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만의 병 고침을 통한 믿음의 발달과정(왕하5:1-19)-2024.2.18
믿음에는 발달과정이 있습니다. 일의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으며, 결국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람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을 인도하시는 과정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아람나라에 나아만은 자기 주인에게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이른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감이 막강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아람나라가 이스라엘과 전쟁할 때 나아만이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 혹자는 길르앗 라못 전쟁을 나아만이 지휘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나아만이 이스라엘 왕 아합을 살해했다고 기록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아람나라의 영웅 같은 인물이요, 왕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아람나라는 이스라엘과 항상 대립관계에 있었습니다.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십니다. 이미 나아만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지요. 1절에 보면, 나아만을 높여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아람나라의 2인자로 세워주셨다는 말이지요. 이로 볼 때 나아만은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택정함을 받기로 작정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인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꼭 나아만에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기 삶에 개입하셔서 역사하심을 인식하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더러는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서 뒤늦게 알게 되지요. 하나님이 자기 삶에 개입하셨음을 말입니다. 나아만도 당시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 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당신의 의지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역사하심을 드러내는 방식은 다양하지요. 나아만에게 있어 하나님이 당신의 역사하심을 드러내는 방식은 문둥병입니다.
나아만은 부족할 것이 없을 정도로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지요. 문둥병입니다. 큰 용사임에도 불구하고 문둥병자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큰 용사일지라도, 혹은 존귀한 자라 할지라도 문둥병자이기에 그는 불행한 자입니다. 불행함을 넘어서 죽은 자와 마찬가지였던 것이지요. 문둥병은 하나님의 형벌로 인식했으며 사람들과의 접촉이 불가한 천벌이었거든요. 보통 사람들 같으면 버림받은 인생으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문둥병은 저주받은 자의 병이라고 부를 정도로 무섭고 비참한 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아만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문둥병을 꺼릴지 모르나 하나님은 문둥병을 통해서 나아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초대하기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만일 그에게 이런 약점이 없었다면 감히 하나님을 접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문둥병으로 인하여 심령이 가난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그가 세운 공로로 인하여 상당한 대우는 받고 살았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 참된 기쁨이나 행복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문둥병이 나아만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내는 촉매제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문둥병은 나아만에게 있어 겸손의 옷과 같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을 계속 주시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나아만의 삶의 한복판에서 역사하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쓰게 하시는 분이시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나아만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다루심을 보게 하신 것이지요. 그가 비록 이방인이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이 본문을 통해서 한 사람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만 칭찬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 이상의 원대한 비전을 갖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끼치는 영향력은 기대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아람나라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나아만을 복음의 무대로 나오게 하시어 아람나라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파하게 하시는 원대한 꿈을 갖고 계셨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이 나아만 장군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먼저 나아만장군의 삶에 개입하고 계셨습니다. 나아만을 전쟁의 영웅으로 만드셔서 아람나라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키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비록 나아만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당시는 모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 전부터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고 간섭하고 계셨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비록 알지라도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 믿음을 가진 이후에 아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불행하게도 살아생전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다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영혼들이 불쌍해서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가 지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식하고 발견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그것을 아는 것마저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은 나아만의 삶 가운데 이미 개입하고 계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하여 문둥병을 발병케 하신 것이지요. 솔직히 문둥병이 아니면 나아만이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라도 갖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갖춘 아람나라의 영웅 나아만을 하나님 앞으로 끌어오는 것은 문둥병만한 것이 없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문둥병으로 나아만을 낮추신 것입니다. 문둥병은 나아만을 낮추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사람을 낮추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나 나아만에게 있어서는 문둥병이었던 것입니다. 문둥병이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병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나아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접촉점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에게는 겸손할 수밖에 없는 가시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대부분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거든요. 교만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겸손한 자는 찾으시나 교만한 자는 버리십니다.
그래서 각 사람에게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가시가 주어짐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때문에 성경은 고난받는 것이 내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질병이 유익하기도 하고, 궁핍이 유익이 됩니다. 때로는 미련함이 유익이 되기도 하고, 약함이 유익이 되기도 합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면 최고로 유익한 것입니다. 나아만의 문둥병은 나아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통로가 된 것입니다.
