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소위를 살펴볼지니라(학1:1-8)-2024.1.28
학개는 페스티벌(축제)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선지자입니다. 아마도 그는 스룹바벨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던 인물일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학개 선지자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는 바벨론 포로 후기 선지자입니다. 대표적으로 바벨론 후기 선지자는 학개와 스가랴와 말라기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재건을 다루고, 말라기는 국가재건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재건을 다루고 있는 선지서 가운데 학개와 스가랴서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학개서는 성전을 건축하도록 촉구하고, 스가랴서는 미래의 메시아 성전을 바라보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학개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루 속히 성전을 재건하도록 촉구하고 독려하기 위해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서와는 다르게 우상숭배에 대한 고발이나 공격이 없습니다. 주로 여호와의 성전을 재건하라고 촉구하는 것이지요. 그가 성전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성전중심의 신앙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지만 하나님은 상징적으로 성전에 계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처소입니다. 하나님의 집이지요. 하나님이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이름을 두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신 표면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문 곳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성전이나 보이지 않는 성전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성전을 가시적 성전이라고 부르고, 보이지 않는 성전을 불가시적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대표적으로 가시적 성전과 불가시적 성전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 눈에 보이는 성전, 이른바 예배드리는 처소가 가시적 성전이요,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성전, 이른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불가시적 성전인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사는 자가 불가시적 성전인 것이지요. 고린도전서3장16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고린도전서6장19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자는 성전이 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신분과 소속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이지요.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건축된 교회입니다. 성전이 된 것이지요. 여기서 성전이라 함은 고린도 지역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성전은 믿는 자들이 믿음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예배당도 포함이 되겠지요. 이른바 믿는 자들의 예배처소 역시 성전이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전에 관한 신학적인 의미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성도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고 계신 성도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도가 성전이라는 말은 비난받을만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당이 성전이라는 말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적 성전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도 마음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외모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속사람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겉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깨끗한 음식을 담으려면 반드시 깨끗한 그릇이 필요하듯이 결코 겉 사람도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경건의 능력도 중요하나 경건의 모양을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원리로 접근해보면 영적인 원리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가시적인 성전이 중요함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가시적 성전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중요하지만 성도가 모이는 교회라는 공간도 역시 중요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둘 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성전도 그렇습니다. 보이는 성전도 중요하고 보이지 않는 성전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구약 성도들은 가시적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 만나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과 친근히 교제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성전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성전을 단장하는 법을 배운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보이는 성전은 너무나 중요했던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보이는 성전에 집착한고로 보이지 않는 성전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성전의 본질적인 의미를 퇴색시켜 버렸던 것이지요. 비본질적인 것으로 인하여 본질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이스라엘의 보이는 성전을 파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보이는 성전의 위용과 아름다움만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1) 성전을 파괴시킬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의도
그것은 결국 성전을 지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실 작업이 무엇일까요? 보이는 성전을 파괴시켜버리는 것입니다. 범죄할 수밖에 없는 성전을 없애버리는 것이지요.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30).
그만큼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가 거하시는 성전을 파괴시켜버려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파괴시킴으로 인하여 성전의 본질을 회복하기 원하셨던 것이지요. 때문에 당신의 영광스러운 집을 파괴시킨 것입니다. 물론 이방인의 손을 빌려서 말입니다. 그것이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알다시피 솔로몬의 성전은 얼마나 위대한 건축물입니까? 온갖 심혈을 기울여 지은 하나님의 처소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웅장한 성전을 왜 파괴시키는 것을 허락하신 것일까요?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교심은 강화되었는지 모르지만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점점 외식적인 종교인들로 타락해갔던 것이지요. 때문에 하나님은 보이는 성전을 파괴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보이지 않는 성전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가 자식에게 학습을 위하여 성능 좋은 컴퓨터를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자식은 그 컴퓨터를 공부를 위한 용도로 사용하기보다는 게임이라든지 좋지 않는 용도로만 사용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부모는 그 컴퓨터를 차라리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제로 자율능력이 없는 자식이라면 컴퓨터를 없애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자식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 아무리 비싼 컴퓨터라도 없애버리는 것이 오히려 자녀교육에 유익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이 성전파괴를 허용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생각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가졌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득불 그 성전을 파괴시켜야 했던 것이지요. 그것도 바벨론 제국의 손을 빌려서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 없는 민족이 된 것입니다. 대신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소유한 민족이 되어야 했지요. 