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갖자(히11:13-16)-2012.12.2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12.12.01|조회수350 목록 댓글 2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갖자(히11:13-16)-2012.12.2

 

모든 사람에게 육신의 고향이 있듯이 영혼도 본향이 있습니다. 또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영혼에 대한 본향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아닌 것처럼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도 나름대로는 천국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선하게 살다 죽은 사람들을 향해 좋은 곳에 갔을 것이라고 서로들 위로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말하는 좋은 곳도 천국을 말합니다.

 

불신자들도 나름대로는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마음에 위안을 삼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들의 생각에는 그럴지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자기들만의 위안의 장소 일 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천국은 자기들끼리 위로를 받기 위해 만들어놓은 장소에 불과 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분명히 자기들이 가야할 본향을 확실히 믿고 삽니다. 우리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유일한 소망은 본향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성도는 항상 영적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갖자라는 말씀으로 은혜받기 원합니다.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은 정말 복된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임시천막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잠시잠간 머물다가 떠나가야 하는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마치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반드시 누구든지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반드시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본향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세상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 장막이 세워집니다. 세상의 장막은 육신의 장막입니다. 세상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의 장막이 세워집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원한 처소가 아닙니다. 반드시 무너져야 할 임시처소에 불과합니다. 개인적으로 육신도 그리하고 피조된 모든 세계가 공히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영원한 하늘의 장막을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이 땅에 살지라도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 살지라도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빌3:20). 때문에 본향을 사모하고 사는 자는 이 땅에 대한 미련이 없습니다. 이 땅에 대한 지나친 소망을 갖지 아니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말입니다. 결코 이 땅의 것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모해야 할 본향은 무엇일까요?

 

(1)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사람은 누구나 육신의 본향이 있습니다. 이른바 자기가 출생했던 곳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본적지라고도 말합니다. 한 사람도 본적지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자기 본적지를 떠나 살지라도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자기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귀소본능이 강하게 작동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이들면 자기 고향에서 살다가 묻히겠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고향은 어머니의 품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고향을 지키며 고향에서 살기도 하지만 많은 현대인들은 자기 고향을 떠나서 삽니다. 세상에서 정말 바쁘게 살다가 명절이 다가오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강해집니다. 그래서 마음먹고 고향을 찾는 것입니다. 외국에 나가 이민생활을 할지라도 자기 조국땅에 와서 고향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고향을 이북에 두고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찾아가서 그쪽 방향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합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육신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지극히 당연합니다. 자주 가보고 싶지만 그동안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가보지 못하다가 명절이 되면 아무리 도로가 번잡하여도 고생을 감수하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도 육신의 고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사모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고향만 그리워하지 말고 영혼의 고향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자기 영혼이 돌아갈 처소가 없는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지금은 모릅니다. 그러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려고 하면 사람의 마음은 비교적 순진해집니다. 그리고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영혼이 정직해집니다. 그만큼 돌아갈 처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면서 자기 영혼이 돌아갈 처소를 기억하고 영적인 본향을 준비한 사람들은 갈곳이 있기 때문에 평안합니다. 그리고 주님만날 것을 고대하므로 영혼이 순수해지고 정직해집니다.

 

하지만 이 땅을 살면서 자기가 돌아갈 영혼의 처소를 준비하지 아니하고 살다가 막상 돌아갈 처소를 생각하니 이 세상이 아쉽고, 저 세상이 두려워서 비교적 마음이 순전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끝날까지 악한 마음과 악한 행동으로 버티다가 매우 비참하고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영혼들도 있지만요. 하지만 대부분 죽음앞에서 차분해지고 초연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때는 자기 영혼의 처소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습니다.