나아만의 집에는 전에 이스라엘 땅에서 붙잡아 온 작은 계집아이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계집아이는 하나님이 나아만 장군을 구원하기 위해 그 집에 미리 파송하신 선교사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계집아이가 자기의 안주인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합니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시리이다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말입니다(3절). 감히 그런 확신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만일 선지자가 문둥병을 못 고친다면 그 계집아이의 신변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계집아이가 말하는 선지자는 당시 사마리아에 있는 일반적인 선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지자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 선지자가 어떤 선지자입니까? 엘리사 선지자입니다. 그녀는 우리 주인이 그 선지자 앞에 서면 혹시 문둥병을 고칠지 모른다는 불확실한 정보가 아니라 분명히 그 선지자가 주인의 병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불확실한 능력이 아니라 분명한 능력이요, 확실한 능력입니다. 다만 그 복음을 우리는 불확실하게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예수 믿으면 천국갈 수도 있다고 전합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것입니다. 갈수도 있다는 것은 못 갈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큰 확신으로 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1장5절을 보면,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복음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확률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확신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무슨 확신을 갖고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복음의 확신이 없으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능력은 성령의 나타남을 의미하지요. 복음은 성령의 나타남으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아만 가정에 계집아이는 담대하게 자기가 아는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복음을 전한 것이지요. 이제 복음의 능력을 행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계집아이는 복음을 소개하는 역할만 한 것이지요. 복음의 능력을 행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능력을 행한다고 착각하니까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공은 나아만에게 굴러갔습니다. 나아만이 계집아이의 소리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달라질 것입니다. 과연 나아만은 계집아이의 소리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보면 나아만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계집아이의 정보를 좋게 여긴 것이지요. 왜냐면 나아만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둥병을 통해서 나아만을 그렇게 낮추신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갈 정도로 마음을 가난하게 하신 것이지요. 그러면 믿음을 갖기 위한 나아만의 과정이 어떠했을까요?
(1) 계집아이의 말을 들었습니다(믿음의 시작)
나아만은 계집아이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알지 못할지라도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기회로 본 것이지요. 만일 그가 작은 계집아이의 말이라고 무시했다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만이라는 사람을 우리도 기억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나아만이 성경적인 인물로 등장한 것은 계집아이의 말을 들음으로 인하여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도 가볍게 흘러버릴 수밖에 없는 말이나 작은 행동들의 반응을 통해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된말로 큰 의미 없이 믿음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친구 따라 교회 예배에 한번 참석한 이후로 믿음을 가진 경우도 많고, 혹은 일신상의 이유 때문에 믿음을 가진 계기도 많습니다. 어느 날 마음이 우울해서, 혹은 병을 고치기 위해, 아니면 자기 삶을 순화시키기 위해서 교회를 찾았다가 믿음을 가진 경우도 많습니다. 나아만도 계집아이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들었던 것이지요. 그 마음을 하나님이 만지고 계셨던 것이지요. 이미 나아만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지요.
물론 이 문제는 나아만이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평소 아람나라와 적대관계에 있던 이스라엘을 나아만이 혼자 결정하여 방문할 위치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먼저 자기가 섬기는 왕에게 이 정보를 전한 것입니다. 허락을 받는 것이지요.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나아만은 그동안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별 수단과 방법을 다 강구해 보았을 것입니다. 왕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힘껏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왕으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 테지요. 아람왕은 허락과 동시에 이스라엘 왕에게 자기의 친서까지 첨부하고 예물까지 준비시켜 보낸 것입니다. 반드시 고쳐달라는 식이지요.
그런데 친서를 받은 이스라엘 왕이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가 무슨 재주로 문둥병을 고치냐는 것이지요. 친서를 읽은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왕의 생각에는 아람나라 왕이 병 고침을 빌미로 해서 침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는 당시 아람과 이스라엘의 긴장상태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왕의 태도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인간적인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때문에 마치 궁궐에 초상이 난 것처럼 큰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엘리사를 소환하십니다(8절).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는 말입니다. 엘리사는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었습니다.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 사람을 자기에게로 보내라고 청합니다.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왕은 믿음이 전혀 없었지만 엘리사는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나아만이 엘리사를 방문합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말들과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을 방문한 것입니다. 아마도 아람나라 군대장관의 신분으로 방문한 것이지요. 자신의 위세를 자랑하듯이 말입니다. 솔직히 자기 병을 고치려고 선지자 집을 찾아가는 데 무슨 말들과 병거들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냥 자기 몸만 태울 수 있는 말 한필이면 족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나아만은 자신의 권세를 최대한 드러내며 엘리사를 찾아간 것입니다. 나아만이 도착하자 엘리사는 사자를 보내어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명합니다(10절). 그러면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고 말입니다. 처방과 함께 결과까지 알려준 것이지요.
그런데 나아만은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의 생각으로는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극진한 예우를 갖추고 자기를 영접해 줄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에 안수를 하든지, 혹은 종교적인 의식을 한 후에 고쳐 줄줄 알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다짜고짜로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요단강물에 가서 일곱 번이나 씻으라니 너무나 분했던 것입니다. 자기 나라 아람에도 요단강물보다 더 좋은 강물이 얼마나 많은 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요단강물에 몸을 씻으라니요? 실제로 아람의 다메섹강의 원류 아마나강이나 바르발강은 요단강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강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격분한 채 아람으로 돌아가겠다고 엘리사의 집을 나와 버린 것입니다. 나아만은 자신을 낮출 준비가 전혀 안되었던 것이지요. 그냥 그렇게 떠나왔더라면 나아만은 평생 문둥병자로 살다가 불행한 삶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 곁에 나아만의 생각을 수정시켜줄 사람을 준비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을 수종들고 왔던 종들의 입을 열게 하신 것입니다. 종들은 지극히 평범한 상식을 가지고 나아만의 자만심을 공략하게 만든 것이지요.
