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병거를 두려워하지 말라(삿1:16-21)-2026.6.7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끌고 들어온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도자의 공백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아직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지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가나안의 남은 족속들을 정복해야 합니다. 사실상 본격적으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어느 지파가 선봉장이 될 것인가입니다. 선봉장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지요. 왜냐면 이스라엘의 전체적인 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용기 있는 지파가 앞장서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워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가 뽑혔습니다. 유다 지파는 가장 용맹스러운 지파요, 궂은 일에 솔선수범한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파가 용맹스런 지파였다는 것은 야곱의 축복기도에서 밝혀집니다. 창세기49장9절을 보면,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유다가 가장 용맹스럽게 선두에서 싸울 수 있는 지파임을 짐작케 하는 말씀입니다. 유다는 항상 궂은 일은 마다치 않고 해결하는 중보자적 기질을 가진 지파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애굽에 식량을 구하러 가기 위해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는 유다를 보십시오(창43장). 그리고 요셉의 시험으로 애굽에 억류될 뻔했던 베냐민을 위해 중보자를 자청하는 장면을 보십시오(창44:33). 그는 자기 동생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유다에게는 이미 중보자의 DNA가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유다는 영적 장자로서 메시아를 모셔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지파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사자로 오셨습니다(계5:5). 이처럼 유다가 보여준 희생과 헌신은 이스라엘을 이끌어갈 만한 충분한 자질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유다 지파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과 가나안 정복, 그리고 사사시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맨 앞자리에서 선봉장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가장 먼저 깃발을 들고 행진하던 지파도 유다 지파였던 것이지요.
유다의 이름은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행진이나 전쟁에서 유다가 선봉이 되었다는 것은 찬송이 세상의 그 어떤 무기보다 더 위대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증거는 성경에 많습니다. 유다 지파의 후손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 군대와 전쟁할 때 무장한 군인을 앞세우지 아니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힌 후에 군대 앞에 행하게 했습니다(대하20:21).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하나님이 복병을 두어 대적들을 물리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찬송을 상징하는 유다 지파의 리더 기질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1) 유다가 선봉장이 되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유다 자손이 먼저 올라가서 싸우라고 말입니다(삿1:2). 유다 지파가 앞장선 것은 그들이 다른 지파보다 싸움을 잘하거나, 혹은 좋은 무기를 갖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니면 그들이 완전하거나 완벽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야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유다가 선봉장이 되어 싸우라고 하셨지만 전쟁의 결과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유다 손에 붙이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승리가 확보된 전쟁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패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유다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추가했습니다. 별로 존재감이 없던 시므온 지파에게 협력을 제안한 것입니다(3절).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선한 연합을 도모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가장 연약한 지파인 시므온에게 믿음의 손을 내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이 있습니다. 유다는 시므온에게 일방적 연합을 유도하거나 교만한 연합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연합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재가하신 연합입니다. 악한 연합이 아니라 선한 연합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형제 연합은 기뻐하십니다. 시편133편1절에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는 시므온과의 연합을 통하여 일만 명의 베섹 군대를 무너뜨렸습니다(4절). 그리고 예루살렘을 쳐서 칼날로 치고 성을 불살랐습니다(8절). 난공불락의 성 헤브론 산지를 정복한 것입니다(10절). 파격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지요. 유다의 승리는 다른 지파에게 사기를 북돋아 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거침없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에게 칭찬받을 만한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믿음과 함께 행동하는 양심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유다 지파의 좋은 인격을 공개하는 내용입니다. 거기에 겐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유다 자손이 겐 사람을 선대한 것입니다. 겐 사람은 미디안 광야의 유목민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혈족들이지요. 이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거친 광야를 통과할 때 이스라엘의 눈과 길잡이 역할을 해준 자들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게 된 것이지요.
유다 지파는 겐 사람들의 선행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인 겐 사람들이 더 이상 그들에게 효용가치가 없다고 내어 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끝까지 동행한 것입니다. 겐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주변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들을 공동체 회원으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유다 자손의 포용력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난 왕 다윗 시대에도 여전히 유다 지파에 머물며 신실한 동역자로 남았던 것이지요. 우상숭배로 치닫던 암흑기에 끝까지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며 이스라엘의 영적 각성을 촉구하던 레갑인들이 겐 사람들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렘35장).
하나님이 함께 하신 유다는 전쟁에서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시므온과 함께 하면서 가나안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스밧을 정복하고(17절),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을 정복했습니다(18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유다 앞에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잘나가던 그들 앞에 과부하가 걸린 것입니다(19절). 유다가 산지 거민들은 쫓아내었으나 골짜기 거민들은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옥에 티와 같았습니다. 유다는 절반의 승리만 거둔 것입니다.