 

(2)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

 

우리가 알다시피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믿음장에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나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구약성경에 믿음의 인물들이 대략 삼만명가량 나온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인물 가운데 믿음의 사람으로 뽑은 인물은 실명으로 16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물론 히브리서 기자가 뽑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 죽었다는 사실이요,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특징은 이 사람들 모두가 다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말하는 이 사람들은 분명히 앞절에 나오는 선조들을 지칭합니다. 이른바 아벨과 에녹, 노아와 아브라함, 그리고 사라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정착민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다 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그네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를 의미합니다. 정착민과는 대조를 이루는 말입니다. 때가 되면 언제라도 미련없이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가는 나그네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나그네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 다 나그네 인생입니다. 마치 가수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과 같은 것이 우리네 인생인지 모릅니다.“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숙생은 인생의 내막을 모르는 노래이지만 나그네같은 인생에 정이랑 두지 말고 미련이랑 두지마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인생은 진짜 불행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이 긴 것 같지만 덧없이 짧습니다. 그러나 또 짧은 것 같지만 그리 짧지만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때문에 우리네 인생을 비관적으로 탄식할 필요도 없고, 낙관적으로 찬양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의 범주내에서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이 땅에서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처소를 사모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인생처럼 허무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향이 있음을 믿고 본향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은 정말 인생의 묘미를 알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인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선진들은 외국인처럼 살다갔습니다. 외국인은 본토인과는 다릅니다. 외국인은 일정 기간동안 머물다가 자국으로 떠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향이 어디일까요? 우리의 본향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입니다. 그곳이 우리가 영원히 살아가야 할 우리의 본향입니다. 우리는 그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본향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제일 불행합니다. 본향을 잊어버리고 사는 자도 불행합니다.

 

여러분이 인정하든지 안하든지간에 우리의 본향은 분명히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육신의 고향이 있듯이 영혼의 본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영적 고향의 성경적인 표현은 본향입니다. 육신의 본향을 그리워한다면 당연히 영적인 본향이 있음을 믿고 본향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도는 영혼의 본향을 사모함이 마땅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돌아갈 본향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튼 성도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돌아가셨다는 말을 합니다. 돌아갔다는 말은 왔던 곳이 있다는 말이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왔던 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우리 영혼의 본향입니다. 우리 영혼의 본향은 장소적인 개념으로 하늘나라입니다. 아버지의 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아버지의 품안으로 복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자녀된 자만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3)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우리는 마땅히 본향을 사모하며 본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나 본향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본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슬피 울며 이를 갈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가장 먼저 본향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본향을 그리워하며 사모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향에 대한 추상적인 믿음이나 막연한 믿음은 정말 위험합니다.

 

본향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본향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본향이 예비되어 있을지라도 본인에게 사모함이 없으면 본향은 소유할 수 없습니다. 본향을 믿지 못하는 믿음은 건강한 믿음이 아니고 병든 믿음입니다. 본향을 사모하지 않는 믿음도 병든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들도 더러는 천국은 죽어봐야 알 수 있는거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본향에 대한 확신이 없는 믿음은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으므로 믿음 자체가 불안합니다.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는 믿음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본향에 대한 믿음이 분명치 못합니다. 마치 본향에 대한 믿음은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삶을 보상받는 마음인것처럼 치부해 버립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돌아갈 본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보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전의 우리 믿음의 선배들보다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15절을 보시면“나온 바 본향”이 나오고, 16절에는“더 나은 본향”이 나옵니다. 15절의 나온바 본향은 육신의 본향을 말하고, 16절의 더 나은 본향은 영적인 본향을 말합니다. 이른바 하늘나라입니다. 장차 우리가 돌아갈 본향은 이 땅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돌아가서 누려야 할 본향은 이 땅의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땅의 본향과 비교하는 개념으로 더 나은 본향이라고 설명할 뿐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육신이 머물고 있는 나온바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다면 그들이 떠나왔던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지만, 그들은 오로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때문에 우리도 이 땅의 육신적인 고향만 그리워하지 말고 오직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허상입니다. 정말 허무적인 믿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성도는 절대 이 땅의 것으로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이 땅의 것으로 집착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우리의 영원한 처소, 하늘나라의 본향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불타고 없어질 세상 장막 짓는 데만 열심내지 마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처소를 짓기 위한 거룩한 열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본향을 두지 말고, 오직 영원한 처소가 되시는 하늘에 본향을 두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본향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를 위해 예비된 본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일 나를 위해 예비된 본향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한 형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 우리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인생과 그러지 않는 인생은 천국과 지옥입니다.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인생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절대 소홀하게 살지 않습니다. 정말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삽니다. 소중한 시간을 아름답게 삽니다. 이 땅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대충대충 사는 것이 아닙니다. 훨씬 더 진지하고 겸손하게 삽니다. 주어진 세월을 아끼고 시간을 아끼며 삽니다.

