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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한 권면(유1:17-23)-2025.3.30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5.03.28|조회수287 목록 댓글 0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한 권면(유1:17-23)-2025.3.30

 

우리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으나 유다서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유다서가 기록될 당시는 거짓 교사들이 난무했고 거짓된 가르침이 횡행했습니다. 특별히 당시에 유행처럼 번지는 거짓된 가르침은 영지주의입니다. 유다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 신앙을 지키며 교훈과 성결한 삶을 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서의 주제 같은 성구는 믿음으로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말입니다(3절). 믿음의 소극적인 의미는 은혜를 받는 것이지만, 적극적인 의미는 원수 마귀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신앙을 대적하는 원수들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대적과의 싸움은 물론이거니와 외부에서 공격하는 대적들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을 공격하는 대적들은 내외적으로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 밖에서는 믿음과 불신의 싸움이요, 예수 안에서는 율법과 복음의 싸움입니다.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대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비록 우리가 믿음을 가졌을지라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공격하는 대적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지만 주어진 믿음을 건강하게 세우고 지키는 것은 내가 할 일이요 내게 주어진 몫입니다. 내게 주어진 믿음의 불씨를 내가 스스로 꺼버릴 수도 있고 활활 타오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내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건강한 믿음 생활을 유지할 수도 있고, 건강하지 못한 믿음 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으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으로 건강한 믿음 생활을 할 수도 있고,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믿음 생활을 하는 조건이나 방법은 매우 다양합니다. 사람에 따라 강조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서를 통해 건강한 믿음 생활을 위한 권면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유다서는 수신자가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수신자들이라는 말이지요. 유다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들로 인해 복음이 변질되고 은혜를 변질시키는 암초들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우리 믿음을 지켜주는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경건치 못한 자들도 있고, 경건한 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불신자들의 경건치 못함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자라고 말하는 자들의 경건치 못한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요, 권면의 말씀입니다. 수신자가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경건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경건은 거룩과 같은 개념으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문제는 믿음을 가진자라 할지라도 모두가 다 경건한 것은 아닙니다. 경건을 가장한 불경건한 자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거짓 교사들의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를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밖에서 노골적으로 교회를 공격해 오는 적들보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적들을 색출하기가 쉽지 않고 대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불경건한 자들 속에서 경건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 속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불경건한 자들 가운데 살아가는 경건한 자들이라는 말이지요. 불경건한 세상에서 경건은 빛이 나고 존재가 확실하게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1) 사도들이 가르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17절)

 

당시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훼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요, 기롱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당을 짓는 자들이며, 육에 속한 자요,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19절). 한마디로 그들은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품어대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입니다(12-13절).

 

본문은 유다서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계속해서 유다서는 거짓 교사들의 특징과 장차 그들이 받을 하나님 심판의 필연성을 가르쳤습니다(5-16절). 그런데 본문에서는 결론적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한 지침서와 같습니다. 먼저 17절에서 19절은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절과 21절은 영적 성숙을 힘쓰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22절과 23절은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 당한 영혼들을 건져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한 제언과도 같은 것이지요.

 

먼저 유다는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17절). 사도들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수식해 주는 말씀이 본문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들의 기원이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기 기독교회는 사도들의 전승을 따라 세워진 교회들입니다. 이른바 사도들의 가르침과 말씀을 바탕으로 세워진 교회들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일찍이 사도들은 거짓 교사들의 출현에 대하여 경고했습니다. 성경에서 그 증거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행20:29-31; 딤전4:1; 요일2:18; 벧후3:3-5). 근시안적으로는 본서의 저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 유다가 권면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로 구약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가르치셨고,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지금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각 사람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장1절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초기 기독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유다는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17절).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으면 영적 분별력이 없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기독교회는 사도들이 가르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이 가르친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가르친 복음은 주님으로 받은 복음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유사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그 입으로 자기를 자랑하며 아첨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16절).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요, 예수님으로부터 보고 듣고 받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는 반드시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의 권면은 사도들을 기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듣고 배운 자들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깨닫게 하신 것이지요. 이른바 우리의 대 사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실을 성령이 친히 내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리스도이심을 배운 자요, 들은 자요, 눈으로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자라는 말입니다(요일1:1).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사도들이 가르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소리를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건강한 성도가 됩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믿음의 교과서는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당시 사도들은 믿음의 건강한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성경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수 마귀 악한 것으로 이기고 승리하려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때일수록 더욱 그리합니다. 원수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훼방하는 자들입니다. 그들도 하나님 말씀의 권능을 알기 때문입니다.

 

(2) 믿음으로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20-21절)

 

건강한 성도는 믿음이 건강해야 합니다. 믿음이 건강하다는 것은 믿음의 기초석이 든든하다는 말입니다. 건강한 믿음은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거룩한 믿음입니다. 믿음도 자기가 스스로 만든 믿음이 있고, 위로부터 받은 믿음이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믿음은 신념, 혹은 자기 확신입니다. 솔직히 오늘날 기독 성도들이 자주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념과 신앙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념은 자기 확신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신념을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신념은 자신의 긍정적 생각이나 추진력 혹은 열심이나 열정 같은 것입니다.