(2) 철병거를 가진 골짜기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한 유다
어찌하여 산지 거민들은 쫓아내었는데 골짜기 거민들은 쫓아내지 못한 것일까요? 산지와 골짜기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산지보다는 골짜기가 비교적 평지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산지에서는 이겼는데 골짜기라는 평지에서는 패한 것일까요? 그것은 철병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가나안 사람들은 이미 철기 문화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문화는 청동기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전력으로 볼 때 청동기 문화를 사용하고 있는 유다로서는 철기 문화를 사용하는 그들을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당시 가나안 족속들은 철병거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철병거를 보는 순간 유다는 전쟁할 사기가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한마디로 철병거가 접근하기 불편한 산지 거민들은 쫓아내는 데 어려움이 없었으나, 비교적 평지라 할 수 있는 골짜기 거민들을 쫓아내는 것은 무척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른바 철병거는 평지에서는 활용하기 쉬우나 산지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병거를 사용할 수 없는 산지 거민들은 쫓아내었지만 골짜기 거민들은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유다 자손이 골짜기 거민들과 싸워서 패한 것이 아닙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싸울 생각을 접어버린 것입니다. 아예 패배 선언을 해 버린 것이지요.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의 결정적인 실수입니다. 유다의 실수라기보다는 유다의 불순종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철병거가 훨씬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 옛날 자기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보냈던 가나안의 정탐꾼들의 실수를 반복한 것이지요. 그래서 실수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알다시피 가나안의 12명의 정탐꾼들이 보고한 내용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민수기서13장을 보면, 열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을 악평했던 것입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그 땅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여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같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 자기들은 메뚜기에 불과하더라는 것입니다(민13:32-33). 좋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그들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맞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시선으로 본 것입니다. 객관적인 사실에 주관적인 해석을 붙여서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림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과 원망만 쏟아내게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입국을 거부하십니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최대의 비극이었습니다.
철병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그동안 하나님만 의지하고 일사천리로 전진하던 유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철병거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철병거보다 크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무지몽매합니다. 잘나가다가도 한순간의 잘못된 생각이 믿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때가 있습니다. 한순간의 잘못된 마음이 그동안 쌓였던 믿음을 넘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자기 마음과 생각을 잘 지켜야 합니다. 자기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유다의 실패는 그들만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패의 쓰나미가 밀려든 것입니다. 실패가 전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중요하고, 선두그룹이 중요합니다.
쫓아내지 못한 유다로 인해 다른 지파의 멘탈이 붕괴된 것입니다. 가까이에 있던 베냐민 자손들이 부정적인 학습을 당한 것입니다. 베냐민 자손들도 예루살렘에 거주한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21절). 그것만이 아닙니다. 쫓아내지 못한 실패가 도미노처럼 확산되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쫓아내지 못한 사례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입니다. 27절에 므낫세가 향리와 므깃도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했고, 에브라임이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29절).
스불론이 기드론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고(30절), 아셀이 주변의 수다한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했으며(31절), 납달리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33절). 이처럼 사사시대는 실패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는 유다의 실패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패배의 말을 듣고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하고, 승리의 말을 듣고 분위기가 고조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속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면 승리에 대한 탄력이 붙지만, 부정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좋지 않은 영향이 확산됩니다.
(3) 세상의 철병거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불병거를 바라보라
유다 자손의 실패는 전체적으로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악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철병거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더 크게 확산하여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이 일시적으로 감겨버렸던 것이지요. 이처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런 경험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순간에 우리 믿음이 춤을 출 때가 있습니다. 하다못해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큰소리 치고 따라다녔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가 하루 저녁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 앞에서 큰 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은 연약합니다.
또 다른 성경을 한군데 더 보겠습니다. 열왕기하6장에 보면, 아람 왕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성을 포위합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던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사환에게 엘리사가 선포합니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자보다 많으니라”(왕하6:16절). 하나님이 사환의 눈을 열어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니 영계를 본 것입니다. 영계가 열리므로 세상의 병거보다는 하나님의 불병거를 보게 된 것입니다.
당시 유다 자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철병거만 보았던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열어 하나님이 준비하신 불병거를 보지 못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불병거는 세상 그 어떤 철병거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철병거는 세상의 병거요, 불병거는 하나님의 병거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불병거를 보는 자들입니다. 사사기4장에 보면, 세상 철병거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던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에게 붙여버리셨습니다. 당시 야빈 왕은 철병거를 구백승이나 갖고 있었습니다.
한 대의 철병거도 갖고 있지 않은 이스라엘로서 철병거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막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이십 년 동안 압제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여선지자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셔서 그들의 손에서 구원해 냅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스토리를 보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히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이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에 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순간 전쟁은 끝난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이 내려와서 구백승의 철병거와 싸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군과 천사를 동원하사 싸우게 하신 것이지요. 때로 하나님은 자연 만물과 기상현상까지 동원하셔서 싸우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기손강을 범람케 하신 것이지요. 내용인즉 하나님이 폭우를 내려 기손강을 뻘밭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철병거가 평지에서는 유효하나 진흙밭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짐만 될 뿐입니다. 이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드보라가 노래를 통해 밝힌 것입니다(삿5:20-21).
하나님이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의 군대를 기손강으로 유인하여 철병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기손강을 범람시켜 철병거가 아무 소용없이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불병거는 세상의 그 어떤 철병거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이 가장 무서워하는 철병거가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이에게는 돈이 철병거와 같고, 세상 권세가 철병거와 같으며, 자기 가진 것을 철병거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철병거로 인하여 무서워서 떠는 자도 있을 것이요, 자기를 지켜줄 만한 철병거가 없다고 두려워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철병거를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없는 철병거 때문에 염려하지 말며, 오직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불병거가 내게 있음을 감사하고 확신하십시다. 반드시 하나님이 예비하신 불병거로 세상의 철병거를 제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담대하게 승리하십시다. 지금 여러분의 눈이 열어져 하나님의 불병거를 보는 역사가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