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보혜사 성령(요14:26)-2024.5.19
교회력으로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절기가 그렇다는 것이지 우리가 은혜의 시대에 절기에 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기를 잊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절기가 주는 영적 의미와 교훈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성령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하기오스 프뉴마’라고 하는데 ‘하기오스’는 ‘순결한’ 혹은 ‘거룩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거룩한 영으로서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논쟁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오해를 낳고 있는 부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실제로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에 관한 오해는 그리 크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안타깝게도 성령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의 부속체 혹은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나 에너지 정도로 이해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성령을 하나님의 파워 정도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성령에 관한 논쟁이 많은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영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하나님이신 것이지요.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구하심으로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성령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구하셨기 때문입니다(요14:16). 그래서 성령은 ‘또 다른 보혜사’입니다.
(1)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는 보혜사 예수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는 두 인격적인 보혜사가 존재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두 분의 보혜사가 존재하신다는 말입니다. 한분은 원 보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시오, 또 한분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중보하는 보혜사는 두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이비 이단들은 많은 보혜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은 창시자 마호메트를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변에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신천지 이단은 교주 이만희를 보혜사라고 말합니다. 말도 꺼내기 부끄러운 사이비 이단들입니다. 이외에도 유사한 주장을 하는 이단들이 꽤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시는 원 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보혜사는 ‘파라클레토스’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법정에서 돕는 자, 조력자, 혹은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주시는 보혜사이십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는 보혜사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주러 오신 보혜사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만나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없으면 한 사람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도 없습니다. 왜냐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단절된 관계를 복원시켜주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이지요. 죄인을 만나기 위해 죄 없으신 하나님이 죄인의 옷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동안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지요. 그래서 요한복음1장18절은 말씀하십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나타내셨느니라”고 말입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일찍이 그분은 아버지 품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으로 계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1장1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이셨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것이지요.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지요. 다시 말해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것이지요.
분명히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이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히3:1). 사도는 ‘아포스톨로스’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말이지요.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가운데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 중에 사도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요한복음1장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보았던 것이지요. 예수님안에 하나님의 모든 것이 드러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마1:21).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병든 자를 고치시기도 하시고, 귀신을 좇아내시기도 하셨으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삼기 위함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어야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무조건 순서를 따라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멀어졌던 관계를 회복시켜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기 위함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혜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혜사라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요한복음14장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사도행전4장12절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은 우리의 보혜사이십니다.
(2)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을 소개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로 말씀하십니다(요14:16). 이는 이미 다른 보혜사가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는 보혜사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소개하십니다. 맞습니다. 성령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는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여기서 ‘다른’이라는 헬라어는 ‘알로스’입니다. ‘알로스’는 질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면서 개체가 다른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보혜사의 사역을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는 원 보혜사이시오, 성령님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는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다시 이 부분을 정리해보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입니다(요14:6).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예수님께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12:3). 한마디로 성령이 아니면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내안에 오셔서야만 내 영으로 더불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8장16절 말씀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나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5장12절은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독생자가 내안에 계심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내안에서 내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셔야 가능하다는 말입니다(롬8:15). 성령이 확신을 주셔야만 자기 확신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도 이 부분을 명확히 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3장5절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확신을 누가 주는 것입니까? 성령이 주시는 것이지요. 성령이 내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해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주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 거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믿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이상한 표현 같지만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받는 것은 믿음의 전제조건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주어지기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성경도 성령을 믿으라고 말씀하지 않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2:10).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 인격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입은 인간과의 교제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지정의의 모든 것을 교감하고 소통하실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가끔 성령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그런 자들은 성령의 인격성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비인격적인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격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령 받으라는 말을 비인격적으로 사용합니다. 마치 성령을 자기가 주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물건 취급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생각으로 말하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에 신중을 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이 삼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식하라는 말이지요. 절대 우리는 성령을 비인격적으로 취급하면 안됩니다. 절대 성령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혹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거나 성령을 훼방하면 안됩니다. 성령은 인격을 갖추신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3)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의 인격과 사역
그러면 성령의 인격을 살펴보십시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는 지적인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고전2:10). 또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십니다(롬8:26). 감정적인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령은 근심도 하시고 탄식도 하시며, 슬퍼하시고 간구하십니다. 물론 성령은 확고부동한 의지를 갖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빌1:6). 당신이 하시기로 작정하시면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인간을 구성하는 지정의의 속성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내안에서 내 영으로 더불어 나와 대화하시고 교제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는 자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성령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은 절대 자신을 위해 일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시는 일에 전념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절대 단독플레이를 하지 아니하십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결재를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지요. 성령은 내안에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며 누리게 하신다는 말이지요. 성령은 오직 예수님께 집중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집중하지요.
