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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출15:22-27)-2011.11.20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11.12.04|조회수185 목록 댓글 2

내 영혼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출15:22-27)

 

 요즘 가장 각광받는 신학중에 하나가 치유신학입니다. 무엇보다도 내적치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치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병든 영혼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현대인들은 겉은 멀쩡하게 보이지만 심령이 병든 자가 많습니다. 절대 겉모습만 보아서는 그 사람을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가끔은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대형 사고를 칩니다. 그만큼 모든 사람들 안에는 질병의 바이러스가 잠복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질병의 바이러스가 내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의 바이러스가 질병을 타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저지른 죄악의 처참하고 무섭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당사자인 사람도 병들고, 동물도 병이 들며, 모든 자연계가 병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도 울고 땅도 울고, 하늘도 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우주만물이 인간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회복되면 모든 피조세계는 더불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의 심령이 병든 것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병든 가정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질병의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미안하지만 교회안에도 질병이 득실거려서 치유가 심각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사실상 육신의 질병을 치유해야 할 병원에서 오히려 질병에 감염되는 일이 꽤나 많다고 합니다.

 

 가장 평안해야 할 가정이 가시방석 같은 공간이 되어 버렸고, 참된 안식을 누려야 할 교회 안에서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상처를 받아 방황하는 영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바이러스를 유포하는 것이, 공간이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질병의 바이러스를 유포시키는 주범이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근본적으로 사람이 치유되지 않으면 아무리 신성한 곳이라 할지라도 안전지대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장 먼저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정상적으로 치유가 되면 인간들의 삶의 터전이 치유가 됩니다. 내가 먼저 치유되면 우리 가정이 평안하고, 우리 교회가 참된 안식처가 될 줄로 믿습니다. 문제는 육신의 질병은 보통 드러나기 때문에 치유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질병은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치료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분노심이나 적개심이 보입니까? 미움이나 시기심이 보입니까? 불만이나 불평의 바이러스가 보입니까? 이런 것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정말 무서운 질병의 바이러스들입니다. 우리안에는 치유해야 할 질병들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가장 시급하게 치유 받아야 할 질병은 내안에 감추어진 영적인 질병들입니다. 사람들은 감기만 걸리면 병원을 생각하고 약국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영적질병에 대해서는 그냥 어떤 조치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치유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고 맙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치유 받아야 할 병든 자들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고 불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고 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질병을 치유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는 못 고칠 질병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여호와 라파입니다. 하나님은 치유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확한 질병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질병에 걸린 자는 자기의 병을 인정해야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진료가 시작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질병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동안 그들속에 잠복되어 있던 질병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옥같은 애굽에서 탈출하여 죽음의 바다 홍해를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하게 통과했습니다. 첫 번째 나와서 그들이 도착한 곳은 수르광야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물을 찾았습니다. 사흘을 찾았지만 한방울의 물도 찾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물이 없는 고통은 당해 본 자만 압니다. 물 때문에 지구촌이 국가간, 민족간, 종족간, 부족간 싸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기다리던 물을 마라에서 찾아냈습니다. 정말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왠 일입니까?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인류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드라마를 연출하며 당당히 출애굽했던 민족입니다. 그래서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이제는 “고생끝, 행복시작”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15:1-21).

 

