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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절을 지키라(출23:14-17)-2024.11.3. 추수감사절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4.11.02|조회수222 목록 댓글 0

수장절을 지키라(23:14-17)-2024.11.3. 추수감사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과 3대 절기를 지키는 민족입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하지만 섭섭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한정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켜야 하는 절기이기도 하지요.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구약 시대의 절기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답은 지켜야 합니다. 다만 구약 성도들이 지켰던 방식으로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도들은 율법에 입각하여 율법의 방식으로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방식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수용하고 복음의 방식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절기를 복음으로 해석하고 복음의 방식으로 지켜야 하는 이유는 율법 자체가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복음을 영접하기 위함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도들은 복음이 오시기 전까지 율법의 방식으로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시작입니다(막1:1).

 

그러면 율법이 주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을 영접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를 영접하기 위함이지요. 그래서 율법은 복음이 오시기 전까지 유효한 법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복음이 오신 이후로 폐기된 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의도하는 모든 것들이 복음 안에 농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이 복음 안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성취하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율법이 최종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율법을 지키면 살고, 지키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율법이 요구하는 조건을 지키고 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율법이 요구하는 수많은 계명 가운데 한 가지라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100가지 계명 가운데 99가지의 계명을 지켰을지라도 한 가지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는 모든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고 살 사람은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답은 하나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죽음입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죽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율법이 주어진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율법이 아니고서는 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알아야 복음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죄를 알지 못한다면 복음을 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고 복음을 영접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 신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안개가 걷혀야 복음의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율법의 안경을 벗어야 복음에 눈이 뜨일 것입니다. 율법의 옷을 벗어야 복음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극소수의 유대인들만 복음의 영접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지요. 물론 하나님의 구속사의 여정으로 볼 때 반드시 그들에게 율법의 비늘이 벗겨지고 복음에 눈이 뜨일 날이 다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스라엘에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 수장절을 지키라

 

오늘은 우리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신대륙을 발견한 청교도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청교도들로부터 유래된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는 의미는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사람들이 필요를 따라 만든 절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만일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절기라면 굳이 우리가 지키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비성경적이라든지, 혹은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지키는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 가지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출23:14)고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가지 절기는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7대 절기를 갖고 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과 오순절과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입니다. 이 일곱 가지 절기는 여호와의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절기라는 말입니다.

 