이 시간 성령의 사역이 어떤 것인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령의 가장 큰 사역 중에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3장5절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거듭남에 성령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십니다. 로마서8장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로마서8장26절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근거로 하여 성령의 사역을 요약해보면, 성령은 예수를 증거 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진리의 영, 혹은 은혜의 영, 양자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무엇보다 성령은 예수를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16장12절 이하를 보면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5장7절은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14장6절은 예수님이 자신을 진리라고 소개하십니다. 성령님도 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누가 진짜 진리이십니까? 두분 다 진리이십니다. 구체적으로 양자 사이에는 진리에 대한 역할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령은 진리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나 성령님은 모두 진리를 우리 가운데 증거하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 수 없는 것이지요. 당연히 믿을 수도 없을 테지요.
그러므로 내안에 성령님이 오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그래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오시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입니다. 물리적으로 육체를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시공간의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성령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성령님께 민감하여 충만한 교제를 누리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믿음생활을 하는 것과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복음서의 제자들과 사도행전의 제자들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지만 사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보면서도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엉뚱한 생각을 갖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망과 야망을 채우기 위해 따라다닌 것이지요.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따라다녔던 거예요.
그런데 같은 제자들이지만 사도행전에 나타난 제자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은 그 사람들인데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삶이 완전히 바뀐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사도로 바뀐 사람들이었지요. 언젠가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사도들의 차이점을 말입니다. 제자들은 보고 배운 바를 따라가는 사람이요, 사도들은 보고 배운 바를 가르치고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제자들은 예수님 신학교 재학생들이요, 사도들은 졸업생들인 것이지요.
우리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로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도로 보내시기 위함입니다. 보십시오. 사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은 아무리 가르쳐도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엉뚱한 생각과 엉뚱한 행동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은 복음서의 제자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는 그들을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통해 듣고 배우고 체험했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구약성경까지도 자기들의 신앙으로 접목을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사도행전2장에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사도들을 대표해서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사복음서에 등장한 베드로가 맞습니까? 그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몰라주던 베드로가 이렇게 바뀐 것입니다. 복음서의 베드로는 사고뭉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베드로는 명설교자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 요엘서를 인용하며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이전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의 베드로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과연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그 베드로가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베드로가 사도행전의 베드로였습니다. 불과 몇 일만에 베드로가 그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바뀐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성령을 받아야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절대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제자 훈련했던 결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오직 예수를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이지요. 성령으로 변화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놀라운 변화는 청중들의 반응입니다. 사복음서의 베드로는 어떠한 영향력도 주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수제자로 생각했지만 그는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볼품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수많은 청중들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찔렸습니다(행2:37). 여기서 찔림은 단순하게 감정적인 느낌이나,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격하게 찔려 관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도 그러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4장12절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후벼 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슴을 치며 자기 죄를 통회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삼천명이 회개하고 주를 영접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 곁에서 3년 이상을 제자 훈련받은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분명히 그 시간은 사도로 보내심을 받기 위한 준비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로 보내심을 받으려면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보고 듣고 배운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를 사도행전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3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쳐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첫 번째 기적을 베푸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하루 이틀 올라갔나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에만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그들의 눈에 보였을까요? 아닙니다. 한 두 번 본 것이 아닐 것입니다. 수없이 많이 보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들에게 치유의 능력도 없었거니와 병자들에 대한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성전을 올라 다녔던 것이지요.
그러나 성령 받은 이후의 그들에게 달라진 변화는 그동안 자기만 바라보던 시선이 다른 사람과 주변인에게로 전이된 것입니다. 당연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권능이 임한 것이지요. 성령 받은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자기 위주에서 다른 사람 위주로 바뀐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 변화가 얼마나 큰 변화인줄 아십니까? 그런 시선을 갖고 성전에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의 눈에 앉은뱅이가 보인 것입니다. 그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하필 그날에만 보였을까요?
성령을 받으면 시선이 달라집니다. 성령 받으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성령 받으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이 성전을 출입하면서도 보이지 않았던 앉은뱅이가 성령을 받고 나니 뚜렷이 보인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긍휼한 마음으로 그의 병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절대 가질 수 없는 마음이요, 성령이 아니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거기서 사도들에게 성령의 큰 권능이 임한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주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14:12). 때문에 우리는 내안에 오신 성령을 거두지 마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범죄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시편51편11절에서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나를 주 앞에서 좇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말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말고, 무시하거나 훼방하지 말며, 날마다 성령을 환영하고 사모하며 성령 안에서 사는 믿음의 종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