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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가 고백할 때 입니다 (요21:15~18)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05.10.12|조회수327 목록 댓글 0

이제는 내가 고백할 때 입니다. (21:15~18)  ……..2005. 7.17.

 

 지난 5월에 한국교계의 원로급에 해당되는 목사님들 몇 분이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주제로 자신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참회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게는 매우 의미있고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어느 종교계나 단체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지상을 통해 공개된 내용이기에 실명을 밝힙니다. 장신대 주선애 교수님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기쁘고 행복했던 기억을 다 잊어버리고, 어느새 스승의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하고 사례비, 월급봉투의 두께에 희비하는 세상 속물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기성증경총회장을 역임한 홍순우 목사님은 처음 교회 개척할 때 1년만에 100명의 성도가 늘어나자 교만에 빠졌다며, 결국은 다른 교회 성도들을 빼앗아 오는 양도둑에 불과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통합 증경 총회장 이종성 목사님은 크고 작은 죄를 수없이 저질렀는데 특히 서류를 위조해서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다른 학생의 대리 시험을 치른 것 등 평생 씻을 수 없는 무거운 죄를 저질렀다. 이성택 목사님은 예수님 때문에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면서도 잘입고, 잘먹고, 잘사는데 대한 욕망이 커서 적어도 내 예금통장에는 절대 손을 대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를 수없이 거듭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들의 죄와 허물, 수치와 치부를 공개적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단한 믿음과 용기, 결단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신앙의 대선배들은 과감하게 자신들의 치부를 공개했습니다. 고백은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관계와 충성을 공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백은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고 인정하는 고도의 전인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고백하는 것을 신앙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연인앞에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것을 사랑고백이라고 합니다.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고백하는 것을 진실고백이라고 하며, 자신의 양심을 더 이상 속일 수 없어 지상에 폭로하는 것을 양심고백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고백은 정직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백의 종교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고 말씀합니다. 신앙도 고백되어지지 않으면 잘못입니다. 고백에 따라서 용서를 받기도 하고,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것도 마 16:16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분명한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에게도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포장하고 은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무거운 부담감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익명의 크리스천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교회앞에 공개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성격상의 문제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리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오늘의 세대는 고백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싫어합니다.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요, 진실함이 부족하고, 정직성이 결여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받는 비결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 자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백을 잘하는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고백을 잘하는 부부는 금실이 좋습니다. 이제는 내가 고백할 때 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정말 고백을 잘하던 제자입니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께 고백했던 내용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6:16). 한마디로 주님의 심장을 울렁거리게 할 정도로 의미심장한 고백이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얼토당토 않은 말씀이라는 듯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자신있게 고백했던 자였습니다. (26:33). 물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느 누구보다 더 강렬했습니다. 누구나 실수는 있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소극적으로 뒤로 물러나지 않고 항상 적극적으로 살았습니다. 이일후에 베드로는 항상 마음이 아프고 주님께 죄송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죽도록 미웠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본 후에(20:19-21) 갈릴리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도저히 주님을 쳐다볼 엄두가 안 났을 것입니다. 그저 죄송하고 창피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베드로, 입이 방정이라고 생각하여 입조심이라도 해야겠노라고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베드로에게 우리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이유는 책망을 주거나 징계를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체질을 누구보다 잘 아는 주님께서 예전과 같이 베드로의 자신있는 고백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자만은 실패를 통해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졌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께서 회복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로하여금 고백을 유도하신 것입니다. 차라리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주님으로부터 크게 책망이라도 받았다면, 마음이 더욱 편했을지 모릅니다. 아니 뺨이라도 한대 때려주셨다면 마음이 더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이런 식이라도 죄의 보상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모습으로 찾아오셨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순간 베드로의 긴장했던 마음은 봄눈처럼 녹아지고, 더욱 죄송한 마음만이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은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심령상태를 너무나 정확하게 아시면서도 베드로의 고백을 유도해 나가십니다. 그래서 일문일답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성도의 고백을 그렇게도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마치 꿀먹은 벙어리처럼 고백이 없는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아마도 우리 주님은 이렇게 당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는 네가 고백할 때란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분명히 내가 고백할 때입니다. 무엇을 고백할까요?

 

 

1.        믿음을 고백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건강한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신앙고백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고백이 없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백되어지지 않는 믿음은 뭔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고백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면 책임감이 생기고, 확신이 생기고, 능력이 생깁니다. 성경의 인물들이나,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나님 앞이나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외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를 누구에게나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다른 길이 없노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그분으로 인하여 구원을 입었노라고 자신있게 고백해야만 합니다.

