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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롬13:11-14)-2018.1.7(신년주일)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18.01.06|조회수392 목록 댓글 0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13:11-14)-2018.1.7(신년주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한 해 동안 우리 교회를 이끌고 갈 표어입니다. 우리 한번 따라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우리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사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옷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피조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오늘 저는 옷의 발전사나 역할, 혹은 옷이 주는 기능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옷은 우리 인간과 가장 친밀하고 가장 소중한 필수품입니다. 옷이 인간에게 주는 역할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감추는 역할과 드러내는 역할입니다.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옷이요, 혹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옷이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부족한 것을 옷으로 감추기도 하고, 자랑 할만 것을 옷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옷으로 자신의 개성을 살리고 상품화시키기도 합니다. 심지어 옷으로 신분을 세탁하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옷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옷이 주는 매력 때문입니다. 특히나 여인들의 옷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지요.

 

사람들은 흔히 의복이 날개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 옷에 따라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고 소속과 정체도 드러납니다. 아무나 왕이 입는 왕복을 입을 수 없습니다. 아무나 군인들이 입는 군복을 입을 수 없고, 경찰관의 제복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의사의 가운을 입을 수 없고, 법관들이 입는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그 신분에 합당한 사람만 그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 옷이 그 사람의 신분을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옷도 아무나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만 그리스도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옷은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의미가 강합니다. 경찰제복을 입었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공권력이 부여됩니다. 그리고 도둑이나 강도가 쉽게 덤벼들지 못합니다. 군복을 입었기 때문에 군인들에게 부여되는 보호를 받고 보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법관들의 옷이나 의사들의 가운도 그들을 보장해주고 보호해줍니다. 영적인 옷은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원수마귀 악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가장 안전하고 완벽하게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십니다. 그래서 옷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옷이 상징하는 대로 우리가 보호를 받고 보장을 받기 때문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며,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주문합니다. 이른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것은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삶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8:5-6)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8:9).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로 옷을 입지 않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옷을 입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입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설프게 흉내 내다가 마귀한테 큰 코 다칩니다. 사도행전에 19장에 보면,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예수의 이름을 도용하다가 악귀에게 자기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고 대적합니다(19:15). 

  

함부로 예수의 이름만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것처럼 흉내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합당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 옷은 복음에 합당한 옷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복음에 합당한 옷이 기본적으로 세 벌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사는 것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가장 기본적인 옷은 당연히 구원에 필요한 옷입니다. 그 옷은 믿고 세례 받을 때 입는 옷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입어야 하는 옷이 있습니다. 그 옷은 갑옷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누리고 살다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입는 옷이 있습니다. 세마포 예복입니다. 물론 이 옷을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적인 근거를 들어 말씀드립니다. 분명한 것은 비록 세 가지 옷으로 비유할지라도 예수 믿을 때 입는 한 벌 옷이라는 사실을 밝혀드립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는 것은 옛 사람이 입던 옷을 벗는 것을 말합니다. 옛 사람이 입던 옷은 예수 믿기 전에 육신이 입고 살던 옷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려면 당연히 전에 입고 있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반드시 옛 사람의 옷을 벗지 않으면 새 사람의 옷을 입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땀 흘리고 더러운 몸을 씻어 목욕을 했으면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원칙입니다. 목욕을 한 후에 다시 그 더러운 옷을 입으면 개운치 않을 뿐 아니라 목욕 자체가 소용이 없습니다.

 

옛 사람이 입던 옷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입던 옷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법의 옷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입던 옷도 있습니다. 이른바 율법의 옷입니다. 물론 둘 다 불법한 사람들이 입던 옷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불법은 아니지만, 율법으로 살려고 하는 행위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굳이 구분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의도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율법의 옷을 입고 살면서도 자신의 체면이나 기득권, 관습이나 전통 때문에 벗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입고 살아온 율법의 옷에 대해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자랑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옛 사람은 예수 믿기 전의 자연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율법아래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옛 사람이 입는 옷은 율법의 옷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4). 그래야 그리스도의 옷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당연히 구원의 옷입니다. 그 옷은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입는 옷입니다. 갈라디아서327절을 읽어보십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합법적으로 주님 앞에서 고백하는 의식이요, 공교회 앞에 공포하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죽은 나를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입니다. 그 옷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옷입니다. 그 옷을 요한 계시록은 피 뿌린 옷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19:13). , 예수 그리스도의 옷은 피가 뿌려진 옷입니다. 그 피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피 뿌린 옷을 입은 자라면 그 옷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른바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의도는 썩어져 가는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어두워진 세상에서 빛으로 살기 위함입니다. 그냥 세상에서 적당히 살다가 죽음 이후에 천국에 들어오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모든 사람들을 죽음 일보직전에 부르시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 부르신 의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구원에 합당한 옷을 입고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옷은 어떤 옷일까요? 성경으로 확인해 보십시다. 아마도 그 예복은 세상을 이기는 전투복이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61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말입니다. 믿음의 성도가 세상을 이기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합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영적 싸움을 반드시 치러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당하게 살아가려면 세상을 이기는 전투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 전투복이 바로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본문으로 말씀드리면 빛의 갑옷입니다(12). 빛의 갑옷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옷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8:12 9:5). 빛의 갑옷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우리가 어두움의 악한 영들과 싸우려면 당연히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입고 들어갈 어린양의 혼인잔치 예복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을 때 입은 옷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옷이요, 세상에서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면서 입었던 빛의 갑옷도 천국에 입고 들어갈 예복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입고 들어갈 옷이 있습니다(19:7-8). 어린 양의 세마포 옷입니다. 세마포 옷은 빛나고 깨끗한 옷입니다. 이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입게 되는 의의 옷과 결코 다른 옷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마포 옷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죄 많은 세상을 살면서 더러워졌던 옷을 깨끗한 예복으로 준비하고 단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세마포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입고 들어갈 가장 정결한 드레스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가장 황홀한 파티복인 셈입니다.