 그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꺼번에 집단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분위기로 보아서 누구 한 사람도 그들의 불평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치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는 무리들처럼 말입니다. 어느 한 사람도 연약한 여인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들어있는 불평의 바이러스가 한순간에 터지고 만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가 착각하는 원인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교회만 나오면 만사가 형통한 줄로 압니다. 병도 안걸리고, 장사도 잘되고,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잘될 줄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금방 낙심하고 실망합니다. 심지어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어디에든지 인생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때로는 마실 수 없는 마라의 쓴 물이 기다리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상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이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똑같은데 내가 달라진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당장 지금의 내 소유가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환경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고 우리의 마음의 자세가 달라진 것입니다. 내 인상의 가치관이 달라진 것이고, 내 인생의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내가 달라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는 마라의 고통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쓴물인지 단물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애꾸눈 사람들속에서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장애인취급을 당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두 눈 가진 사람들속에서 살다보면 애꾸눈이 잘못된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마라의 쓴물이 있습니다. 이른바 육체적인 가시와 쓴 뿌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마라 지역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마라의 쓴물이 준비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라를 통과해야 엘림에 도착합니다. 마라를 통하지 않고는 엘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엘림에 가면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칠십주가 있습니다. 마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마라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입니다. 더 이상 우리앞에 찾아온 마라를 불평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정면으로 승부하시기 바랍니다. 의사들이 조언하기를 연세 많으신 분들의 질병은 마치 친구같이 대하라고 주문합니다. 낙심과 두려움과 불평은 우리의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면역성을 떨어뜨려 일찍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앞에 찾아오는 내 인생의 쓴물을 인정하십시오. 어떤 이에게는 물질적인 마라가 있습니다. 질병의 마라를 가지고 사는 자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속의 마라를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정에도 마라가 있고, 직장에도 마라가 있으며, 교회에도 마라가 있습니다. 지금 세계경제의 글로벌 마라가 지구촌 전체를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마라지역을 통과하면 반드시 엘림지역이 보입니다. 마라를 통하여 엘림으로 들어갑니다. 마치 고난절을 지나야 부활절을 맞이하듯이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내게 고통을 주는 마라야, 더 이상 나를 고통스럽게 마라. 쓴물을 주는 마라야, 내게 더 이상 나를 쓰게 하지 마라. 질병과 고통의 마라야, 더 이상 나를 괴롭게 마라”. 그러면 이 마라를 어떻게 통과해야 할까요?

 

(1)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24절)

 

 그들은 불과 3일전만 해도 출애굽의 감동을 가지고 하나님께 노래를 만들어 부르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3일만에 일심단결하여 불평분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작심삼일만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하늘을 찔렀던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의 사악한 마음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그들은 불과 3일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던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그들중에 한 사람이라도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단 말입니까?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신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중에 하나가 바로 건망증이라고. 잘 잊어버리면 정신병에 안 걸린다네요. 보통 정신병을 앓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과거의 충격, 분노, 섭섭함이 잊혀지지 않고 생각나서 그들을 괴롭히기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여 생긴 병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잘 잊어버리면 치매가 걸립니다.

 

 물론 은혜는 잘 기억하고 상처는 잘 잊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대표선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사실 모세가 무슨 죄가 있나요? 자기 민족을 위해 자기 인생을 바친 것밖에는 더 이상 무슨 책임이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모세의 리더쉽은 여기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그들을 향해 교육적으로 훈계하거나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하거나 설교하지도 않았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역시 모세는 위대한 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분명히 다른 사람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속이 상하여 그들에게 분노하며 맞불을 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주의 종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답답한 일을 만나면 오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벗겨주실 분은 오직 우리 주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답답함을 풀어 주실 분 역시 우리 주 하나님밖에는 없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 인생의 헝크러진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이야기한다해서 풀릴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불평하고 원망한다고 해서 풀릴 문제는 더욱 더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어떤 쓴물이 있습니까? 여러분 인생의 마라의 쓴 물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의 쓴물이 단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쓴물이 단물이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의 쓴물도 단물로 회복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쓴물일지라도 의인 한사람의 간구하심으로 인하여 단물로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마라의 기도는 목숨을 건 기도입니다. 능력의 기도입니다. 어떤 인생이든지 쓴물이 있어야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간절해집니다. 그러므로 마라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 붙들게 하여 축복의 땅 엘림으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1967년 인구 5백만의 이스라엘과 2억이 넘는 중동국가가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른바 우리가 기억하는 6일전쟁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은 다얀장군이었습니다. 다얀 장군은 입수된 정보와 데이터를 컴퓨터로 정확하게 분석한 결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컴퓨터를 팽개치고 “우리는 과학으로 싸우지 않는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된다. 우리는 이번 전쟁을 다음 안식일전까지 반드시 끝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안식일 다음날 전쟁을 시작해서 그 다음 안식일 전에 전쟁을 끝냈습니다.