그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이 없는 땅 바벨론에서 70년을 살아야 했던 것이지요. 성전중심의 삶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당중심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성전중심의 삶이란 성전을 이루는 삶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삶인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비록 바벨론에서 보이는 성전은 없었으나 보이지 않는 성전을 인식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느껴보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만끽하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곳에서 오히려 그들의 신앙이 순수해졌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은 성전에 대한 사모함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던 것입니다. 이제 다시 그들이 자기 본국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성전을 올라가서 신앙생활을 잘하리라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편에 있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시편120편~134편)를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그중에 시편126편은 바벨론포로에서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대표적 시입니다. 그만큼 성전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없을 때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행가 가사에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지요.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한 가지 분명한 목표를 주셨습니다. 물론 바사왕 고레스를 통해서 말입니다. 귀환해서 성전을 재건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스룹바벨을 필두로 해서 1차 귀환을 했습니다. 그들의 귀환목적이 무엇입니까? 성전을 재건하는 일입니다. 에스라서1장2절과3절을 보십시오. “바사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왕 고레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레스로 하여금 이런 명령을 하게 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1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바사와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오, 성전을 파괴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성전을 재건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2) 성전을 다시 건축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
그러면 하나님이 이제 와서 성전을 재건하라 명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의 가치를 인식한 자기 백성들이 보이는 성전의 가치를 인식할 수준으로 성장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성전이 없는 이방인의 땅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참된 성전의 가치를 인식했다고 여겨주신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보이는 성전을 가져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가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무너진 성전을 다시 재건하라고 명하십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보이지 않는 성전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배웠을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이 하나님이심을 말입니다. 이제 그들은 참된 성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성전을 재건할지라도 더 이상 성전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을는지 모릅니다. 물론 그들이 여전히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속은 것이 아니라, 속아주시는 것이지요. 그것은 육신의 부모가 자식에게 속아주는 원리나 비슷할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 부모들도 자식에게 속아주십니다. 져주시는 것이지요.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어쩌면 성전을 재건하라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을 다시 한번 믿어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비록 그들이 다시 나중에 그 자리로 돌아갈지라도 말입니다. 끝까지 믿어주시는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생각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레스를 감동하사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스룹바벨을 두령으로 해서 예수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하게 됩니다. 1차로 귀환한 숫자는 4만2천3백6십명입니다. 생각보다 참여하는 숫자가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바벨론에서 70년을 살면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정착했기 때문에 둥지를 이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귀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건축의 지대를 놓았습니다(스3:12). 그들은 신앙적인 준비와 함께 물질적인 준비를 시작하였던 것이지요(스3:1-7). 그동안 무너졌던 제단을 만들어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중단되었던 절기를 지켰습니다(스3:1-6). 또한 물질적으로도 솔로몬의 성전을 건축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목수와 석수 같은 기술자를 고용했습니다. 심지어 시돈사람과 두로 사람을 통해 재료를 구비했습니다. 이른바 성전 재건을 위한 기초 작업을 시작한 것이지요(스3:8-13). 그들이 귀환한지 이년 만에 성전재건이 시작된 것입니다(BC536년).
그런데 얼마 못가서 성전재건이 중단되었습니다(BC534년). 그리고 16년 동안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박해와 집요한 방해공작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비전이 중단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시간은 더딜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성전재건을 촉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때가 다리오 왕 이년 유월 초하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학개에게 임한 것입니다(스5:7, 학1:1절상). 단도직입적으로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BC 520년에 성전재건이 시작되지요. 1차포로 귀환 년도를 BC538년의 기산하면 18년의 세월이 지난 것입니다. 그들은 18년 동안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상태로 거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방해하는 세력을 이길만한 힘이 없었고, 성전을 재건할만한 재정이나 인력이 부족해서 손을 놓고 있던 상태였던 것이지요.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그렇다할지라도 궁극적인 이유는 신앙적인 게으름과 안일함이 문제였던 것이지요. 그들이 처음 포로귀환 하던 정신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 열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신들의 일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 가난하여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변명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은 판벽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학개 선지자를 통해 성전을 재건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당시 이스라엘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당시 그들이 수행해야 할 가장 영적인 일은 예배의 중심지인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때가 이스라엘에게 있어 신정정치의 영향이 가장 약화되었을 시기였을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성전신앙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을 경배하는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그들은 성전을 건축해야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믿음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일이라지만 보이는 육신 세계의 일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이는 세계도 무시할 순 없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거든요.
