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요1:45-51)-2019.2.24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갈릴리로 나가시다가 빌립을 만나 제자로 삼습니다. 아마도 로드캐스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곧장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고 전합니다. 그는 요셉의 아들이요, 나사렛 예수라고 덧붙입니다. 한마디로 빌립이 전한 예수는 혈통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가 아는 예수의 모든 정보입니다. 기껏해야 요셉의 아들이요, 나사렛에서 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를 그 선지자로 알았습니다.
우리는 빌립을 통해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아야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가 아는 수준에서 전하면 됩니다. 굳이 알지도 못하면서 무리하게 오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큼 전하면 됩니다. 빌립이 짧은 시간에 만난 예수의 정보는 그것이 전부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인성을 가진 예수를 자기들이 그동안 기다려왔던 선지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믿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런 믿음도 찾아보기 힘든 시기입니다. 빌립은 모세의 율법과 수많은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이를 만났다는 표현으로 자기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 역시 나름대로 메시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아는 상식으로는 나사렛에서 결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노골적으로 빈정댔습니다(46절). 그런 모습은 우리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선입견을 가지고 반문한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정보가 일천한 빌립은 난감했을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나다나엘을 설득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에게 그리하셨듯이 ‘와보라’고 했습니다. 직접 와서 그분을 만나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구차한 설명보다 직접 와서 만나보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가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설픈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도 초라해지고 궁색한 코너에 몰리기도 합니다. 가끔씩 논쟁을 하다가 자존심 싸움으로 비화되고 등을 돌리는 일들도 있습니다. 사실 복음은 논쟁할 것이 아닙니다. 굳이 논쟁이 필요하다면 전문가들이 복음의 변증을 위해 필요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논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준에서 그들을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초청하면 됩니다. ‘와보라’는 간단한 메시지로도 충분합니다.
(1) 예수를 만난 나다나엘
빌립의 초청을 받은 나다나엘이 예수께 나왔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다른 정보를 구하지 않았고,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없이 주님을 찾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준비된 영혼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메시아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성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주님께 나오자 주님이 단번에 나다나엘을 향해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을 보신 주님의 첫 번째 평가입니다. 예수님의 평가는 모양새나 외모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속사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차원에서 나다나엘은 후한 평점을 받은 셈입니다. 솔직히 그보다 좋은 평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외모가 준수하고 잘생겼다는 말보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씀이 훨씬 더 고상하고 격조 높은 평가가 아닐까요? 아마도 최고의 칭찬이겠지요. 지금도 여전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사상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사는 민족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칭찬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관한 칭찬이거든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들을수록 듣기 좋은 칭찬이요, 복된 칭찬입니다. 이는 사람의 인격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격을 건드리면 불쾌합니다. 불쾌한 수준이 아니라 정말 짜증나고 기분이 상합니다. 사람의 인격을 건드리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간사한 놈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로부터 간사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면 감정이 어떠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아무튼 나다나엘은 주님으로부터 최고의 칭찬을 받은 셈입니다. 정말 기분 좋은 칭찬을 받은 것이지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다나엘은 온몸에 전율이 돋는 느낌을 받았을는지 모릅니다. 나름대로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율법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하여 상당히 후한 점수를 줍니다. 마치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율법은 나름대로 자신의 의로움을 목숨처럼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자부심을 주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물론 반대로 자신이 율법을 어겼을 경우에 찾아오는 박탈감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사람들은 사람들의 소리에 민감하고, 사람들의 판단에 민감합니다. 그때그때 기분이 들쭉날쭉합니다. 이것이 율법이 주는 한계입니다.
나다나엘은 아마도 뿌듯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가 예수님께 여쭙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말입니다. 그는 자기의 정곡을 찌르는 그분 앞에서 어떻게 자기를 아시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당시 나다나엘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 지식의 한계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직 예수가 메시아인지 몰랐습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분의 전능성을 알았을 터이요, 최소한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찌 메시아가 자기 자신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의 질문은 자신의 신앙적인 한계를 분명히 드러낸 셈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48절)고 말입니다. 이것은 나다나엘에게 더욱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나다나엘을 향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냥 외모만 보고서 내릴 수 있는 판단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덕담수준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시는 말씀은 가히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히 누가 자신을 그렇게 통찰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다나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민하지 않고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말입니다(49절). 그의 고백은 당시로서는 충격 그 이상의 고백이었던 셈입니다. 감히 어떤 사람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분명히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임을 아는데 말입니다. 그것도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요.
(2) 나다나엘의 신앙고백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나다나엘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거의 삼년을 따라 다니며 제자훈련을 받았지만 그런 고백을 쉽게 한 자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수제자로 불리어졌던 베드로도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날 무렵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듣고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아십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고 극찬하십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 경외사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지금의 우리 시대는 너무나 익숙하게 들어왔기에 어지간하면 고백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고백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결정적인 계기도 하나님의 성호를 모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경죄요, 신성모독죄로 여겼던 것입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호를 모독한 죄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려고 발광을 한 것입니다(마26:66).
하지만 예수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수준의 믿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배운 것도 아니요, 누구에게서도 들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나다나엘은 율법에 대한 선지식을 갖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는 분명 율법에 정통하면서도 바른 신앙을 가질 사람으로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분명히 말하지만 나다나엘은 빌립보다 성숙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빌립은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45절)고 소개했지만, 나다나엘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49절)고 고백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빌립은 예수를 육신의 혈통으로 보았지만, 나다나엘은 신성을 가진 하나님으로 본 것입니다.
