.
그래서 짐은 서로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면 가볍습니다. 2절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말씀하고, 5절에서는 ‘각각 자기의 짐을 자신이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2절에 나오는 짐은 헬라어로 ‘바로스’요, 5절에 나오는 짐은 ‘포르티온’입니다. 그런데 ‘바로스’의 짐과 포르티온‘의 짐은 다릅니다. ‘바로스’의 짐은 서로 져야 할 짐입니다. 질병이나 과제나 고통이나 핍박이나 억누름을 말합니다. 세상만사 어려움을 의미하지요. 1절에 기록된 형제의 범죄도 함께 져야 할 짐입니다. ‘바로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5절에 나오는 짐 ‘포르티온’은 배에 싣는 화물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의미는 한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짐 꾸러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짐은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말합니다. 게으른 사람이나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이 ‘프로티온’의 짐을 자꾸 누군가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려는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자기에게 부여된 짐은 자기가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스’의 짐은 서로 서로 져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눔입니다. 그것이 착한 행실입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 자는 착한 일을 하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10절). 하지만 먼저는 믿음의 가정들에게 해야 합니다. 가까운 자기 주변을 살펴서 착한 일을 하라는 것이지요. 교회는 자기 교회식구들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함에 있어 각 개인이 실천해야 할 일이 있고,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나타내야 할 것들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본문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실천해야 할 덕목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점이나, 사람들과의 관점, 혹은 자기 자신과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믿음의 성도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