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시3:1-8)-2019.8.18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저자 노만 빈센트 박사는 사람들이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의 40%는 지나간 과거, 50%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 현재적인 문제는 불과 10%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심리학자들도 두려움은 주로 일어나지 않을 것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면, 획득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미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또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들로 인한 피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시작하여, 육체적 건강이 무너지고,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상실하며 불행지수만 높이는 악성 바이러스 같은 것들이라는 것이지요. 특히 성도들에게 두려움은 믿음을 파괴하고 하나님이 주신 내적평강을 깨뜨리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주범입니다. 그런데 사실 두려움은 허수아비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두려움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고 폭로해야합니다. 어느 위대한 왕이 새로운 궁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궁전의 사면 벽들을 수 백개의 거울로 덮었습니다. 궁전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마리의 개가 잘못 들어왔습니다. 개는 불안하여 사방을 둘러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수 백 마리의 사나운 개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개는 겁이 나서 컹컹 짖었습니다. 그러자 수 백마리의 개들이 자신을 보고 사납게 짖어댑니다. 개는 공격할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개들이 일제히 공격 자세를 취합니다. 개는 벽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궁전에 들어가 보니 개는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한 마리의 개밖에는 어떤 개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이 개처럼 막연한 두려움에 포로가 되어 삽니다. 허수아비 같은 두려움에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밤길을 걷다가 자신의 발걸음 소리에도 놀랍니다. 자신의 기침소리에도 놀라고 심지어는 자신의 샤워소리에도 놀라기도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주변 열강들의 변화무쌍한 반응에 우리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열강들의 패권주의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초긴장 상태입니다.
그러나 북한 핵보다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일본의 경제규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터에서 직접 죽은 전사자보다 남편이나 자식을 전쟁터로 보낸 후에 걱정과 두려움으로 시달려 간접적인 원인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만큼 두려움이 무서운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정신과 계통의 약물을 가장 많이 복용한다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평안을 잃어버린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려움입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신할 때 지은 시입니다. 그토록 당당하던 다윗왕의 위용은 어디로 갔습니까?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어쩌면 집권말기에 나타나는 레임덕을 다윗도 피해갈 수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킨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밑에서 권세를 누리던 실세들까지 쿠데타에 가담하고 백성들의 민심도 등을 돌렸습니다. 사람들은 힘 있고 권력이 있을 때는 다가오지만 힘과 권세가 떨어지면 가차 없이 등을 돌리고 떠나갑니다. 그래서 정승집 개가 죽으면 찾아가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하루아침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의 처참한 모습을 사무엘하 15장과 16장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감람산으로 피난 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떠납니다(삼하15:30). 그때 다윗을 향해 시므이라는 사람은 ‘비루한 자여 가거라’며 입에 담지도 못할 독설을 퍼붓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방은 다윗의 망명처를 고발하려는 대적들이 득실거립니다. 한 때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존경받았던 왕이었고, 지금도 가장 존경받는 왕 중에 하나인 다윗왕의 모습은 수난 받는 왕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명예와 권위는 완전히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이는 장차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비천한 모습을 예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존귀함을 받아야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모진 배신과 수난을 받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들에 의해서 쿠데타를 당하듯이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를 통해 영적 테러를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다윗에게 민심은 떠나고 측근들마저 등을 돌리고 도망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 자기 백성들이 돌아서고 제자들도 등을 돌리고 떠나갔음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향해 모멸스러운 말들을 토해냈습니다. 2절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향해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비아냥거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당시 예수님을 조롱하던 소리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를 당하실 때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당한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지껄였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살맛이 나겠습니까? 만일 이 정도로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구겨진 소리를 들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정말 죽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없었고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두려움을 극복한 비결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문제의 해답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찾은 것입니다(1,3,4,5,7,8절). 그가 하나님을 찾은 것은 하나님이 어떤 상황보다 크시고, 어떤 사람보다 크시며, 어떤 문제보다 크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남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사단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특기는 인간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에 매인 사람은 자유함도 없고 평안함도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범죄 한 아담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부르십니다. 그때 아담이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대답합니다(창3:10). 하나님을 떠난 아담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를 변명합니다. 자신이 벗었으므로 두렵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가 벗었기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입니다. 두려움은 범죄 한 영혼에게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려움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이 주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성도라면 주일을 성수하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두려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순종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없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염려나 근심이나 걱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한 죄송함 내지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라는 것입니다. 경외심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배에 대한 두려움, 성전에 대한 두려움, 사역에 대한 두려움, 거룩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님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주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주안에서 우리 영혼을 성숙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두려움은 그리스도 밖에서 들어오는 근심과 걱정과 염려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사실 성도에게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영혼을 쇠약케 하는 두려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두려움들이 엄습해옵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사람들을 타고 들어옵니다. 때로는 배우자를 통해서, 부모 형제를 통해서, 혹은 자녀들을 통해서 두려움이 들어올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환경이나 사건들을 타고 들어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나안을 정탐하러 갔던 10명의 정탐꾼은 환경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기 백성들을 낙심케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갈렙은 그런 두려움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결국 두려움을 이긴 것입니다.
