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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사는 사람(갈2:19-21)-2020.4.5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0.04.04|조회수390 목록 댓글 0

죽어야 사는 사람(갈2:19-21)-2020.4.5

 

 오늘은 종려주일이요, 고난주간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은 고난주간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먼저 생각날 것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 토대위에 세워진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알지 못함이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보고, 예수님의 끝없는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의 신비를 알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다양하게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오셨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려고 오셨다, 율법을 완전케 하시려고 오셨다,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해 오셨다, 잃은 양을 찾으러 오셨다,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 죄사함을 주시려고 오셨다, 제자삼기 위해 오셨다, 마귀를 없이 하시려고 오셨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러 오셨다, 천국복음을 증거하러 오셨다’등 아주 다양합니다. 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은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을 세우는 것입니다(히10:9). 첫째 것은 옛 언약이요, 둘째 것은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것을 이루려고 오신 것입니다. 둘째 언약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내 마음과 생각에 새겨주시는 방식입니다. 첫째 언약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육신의 생명에 기록한 방식이었다면, 새 언약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친히 성령을 통하여 듣고 깨달아서 마음 판에 직접 새겨주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예수님이 내안에 오신 이유를 확고히 해줍니다.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살전5:10).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 들어오셔서 함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야 합니다. 왜냐면 거룩하신 예수님은 죄인 속에 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원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사 하늘 보좌 우편에서 모든 죄를 영원히 속량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가 왕권을 가지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과 함께 영으로,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가 나를 성전 삼으시고 심령 안에 왕으로, 주인으로, 전부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과 한 생명 되어서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나는 그분의 몸이 되어 예수님이 주는 마음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게 해주시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에 보내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새 언약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새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 우리 가운데 중보자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십자가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의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새 언약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두 가지의 의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의 의는 무엇일까요? 율법과 복음의 의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요구하는 의는 무엇일까요? 율법도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래서 로마서7장12절의 말씀은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고 율법대로 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도달하는 자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고 율법대로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못 박아버렸습니다(롬3:10). 아무도 율법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율법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습니다. 혹은 시대나 상황에 맞는 것을 배려해주지도 않습니다. 상대적인 선이나 공력을 인정해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의를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의를 이루어 드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방법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동시에 말입니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획입니다(창3:15). 우리는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의를 이루어 드릴 가장 완전하고 합당한 방법을 예비해 놓으셨던 것이지요.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한 몸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히10:5). 그분이 바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보내심을 받은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두 가지 의를 충족시켜 드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두 가지 의를 동시에 만족시켜 드린 것입니다. 이른바 죄에 대하여는 죽으시고, 의에 대하여는 살으신 것입니다(롬6:10). 이것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의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을 처리하는 최적의 방편입니다. 가장 더러운 죄를 처리하는 장소요, 가장 무서운 죄를 다루시는 장소입니다. 한마디로 가장 악랄한 죄악을 해결하시는 방편입니다. 율법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신21:23, 갈3:13).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의 저주를 처리하시는 가장 무섭고 두려운 자리요, 가장 치욕스러운 방편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곳에서 나무에 달려 우리의 저주를 감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저주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시킨 것입니다.

 

원래 십자가는 고대 페르시아의 사형틀입니다. 가장 흉악한 죄인이 거룩한 땅에 발을 붙이고 죽으면 땅이 오염되기 때문에 나무에 매달아 죽게 하여 부정한 독수리와 까마귀의 밥이 되게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무에 달려죽는 것을 하나님의 저주로 여겼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십자가는 죽음과 생명이 교차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이 요구하는 두 가지의 의가 충족된 것이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그곳이 골고다(라틴어에서 파생된 갈보리)요,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죄를 무섭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2)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예수님의 희생

 

그래서 루터는 십자가를 ‘나의 죄와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교환되는 장소’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십자가가 복음의 전부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십자가가 복음을 이루는 가장 높은 봉우리요, 핵심인 것은 분명합니다.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함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범죄한 인간은 자기들의 죄로 인해 죽어야 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훼손시키지 않고,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가장 탁월한 방법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시는 곳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죽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일찍이 범죄한 인간들에게 그들의 죄를 처리하는 방법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동물의 희생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의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죄인의 마음도 정결함을 얻을 수 없었구요. 아무리 제사를 잘 드리고, 자주 드려도 어떤 영혼도 자유함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단순히 육체의 예법이요, 그림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 방법으로는 범죄한 영혼의 죄악을 온전케 할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예비해 놓으셨던 것이지요. 당신의 독생자에게 죄의 짐을 지워 죽음의 값을 지불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님은 한 제사를 드리시기 위해 오신 분이요(히10:12), 한 제물로 오신 분이십니다(히10:14).

