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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요일3:5-10)-2025.4.6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5.04.05|조회수260 목록 댓글 0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요일3:5-10)-2025.4.6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모든 피조물이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목적 없는 피조물은 없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인간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도 목적 없이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빌리면,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이지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알면서도 반역한 것이지요.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살아야 하는데 사단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결국 파멸에 이른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외면치 아니하셨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먼저 화해를 시도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올 의지도 없었고 반응도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버리고 사단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주인이 바뀌어 버린 것이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회복을 원하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셨던 것입니다. 사실 화해는 누가 받아들여야 합니까? 피해자가 합의해 주어야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피해자요, 인간은 가해자입니다. 피해자인 하나님이 먼저 가해자에게 화해를 시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동원하셔서 가해자와의 화해를 시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공은 인간에게 넘어갔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화해 시도에 화답하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얼마나 뻔뻔합니까? 대부분의 인간이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하나님 화해의 테이블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완악한지 모릅니다. 마치 자기들이 피해자인 것 같은 코스프레를 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지요.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의 화해를 중단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시도하지요. 문제는 어느 순간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것 같았던 인간들이 또다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나는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

 

그 숱한 방법들이 인간들 편에서 수용하기도 힘들고, 지키기도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의 속성을 아시는 하나님은 이미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방법을 준비해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와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셨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독생자는 이미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함께 계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사람의 옷을 입혀 우리 가운데로 보내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육신입니다.

 

(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보편적인 목적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들입니다. ‘죄를 없이하려고 오셨다’, ‘천국 복음을 증거하려고 오셨다’, ‘성령세례를 주시려고 오셨다’,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셨다’, ‘잃은 양을 찾으려고 오셨다’,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 ‘율법을 이루시려고 오셨다’, ‘회개시키려고 오셨다’, ‘복을 주시려고 오셨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셨다’ 등 이외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다 맞는 말씀들입니다. 그 내용들이 각론적으로는 하나도 틀림이 없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5절에 보면, ‘죄를 없이하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이유 중에 가장 표면적인 것은 죄를 없이 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중에 태어났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지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죄로 인하여 영원한 죽음에 처한 것이지요. 그것이 죗값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거든요. 문제는 죽음으로 인생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이 땅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인간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결과는 뻔합니다. 죽음이지요. 그 죽음이 영원한 죽음이에요. 영원한 형벌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이 땅에서 죄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해결할 수 없고, 어떤 신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죄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입법자시오, 재판장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실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로 보내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를 없이 하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죄가 없으십니다. 죄를 짓지도 못하실 뿐 아니라 알지도 못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에게 죄인의 옷을 입히사 우리 가운데로 보내신 것입니다. 죄인의 옷을 입히셨다는 말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죄의 옷을 입고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죄수의 옷을 입혀 보내신 것입니다. 죗값을 치르도록 말입니다. 죗값을 치르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지요.

 

또한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신 것입니다(8절). 죄는 마귀의 일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을 사단이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한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 죄를 유전 받아 죄인이 된 것입니다. 죄를 유전 받았다는 말은 마귀의 일에 참예한 자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모든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죄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죄 중에 탄생한 것이지요. 소속이 바뀐 것입니다. 사단에게 속한 자요, 마귀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마귀는 지금도 자기에게 속한 인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광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된 자들까지도 미혹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지요. 그런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마귀의 일을 박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귀의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조작하고, 원망과 불평을 조장하며, 하나님의 일을 거역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마귀의 일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문제는 마귀가 항상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때로는 자기 정체를 감추고 믿는 자들을 미혹합니다. 영혼의 낚시꾼이 마귀인 것이지요.