절기를 알아야 복음의 문이 열립니다. 일곱 절기는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고, 무교절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고, 오순절은 성령강림을 의미합니다. 나팔절은 장차 재림 나팔을 불고 우리 가운데로 오실 예수님을 의미하고, 속죄일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막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절기는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율법의 절기를 지킬지라도 절기를 통해 예수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기를 주신 목적입니다. 만일 복음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절기 지키는 일에만 집착한다면 쓸데없는 종교 놀음만 하는 셈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율법에 집착하여 절기를 지키는 유대인들이 대다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비늘이 벗겨질 텐데 아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의 옷을 입고 율법의 춤을 추며 사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이 보실 때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 외에는 다른 어떤 계획도 마련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온통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무 일도 아니하시고, 어떤 일도 못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유일한 방편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직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 영혼들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지구촌에 거하는 모든 인간들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지천에 널려 있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미련한 일이지요.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부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다수는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던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의 관심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절기를 주신 목적도 절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고, 믿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이 절기를 주신 목적입니다. 절기를 주신 목적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을 연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 없는 종교는 눈에 보이는 의식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의 중심을 드리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치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절기를 지키되 바르게 지켜야 합니다. 절기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른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채우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없이 절기를 지킨다면 그 절기는 효력 없는 종교행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2)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7대 절기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가르치는 그림자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골로새서2장16절과17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니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율법에 계시된 모든 절기는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절기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림자 연습을 한 것이지요. 일종의 그림자놀이를 한 셈입니다. 그래서 절기는 예행연습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리허설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무슨 행사를 하든지 사전에 예행연습을 합니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운동회를 앞두고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가을운동회를 위하여 방과 후에 거의 한 달 이상은 연습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지루할 정도로, 피곤할 정도로 예행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본 행사 전날에 최종 리허설을 합니다. 리허설을 통해 본 행사에서 있을 수 있는 실수나 잘못된 것을 발견하여 고치는 것이지요. 그런 과정이 없으면 본 행사에 실수 연발일 것입니다. 무슨 행사든지 마찬가지예요. 평생을 노래만 하던 프로 가수들도 행사를 앞두고 숱한 연습을 한답니다. 본 행사에 실수하지 않기 위함이지요. 그런 정신은 믿는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위해서 얼마나 준비할까요? 혹시 습관적으로 드리는 것은 아닐까요? 익숙한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익숙함은 습관적이 되고 종교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위해 한 주 동안 충분한 예행연습을 하고 토요일에 최종적인 리허설을 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음으로라도 말입니다. 전에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토요일에 모여 순서를 점검하고 기도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꾸준히 지속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제게는 너무 좋았습니다. 주일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한 마음가짐을 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이는 준비하는 것을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목회자들이 설교 준비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때그때 주시는 성령의 말씀을 받아서 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특별하게 사용하시는 종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경우가 절대적이라는 말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준비하는 곳에는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 하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준비하는 마음을 즐거워하십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거든 준비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지요. 이른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훈련을 시키는 거예요. 그러므로 절기를 지키는 것을 폄론하면 안됩니다. 물론 절기를 지키는 방식은 제고돼야 합니다. 율법 시대를 살아가는 것도 아닌데 율법으로 절기를 지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됩니다. 율법을 복음으로 수용하여 해석함으로 지켜야 한다는 말이지요. 복음 안에서 복음으로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명으로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을 고집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드려야 합니다. 구약 성도들이 절기를 지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율법의 방식에 충실하게 드림이 옳습니다. 그러나 실체가 오시면 더 이상 그런 그림자놀이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은 율법에 갇혀 절기를 지킨다고 힘을 쓰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런데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구약시대 성도들이 지켰던 방식으로 지키지 못합니다. 율법의 방식으로 지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속칭 그들이 절기를 지킨다고 노래 하면서도 동물의 희생 제사 방식으로 드리던가요? 아닙니다. 완전히 짬뽕을 만들어서 지키면서도 말로는 제사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떠드는 것이지요. 그것은 예수를 알지 못함이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율법적인 절기를 지키려고 노력하지도 않을뿐더러, 율법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직도 기독교 이단들중에는 구약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라는 자들은 유월절에 목숨을 겁니다. 이른바 동물의 희생 제사의 방식으로 드리는 것도 아니면서도 말입니다. 그들의 방식은 율법의 방식도 아니요, 그렇다고 복음의 방식은 더욱 아닙니다. 그냥 그들만의 방식인 것이지요. 복음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수장절의 현대적인 의미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드려야 합니다. 다만 알고 드려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의 성경적인 이름은 수장절이요, 초막절입니다. 그것을 현대식으로 해석해 보니 추수감사절과 같은 것이기에 우리는 추수감사절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수장절은 모든 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큰 기쁨으로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때 그들은 야외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일주일을 생활하면서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방랑 생활했던 것을 기억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초막절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지금도 초막절이 되면 그들이 살던 좋은 집을 나와서 밖에 허름한 초막을 짓고 일주일을 보냅니다. 자기 조상들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고생하던 것을 체험하고 기억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런 의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나 그들의 그런 정신은 충분히 배워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초막절, 수장절, 혹은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구약에 계시된 방식으로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밖에 나가서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지내라고 강요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런 방식을 고집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마음은 없는데 그런 행위를 한다고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계속해서 그런 종교적인 의식에 매여 살아온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시대마다 그러했지만, 대표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사야서1장3절입니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오죽하면 이사야서29장13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절기를 지키지 않았다고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종교적 의식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치 않았던 것이지요. 말라기 시대를 보실까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시는 말씀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말라기서1장10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묻겠습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았나요? 그들이 절기를 지키지 않았나요? 그들은 제사나 절기를 누구보다 충실히 드렸습니다.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드렸던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경건하게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드린 것이지요. 종교적인 행사를 치른 거예요. 때로는 화려하게, 때로는 의무감으로, 때로는 자기들만의 포만감으로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것은 무효입니다. 무효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지요. 그런 절기를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사나 절기에 굶주리신 분이 아닙니다. 드리되 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게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감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감사가 생명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은혜로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신 것에 대한 감사이지요. 감사가 없는 수장절, 감사가 없는 초막절, 감사가 없는 장막절, 감사가 없는 추수감사절을 우리가 아무리 화려하고 풍성하게 드릴지라도 그것은 결국 앙꼬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라옵기는 감사가 우선이요, 감사가 전부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절기의 생명인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감사하는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절기가 초라할지라도 감사로 충만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감사 없는 제사나 절기는 영혼 없는 종교행사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퍼포먼스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추수감사절도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추수감사절로 드리는 것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추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추수감사절은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장차 주실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감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추수에 감사가 맞추어진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만일 만족할 만한 추수가 없었다면 무엇으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들을 통해서 범사 감사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지요. 추수와는 상관없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성숙한 자세입니다. 비록 거둔 것이 없을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자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지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멀리 보지 마십시다. 금년 한 해 동안 여기까지 나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십시다. 그것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자의 바람직한 자세일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과 3대 절기를 지키는 민족입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하지만 섭섭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한정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켜야 하는 절기이기도 하지요.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구약 시대의 절기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답은 지켜야 합니다. 다만 구약 성도들이 지켰던 방식으로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도들은 율법에 입각하여 율법의 방식으로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방식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수용하고 복음의 방식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절기를 복음으로 해석하고 복음의 방식으로 지켜야 하는 이유는 율법 자체가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복음을 영접하기 위함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도들은 복음이 오시기 전까지 율법의 방식으로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시작입니다(막1:1).

