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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믿음을 배우라(눅2:36-38)-2018.4.8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18.04.07|조회수977 목록 댓글 0

안나의 믿음을 배우라(눅2:36-38)-2018.4.8

 

성경에는 믿음이 좋은 여인들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우리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지만 한 여인의 믿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안나의 믿음입니다. 그녀는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입니다. 그녀는 선지자요, 나이가 많은 할머니였습니다. 무엇보다 시집 간지 7년 만에 과부가 되어 84년을 홀로 살아온 한 많고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믿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모릅니다. 정말 귀한 믿음이요, 복된 여인입니다. 그 여인이 성경적으로 무슨 큰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요, 기억에 남을만한 흔적을 남긴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여인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 여인의 아름다운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어떤 흔적이나 업적이 있을 때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하거나 칭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안나는 그런 흔적이나 업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신앙은 우리에게 잔잔함 울림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안나는 아셀지파입니다. 아셀지파는 신앙의 선조 야곱의 8번째 아들입니다. 레아의 시녀 실바의 소생입니다(창30:13). 그리고 아셀 지파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여 돌아오지 못한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안나가 아셀지파의 후손이라 함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 지파이기에 당연히 그 자손도 유대 땅에 없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추측컨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유대로 돌아올 때 그 대열에 합류한 것은 아닐까합니다. 이로 볼 때 안나는 유대의 경건한 남은 자로 보여집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여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녀의 삶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안나는 결혼하여 불과 7년간 남편과 살다가 84년을 과부로 살았습니다. 아마도 나이가 100세는 넘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10대 중반이면 결혼하는 조혼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일찍 과부가 되어 살아온 세월은 고난과 아픔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한 많은 세월을 살아온 그녀가 복음서에 이름이 녹명된 것은 정말 복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복된 삶을 살았다는 증거는 본문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나는 과연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두말할 것 없이 안나는 주전 1세기 말에서 주후 1세기 초에 살았던 여인입니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영적으로는 캄캄한 시대나 마찬가지였지요.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가 있었습니다. 대략 400년 정도의 이스라엘 역사는 예언가들의 활동이 거의 없는 너무나 고요하고 적막한 기간이었지요. 세례요한이 나오기 전까지 하나님은 모든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의 입을 봉하셨고 눈을 가리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실한 사람들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안나입니다.

 

(1) 성전중심의 삶을 살았던 여인입니다(37절)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복된 신앙은 성전중심의 신앙입니다. 신앙이 병들 때 나타나는 증상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공통적인 증상이 하나 있습니다. 성전을 등한히 합니다. 성전을 무시하고 성전에 대한 불평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성전을 멀리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우리 육안으로 보이는 예배당을 말합니다. 성전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성전 예배당이 있고,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심령 성전이 있습니다. 물론 믿음이 병들었다는 것은 심령 성전이 병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심령 성전이 병 들면, 보이는 성전도 병이 듭니다. 사례가 적절치 못하지만 우리 말 속담을 빌려 설명해 보겠습니다.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의 성전이 병이 들면, 눈에 보이는 성전도 멀어진다는 말입니다. 가끔씩 성전으로부터 멀어져가는 듯한 성도들을 보면서 왜 요즘 성전출입이 뜸하냐고 물어보면 하는 말이 있는 곳에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게 말은 하지만 마음은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목사의 눈에 그게 보여서 하는 묻는 말인데, 그분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핑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부하기 싫은 학생이 학교가기 싫은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과 멀어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유야 어떻든지 신앙앓이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100% 신앙에 병든 사람들입니다. 빨리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더 이상 병이 깊어지지 않도록 성전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전을 사랑하고 성전으로 돌아와야 믿음이 회복됩니다. 성전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와야 건강한 믿음으로 회복이 됩니다. 건강한 신앙, 복된 신앙은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성전을 너무 사랑했기에 신앙이 병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교회에 너무 깊숙이 개입해서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심령 성전이 먼저 병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신의 심령 성전이 건강하면 혹시 눈에 보이는 성전의 모습이 불편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전혀 내 신앙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모든 신앙의 병은 내 심령에서 일어나는 질병입니다. 때문에 먼저 자신의 심령 성전을 잘 단장하고 건설해야 합니다. 내 마음의 성전이 분명하게 건설되지 않으면,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예배당이라는 성전도 건강하게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성전이 무너진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른바 교회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불평하며 교회로부터 멀어진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아예 교회를 나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이른바 ‘가나안성도’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물론 교회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교회만의 책임을 돌리는 그들의 신앙도 결코 칭찬받을만한 믿음은 아닙니다. 교회는 당신이 세워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믿음이 자신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만의 착각이요, 교만입니다.