물론 나다나엘도 성숙한 신앙을 가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도 여전히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역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제한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사람을 구분할 때 혈통만 가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다나엘도 예수를 그들만의 메시아로 제한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구분하지 아니하십니다. 참 이스라엘과 거짓 이스라엘로 구분하십니다. 언약적인 측면에서 그러하시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누구보다 율법을 많이 아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유는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그를 보았다는 주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그가 얼마나 율법을 사모하고 묵상하며 율법대로 살아왔는지를 짐작케 해 주는 가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성경에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로서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는 나뭇잎이 크고 넓어 그 밑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여인들이 아이들의 젖을 먹이는 곳으로 자주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밑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며 묵상하는 곳으로 이용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무화과나무는 율법을 연구하는 상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주님이 나다나엘을 보자마자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고 말씀하시는 의도 역시 이런 의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나다나엘도 시간만 나면 무화과나무 아래 찾아가 율법을 듣고 배우며 묵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그가 율법의 지식으로 충만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대망론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빌립으로부터 소개를 받은 후에 주저없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그에게 간사함이 없다는 또 다른 이유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대부분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아마 나다나엘도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나름대로 율법을 근거로 이스라엘에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 메시아가 나사렛에서 나실 것으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근거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신다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물론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당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고 빈정댔던 것입니다. 선입견은 이처럼 무섭습니다. 사실 우리 신앙을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입견이나 편견, 고정관념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예수 앞으로 나오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됩니다. 한마디로 우리 신앙을 방해하는 가장 위험한 장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율법의 올무에 스스로 갇히게 만듭니다. 심령의 자유를 박탈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것들만 내려놓아도 복음을 영접하기가 정말 유리합니다. 물론 복음을 영접했을지라도 그런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면 복음의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나다나엘도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똑똑한 소리를 한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46절)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나다나엘의 율법적인 지식이 벗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법의 비늘이 벗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 몇 마디의 짧은 대화를 나눈 후에 곧장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나름대로 파격적인 고백이었지만 그래도 온전한 고백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의 마음을 뚫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50절)고 말씀하십니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말씀이요, 또 한편으로는 소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표적을 보고 믿는 나다나엘의 믿음을 아쉽게 여기시면서도 장차 ‘이보다 더 큰일’을 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불러 일으켜주십니다.
(3)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일’은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답은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하시니라”(51절). ‘이보다 더 큰일’은 하늘이 열리는 일입니다. 세상에 하늘이 열리는 일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이른바 신령한 영적세계가 열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의 비밀은 하늘이 열리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세계가 열리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모르니까 볼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구요.
하지만 하늘이 열리면 하늘의 비밀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비밀도 다 알고 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복음의 모든 비밀은 하늘이 열려야 알게 되고, 보게 됩니다. 절대 하늘이 열리지 않으면 율법에 갇혀 복음을 알 수 없고 볼 수 없습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되는 일입니다. 복음의 역사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주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나다나엘을 옭아매고 있는 율법의 비늘이 벗겨지고 복음을 누리며 살 것이라는 예언의 축복입니다.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는 구체적인 의미는 요한복음 2장에서 12장까지 나오는 예수님의 표적들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도를 암시합니다. 사실 요한복음에는 굵직굵직한 예수님의 표적들이 7개가 나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표적을 시작으로 해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표적과,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표적과, 물위를 걸으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입니다. 그것은 메시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하실 수 있는 표적들입니다.
그래서 ‘이보다 더 큰일’이란 단순하게 나다나엘의 심령을 뚫어보시는 한 가지 사건을 지나서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표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지극히 작은 한 면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성도는 ‘이보다 더 큰일’을 보며 사는 자들입니다. 마땅히 주안에 있는 자는 ‘이보다 더 큰일’을 보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늘이 열리면 가능합니다. 반드시 하늘이 열려야 합니다. 하늘이 열리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창세기 28장의 야곱의 꿈 사건을 근거로 합니다.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는 야곱이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타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창28:12).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가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으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가지 사건에서 결정적인 차이점을 발견합니다.
사닥다리와 인자입니다. 사닥다리는 율법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요, 인자는 복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사닥다리는 매우 불완전하고 위험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사닥다리를 타고 원하는 곳을 오르려면 수고와 열심이 따릅니다. 무엇보다 사닥다리의 최고 정상에 오르려면 중간에 한 개의 계단이라도 빠지면 안됩니다. 차근차근 올라가다가도 힘에 벅차 포기할 때도 많습니다. 또한 아무리 열심을 가지고 계단을 올랐을지라도 최후의 마지막 한 개의 계단을 오르지 못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수고는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만일 그 사닥다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닥다리라면 어찌할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의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자청년이 주님 앞에 나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질문합니다(마19:16). 그러자 주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돌한 청년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키었는데 무엇이 부족하냐고 큰 소리를 칩니다. 그때 주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21절). 이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네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이나 복음의 핵심입니다. 백가지 율법 가운데 99개의 율법을 지켰을지라도 한 가지만 못지키면 아무 것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계시는 주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일하심을 보는 것은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사자들인 우리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인자이신 예수님을 새 언약의 중보로 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보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수고를 담보로 하는 사닥다리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는 주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영광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초를 인자 위에 세우시기 바랍니다. 인자 위에 내 신앙을 건축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방식이 아닌 복음의 방식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이보다 더 큰일’입니다. 세상에 복음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복음이신 주님의 일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복음이신 주님이 내안에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는 일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보다 더 큰일’을 날마다 보고 사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마땅히 볼 수 지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