 

성도가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믿음이 바르게 고백되어 질 때, 세상의 그 어떤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는 일은 먼저 죄를 고백하는 일입니다. 고백할 때 역사가 나타나고, 고백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1907년은 초대 한국교회사에 가장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해입니다. 회개의 물결이 평양을 중심으로 원산, 서울, 목포에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파급되어 갔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의 고백하는 힘이 회개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흥회대 나는 못된 놈입니다. 이 놈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1년전 병들어 죽게된 친구 한 사람이 나를 불러서 그가 죽은 후에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해 달라고 죽었습니다. 나는 죽은 친구의 자산을 정리하던 중에 2백원을 훔쳐 내 소유로 썼습니다. 나는 도둑놈입니다. 이제 이 죄악을 회개하며, 내가 친구의 부인을 찾아가서 모두 갚겠나이다 청중들은 극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겉잡을 수 없을 만큼 큰 회개의 은혜가 그들 가운데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너와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했습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고백이 모든 사람들의 죄악을 끄집어 내었고 회개시켰습니다. 그 때 한 여자 선교사가 고백하는 평가는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지붕을 열어 젖힌 것과 같았다. 살인, 강간,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더러운 죄악, 불결과 음욕, 도적, 거짓, 질투, .. 부끄럼없이 회개하며 고백했다. 이것은 분명히 사람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힘이었다. 많은 한국 교인들은 공포에 질려 창백해지고 마루에 얼굴을 가리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백의 힘은 놀라운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되심과, 주님께서 나의 주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 분의 자녀됨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이처럼 아름다운 믿음을 고백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다윗은 시편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쏟아냈습니다.

l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구원의 불, 나의 산성 이라고 고백하며,

l        16:2   여호와는 나의 산업, 나의 잔의 소득

l        27:1 -  여호와는 나의 빛, 나의 구원, 생명의 능력

l        71:5   여호와는 나의 소망

l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앙고백은 입으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찬양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전도를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삶을 통해서 그리고 전인격을 통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백은 정직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고백은 너무나 복되고 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고백은 마 16:16절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진실된 자기 신앙의 고백이요, 진지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 앞에 나의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2.       사랑을 고백할 때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믿음이 있노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번씩이나 물어오십니다. 얼마나 가슴이 뜨끔한 질문입니까? 사실 베드로가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믿음 분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항상 불안하고 언제 무너질 지도 무릅니다. 마치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항상 출렁거립니다. 기복이 심합니다. 자기 감정적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항상 불안합니다. 물론 사랑이 없어도 자기 자리는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숙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결과도 없습니다. 보람도 없습니다. 역사도 안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 없어도 부부의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교회직분의 자리를 지킬 수는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예수 믿은 것처럼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보나마나입니다. 아무 것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믿음의 완성입니다. 믿음의 열매요, 믿음의 모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3:13절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다고 큰 소리치는데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본질이 자꾸 퇴색되어 갑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속성 때문입니다. 믿음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믿어 줄 수도 없고 믿음을 보여 줄 수 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기중심적이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독불장군식의 믿음은 가능할 수 있지만, 독불장군식의 사랑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믿음은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사랑을 확인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기어들어 가고 싶은 심정으로 대답을 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얼마나 많은 고백을 하고 계십니까?(3:16)

요한 14장을 보십시오. 구절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l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7)

l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느니라(10)

 이제는 우리가 사랑을 고백할 차례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랑을 고백할 때입니다. 시편 18:1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3.        사명을 고백할 때 입니다.

오늘 현대 크리스찬들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사명입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보기에는 사명이 귀하고, 덜 귀한 것처럼 보일찌라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모두가 귀하고 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명을 마치 헌신짝 취급을 합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감당하려 합니다. 때로는 사명을 망각하고, 사명을 포기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주로 교회를 통해서 감당케 하십니다. 주님은 교회를 통해 충성과 헌신, 봉사와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각자에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교회는 3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꾼, 구경꾼, 훼방군입니다. 일꾼이 많은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합니다. 구경꾼이 많은 교회는 냉랭하며 시들어진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항상 말이 많고, 핑계와 변명이 많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노예선을 방문했습니다. 많은 죄수들이 쇠사슬에 매여 노를 젓는 처참한 광경을 보고 물어봤더니, 노예들은 모두 자기의 억울함과 무죄함을 변명합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은 아무 말한마디 없어 이유를 물었습니다. 자네는 왜 말이 없는가? , 저는 여기서 고생을 해야 마땅합니다. 죄인입니다. 그 때 알렉산더 대왕이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죄가 없는 사람들인데, 왜 의인들 속에 자네 같은 죄인이 있단 말인가? 당장 이 자를 돌려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또한 훼방꾼이 많은 교회는 항상 싸우고 물고 뜯으며, 서로 대적하고 원망과 시비가 끊어지지 않으며,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결국은 파선합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오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앞으로 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다시한번 고취시켜 주십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베드로가 고백할 차례입니다.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베드로에게 물어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똑같이 물어오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고백할 때입니다. 따라하십시다.

l         믿음을 고백하면 구원을 주시고

l         사랑을 고백하면 은사를 주시며

l         사명을 고백하면 능력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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