 

때문에 각 사람의 신앙의 건강상태를 점검하는 가장 좋은 척도 중에 하나가 성전을 대하는 자세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성전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상태를 검증할 수 있습니다. 안나는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을 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성전에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녀의 이름 ‘안나’는 히브리어 ‘한나’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을 통해 자기 이름을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린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우리 시대 모든 성도는 반드시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양의 우리와 같습니다. 우리를 떠난 양은 사나운 짐승에 잡아먹힐 수 있습니다. 이리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머문 곳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을 보호해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그래도 교회밖에 없습니다. 잘났든지 못났든지 내 부모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전중심의 삶을 살았다는 것은 오직 주님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전중심의 삶이라는 것은 교회에서 머물러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삶이 성전되어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성전이신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았다는 것이지요. 모든 범사를 주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주님 마음으로 결정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안나 여인은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고 살았을 것입니다. 오직 자기가 의지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그는 한평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전중심의 삶입니다. 그런 자가 복된 자입니다.

 

우리가 안나를 복된 여인으로 존경하는 이유는 그녀의 믿음 때문입니다. 오직 그녀는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전 된 주님을 자기 성전의 주인으로 모시고, 왕으로 모시며, 전부로 모시고 산 여인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었으면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버림받은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주님을 성전삼고 일생을 주님 안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천국 되어 살았던 것입니다.

 

(2) 예배자의 삶을 살았던 여인입니다

안나가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을 했다는 증거는 본문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37절을 보면,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가 어떻게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그녀는 추상적으로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삶을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이른바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섬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금식은 육신을 쳐서 굴복시키는 데 유익한 영적 생활입니다. 육신이 강렬하게 불타오르면 영적으로 살기가 무척 힘듭니다. 우리들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당사자가 바로 내가 아닐는지 모릅니다.

 

성경도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니라’(롬8:7)고 말입니다. 때문에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롬8:8). 그러므로 육신이 내 안에서 강해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이 삽니다. 육신이 강하다는 말은 육신의 생각과 마음이 완고함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마음과 생각이 강렬하면 영적으로 살기가 힘듭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신의 법과 영적인 법으로 싸웁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육신의 생각과 마음이 나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육신의 마음과 생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런 것들이 내안에 둥지를 틀면 영적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영적인 것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이런 것들을 차단해야 합니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안에 나를 성전삼고 계시는 주님의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되어 살면, 주님이 그런 모든 생각과 마음을 차단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안나가 육신을 쳐서 굴복시키는 방법은 주야로 금식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날마다 주야로 금식한 것은 아닐테지요. 아마도 그녀는 자기 육신의 마음과 생각을 차단하기 위하여 주야로 금식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금식은 우리 안에 있는 흉악한 결박을 풀어주는 통로입니다. 흉악한 결박이 우리를 묶고 있으면 우리는 절대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안나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묶고 있는 결박들을 주야로 금식하며 풀어냈다고 보여 집니다. 살다보면 우리를 묶고 있는 결박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물론 주님이 풀어주시면 자유합니다. 주안에 능치 못함이 없음을 믿고 모든 결박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야에 금식했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 육신을 쳐서 흉악한 결박을 풀어내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비록 우리가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 삶 가운데 노출된 죄악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공격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육체를 입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할 때가 많다’고 말입니다(롬7:19). 또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가려한다고 말입니다’(롬7:22-23).

 

안나는 금식은 물론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금식도 일종의 기도이지만 금식과 함께 기도에 게으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기도함으로 섬기었다는 것은 예배자의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섬김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service’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예배자의 삶을 산 것입니다. 예배보다 우리를 하나님과 친밀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배보다 우리를 영적으로 건강하게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예배가 무너지면 병든 신앙이요, 죽은 신앙입니다. 때문에 안나처럼 오직 예배중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3)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았던 여인입니다(38절)

 

그녀는 선지자로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정보를 알고 기다려온 여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갈망하며 기다려온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것입니다. 때문에 그녀가 복된 여인입니다.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메시아 예수님을 기다려오다가 드디어 아기 예수께서 결례(22절, 레12:1-5)를 행하고자 성전에 왔을 때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한눈에 그분이 바로 메시아임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한 평생을 기다려 온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자 예수를 이스라엘을 위로할 자로 보내주셨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면서도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자기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지 아니했습니다(요1:11). 그러나 안나 여인은 단번에 아기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믿음입니까? 이 얼마나 복된 여인입니까?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영안이 열린 안나의 믿음이 대단하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모든 성도는 영안이 열려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증거하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그냥 교회만 다닌다고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도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정치적인 메시아, 혹은 경제적인 메시아, 혹은 사람마다 다른 목적을 가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메시아로 영접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요1:11). 영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귀먹은 자들이 어찌 메시아의 음성을 듣고, 소경된 자들이 메시아를 볼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결례를 행하고자 왔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멀뚱거렸을 뿐입니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 행하는 결례식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나 안나는 금방 알아보고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기를 소개했습니다. 지금껏 기다려온 메시아로 증거한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처한 곳에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처럼 그녀는 전도자의 삶을 산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안나 여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온 메시아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 경건한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을 영접하는 자도 있었을 터이요, 노인의 입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지체없이 이 아기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려 온 메시아라고 힘주어 외쳤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나 선지자의 믿음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안나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비록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한평생을 굿꿋하게 살아온 안나 선지자의 믿음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안나는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을 한 여인이요, 예배자의 삶을 산 여인이며, 복음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선포하는 전도자의 삶을 산 여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여인의 믿음을 복되다고 칭찬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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