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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갈3:11-12)-2018.8.5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18.08.03|조회수779 목록 댓글 0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갈3:11-12)-2018.8.5

 

인생의 영혼을 좌우하는 가장 큰 질문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그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해 정확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성경의 핵심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원리와 행함의 원리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 두 가지 원리에 대해 어느 것도 소홀히 여기거나 편파적이면 안됩니다. 이른바 믿음만 강조하다보면 행함이 약화되고, 행함을 강조하다보면 믿음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는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율법으로 사는 믿음이 있고, 복음으로 사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사는 방법도 달라집니다. 율법으로 사는 방법과 복음으로 사는 방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고, 복음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건데 복음을 믿어야 사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율법을 지켜도 살 수는 있습니다. 성경도 분명히 율법으로 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출19:5-6, 레18:5, 신4:1, 신8:1).

 

대표적으로 레위기서 18장 5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런데 왜 율법으로 살면 안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율법을 주신 목적이 죄를 깨닫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어떤 것이 죄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20절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이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인간이 얼마나 초라하고 연약하며 무익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비록 율법의 백 가지 조항을 지켰을지라도 한 가지만 지키지 못하면 율법에 거친 자가 되고 맙니다. 야고보서2장 10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긍휼 없는 율법의 저주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그렇게 완전하고 완벽한 율법을 지키고 살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한 사람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의인이 사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8장3-4절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1)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는 단순하게 설명할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으로만 정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쉽게 설명하면 죄와 반대되는 개념이요, 공의나 정의의 축약형입니다. 언약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에 대한 모든 성품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인자하심과 성실하심과 신실하심 등의 성품에 기초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7장12절을 보겠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어떤 인간도 만족시켜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의를 충족시켜 드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나타난 의로 의로워질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죄의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예 모든 사람을 이미 죽었던 사람이라고 치부합니다(엡2:1).

 

그런데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 사도 바울은 그 의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복음이신 예수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는 어떤 사람도 살릴 수 없으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는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갈3:21). 한마디로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여 죽이는 의요, 복음은 죄인을 사죄하여 살리는 의입니다.

 

정리해 보면 ‘율법에 나타난 의’로는 한 사람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지만, ‘복음에 나타난 의’로는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것이요,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공의를 다 포용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수용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모든 죄를 다 덮어주지만, 죄는 사랑을 핑계로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는 반드시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공의는 긍휼 없이 집행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는 의요,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충족시켜주는 의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천하 인간에 어떤 사람이라도 ‘율법에 나타난 의’로는 의로워질 수 없고, 오직 ‘복음에 나타난 의’로만 의로우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나타난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롬3:22). 그런즉 우리를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입니다. 정리해 보면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은 당신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 자요, 하나님의 의를 입은 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치심을 받은 자입니다. 세상에 한 사람의 의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를 기꺼이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인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죄와 상관없이 의로운 자라 칭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4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2) 율법으로 사는 악인, 복음으로 사는 의인

 

그렇다면 성경에서 정의하는 의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3가지 자유를 받은 사람입니다. ‘죄로부터 자유’, ‘율법으로부터 자유’,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의인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자입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분명한 것은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의인과 악인의 기준은 너무나 분명해집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은 의인이요,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은 악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통 의인은 선한 사람이고, 악인은 죄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인은 착한 사람이고, 악인은 덜 착한 사람 정도로 생각합니다. 의인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고, 악인은 신앙생활을 덜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생활은 육신의 눈으로 드러나는 종교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절대 의인과 악인은 육신의 눈으로 정의하거나 구별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의인과 악인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고, 판별도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만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실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이 보는 내가 아무리 악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의로우면 의인이요, 세상이 보기에는 지극히 착하고 선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으로 볼 때 악인이면 악인입니다. 때문에 의인이 사는 방식과 악인이 사는 방식은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삶의 방식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의인과 악인의 결국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 하나님은 의인의 길만 인정하십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무엇으로 살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른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찍이 구약 성도들에게도 하박국서 2장 4절 말씀을 통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서1장 17절에서도 친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의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산다는 개념은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사는 방법도 포함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말입니다.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이름이 예수이십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예수 이름이 구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를 구원할 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계획을 예수 안에 담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케 하셨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못하시고, 어떤 일도 안하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나 작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모든 의가 예수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인이 사는 길입니다. 다시 말해 내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좇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악인은 죄가 많은 사람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악인은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율법의 의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율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3) 당신은 지금 무엇으로 사는가?

 

율법의 의로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모든 기준이 자기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들도 물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지만 실상은 모든 관점이 자기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예수님의 이름은 종교적 구호에 불과할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차용합니다. 그리고 은근히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챕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차용하며 간증하고 고백하면서도 자기들의 열정과 수고와 노력과 공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나타난 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와 세상은 간 곳없고 구속한 예수님만 보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만 드러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세례요한의 고백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이것이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믿음이요, 자세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나타난 의’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말로만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하지 마시고 오직 내안에 나를 성전 삼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도 내 의지로는 안됩니다. 내 의지대로 하려는 모든 시도 자체가 율법의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으되 내안에서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주님은 못하실 것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주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솔직히 우리가 기도한대로 다 이루어집니까? 이 말씀은 능치 못할 일이 초점이 아니라, 믿음에 초점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주님의 능력은 제한이 없으나, 그분 안에 사는 우리의 능력은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지 말고, 능치 못함이 없는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라면 마땅히 그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의인이 사는 법입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무엇으로 살고 계십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몸부림을 치며 끙끙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뭔가 주님을 위해 당신의 수고와 열정과 공로를 보여드리고 싶지는 않습니까? 혹은 뭔가 당신이 주님을 위해 도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앞세워서 뭔가를 이루어 드리려는 시도 역시 율법적 신앙이요, 주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당신의 공로를 드러내려는 것 역시 율법적 믿음입니다. 당신이 율법으로 살려고 하는 순간 주님은 당신을 통해 어떤 일도 하실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을 당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신이 감당해야합니다. 당신이 그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합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확인해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2장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우리가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결코 헛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보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주님의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행하신 표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에 관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으면 주님의 일하심과 주님의 표적과 주님의 관한 모든 것은 믿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표적만 보고 믿는 자는 표적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실망하고 주님 곁을 떠나기도 하고, 자기들의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면 주님 곁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사례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고, 지금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런 유사한 표적은 사단도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표적이나 주님의 행하는 일들이 우리 신앙의 기준이나 표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의 전부요,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의인입니다. 내안에 나와 함께 사시는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자가 의인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그런 믿음으로 사는 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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