 

 세계 전쟁사에 최고의 전투로 기록된 6일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요단강 서안, 골란고원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승리의 열쇠는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것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될 줄로 믿습니다.

 

(2) 오직 십자가만 붙들어야 합니다(25절)

 

 기도하는 모세에게 우리 하나님은 처방전을 주십니다.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십니다. 아니 이렇게 회괴망칙한 처방전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말씀으로 명하시든지, 아니면 설탕을 드럼으로 부으셔서 달게 하시면 되는 일을 상식이하의 처방전을 내십니까? 하나님이 마라의 쓴 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논리나 지식,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 작은 머리의 한계로만 이해되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는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믿음과 과학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믿음은 믿고서 보는 것이요, 과학은 보고서 믿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뭇가지에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뭇가지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널 때도 모세의 지팡이에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등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오는 한 나무는 구속사적으로 해석해보면 나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른바 나무십자가를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생명나무입니다(계22:2). 사시사철 열두가지 과실을 맺혀주는 생명나무입니다. 제일 아담이 선악과 나무를 무너뜨리고 범죄했다면, 제이 아담되시는 우리 주님은 나무 십자가를 세우시고 친히 달리사 우리 인생의 모든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죄와 질병과 사망의 문제를 다 해결하신 분이 바로 한 나무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한 나무이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튼튼히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고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인생의 쓴물을 가지고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쓸데없이 이곳저곳 다니면서 돌팔이 의사에게 여러분의 운명을 맡기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셔서 그분만 붙드시기 바랍니다.

 

(3)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26절)

 

 하나님은 치료자이십니다.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못 고칠 질병이 전혀 없는 전능하신 의사이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늘에서 별을 따올 정도의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리고 우뢰와 같은 큰 소리로 부르짖는 기도가 있을지라도 순종하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니 기도의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도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능력도 순종을 통해서 일어나고 기도의 능력도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에 순종하고, 기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뭇가지를 물에 던졌습니다. 아마도 못된 인간 같았으면 저런게 무어냐고 빈정대고 난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콧방귀만 뀌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나뭇가지를 물에 던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신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이 달아진 것입니다. 쓴물이 단물이 된 것입니다.

 

 룻기서를 보십시오. 베들레헴에 거주하던 나오미 가족이 흉년이 들자 남편과 함께 모압땅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10년만에 남편도 잃고 두 아들까지 다 잃었습니다. 결국 이민생활을 정리하고 나오미는 정든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옛 친구들이 그녀를 기쁨을 상징하는 이름 나오미로 부르자, 그녀는 자기를 고통을 상징하는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흉년들었다고 베들레헴을 떠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그녀가 말씀을 회복하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의 마라가 아니었고 분명히 기쁨을 상징하는 나오미가 분명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라가 클수록 축복도 큰 것입니다. 결코 마라의 쓴 물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마라에서 끝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인생의 마라는 엘림의 축복을 향하여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주시는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앞에 놓인 마라를 잘 통과하기만 하면 내 영혼이 강건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내 영혼이 성숙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프고 나면 훌쩍 크듯이 말입니다. 아픈만큼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절대 마라 앞에서 불평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좌절하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마라 앞에 감추어진 엘림의 축복을 보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끝까지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튼튼히 붙잡고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 앞에 마라의 쓴 물이 조만간에 사라지고 은혜의 단 물만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201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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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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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강문중 | 작성시간 11.12.07 늘 좋은 말씀 은혜 받습니다.
  • 작성자최규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12.1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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