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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1-13)-2026.6.14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6.06.13|조회수79 목록 댓글 0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1-13)-2026.6.14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 약속은 아내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아들을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언약을 성취할 씨앗을 주신다는 말이지요. 사라에게서 태어날 아들은 믿음의 유업을 이어갈 아들입니다. 물론 그 언약의 포괄적인 의미는 아브라함을 불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고 이름을 창대케 하여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후사가 있어야 합니다. 후사가 없는데 어떻게 후손이 있으며, 후손이 없는데 어떻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이 아브라함의 직계 후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가는데 자식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후사가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점점 늙어갑니다. 생리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부부는 마음이 조급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꾸며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직접 도와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이 아들을 생산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물론 사라의 제안을 아브라함이 흔쾌히 받아 드림으로 성사가 된 것입니다. 그들의 꼼수는 성공적이었습니다. 하갈을 통해 아들을 생산한 것입니다.

 

그가 이스마엘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얻은 때가 86세입니다(창16:16). 부부는 이스마엘을 애지중지 길렀습니다.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13년 동안 이스마엘을 양육하는 데 심혈을 다했을 것입니다. 나이 든 그들에게 이스마엘은 유일한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약하신 후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13년 동안 하나님이 아브라함 부부에게 침묵하십니다. 어떤 접촉이나 어떤 간섭도 아니하십니다. 13년의 세월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교제가 끊어진 기간입니다.

 

아브라함을 친구처럼 여겨주셨던 하나님이 갑자기 13년 동안 교제를 중단하셨다면 이것은 위기 중의 위기입니다. 아브라함은 과연 이것을 위기로 직감했을까요? 그런데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진짜 위기는 금전이나 재정이 아닙니다. 혹은 건강의 무너짐도 아닙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됨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최고의 위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위기로 여기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위기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아브라함도 13년간 하나님의 침묵을 위기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 부부는 이스마엘을 키우면서 세상사는 재미를 붙였을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스마엘을 하나님이 언약하신 후사라고 생각하고 살았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이스마엘로 인하여 가정이 아픔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라가 많은 갈등과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잉태한 순간부터 하갈이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했거든요(창16:4). 잉태하는 순간부터 멸시를 당했는데 아들을 낳은 이후는 오죽했겠습니까? 아마도 여인열전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브라함도 두 여인 사이에서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입니다. 이 편을 들 수도 없고, 저 편을 들 수도 없는 고통을 겪었을 것이지요.

 

(1) 13년 만에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한 사라의 아픔과는 비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라는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평화 없는 가정생활을 하던 차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구십 구세 때입니다. 13년 만에 찾아오신 하나님이 몇 가지 중요한 언약을 하십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내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창17:16). 그때 사라의 나이 90세입니다.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진 상태였지요. 그런 사라에게 아들을 낳게 하신답니다. 아브라함도 웃고 사라도 웃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승인치 않았던 것이지요. 승인치 않았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누가 그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를 말씀대로 권고하셨습니다(창21:1). 권고하심은 믿음을 설득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잉태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여호와라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그가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을 얻은 사라는 하나님이 웃게 하신다하여 이삭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정말 우리로 하여금 웃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 감성을 초월하사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스마엘에 집중하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시선이 이삭에게로 쏠렸을 것입니다. 마치 증손자뻘에 해당하는 이삭을 키우면서 두 부부는 더없이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이삭이 크는 재미로 나이를 잊은 채 살았을 것입니다. 이삭도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문제는 아브라함 부부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얻는 기쁨보다 이삭으로 인하여 얻는 기쁨을 한껏 누리며 살았을는지 모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상상입니다. 하지만 그때가 또 다른 위기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느날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수용하기 어려운 미션을 주십니다. 그 미션은 하나님의 성품상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미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가서 당신이 지시하는 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번제로 드리라니요?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이방인의 제사를 가장 싫어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니요. 그것도 불로 태워서 드리는 번제로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떤 토도 달지 않았습니다. 마치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다음날 바로 미션을 수행합니다. 역시 하나님은 실수하지 아니하신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온갖 핑계와 반대로 저항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때는 언제고 왜 그런 잔인한 방법으로 바치라 하시냐고 따졌을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마음인지 모릅니다.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미션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입니다.

 

(2)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그는 하나님의 미션에 즉시 참여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서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마친 후에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사환을 그곳에 대기시킨 후에 이삭을 데리고 한 산으로 올라 갑니다. 번제에 쓸 나무는 이삭에게 지웠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든 채 산으로 올라갑니다. 부자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미션이 궁금했고, 이삭은 아버지의 행동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시간 침묵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그 상황을 어렴풋이 알기 때문에 할말이 없었을 터이요, 이삭은 그 상황을 도저히 알 수 없어서 침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침묵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온갖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후에 전개될 번제의 상황을 그리며 깊은 사색에 빠졌을는지 모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반드시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셨으리라는 확신을 가졌을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비록 이삭을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살려주실 것을 믿는 부활의 신앙을 가졌을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마음으로 올라갔을까요? 성경의 분위기로 볼 때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다시 살리실 줄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올라갔던 것이 확실합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19절은 “저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다시 살려주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졌던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침묵으로 올라가던 그때 이삭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이삭의 궁금증이 발동한 것이지요. 우리는 그때 이삭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상식선에서 10대 초중반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정할 뿐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에 쓸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10대 정도의 나이임을 감안할 때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아마도 이삭은 그동안 아버지를 따라 번제 드리는 예식에 몇 번 참여했던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어린 양이 안 보입니다. 제사의 생명은 제물입니다. 번제의 생명도 제물입니다. 번제의 제물은 다양합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가 보편적인 제물이었습니다. 물론 새를 드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새는 비둘기입니다. 비둘기는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이 가장 많이 드리는 제물이었지요. 그중에서도 어린 양은 최고의 제물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물을 물어 볼 때 아버지의 마음이 착잡했을 것입니다. 충분히 물어 볼 수 있는 질문이지만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순간 착잡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마치 그 질문이 있을 것을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대답합니다.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말입니다(8절). 이는 자연인으로서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입을 열어 구속사의 관점으로 대답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예비하셨음을 아브라함의 입을 열어 대언케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3) 번제에 쓸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이삭의 질문에 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 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아직 어린 양의 의미를 모르는 자라면 이삭 같은 질문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번제에 쓸 어린 양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 말입니다. 이 질문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할 질문이요, 반드시 찾아야 할 답입니다. 번제 할 어린 양이 어디 있습니까? 누군가 여러분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렵니까?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삭의 질문은 번제에 쓸 양을 찾은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을 찾은 것입니다.