 

뭇 영혼을 낚아서 지옥 가게 하는 세력이 마귀입니다. 문제는 그런 마귀가 항상 우리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거룩한 교회 안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마귀도 영물인지라 영적 세계를 귀신같이 압니다. 그래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장난을 칩니다. 아무리 믿는 자라 할지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마귀의 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마귀를 색출해서 박멸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세력이었습니다. 그 마귀가 말세가 되면 더욱 지능적으로 최후 발악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미 마귀는 패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창세기 3장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싸움에서 여자의 후손이 승리할 것을 선언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발굼치를 무는 마귀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완전하게 짓밟아버리신 것입니다. 철장 권세로 그들의 머리를 부숴버리신 것이지요. 예수님이 그 일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말입니다(8절).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또 하나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씨를 파종하기 위해서입니다(9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씨앗으로 오신 것입니다. 생명의 씨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분의 오심으로 이 땅에 생명의 씨가 뿌려진 것입니다. 지금도 그분의 씨를 가진 자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생명의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그분의 씨를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의 생명을 얻습니다. 그분의 씨는 생명의 씨요, 영생의 씨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씨는 썩지 아니할 씨입니다(벧전1:23). 썩지 아니할 씨라는 말은 살아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지가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씨가 생명의 씨요, 영생의 씨입니다. 우리의 거듭남도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입니다. 그 씨앗 자체에는 죽지 않는 생명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씨앗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생명이 되려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생명을 가진 씨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한 알의 밀알로 오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려고 오셨다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12장24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썩지 아니할 씨가 썩으러 오셨다는 말입니다. 죽을 밀알로 오신 것이지요. 실제로 예수님은 땅에 떨어져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온 누리에 생명의 씨가 퍼진 것입니다. 오대양 육대주에 생명의 씨앗이 퍼트려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씨앗을 파종하시는 분들에 의해 세상이 생명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덮어지는 것이지요.

 

다만 그 생명을 파종하는 기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오면 더 이상 생명의 씨가 파종되지 못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할 수만 있거든 생명의 씨를 파종해야 합니다. 때문에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어디든지 생명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곳이 길가든지, 돌밭이든지, 옥토이든지, 가시덤불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밭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는 일과 물을 주는 일만 할 뿐입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씨를 뿌리면 생명을 얻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 가운데로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오,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빛으로 나옴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유는 그분이 뿌려주신 씨가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낳기 때문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알게 됩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는 법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시고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다만 부분적인 것으로 전부인 양 주장하지 말고 가장 핵심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궁극적인 목적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2)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궁극적인 목적

 

예수님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10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려고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천국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궁극적 목적이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임마누엘을 이루시려고 말입니다. 내 안에서 나를 성전 삼고 나와 함께 살기 위함인 것이지요. 성전의 머리이신 주님이 주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내 안의 죄를 없이 해야 합니다. 그것은 본문 5절에서 사도 요한이 주장한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이어주는 중보자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 같은 역할을 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완전한 중보자이십니다. 그분이 중보자로 적합한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사람이요, 사람 편에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유일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하나님의 신성과 인간의 인성을 다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실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범죄한 인간은 자기 스스로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인간은 죄를 가진 상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고, 의와 불법이 함께 할 수 없는 원리 때문입니다(고후6:14).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중보자는 예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죄의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분명히 죗값이 있거든요. 범죄한 영혼은 반드시 죽습니다. 성경은 친히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롬6:23).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을 알기 위해 표면적인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표면적인 이유는 죽으려 오신 것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죗값을 지불하려고 말입니다. 물론 그 죗값은 우리가 지불해야 할 값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지불해 주시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죗값을 지불해 주시는 방법을 예수님께 위임해 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 성도들에게는 동물을 대신 죽이는 방법을 마련해 주셨지요.

 

그래서 구약 시대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죄 없는 동물을 대신 죽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죄를 대신 처리했던 것이지요. 문제는 그 방법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방법도 단회적이지 않았습니다. 계속 반복해야 했지요. 그러면서도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냥 죗값을 치렀다는 퍼포먼스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일종의 그림자놀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이 방식으로는 인간의 죗값을 영원히 속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영원히 속죄하는 방법을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하나님의 독생자를 우리 죗값을 지불하는 어린양으로 보내신 것이지요. 예수님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는 제물로 보내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이지요. 영 단번에 말입니다. 더 이상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한 제물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친히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죗값을 모두 다 지불해 주신 것이지요.