 

때문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최고의 방법이요, 절정입니다. 도저히 사랑받을 수 없는 죄인을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이시다니요!!! 그보다 더 한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 5: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최고의 방법이 십자가에서 독생자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 날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번제나무를 지우고, 사흘 길을 걸어갑니다.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은 뒤 아들을 나무위에 올려놓고 칼로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번제에 쓸 양을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장차 예수님이 지셔야 할 십자가를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고편 같은 것이지요. 예수님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의 막힌 담을 허시고 화해케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억지로 연출된 하나님의 슬픈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이미 구약을 통해 수없이 예언되어 왔던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순한 기독교의 시그널이 아니요, 아무 의미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치장하고 다니는 장신구도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의미도 모른 체 아니 십자가를 믿지도 않으면서도 귀걸이,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우리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가장 으뜸되는 정신은 고난입니다. 십자가에 고난이 빠지면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십자가의 고난은 육체적인 고통만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보다 더한 고통이 어디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죄 없으신 주님이 당하셨던 멸시와 천대와 수모, 옷을 벗기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며,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창으로 찔리시고 상하시며, 물과 피를 아낌없이 쏟으시고, 손발에 못 박으심을 당하셨던 고통을 어찌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답니다. 농부는 예수님을 영접치 않았고, 부인은 농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목사님이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할 기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을 가보자고 하더랍니다. 그 닭장의 둥지에 암탉이 앉아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예쁜 병아리들이 삐약 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더랍니다. 그런데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탉이 푹 쓰러지더랍니다.

 

그 농부가 말하기를 ‘목사님,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그 몸에서 피를 다 빨아먹었는데, 그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이 농부에게 ‘바로 저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있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멸망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는 그제서야 그 뜻을 깨닫고 즉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인해 그분이 찔림을 당하셨고, 우리의 죄악을 인해 그분이 상함을 입으셨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 그분이 징계를 받으셨고, 우리의 나음을 위해 그분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사53:5).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습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사는 나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 교회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예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우리 스스로는 질 수 없습니다. 오직 주의 능력으로 질 수 있습니다. 본문 20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마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사람마다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곧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지요. 나는 없고 주님만 있는 삶입니다. 그런 삶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각 사람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 도리와 사명을 모두 다 포함합니다. 결국 그것은 고난의 무게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고난의 삶이요, 주님을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영광이 아니라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무시하고 자기 영광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오직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분명히 본문19절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합니다(고전15:31). 살아있는 나무는 기둥이 안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어떻게 하면 고난 없는 십자가를 질 것인지 골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분명히 주님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남겨놓으신 고난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갈6:14). 그러면서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합니다(갈6:17). 계속해서 그는 갈5: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증언합니다.

 

실제로 그는 평생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그의 몸은 고난의 흔적으로 가득했습니다(고후11:23-27).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이요, 신학입니다. 낙타는 하루 일과를 주인 앞에 무릎 꿇고 시작하고, 무릎 꿇고 마칩니다. 아침에는 주인의 짐을 짊어지기 위해 무릎을 꿇고, 저녁에는 주인의 짐을 내려달라고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우리도 예수님 앞에 자기 십자가를 지기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말은 그분께 모든 것을 복종한다는 말이요, 그분을 최고로 존경한다는 말입니다.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왕으로, 전부로 고백할 때 우리는 그분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새의 날개는 무거우나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습니다. 배의 돛은 무거우나 돛이 있어야 항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무거워 보이지만 십자가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지 말고, 오직 그 십자가만 자랑하며 십자가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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