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겔18:21-32)-2018.1.14
우리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범주 내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본문 18장은 두 파트로 나누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1-20절은 반드시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21-32절까지는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른바 1-20절까지는 공의의 하나님, 21-32절까지는 사랑의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려고 합니다.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고 단호하게 처벌하시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시고 방법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주로 성품에 대한 편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일방적인 독재자, 혹은 무서운 폭군 정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징벌하시는 하나님, 혹은 당신의 편에 서지 않는 나라들을 전쟁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응징하시는 전쟁광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시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한없이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긍휼하십니다.
당신의 잘못된 지식과 정보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은 무지한 인간의 수치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범죄행위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식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지식과 정보가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집이 세고 거침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받아드리지도 못할 뿐 아니라 자기의 잘못된 지식이나 정보를 내려놓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미련하고 우준한 사람들을 깨우치기가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한 가지 성품으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판단하면 안됩니다. 마치 한 마리의 제비가 찾아왔다고 무조건 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심각했습니다. 그들은 아예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고 불평했습니다(25절). 하나님의 방법이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감히 자기들의 눈으로 하나님을 판단했고, 자기들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폄론했습니다. 참으로 무식하고 패역한 백성들입니다. 문제는 영적 지도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의구심을 토해냈고, 엘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하시는 방법에 불만을 쏟아내었으며, 요나 선지자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순종의 길을 가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만 가지고 계시는 고유한 성품을 상황에 가장 적절하게 사용하십니다. 크게는 당신의 공의와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공의보다는 사랑이 훨씬 더 크고 사용하시는 범위가 깊고 높고 길고 넓습니다.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대표적으로 잘 알려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34장7절입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한마디로 인자와 보응이라는 단어를 비교해 보십시오. 인자는 사랑이요, 보응은 공의입니다. 그런데 인자가 보응보다 훨씬 더 크고 깊고 높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의 본심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공의로만 우리 인간을 다스리신다면 감히 세상에 남아 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 혹은 사랑보다 공의로 다스리심이 더 크고 빠르다면 과연 남아 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당신의 공의를 작동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공의 안에서 사랑을 작동하신다면 우리는 숨을 쉬기도 힘들뿐 아니라, 범사에 두려워서 살아 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의 법이 훨씬 더 크고 위대하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소개하는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원합니다.
(1) 악인이 자기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21-23절)
하나님은 악인들이 자기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악인들의 최종적인 결말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인내하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른바 악인들에게 회개하여 돌이킬 시간을 주시고 기회를 제공하신다는 말입니다. 감히 하나님같이 참을성이 많으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죄인의 행실을 좇아 인내하지 않으시고 죄를 다루셨다면 감히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우리도 여전히 악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으셨다면 감히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하나님의 진노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 줄 아십니까? 그분의 속도는 세상의 어떤 속도보다 빠르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의 정확도가 얼마나 완벽한 줄 아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진노의 속도를 최대한 자제하시고 조절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진노 중에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자기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32절).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영혼구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악인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악인이 살고 죽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 앞에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들이 악인으로 살다가 죽을 수도 있고,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돌이키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고 살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죽는 길도 그들 앞에 있고, 사는 길도 그들 앞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자기들의 의지를 가지고 생사의 권한을 자기들이 결정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 앞에 놓여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릴 수 있는 의지가 그들에게 충분히 주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의 혜택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면 의인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지 못하면 악인입니다. 그리고 의인과 악인의 결정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의인과 악인을 판단할 수 없고,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결정권자이십니다. 그런데 의인이 처음부터 의인인 것은 아닙니다. 의인이 의인이라고 불러지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졌지만 악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하지 못했기에 여전히 악인의 신분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사랑이 이해되고 믿어지기까지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른바 악인이 자기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오래 참고 기다려 주십니다. 얼마든지 악인들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셈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악인들 앞에 하나님의 사랑이 보여지고 부어지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듣고 적극적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도 사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심이고 목적입니다. 우리 함께 21절을 읽어보십시다. 만일 악인이 그들이 행한 모든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아와서 율례와 법도를 지키면 지금까지 그 범죄한 것을 하나도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지금 그들이 행한 의로 인하여 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사랑의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악인이 자기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인을 살리는 생각밖에 안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죽이시면서까지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쩌면 너무 큰 사랑이라서 이해를 못하고 믿지를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들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드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인간은 대부분 자기 수준에서 이해되고 납득되는 것만 믿습니다. 너무나 크고 위대한 것은 믿지를 못합니다. 그런 것이 실감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범죄한 영혼은 자기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인의 죄를 용서하사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다시 말해 악인들이 자기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부당하시다고 생각하십니까?
