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노래(눅1:46-55)-2024.12.15
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연대기별로 잘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사역과 배척당하시는 모습, 수난당하시는 모습과 부활하신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지요.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탄생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누가복음의 특징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세례요한의 탄생부터 알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라기 이후 400년의 침묵기를 깨고 단절된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주는 역할을 세례요한이 할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옛 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지요. 새 시대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는 엘리사벳을 통해 세례 요한의 탄생을 알려주고,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가 나실 것을 예언해 줍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여인으로서는 가장 복된 여인이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 예수를 자기 몸에 잉태하는 복을 받은 여인이오니 천하 여인 중에 마리아보다 더 복된 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정혼한 여인 마리아는 열 달 동안 아기 예수를 모신 거룩한 성전이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성전이었겠습니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으니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요. 사내를 알지 못하고 정혼한 상태에 있던 마리아에게 잉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준 천사 가브리엘은 ‘은혜받은 자여’라고 마리아를 호칭했습니다(눅1:28). 그러면서 평안을 주문합니다. 왜냐면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의 임신 소식은 파혼은 물론 사람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두려웠겠습니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가브리엘 천사의 통보를 받은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에 이런 인사가 어디 있느냐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두려워하는 마리아에게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다고 통보했습니다. 그래도 그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천사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까지 알려주었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것입니다(눅1:31).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하실 일을 통보해 주었습니다. 결코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문하는 마리아에게 천사는 성령이 하신 일을 알려줍니다. 성령은 능치 못하심이 없음을 확신하는 차원에서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의 수태 소식까지 전해주었던 것이지요. 임신할 수 없는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6개월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소식은 마리아를 안심시키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제야 마리아는 천사의 소식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는 고백을 합니다(38절). 이로 볼 때 마리아는 이미 수용할 수 있는 그릇으로 준비되었던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같이 천한 계집종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음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정혼한 남편 요셉이었을 것입니다. 당사자인 마리아는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테지만 요셉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마리아보다 훨씬 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던 것이지요(마1:19). 그래도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조용히 수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일 못된 사람 같았으면 동네방네 떠들고 난리법석을 피웠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마리아의 생명은 보장받을 수 없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십니다. 요셉이라는 이름 자체가 꿈하고 친한 이름인지 모릅니다. 구약의 요셉도 꿈꾸는 자로 살았는데, 신약의 요셉도 역시 꿈으로 알려주신 것이지요. 마리아의 설명보다 하나님이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꿈으로 말씀하신 방식을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라사대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마1:20). 그리고 이름까지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생각을 이깁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그 아내를 데려왔습니다(마1:24). 요셉은 마리아를 율법의 칼날에서 지켜준 것입니다. 그녀를 사랑의 옷으로 덮어준 것이지요. 역시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추진하는데 실수하지 아니하십니다. 반드시 감당할 만한 그릇을 준비하십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부창부수입니다. 그 남편에 그 아내였던 것이지요. 마리아는 노래를 지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당신의 몸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잉태하고서 말입니다. 마리아는 오직 하나님만 찬양합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노래를 통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 알아보기 원합니다.
(1) 비천한 자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48절)
마리아가 노래를 지어 찬양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마리아는 자기 영혼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고백하는 내용을 분석해 보면 자기가 비천한 계집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를 하나님이 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계집종임을 알았던 것이지요.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아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를 신의 경지로 올려놓고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촌에 거하는 수십 억명의 카톨릭 신자들이 마리아를 중보자로 추앙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숭배하는 마리아는 단순한 중보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리아를 통해 잊어서는 안될 교훈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대단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잉태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잉태하였기 때문에 대단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만일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마리아 숭배 사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 무흠설이나 마리아 무죄설, 혹은 마리아 중보설 등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마리아에게는 원죄가 없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우상화시킵니다. 성전은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전의 영광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아무리 화려하고 아무리 고상해도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더 이상 성전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면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의 영광은 성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의 주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순히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였다는 신분 때문에 마리아를 중보자라고 추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머니의 부탁은 잘 들어주신다는 것이지요. 인간적인 생각으로 중보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래도 거룩한 하나님의 독생자를 잉태하셨던 어머니 신분의 마리아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신의 반열에 높여서 추앙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인간이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무흠 무죄한 중보자로 추앙하는 것은 성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일입니다. 만일 성모를 섬기는 것을 비난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절대 공경하는 것과 신성시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강한 모성애 본능이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성경을 떠나 모성애 그 이상의 것을 주문하고 자극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하나님의 교회라는 종교집단이 상당한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이단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틈새시장을 공략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세력을 확장해 가는 데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제가 말하는 기독교의 틈새시장은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만든 것입니다.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제도를 만든 것이지요. 그래서 젊은층에 속한 여인들에게 공감을 받은 것입니다. 젊은층에 속한 여인들은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 모성애의 본능이 비교적 강한 나이대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인간들이 좋아할 만한 신의 자리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성경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어머니 하나님을 만든 것입니다. 참으로 가증할 노릇이지요. 우리에게 하나님 외에는 섬길 신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살아계신 참 신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지요. 거기에 그 어떤 것도 끼워 넣으면 안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기 위하여 그 어떤 것도 신의 경지로 숭배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성령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보혜사는 없습니다. 더 이상 다른 중보자를 만들지 마십시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 범주에 마리아도 들어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공경하되 우상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리아도 스스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말입니다. 심지어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고 말입니다(52절).