 

신념과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굳이 신앙과 신념을 기독 신앙 안에서 구분하자면 이렇습니다. 신앙은 지정의의 모든 가치를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나, 신념은 모든 가치를 자기로부터 찾습니다. 그래서 율법적인 사람들은 신념이 강한 자요, 복음의 사람은 신앙이 좋은 자입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율법에 강한 자들은 자기 의가 얼마나 강하고 뜨거운지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람은 자기 의가 강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정도로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의 사람보다는 율법에 강한 자들을 선호합니다. 마치 그런 자들의 믿음이 다이내믹하고 충만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심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자들의 열정이나 열심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이분들의 열정을 게으름의 반대적인 개념으로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접근하면 본질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열정을 믿음의 결과물로 단정짓지 말라는 것이지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신앙이 복음으로 하는 행위라면, 신념은 종교적인 열정, 이른바 율법의 열심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믿음은 거룩한 믿음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는 말입니다. 자기를 건축한다는 말은 자기 믿음의 집을 세운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 신앙을 건축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2장22절의 말씀처럼,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지금도 지어져 가는 건축물입니다. 내 안에 지어져 가는 집은 누가 살 집입니까?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지요.

 

그런데 누가 건축을 합니까? 나 혼자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공사하는 것입니다. 성화를 이루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20절하). 성령으로 세우지 않은 집은 금방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21절).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믿음이 파선되지 않도록 방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믿음을 파선하고 배도합니다. 이유는 자기를 믿음으로 세우지 아니함이요, 성령으로 기도하지 아니함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를 잘해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했다면 잘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세우시는 자도 하나님이시오, 지키시는 자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세우고 지키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집을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지키는 것은 자기를 율법으로 판단하거나 책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같은 교육일지라도 사랑으로 하는 교육이 있고, 공의로 하는 교육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의로 하는 교육보다 사랑으로 하는 교육이 훨씬 더 교육적인 효과가 큽니다.

 

공부 못한다고 책망하는 것보다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사랑하는 것이 교육적 효과가 크다는 말입니다. 영적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을 공의로 지적하고 판단하고 책망하기보다는 사랑으로 훈계하고 감싸주며 권면하는 것이 훨씬 더 교육적 효과가 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사랑으로 자기를 지킬 줄 압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자기를 지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주문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전혀 다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실체는 성령이 깨닫게 하시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집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건축된 집이라 할지라도 사랑으로 지키지 않으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건축한 믿음이라는 집을 더욱 견고히 지탱해 주는 결속력이 됩니다. 마치 시멘트와 같이 접착제 역할을 해준다는 말이지요. 믿음의 집이 사랑의 띠로 둘러야 온전해지거든요. 그러기 위하여 자신을 사랑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송이지요. 그 가사처럼 분명히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정작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말이지요.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자기에게 관대하거나 무능한 것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그냥 자기 자신에게 무책임하거나 방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우하며,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지키는 법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관용하고 품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지요. 설령 부족할지라도 그것으로 불평하지 않습니다. 혹은 실수했을지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심각한 죄에 빠졌을지라도 자기를 학대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사랑이지요. 나보다 나를 더 근심하시는 사랑이요, 나보다 나를 더 위로하시는 사랑이며, 나보다 나를 더 챙겨주시는 사랑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높여주시는 사랑이요, 나보다 나를 더 칭찬하시는 사랑이며, 나보다 나를 더 아끼는 사랑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안타까워하시는 사랑인 것이지요. 그 사랑으로 나를 지켜야 합니다. 그 사랑이 아니면 결코 나를 지킬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 할지라도 바르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과대 포장하거나, 과소평가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보는 객관적 통찰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차라리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훨씬 더 나를 잘 알고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눈과 마음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정확합니다. 그분은 눈이 밝으시고 귀가 밝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분은 나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지킨다는 말은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경건한 자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내 스스로는 아무도 경건하게 살 수 없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질 때 나는 경건의 능력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22-23절)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만 위하여 사는 자는 건강하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내 주변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영혼이 없는지를 뒤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의 긍휼로 옷을 입은 자가 된 것이지요. 내 삶에 하나님의 긍휼이 입혀 졌다는 말이지요. 이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경건은 온전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믿음의 집을 세우고 지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긍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주문합니다. 믿는 자는 평생 그리스도의 긍휼을 바라보고 긍휼을 입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긍휼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내가 기다려야 할 긍휼이 있습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긍휼을 받아야 할 우선 대상자입니다. 가끔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은혜받는 일에 집중하다가 정작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반드시 내가 먼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맛보아야 합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라 말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받지 못했다면 불신자입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착각하며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내가 먼저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만의 긍휼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내가 베풀어야 할 긍휼이 있다는 말입니다(22-23절). 내가 받은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면 그 긍휼은 그리스도의 긍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긍휼을 입은 자라면 반드시 다른 이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본문은 긍휼을 베풀 대상을 지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의심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심하는 자는 어떤 자들일까요? 사도적인 믿음을 의심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거룩한 믿음과 성령의 기도와 사랑으로 자기를 지켜내는 것과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보다 더 큰 영역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전반적인 가르침을 믿음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쉽게 타이르거나 정죄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런 자들을 상종하지 않으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비록 그런 자들이라도 그리스도의 긍휼로 감싸주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그런 자들이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그들 곁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는 것이지요. 믿음이 없이 의심한다고 비난하거나 따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그런 자들을 방치하면 결국은 뻔합니다. 불같은 시험에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을 바로 잡아주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긍휼은 없습니다. 심지어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자들의 더러움에 오염되거나 감염되지 않도록 조심하여 두려움으로 긍휼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기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써야 합니다(벧후3:14). 예나 지금이나 거짓된 교훈이 난무하고 거짓 교사들이 횡행하는 시대에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건강한 믿음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순결해야 하고 정결해야 합니다. 당연히 그 교회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신 내가 교회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선 자들입니다(24절). 우리 능력으로 우리가 흠이 없고 즐거움으로 선 자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흠이 없이 세움을 입은 자요, 즐거움으로 서게 될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건강한 교회와 성도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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