 

그러나 영적 본향을 준비하지 않는 영혼들은 이 땅에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고 흥청망청 부어라 마셔라하며 살아갑니다.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인생과 그러지 않는 인생은 삶의 질이 다릅니다. 삶의 목적과 방향이 다릅니다. 인생의 최종 목적지가 다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다르고, 이 땅을 떠나가며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결론적으로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의 지성인을 소개하려 합니다. 프랑스의 샤르트르라는 실존주의 철학자와, 독일의 본훼퍼라는 신학자입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의 대두라고 할 지성인 샤르트르가 1980년 3월 파리 부르세병원에 폐수종으로 입원을 합니다. 한달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샤르트르는 고함을 지르고 절규하며 발광을 했다합니다. 심지어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자기 옆에서 간호하던 아내에게도 자기의 병을 묻지 않았답니다.

 

그런 그가 한달 동안의 투병을 마치고 죽자 프랑스 언론들이 대서특필했습니다. 샤르트르가 왜 이렇게 광분하며 죽었는가? 죽음으로부터 그토록 자유를 외쳤던 실존주의 거성 샤르트르의 말로가 왜 이리 비참했는가?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유까지 착실하게 실었는데, 이유는 샤르트르가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확한 분석입니다. 그에게는 죽은 이후에 돌아갈 본향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일의 유명한 행동주의 신학자요, 목사인 디트리히 본훼퍼는 나치정권에 저항하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구금당합니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1945년 4월에 처형당합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기도문과 시를 보면 죽음앞에서 얼마나 당당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나치정권에 저항하며 베를린 감옥에서 처형당하기 전에 기록한 시입니다.

제가 오늘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나는 누구인가”- 디트리히 본훼퍼 -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나는 감방에서 걸어나올 때

마치 왕이 자기의 성에서 걸어나오듯

침착하고, 활기차고, 당당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나는 간수에게 말을 건낼 때

마치 내게 명령하는 권한이라도 있는 듯

자유롭고, 다정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또한 말하기를

나는 불행한 날들을 견디면서

마치 승리에 익숙한 자와 같이

평화롭고, 미소 지으며, 자연스럽다고 한다.

 

나는 정말 다른 이들이 말하는 그런 존재인가.

아니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게 뭔가를 갈망하다 병이 들고

손들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듯 숨 가쁘게 몸부림치고

빛깔과 꽃들과 새소리를 갈구하며

부드러운 말과 인간적인 친근함을 그리워하고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로 치를 떠는.

 

그리고 위대한 사건들을 간절히 고대하고

저 멀리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다 힘없이 슬퍼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글쓰는 일에 지치고 텅 빈.

무기력하게 그 모든 것과 이별할 채비를 갖춘 그런 존재.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인가.

 

아니면 동시에 둘 다인가.

타인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약자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하지만 내가 누구이든, 신은 안다.

내가 그의 것임을.

 

또한 그가 남긴 한편의 기도문을 보너스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주 하나님!지금 저는 큰 어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두려움이 저를 압도하고 있습니다.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주여! 당신의 은혜로 도와주십시오.두려움이 저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소서.아버지처럼, 아내와 자식들처럼저를 돌보고 지켜 주십시오.

 

자비하신 하나님!당신에게 지은 죄, 사람들에게 지은 죄,모두 용서하소서.주의 은혜를 믿으며 당신 손에 제 생명을 맡깁니다.당신의 뜻에 맞고 제게 유익하도록저를 이끌어 주소서.죽든지 살든지 제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당신이 저와 함께 하시옵소서.주여! 당신의 구원과 당신의 나라만을 기다리며 바랍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죽음앞에서 이렇게 다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삶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죽음의 자세를 보면 믿음의 상태를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장차 자기 영혼이 돌아갈 본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죽음앞에서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지만, 자기 영혼이 돌아갈 본향이 준비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신이 돌아갈 본향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준비하십시오. 할렐루야!!!(2012. 12. 2)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겨자씨 | 작성시간 12.12.01 이 시대에 준비된 목사님 역쉬 최곱니다^^
  • 작성자최규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2.02 감사합니다...하오나 어찌 그리 바쁘신지요? 목회에 일념하시는 목사님이 그냥 존경스럽습니다...언제뵈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