 

번제에 사용되는 양은 어린 양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의 형편에 따라 제물은 달랐습니다. 레위기서 1장을 보면, 제물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나 새까지도 가능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새는 비둘기입니다. 집비둘기나 산비둘기가 모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번제를 드리는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제물이든지 흠 없는 수컷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번제는 일반 개인이 드리는 번제가 있고,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위해 매일 드리는 번제가 있습니다. 그 번제가 상번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양 두 마리를 번제단에 바쳤습니다. 매일 상번제를 드리기 때문에 번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드리는 번제물이 어린 양입니다. 어린 양이 상징하는 바는 깊고도 오묘합니다. 일 년 된 어린 양은 때 묻지 않는 순수함과 온전함을 상징합니다. 가장 깨끗하고 소중한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이 어린 양은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면서 먹었던 제물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의 고기가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을 모르고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린 양이 신약을 관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던 것이지요. 예수님보다 6개월을 먼저 와서 예수님의 첩경을 예비하고 있던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말입니다. 구약의 어린 양이 죄인의 죄를 대신하여 잠잠히 죽어갔듯이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제단에서 물과 피를 아낌없이 쏟으시고 단번에 온전한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바가 된 것입니다.

 

어린 양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질문 속에서 우리는 메시아를 갈망하는 인간의 고뇌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인간에게든지 어린 양이 필요합니다. 내 대신 나를 대신하여 죽어줄 어린 양 말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도들에게 번제단에 바쳐진 어린 양을 통해 대속의 원리를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을 통과한 성도들에게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대속의 원리가 아니라 대속의 실재를 믿게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어린 양을 통해 죄사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동물의 제사 방식을 통해 희생의 퍼포먼스를 배우게 하는 것이었고, 신약을 통과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사함의 믿음을 갖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삭이 번제에 쓸 어린 양이 어디 있냐는 질문 속에서 단순한 번제물 그 이상을 찾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드리는 단순한 번제물을 찾지 않았습니다. 번제에 쓸 어린 양이라고 분명히 물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구속사를 염두 한 질문이지요. 물론 그것은 이삭이라는 개인의 질문이라기보다 하나님이 이삭의 입을 열어 구속사의 질문을 하게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스케줄 속에는 이미 이삭을 통한 구속사의 계보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삭으로, 이삭을 통하여 야곱으로, 야곱을 통해 다윗으로, 다윗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구속사가 중단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구속사의 줄기입니다. 하나님이 그 구속사의 줄기를 끊어버리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복의 줄기가 이삭을 통해 흘러가야 합니다. ‘번제에 쓸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이삭의 질문은 하나님이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대신 물어오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번제 할 어린 양이 어디 있습니까? 속칭 나를 위해 죽어주실 어린 양이 어디 계시냐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실 어린 양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구약 성도들에게 어렴풋이 어린양을 소개해 주었습니다(사53:7). 그가 소개한 어린 양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요,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하던 어린 양이었습니다. 자기 앞에 펼쳐진 죽음 앞에서 아무런 저항이나 반항 없이 묵묵히 순종하신 고난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신약의 문이 열리자 세례 요한이 그 어린 양을 선명하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베드로전서1장18-19절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유월절 어린 양이 잡히는 그 시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 계시록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승리자이심을 밝히고 심판주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외칩니다(계5:12). 19장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19:9). 21장에서는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이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계21:22).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해와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십니다(계21:23).

 

성경을 관통하는 구속사의 핵심이 어린 양입니다. 구약 성경의 어린 양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희생제물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어린 양은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의 어린 양은 예표요, 신약의 어린 양은 성취입니다. 성경의 어린 양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낮고 낮은 곳에 오시어 자기 목숨을 온전히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이 바로 지금 우리가 찾는 어린 양이십니다. 아니 세상 모든 사람이 반드시 찾아야 할 어린 양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 당신은 번제에 쓸 어린 양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당신의 번제에 사용할 어린 양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당신의 번제에 쓸 어린 양을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셨음을 믿으십니까? 그 어린 양은 하나님 안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 양을 하나님이 친히 우리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그 어린 양은 친히 십자가에서 번제물로 드려졌습니다. 그 어린 양이 우리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린 양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지금 사는 나는 어린 양의 피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2장20절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어린 양이 준비되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눈을 들어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친히 당신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어린 양이 보일 것입니다. 그 어린 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어린 양을 믿으십시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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