또한 돈이나 명예나 권세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세상 것으로는 안됩니다. 두려움을 해결하실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지금 북한 핵과 미사일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미국이 도와주는 것처럼 착각하지 마십시오. 다들 자기들이 살기 위해 서로를 물고 뜯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결국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안되면 미련없이 포기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도움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앉으나 서나 하나님만 찾았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자빠져도 하나님을 찾았고, 죄를 범하고도 하나님만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괜히 내숭 떠는 사람보다 솔직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다윗을 합한 자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시고 문제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떤 것도 겁나지 않았고,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1967년 6월5일에서 10일까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사이에 6일 전쟁이 터졌습니다. 물론 누가 승자이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250만 명에 불과한 이스라엘군대가 1억 명이 넘는 아랍국가 연합국을 초단시간에 무너뜨렸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모세 다얀이라는 장군입니다. 애꾸눈으로 알려진 그는 전쟁 전에 국영방송을 통해 대국민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는 2534년 만에 다시 찾은 조국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부득불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최단 시간 내에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전 장병들이 최신식 무기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서방국가 첩보원들이 혹시 원자탄이나 수소탄보다 더 무서운 무기가 있는 줄 알고 정보를 수집하기에 바빴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런데 국방장관은 군인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방송국 의자에 앉아 시편 121편과 본문 3편을 계속 읽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최신 무기는 시편 121편과 오늘 본문 시편3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분의 도움을 믿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6일 만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쟁역사에 있을 수 없는 쾌거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셨던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시편 42편5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고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할렐루야!!!
(2)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3-5절)
다윗은 하나님이 압살롬의 불장난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하나님이시오, 이 두려움을 극복케 하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평안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입니다. 때문에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평강이 내려오면 두려움은 자동 소멸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두려움을 추방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은 무리하게 두려움을 명하여 소멸하게 해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구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자동으로 소멸되고 해제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움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이 쉽겠습니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면 자동적으로 두려움은 떠나가고 소멸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평강과 두려움은 절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 영적인 원리를 분명히 알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이 평안히 자고 깰 수 있었던 비밀입니다(5절). 주안에 있는 자에게 딴 근심 없습니다. 어떤 두려움도 없습니다. 때문에 위기 속에서도 평안히 누워 잠을 자고 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근심이나 걱정, 두려움이 있으면 편히 누워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자는 것도 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편안한 잠을 잘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편히 누워 자고 깨었습니다(5절).
다윗은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해주실 하나님께 이런 고백을 합니다. 시편18편 1절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한마디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다윗에게는 어떤 위기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영적인 내공이 쌓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렵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설프게 믿으니까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으면 두려움은 없습니다.
배를 타고 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잠간 주무시는 사이에 풍랑으로 인하여 죽겠다고 탄식합니다(눅8:22-24).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5절)는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이제 간신히 한 발자국씩 걸음마를 배운 어린아이가 불과 몇 발자국 앞에서 손을 벌리고 기다리는 엄마의 품으로 뒤뚱거리며 돌진합니다. 그 아이는 자기 엄마가 자기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이 없습니다. 엄마가 당연히 자기를 받아 줄거라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천만인이 자기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고 고백합니다(6절). 이런 배짱이 어디서 나올까요? 이런 용기가 어디서 나올까요?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일어나사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고 악인의 이를 꺾으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능력은 제한이 없고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개들도 어떤 사람이 지나갈 때는 유난히 짖고 어떤 때는 짖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리학자가 연구했더니 무언가 안정되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위축된 마음을 품고 개 앞을 지나가면 그 사람의 떠는 진동이 개의 촉감에 전달되어 짖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두려워하면 개한테도 무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마귀의 밥이 되는 셈이지요. 그러므로 주안에 능치 못함이 없음을 믿고 그분께 모든 두려움을 온전히 맡기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기 때문입니다(4-8절)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다른 것으로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만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구하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지적인 요소가 많이 작용하는데 반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감정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의지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른바 신앙의 3요소가 균형있게 작동하는 것이지요. 만일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하게 여기면 신앙의 밸런스가 깨어집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것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께 간구하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건강한 믿음입니다. 다윗이 참담한 위기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구하면 반드시 도와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윗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2절). 이는 하나님이 다윗을 포기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다윗의 마음을 두렵게 하는 사단의 계교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한 치의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방패시오, 영광이시오, 자기 머리를 드시는 자이심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3절).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4절). 심지어 하나님은 원수의 뺨을 치시고 악인의 이를 꺾으셨다고 고백합니다(7절). 장차 그럴 것이라는 고백이 아니라 이미 이루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믿음만 있으면 세상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세상의 그 어떤 문제도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이 비록 재물이나 건강의 아픔일지라도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던 배가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배가 요동을 치자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노인 한 사람이 가장 평화스러운 얼굴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지금 배가 난파직전에 있는데 당신은 두렵지 않소?’. 그러자 노인이 조용히 말합니다. ‘아니요, 나에게도 두 딸이 있습니다. 큰 딸은 몇 년 전 잃어버렸고, 지금은 작은 딸을 만나러가는 중이라오, 그런데 만일 배가 뒤집혀 죽게 되면 천국 가서 큰 딸을 만나게 될 것이고, 다행히 배가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면 작은 딸을 만나게 될 것이오, 나에게 이런 만남의 소망이 있으니 더 이상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어떤 위기나 환난 속에서도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도움을 청하면 결코 외면치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두려워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누군가는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있다고 합니다. 이는 1년 365일 동안 두려워하지 말고 살라는 의미입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마귀에 속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인생의 고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두렵지 않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젊은 날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던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4)고 말입니다. 본문에서도 그가 두려워하지 이유를 구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8절).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두려움의 존재가 무엇입니까? 그 대상이 무엇이고 원인이 무엇입니까? 결코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강으로 모든 두려움은 소멸되고 해제될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주가 주시는 평강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