(2) 악인이 악한 길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23절)
알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25,29절). 심지어 그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악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곤경에 빠지면 마치 하나님이 자기들을 악한 길로 인도하셨다고 불평한 민족입니다. 출애굽할 때 광야에서 길로 인하여 하나님께 불평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자기들이 악한 길을 가면서도 결코 그 길이 악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악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 길이 옳다고 우겨댑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고 우겨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심문하십니다. 하나님의 길이 언제 공평치 않은 적이 있었는지, 혹은 그 증거가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추궁하십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걸어가는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고 반대질문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실을 분별치 못하고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악한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행악한 족속들입니까? 정말 기가 막힌 족속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모르는 족속들이라면 몰라도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민족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런 몰염치한 말을 토해내다니요!!!
정말 가증스럽고 뻔뻔하기 그지없는 족속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는 통용되는 속담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기들의 이가 시리다’는 것입니다(18:1). 자기들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자기 조상들의 죄악으로 자기들이 억울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공평치 못하다고 하는 우겨대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요. 당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도 하나님이 공평치 못한 방법 때문이라는 불만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어긋난 길로 가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참으로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족속들입니다. 아마도 이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장 많이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모르는 것은 아닐는지요? 어쩌면 오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다가 얻어맞으면서도 자신들은 억울하다고 투정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공평하지 못한 것처럼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뒤집어씌웁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불순종으로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냐고 따집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아보시지 않았다는 둥, 도대체 하나님은 그 시간 어디에 계셨냐는 둥, 심지어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는 등의 불평을 뻔뻔하게 토해냅니다.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과 주의 종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바른 길을 가르쳐주시고 인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자기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렘7:25).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고 경고하십니다. 오히려 그들은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자기 열조보다 악을 더 행했습니다. 그래놓고도 그들은 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공평치 못하다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설득해 나가십니다.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하나님으로서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공의로 처리하시면 그만인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인격적으로 설득해가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25,29절).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죄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이 자기들의 길을 떠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길로 들어오기를 학수고대하십니다. 그것만이 그들이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3) 악인의 마음과 영이 온전히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31절)
악인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악인들이 자기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악한 길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악인들의 마음과 영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악인의 반열에 세워진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할 정도의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지라도 이제부터라도 돌이켜 회개하고 돌아와 죄에서 떠나면 모든 죄악을 사하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22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악인들의 마음과 영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오히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주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은 안타깝고 서운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31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시고, 그들의 영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구촌에 거하는 어떤 사람도 악인의 반열에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악인도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버림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기 원하십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악인들은 좀처럼 하나님의 크고 넓고 위대하신 사랑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악인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릴 때까지 오래 참고 또 참으시며 기다려주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한계는 있습니다. 모든 사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려야 할 제한된 시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그 기회가 금방 지나가고 시간이 매우 짧을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이에게는 죽음 일보직전까지 그 기회와 시간이 유효할는지 모릅니다. 다만 그 기회와 시간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도록 초청하고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선포합니다(2:7 3:11). 비록 그들이 패역한 족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들을 두려워말고 그 얼굴을 무서워마라고 주문합니다. 물론 악인들의 마음은 악합니다. 그 악인들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족속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패역한 백성들이요, 하나님을 배반한 자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2:3). 그들의 얼굴은 뻔뻔하고 마음은 강퍅합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악인들이 돌아올 때까지 사랑으로 인내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마음과 영이 새로워질 때 까지 말입니다.
악인들의 마음과 영이 새로워진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새로워진다는 말일까요? 그들의 마음과 영이 새로워지는 것은 자기들만의 고집스러운 마음을 벗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고집스러운 마음은 율법으로 고착된 마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에 붙잡혀 살아왔습니다. 자신들은 크게 잘못한 것이 없고 비교적 의롭다고 자부하면서 말입니다. 굳이 잘못되었다면 공평치 못한 하나님이 잘못되었다는 식이었지요.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의 마음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으로 사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미안하지만 아무도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마음이나 영으로 새로워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이 받아들이면 그들의 마음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의 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지금까지 악인들이 살아 온 삶의 방식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서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 방식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일시적인 변화는 사람을 온전히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근본이 바뀌어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에스겔서11장19-20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라,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새 영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들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자기 백성들이 옛 언약으로는 실패했지만 새 언약의 방식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한마디로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은혜의 방식이요, 새 언약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 모두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