13절을 보십시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여기서 ‘큰일’은 ‘행하기에 어려운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나아만에게 있어서 ‘큰 일’은 어떤 일일까요? 예를 들어, 당시 나아만이 가지고 온 금 육천 개 보다 훨씬 더 많은 금을 요구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금을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가져오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비록 몇 배의 금을 더 가져오라고 할지라도 가져오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행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물며 요단강물에 들어가서 몸을 씻으라는 일을 왜 할 수 없냐는 것입니다. 속된말로 큰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돈이 드는 것도 아니요, 특별한 수고를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자존심을 부리면서 거절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나아만의 신분으로 볼 때 자존심이 상한 일로 보일 수 있을지라도 자기들이 생각하는 큰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쓸데없는 자존심 부리지 말고 한번 해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의 자만을 무너뜨리기 위해 종들의 입을 동원하신 것입니다.
(2) 종자들의 말을 들었습니다(믿음의 과정)
나아만은 자기 종자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비록 나아만이 한순간의 자만심으로 분노했지만 자기 종자들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하나님이 택하심을 받은 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나아만이 자기 종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순간마다 나아만은 고비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아람나라의 존귀한 자로 인정받는 과정이나 자기 집에 있던 계집아이의 말을 무시하지 않는 과정, 그리고 자기 종들의 간청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나아만이 자기 집에 있는 게집 아이의 말을 들음으로 인하여 믿음이 시작되고, 자기 종들의 간청을 수용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계집아이의 말을 듣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었다면, 자기 종자들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믿음으로 발전하는 과정이 된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믿음의 위기는 있습니다. 그 믿음의 위기를 극복해야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아만에게도 믿음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의 섭섭한 말 한마디로 나아만의 믿음이 깨어질 뻔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나아만은 자존심이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만이 변화될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은 자기 종자들의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순간, 혹은 일시적으로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주변사람들의 진실한 충고를 받아들입니다. 물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지요. 여기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물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반대의 사람이겠지요. 자기 것으로 충만한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나아만이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자기가 부리는 종의 충고를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나아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단순히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성품이 착하다고 치부할 부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작은 자의 소리를 경청할만한 믿음을 가진 자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나아만은 자기 종자들의 충고를 듣고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보다 낮은 자의 소리라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준비된 자의 소리로 들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변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듣지 못할 때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듣게 하십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을 통해서도 듣게 하십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다급하시면 나귀의 입을 열어서라도 듣게 하십니다. 그것도 안되면 굴러다니는 돌들로도 외치게 하십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나아만의 종자들의 입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만으로 하여금 듣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나아만의 부족한 부분을 계속 만져 가시는 과정이었던 것이지요.
(3) 선지자의 말을 들었습니다(믿음의 결국)
나아만은 즉시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요단강 물에 들어가서 몸을 일곱 번 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즉시로 그 살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살처럼 말입니다. 그에게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한 번의 실수는 있었을지라도 그는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종자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비록 자기감정의 격한 상태를 스스로는 통제하지 못했지만 종들의 충고를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믿음의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곁에 믿음의 사람을 붙여놓으십니다. 나아만 곁에 믿음의 사람을 붙여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은 믿음의 사람들의 말을 흘러버리지 않습니다. 경청하게 되지요. 우리는 나아만이 비록 아람나라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멈추지 않고 작동하고 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서 기자는 단순하게 하나님이 나아만이라는 사람의 문둥병을 고쳐주신 것을 소개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문둥병을 고쳐주는 기적의 사건이 구속사가 됨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지요.
이번 사건의 핵심은 나아만 한 사람의 구원사건이 아닙니다. 패역한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방사람까지도 계시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하여 나아만을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왕은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음을 알아야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아야 했던 것이지요. 이 일을 알려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방인이라도 나아만의 삶을 주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본문 1절입니다. 나아만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람을 구원하는 일에 공을 세웠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단순히 나아만이 병 고침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하면 안됩니다. 성경에 한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는 사건이 많습니다. 하지만 나아만의 문둥병 치유 사건은 단순한 치유사건을 넘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동시에 보여주시는 구속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신앙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더하심이요, 이방인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아만도 자기가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그 이상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알았습니다(15절). 그러면서 자기신앙을 고백합니다(17절). 이제부터는 절대 다른 신에게는 어떤 종교적인 제사를 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오직 여호와께만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아만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서 이런 고백을 받기 원하셨던 것이지요. 나아만은 문둥병으로부터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만 나아만을 통한 구원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나아만의 치유사건을 통해서 배운 교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대부분은 약하고 천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복음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해 민감한 자는 항상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자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