그녀는 자기가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비천한 신분의 계집종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비천한 계집종을 돌아보셔서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자신을 복된 여인으로 높여주셨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비천하고 볼품없는 여인을 만세에 복 있는 여인으로 부르게 하셨다는 말입니다(48절). 또한 마리아는 큰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했습니다(49절).
(2)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49절)
하나님이 마리아를 통해 행하시는 큰 일은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로는 비천한 여인을 통해 메시아를 잉태케 하신 일이 가장 큰 일이요, 그보다 더 큰 일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메시아를 보내시는 일입니다. 그 하나님은 능하신 하나님이시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말씀을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똑똑히 들었습니다. 누가복음1장35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에게 임하사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자기를 덮으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임한 하나님의 가장 큰 일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독생자가 잉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독생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였습니다. 이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하심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능하심으로 이루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1장37절은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기로 작정 하시면 못 하실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능하심과 거룩하심을 통해 큰 일을 행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비천하고 초라한 상태에 있는 여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목수의 아내라는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행하시는 큰 일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만큼 마리아는 신령한 눈이 열린 여인이었던 것이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가진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영적인 눈이 열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겸손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가진 자를 쓰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녀를 중보자로 혹은 죄가 전혀 없는 무흠 무죄한 여인으로 숭배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녀는 스스로가 자신을 너무나 잘 아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를 통해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3)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50-55절)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은 긍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긍휼은 기독교의 용어 가운데 가장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가장 폭이 넓고 깊은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긍휼은 자비, 은혜, 친절을 다 포함하거든요.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지요. 하나님의 긍휼이 먼저 마리아에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입니다.
그분의 긍휼하심을 나타내는 방편은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51절), 권세 있는 자를 위에서 내려치시며, 비천한 자를 높여주십니다(52절). 주린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 먹여주시고, 부자를 공수로 보내주십니다(53절).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겨주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강자와 약자를 조절하시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인하여 약자에게는 하나님의 약함으로 대우해 주시고, 하나님을 떠난 강자에게는 하나님의 강함으로 역사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긍휼하십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긍휼하신 속성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은 모든 공의가 자기 안에 품고 있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통해서 실현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공의가 흐르는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진행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을 통하여 자기안에 계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전해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이 주는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가 되고 노래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녀는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보았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도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안에 계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충만했기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구약 성도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긍휼이 그동안 이스라엘에게 한정되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이후 400년 침묵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을 더 이상 맛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선지자도 없었고 대언자도 없었던 것입니다. 무려 400년간 침묵기로 지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그 침묵기를 통과하면서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요? 답답했을까요? 아니면 홀가분했을까요? 그들이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면 당연히 답답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400년의 침묵기는 그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을 테니까요.
사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도 그런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영적 상태가 피폐했다는 증거이지요.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을 끝까지 지켜보며 하나님은 당신의 때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지요. 미우나 고우나 그들은 하나님이 언약으로 맺은 택한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도래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통해서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암흑을 뚫고 구원의 새로운 빛이 자기 땅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지요. 마리아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몸소 그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미 그녀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고, 조만간에 만민들이 그들의 눈을 열어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이스라엘에게 제한적으로 임하였지만 이제 조만간에 임할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통하여 열리게 될 시대는 새로운 시대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각 나라와 족속과 이방과 열방에게 확대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게 될 대상이 육적 이스라엘을 넘어 영적 이스라엘로 확대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방인의 구원은 이미 구약 속에서 태동되어 있었던 구속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통하여 실제화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자기 조상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나라와 족속에게 미칠 것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런 눈이 하나님의 독생자를 잉태함으로서 열린 것이지요. 그래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잉태함으로 인하여 이 땅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지극히 높고 광대하심을 온 누리에 선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대림절을 맞이하여 우리에게도 마리아와 같은 믿음의 눈이 열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