 

그러면 율법이 주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을 영접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를 영접하기 위함이지요. 그래서 율법은 복음이 오시기 전까지 유효한 법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복음이 오신 이후로 폐기된 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의도하는 모든 것들이 복음 안에 농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이 복음 안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성취하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율법이 최종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율법을 지키면 살고, 지키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율법이 요구하는 조건을 지키고 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율법이 요구하는 수많은 계명 가운데 한 가지라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100가지 계명 가운데 99가지의 계명을 지켰을지라도 한 가지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는 모든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고 살 사람은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답은 하나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죽음입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죽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율법이 주어진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율법이 아니고서는 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알아야 복음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죄를 알지 못한다면 복음을 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고 복음을 영접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 신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안개가 걷혀야 복음의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율법의 안경을 벗어야 복음에 눈이 뜨일 것입니다. 율법의 옷을 벗어야 복음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극소수의 유대인들만 복음의 영접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지요. 물론 하나님의 구속사의 여정으로 볼 때 반드시 그들에게 율법의 비늘이 벗겨지고 복음에 눈이 뜨일 날이 다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스라엘에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 수장절을 지키라

 

오늘은 우리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신대륙을 발견한 청교도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청교도들로부터 유래된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는 의미는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사람들이 필요를 따라 만든 절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만일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절기라면 굳이 우리가 지키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비성경적이라든지, 혹은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지키는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 가지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출23:14)고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가지 절기는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7대 절기를 갖고 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과 오순절과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입니다. 이 일곱 가지 절기는 여호와의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절기라는 말입니다.

 