 

만일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시고 끝났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끝났다면 우리가 우리 죗값을 지불하고 죽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은 사단에 속한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그 주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수용한 자는 영원한 생명에 참예함을 얻은 것입니다.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지요.

 

(3) 내 안의 천국을 이루라

 

그러므로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이후로는 아무도 자기 죄로 인하여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죽습니까? 그 십자가의 사건을 믿음으로 수용하지 못해서 죽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면, 지금 우리가 죽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아서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고 죽으사 부활하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도 우리 중에 자기 죄로 인하여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이천년 전에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십자가의 사건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죽는다고 생각하는 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인간의 죄값이 다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는 절대 자기들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죽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죽는 것입니다. 구원의 믿음이 없어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믿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죄가 세상에서 가장 큰 죄입니다. 모두가 다 이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에 처한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어떤 죄라도 용서받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짓는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살고, 믿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이른바 예수 믿으면 영원히 살고, 안 믿으면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영생과 영벌이 예수 영접에 달려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단순한 목적은 천국 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천국은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고 들어갈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물론 그 천국이 완성된 천국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 들어갈 천국이 천국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천국도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천국을 시간적인 개념이나 공간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나중에 들어가서 살 천국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현재적 삶이 무미하고 건조합니다. 심지어 불신자들에게 자기가 들어갈 천국을 소개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원론적인 삶에 허덕이는 것입니다. 그 좋은 천국을 사모하면서도 현실의 삶에 지쳐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세상이 힘들어서 빨리 천국 가고 싶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사례들도 적지 않습니다. 의외로 그리스도인들의 자살률이 높은지를 알고 계십니까? 그만큼 현재적 천국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것은 자기가 들어갈 천국에 대한 확신도 부족합니다. 마치 자기들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천국행 티켓을 가끔씩 확인해 보는 정도입니다. 그것도 불확실한 티켓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천국행 티켓을 보험상품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보험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보상받는 것도 자기가 가입한 상품과 코드가 맞아야 됩니다. 모든 보험이 모든 질병이나 사고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천국 가는 믿음을 다양한 보험상품에 가입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예배를 빠짐없이 드리고 헌금을 많이 냈다고 자부심을 느끼고, 어떤 이는 헌신과 봉사를 많이 한 것으로 뿌듯함을 느낍니다. 어떤 이는 전도를 많이 했다고 자랑하고, 어떤 이는 자자손손 기독교 가정임을 자랑합니다. 나름대로 종교적인 보험에 가입한 상품이 자기를 천국으로 인도할 줄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보험상품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하나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면 충분합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불신자들에게 천국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지 못하고, 보여 주지도 못합니다. 지금 자기가 사는 삶이 천국 같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천국은 완성된 천국은 아닙니다. 이 땅에는 우리가 원치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우리 중에 아무도 가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질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혹은 사업 실패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그런 것들이 피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을 천국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천국에서도 이런 일이 내게 주어진다면 나는 천국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라도 믿음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수용합니다. 이른바 감사로 수용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천국은 나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는 곳이요, 보여주는 곳입니다.

 

천국은 내게 부족함이 없는 곳이 아닙니다. 내게 좋은 일만 있는 곳도 아닙니다. 비록 내게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내게 좋지 않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런 것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곳입니다. 물론 지금 말씀드리는 천국은 이 땅에서의 천국을 말합니다. 장차 들어갈 영원한 천국, 완성된 천국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좋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천국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불편하며 무엇이 불만족스럽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통치하심이 있는 곳이 진정한 천국입니다.

 

이런 천국을 이 땅에서도 누려야 합니다. 천국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는 곳이 아니라, 주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라는 것은 천국된 내가 있는 그 어떤 곳도 천국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이 믿어지십니까? 내 마음이 천국이 되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것이라도 천국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천국이 안되면 아무리 좋은 곳도 천국이 아니요, 아무리 좋은 것도 천국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천국이 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내 안에 주님이 나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천국된 삶이라는 것이지요. 천국을 누리고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사는 것이 천국이요,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천국이며,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천국 시민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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