아담의 범죄도 자기 눈앞에 보이는 선악과의 보암직한 유혹을 이겨낼 수 없어서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영역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이는 것을 무시하면 안된다는 증거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결정할 만큼 지대한 영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심령의 성전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눈에 보이는 성전도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는 성전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또한 그들이 성전을 재건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경건의 능력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경건의 모양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상당수의 성도들이 놓치기 쉬운 함정이 여기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강조하면서 보이는 세계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삶이 힘들고 곤고해질 때 이런 넋두리를 하는 분들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천국에 빨리 데려가시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언뜻 들어보면 꽤나 믿음이 있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믿음의 소리가 아닙니다. 그냥 푸념에 불과할 뿐입니다. 비록 삶이 버겁고 어려울지라도 현실의 삶 가운데 믿음으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함이 옳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보이는 세계의 가치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 성전을 재건해야 할 또 다른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는 바는 마음의 성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이스라엘은 먼저 참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육을 입고 사는 백성들이기에 보이는 성전 역시 있어야하고 중요함을 인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보이는 성전은 보이지 않는 성전의 성숙함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은 세상이라는 공간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공히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는 세상이라는 공간속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는 살아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믿음의 자리가 필요합니다. 그 믿음의 자리가 거룩한 자리입니다. 거룩한 자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라는 말입니다. 그 고정된 자리가 성전입니다. 하지만 고정되지 않는 자리도 있습니다.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움직이는 성전이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당신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당신의 이름을 두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성전이요, 하나님이 머문 곳이 성전입니다. 내가 성전인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전이라는 집을 짓게 하십니다. 사실 인간은 100% 영적인 존재는 아니거든요.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은 분명히 육체의 한계를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육체가 인식할만한 성전도 필요한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이 거주하신다는 상징적인 공간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징적인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 미치는 영향력으로 볼 때 상징적인 성전도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행동이 과연 하나님보시기에 어떤 것인지 돌아보라는 것이지요. 당시 이스라엘은 자기의 소위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무슨 목적으로 바벨론에서 귀환했는지를 말입니다. 무엇보다 일의 우선순위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3)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당시 이스라엘의 일의 우선순위는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자기들의 육신적 안일에 빠져 살았던 것이지요. 믿는 자의 우선순위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그래야 범사가 잘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은 반대로 행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의식주에 매달려 살았던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이 뿌린 대로 거두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이 먹는 대로 배부르지도 못했습니다. 입어도 따뜻하지 않았고, 일군이 삯을 받아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6절).
심지어는 많은 것을 바랐으나 적었습니다. 집으로 가져갔으나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불어 버렸기 때문입니다(9절).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슬을 그치게 하셨고, 땅에는 산물을 그치게 하신 것입니다(10절). 심지어 한재를 불러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신 것이지요(11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실 복을 막아버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을 방치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왜 자신들이 안되는지 이유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충고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부르시어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는 시시한 변명을 하지 말고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그들은 아직은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아니라고 변명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시기상조라는 것이지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때를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저울질 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때를 가지고 자기 때를 맞춥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생각을 집어넣고, 자기들의 때에 하나님의 때를 저울질 했던 것이지요. 얼마나 어리석은 백성들입니까?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당장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당시 솔로몬의 성전같이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재정상의 어려움을 빌미로 건축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대 솔로몬 성전의 위용을 두고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솔로몬이 레바논에서 공수해온 고가의 백향목이나 잣나무 같은 재료를 살만한 재력이 없다는 것이었겠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거든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라도 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이 가면 방법이 생기는 법이지요. 이는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불효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합니다. 돈 많이 벌고 성공해서 효도하겠다고 벼릅니다. 부모의 마음을 잘 모른 것입니다. 부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지금 있는 그대로 보여만 주어도 흡족해 하십니다. 부모는 자식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이 성전을 짓겠다는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구해다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산에 가면 울울창창한 나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굳이 레바논의 백향목이 없다고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이거든요.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런 영적원리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승부하려고 합니다. 이른바 외모로 승부를 보려고 하거나, 양으로 승부를 보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굳이 하나님이 보이는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성전의 중요함을 가르쳐주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관심은 보이는 성전의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성전의 크기나 위용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런 것이 하나님의 관심사라면 굳이 우리 같은 자를 택하셔서 그런 미션을 주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부자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보이지 않는 심령성전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모실만한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내안에 하나님을 모셔드리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일까요? 다음 세대를 위해서 예루살렘을 개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가 살아갈 수 있도록 예루살렘을 현대식 도시로 구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사명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성전건축이 1차로 귀환한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는 말이지요. 그들은 그 어떤 일보다 성전 건축하는 일을 우선해야 했습니다. 나머지는 나머지 사람들의 몫입니다. 푼수 같은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 일에 손을 대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스스로 지쳐서 넘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금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성전재건입니다.
모든 일은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급한 일이 있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은 급하기는 하나 중요하지 않는 일이 있고, 어떤 일은 급하지는 않으나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급하면서도 중요한 일이 있지요. 반대로 급하거나 중요하지도 않는 일도 있겠지요. 1차로 귀환한 그들에게 가장 급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성전건축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요? 그것도 성전건축입니다. 성전건축은 그들에게 있어 가장 급하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성전건축을 마쳐야 2차 귀환 팀들이 또 다른 사명을 갖고 들어올 수 있는 것이거든요.
순서대로 영적지도자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2차 귀환 팀(BC458년)이 들어와서 종교개혁을 단행할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운동을 전개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다시 BC445년경에 정치지도자 느헤미야를 필두로 하여 4만2천3백6십명이 돌아와서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라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우선순위로 여기고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지만 칠십년이 지나면 반드시 본토로 귀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귀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요, 적극적인 열심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바벨론에서 풀려 난지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전의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불순종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 버린 셈이지요.
시쳇말로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만 안된 병사들은 군기가 들어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예전의 자리로 돌아가 버릴지라도 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할 때만 해도 나름대로는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군인 같았을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열심과 패기로 충만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에 금방 동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세속화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육적인 자아를 죽이고 주님만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날마다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결국 그것은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른바 주님의 성전이 되어 사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학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상태를 진단해보고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지금 우리 자신의 소위를 살펴보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