절기를 알아야 복음의 문이 열립니다. 일곱 절기는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고, 무교절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고, 오순절은 성령강림을 의미합니다. 나팔절은 장차 재림 나팔을 불고 우리 가운데로 오실 예수님을 의미하고, 속죄일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막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절기는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율법의 절기를 지킬지라도 절기를 통해 예수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기를 주신 목적입니다. 만일 복음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절기 지키는 일에만 집착한다면 쓸데없는 종교 놀음만 하는 셈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율법에 집착하여 절기를 지키는 유대인들이 대다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비늘이 벗겨질 텐데 아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의 옷을 입고 율법의 춤을 추며 사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이 보실 때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 외에는 다른 어떤 계획도 마련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온통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무 일도 아니하시고, 어떤 일도 못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유일한 방편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직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 영혼들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지구촌에 거하는 모든 인간들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지천에 널려 있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미련한 일이지요.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부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다수는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던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의 관심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절기를 주신 목적도 절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고, 믿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이 절기를 주신 목적입니다. 절기를 주신 목적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을 연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 없는 종교는 눈에 보이는 의식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의 중심을 드리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치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절기를 지키되 바르게 지켜야 합니다. 절기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른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채우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없이 절기를 지킨다면 그 절기는 효력 없는 종교행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2)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7대 절기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가르치는 그림자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골로새서2장16절과17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니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율법에 계시된 모든 절기는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절기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림자 연습을 한 것이지요. 일종의 그림자놀이를 한 셈입니다. 그래서 절기는 예행연습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리허설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무슨 행사를 하든지 사전에 예행연습을 합니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운동회를 앞두고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가을운동회를 위하여 방과 후에 거의 한 달 이상은 연습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지루할 정도로, 피곤할 정도로 예행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본 행사 전날에 최종 리허설을 합니다. 리허설을 통해 본 행사에서 있을 수 있는 실수나 잘못된 것을 발견하여 고치는 것이지요. 그런 과정이 없으면 본 행사에 실수 연발일 것입니다. 무슨 행사든지 마찬가지예요. 평생을 노래만 하던 프로 가수들도 행사를 앞두고 숱한 연습을 한답니다. 본 행사에 실수하지 않기 위함이지요. 그런 정신은 믿는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위해서 얼마나 준비할까요? 혹시 습관적으로 드리는 것은 아닐까요? 익숙한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익숙함은 습관적이 되고 종교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위해 한 주 동안 충분한 예행연습을 하고 토요일에 최종적인 리허설을 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음으로라도 말입니다. 전에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토요일에 모여 순서를 점검하고 기도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꾸준히 지속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제게는 너무 좋았습니다. 주일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한 마음가짐을 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이는 준비하는 것을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목회자들이 설교 준비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때그때 주시는 성령의 말씀을 받아서 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특별하게 사용하시는 종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경우가 절대적이라는 말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준비하는 곳에는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 하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준비하는 마음을 즐거워하십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거든 준비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지요. 이른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훈련을 시키는 거예요. 그러므로 절기를 지키는 것을 폄론하면 안됩니다. 물론 절기를 지키는 방식은 제고돼야 합니다. 율법 시대를 살아가는 것도 아닌데 율법으로 절기를 지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됩니다. 율법을 복음으로 수용하여 해석함으로 지켜야 한다는 말이지요. 복음 안에서 복음으로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명으로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을 고집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드려야 합니다. 구약 성도들이 절기를 지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율법의 방식에 충실하게 드림이 옳습니다. 그러나 실체가 오시면 더 이상 그런 그림자놀이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은 율법에 갇혀 절기를 지킨다고 힘을 쓰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런데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구약시대 성도들이 지켰던 방식으로 지키지 못합니다. 율법의 방식으로 지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속칭 그들이 절기를 지킨다고 노래 하면서도 동물의 희생 제사 방식으로 드리던가요? 아닙니다. 완전히 짬뽕을 만들어서 지키면서도 말로는 제사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떠드는 것이지요. 그것은 예수를 알지 못함이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율법적인 절기를 지키려고 노력하지도 않을뿐더러, 율법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직도 기독교 이단들중에는 구약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라는 자들은 유월절에 목숨을 겁니다. 이른바 동물의 희생 제사의 방식으로 드리는 것도 아니면서도 말입니다. 그들의 방식은 율법의 방식도 아니요, 그렇다고 복음의 방식은 더욱 아닙니다. 그냥 그들만의 방식인 것이지요. 복음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수장절의 현대적인 의미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드려야 합니다. 다만 알고 드려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의 성경적인 이름은 수장절이요, 초막절입니다. 그것을 현대식으로 해석해 보니 추수감사절과 같은 것이기에 우리는 추수감사절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수장절은 모든 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큰 기쁨으로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때 그들은 야외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일주일을 생활하면서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방랑 생활했던 것을 기억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초막절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지금도 초막절이 되면 그들이 살던 좋은 집을 나와서 밖에 허름한 초막을 짓고 일주일을 보냅니다. 자기 조상들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고생하던 것을 체험하고 기억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런 의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나 그들의 그런 정신은 충분히 배워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초막절, 수장절, 혹은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구약에 계시된 방식으로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밖에 나가서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지내라고 강요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런 방식을 고집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마음은 없는데 그런 행위를 한다고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계속해서 그런 종교적인 의식에 매여 살아온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시대마다 그러했지만, 대표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사야서1장3절입니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오죽하면 이사야서29장13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절기를 지키지 않았다고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종교적 의식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치 않았던 것이지요. 말라기 시대를 보실까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시는 말씀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말라기서1장10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묻겠습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았나요? 그들이 절기를 지키지 않았나요? 그들은 제사나 절기를 누구보다 충실히 드렸습니다.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드렸던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경건하게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드린 것이지요. 종교적인 행사를 치른 거예요. 때로는 화려하게, 때로는 의무감으로, 때로는 자기들만의 포만감으로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것은 무효입니다. 무효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지요. 그런 절기를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사나 절기에 굶주리신 분이 아닙니다. 드리되 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게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감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감사가 생명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은혜로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신 것에 대한 감사이지요. 감사가 없는 수장절, 감사가 없는 초막절, 감사가 없는 장막절, 감사가 없는 추수감사절을 우리가 아무리 화려하고 풍성하게 드릴지라도 그것은 결국 앙꼬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라옵기는 감사가 우선이요, 감사가 전부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절기의 생명인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감사하는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절기가 초라할지라도 감사로 충만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감사 없는 제사나 절기는 영혼 없는 종교행사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퍼포먼스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추수감사절도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추수감사절로 드리는 것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추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추수감사절은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장차 주실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감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추수에 감사가 맞추어진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만일 만족할 만한 추수가 없었다면 무엇으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들을 통해서 범사 감사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지요. 추수와는 상관없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성숙한 자세입니다. 비록 거둔 것이 없을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자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지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멀리 보지 마십시다. 금년 한 해 동안 여기까지 나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십시다. 그것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자의 바람직한 자세일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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