 

(2)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살아가야 할 이유는 두말할 필요 없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말씀드리면 시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천국비유 가운데 열 처녀의 비유를 아십니까? 지혜로운 다섯 처녀나 미련한 다섯 처녀 할 것 없이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는 모두다 졸며 잠을 잤습니다. 그러던 중 밤중에 신랑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열 처녀가 다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육신은 깨었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비유를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는 최종적인 메시지는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25:13).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적인 상황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잠들어 있습니다. 아주 곤한 잠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깰 때입니다. 아니 벌써 지났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한밤중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입니다. 밤의 특징은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과 호색, 그리고 쟁투와 시기입니다. 밤은 육체가 원하는 것을 좇아 육체의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시간이요, 시대입니다.

 

오늘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도 어렵고 찾기도 힘듭니다.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자기들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때로는 당당하지 못해서 자기들의 신분을 감추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감추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찌 보면 불가의 스님들은 그들을 상징하는 옷을 입었기에 금방 드러나지만, 목사와 성도는 구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십자가 목걸이 하나 걸친 것으로 우리들의 신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마치 까멜레온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진짜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옷이 아니요, 영으로 입는 옷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입을 수 없는 옷입니다. 당연히 눈에 보이는 옷이 그 사람의 신분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군복만 입었다고 모두 다 군인은 아니요, 경찰복을 입었다고 모두 다 경찰은 아닙니다. 법복을 입었다고 모두 다 법관은 아니요, 의사의 가운을 입었다고 모두 다 의사는 아닙니다. 그 옷에 합당한 사람이 입어야합니다.

 

무조건 교회만 다닌다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목사의 가운만 걸쳤다고 목사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너무 악합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정말 힘듭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가 더욱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3)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것일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사는 방법은 주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주님의 성전이 되어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천국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내가 주님의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내안에서 나를 성전삼고 임마누엘로 사십니다. 주님은 성전 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마음을 부어주사 당신의 마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당연히 주님의 성전 된 나는 성전을 청결하게 단장해야합니다. 주님이 내안에서 사시는데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말입니다. 주님이 불편하지 않으시려면 주님이 내 안에서 나의 주, 나의 왕, 나의 머리, 나의 전부가 되시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내가 주인되어 살면 주님은 내안에서 사실 수 없으실 뿐 아니라, 잠간이라도 주님은 너무 불편하십니다. 주님이 내안에서 불편하시면 당연히 성전 된 나도 불편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많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14:17). 주님이 내안에 계심을 믿는 자는 복음의 옷을 입은 자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옷을 입은 자는 주님이 계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주인 되어 살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믿음 안에 거한다고 할지라도 율법의 옷을 입고 사는 자와, 복음의 옷을 입고 사는 자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한마디로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리고 자기 양심이 증거하고 영적인 사람들의 눈에 금방 드러납니다.

 

율법의 옷을 입고 사는 자는 모든 것에 자유함이 없습니다. 때문에 범사가 불편합니다. 불편하므로 불평과 친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을 할 때입니다(삼상17). 처음에는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까지 씌워주고 갑옷까지 입혀주었습니다. 다윗은 왕의 군복을 입고 골리앗 앞에 나아갑니다. 사울왕의 군장은 참으로 세련되고 값도 비싸고 화려하며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옷이었을 것입니다. 일국의 왕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할만한 옷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옷은 다윗이 입을 옷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 그 옷은 너무나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 전쟁의 승패가 옷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관심은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옷이 자기를 골리앗의 손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의 손에서 자기를 지켜주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사울의 안전한 군장을 벗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익숙한 옷을 갈아입고 익숙한 장비로 무장했습니다(삼상17:40).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눈에 보이는 것으로 승부하려고 합니다. 그것으로 우리 신앙의 기준을 삼으려고 합니다. 율법적인 믿음과 시선으로 말입니다. 어쩌면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의 군장은 율법의 옷과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남루하고 초췌하게 보일지라도 자기가 입던 옷이 복음의 옷이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이 입는 옷이 복음의 옷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서입니다. 율법은 형식과 겉치레에 치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의 옷을 입고 형식에 매여서 삽니다. 너무나 부자유하고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울의 군장이 다윗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 왕 자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입던 옷이 다윗을 지켜줄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튼튼한 옷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제가 사울의 군장이 율법의 옷이었다고 말씀드리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다윗에게 사울의 군장은 마치 양복입고 갓을 쓴 것같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불편했습니다. 복음 안에 사는 자들은 율법이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때문에 다윗은 사울의 군장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비록 허접하게 보이는 옷일지라도 다윗의 옷은 세상의 어떤 옷보다 편하고 자유 했습니다. 이 전쟁이 옷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옷을 입은 사람의 믿음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군장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옷이었지만, 다윗의 옷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옷이었습니다. 영적인 의미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무장된 사울의 군장이 골리앗의 칼에서 다윗을 건져주는 것이 아니라, 다윗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기고 승리케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입어야 할 그리스도의 옷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성전이 되어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른바 말에나 일에나 예수 그리스도가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 안에 부어주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마음이 부어지면 예수 그리스도로 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로도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구하면 주님이 내안에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이른바 주님의 형상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금년 한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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