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요11:39-44)-2020.6.21
요한복음 11장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주님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베다니라는 촌에 삼남매가 살고 있었지요. 나사로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였습니다. 그런데 그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고 기별했습니다. 급히 오셔서 고쳐달라는 기별이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서두르지 아니하시고 나사로의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우리 친구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주님이 아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나사로의 죽음을 잠으로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실 때는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 들어간 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완전한 죽음이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각보다 늦게 도착하셨다고 생각한 누이들이 서운한 마음을 토로합니다. 만일 주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다면 자기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21절). 반가우면서도 섭섭했던 모양이지요. 그러면서도 주님을 믿는 자매들이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것을 아나이다’고 고백합니다(22절). 누이들의 믿음이 보통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입니다(23절).
그러자 한술 더 떠서 마르다가 고백합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줄을 안다고 말입니다(24절). 그때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십니다(25-26절). 아는 믿음에서 믿는 믿음으로 고백을 유도하신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찾으셨습니다. 가족과 동네 사람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느 초상집의 풍경과 다를 것이 없지요? 주님도 슬퍼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물과 주님의 눈물은 전혀 달랐습니다.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눈물은 죽은 나사로가 불쌍해서 울었던 것이나, 주님의 눈물은 죽은 나사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 누이들의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신 것입니다(33절). 한마디로 산 자들의 영혼을 위한 눈물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주변에 아무도 주님이 흘리시는 눈물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저렇게 우시냐고 반문할 정도였으니까요(36절). 그들 중에 어떤 이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하실 수 없었더냐고 주님의 능력을 폄하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사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첫 번째 명령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과정을 통해 믿음의 발달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시는 과정 속에 우리 믿음의 발달과정이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대부분의 인간은 이런 발달과정을 경험합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통한 발달과정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무덤 속에 갇힌 나사로입니다. 죽은 나사로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수족을 동인 나사로입니다. 수족을 동인 나사로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입니다. 마치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사데 교회 같은 모습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풀어 놓아 다니는 나사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자유 하는 단계입니다. 이런 발달 과정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가르친 것과 유사합니다. 즉, 육에 속한 사람과 신령에 속한 사람의 비유와 흡사하다는 말이지요. 영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과정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상태가 무덤 속에 있든지, 혹은 수족을 동인채로 나왔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살아가든지 말입니다. 나사로의 상태를 통해 자신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1) 무덤 속의 나사로(39절)
나사로의 죽음은 분명하고 확실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무덤 속에 나흘을 있었습니다. 무덤 속에 갇힌 나사로는 시체가 부패하여 냄새가 날 정도였으니까요. 죽은 나사로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감히 죽은 나사로를 살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구요. 그런데 주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명령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는 것입니다(39절). 감히 이런 명령은 주님만 하실 수 있는 명령입니다. 물론 주님이 친히 말씀으로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기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런 수고를 그들에게 하시는 것일까요? 주변에 있는 영혼들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이의 도움도 필요 없이 주님은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그들을 참여시킴으로 인해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물고기를 잡아서 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합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 인간을 다루실 때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있는 방편을 제공하십니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것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도전을 받기 때문입니다. 더 큰 감동을 느끼고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나사로가 부활하는 것은 당연한 코스였지요. 나사로 부활의 주도권은 주님이 갖고 계셨지만 주님은 주변에 있는 영혼들을 동참케 하사 하나님의 영광을 극대화시키는 방편을 취하신 것입니다. 훨씬 더 감동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이 일부러 이런 퍼포먼스를 연출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부활의 믿음으로 상향시키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의 의도는 우리의 상상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말입니다(42절).
돌을 옮겨 놓으라는 주님의 명령에 나사로의 누이들은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반문합니다. 주님 무덤의 돌을 왜 옮기라고 하십니까? 지금 무덤은 부패한 시체의 썩은 냄새가 나는데요. 굳이 그런 수고를 왜 하시려고 하십니까라는 의도지요. 일이 터지기 전에 손을 쓰셔야지 일이 터진 후에 왜 쓸데없는 일을 하시려는데요? 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능력을 일언지하에 제한해 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런 무능한 상태에 있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마치 육신으로서 할 수 없는 그것을 주님은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함이 시인되어 질 때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주님이 일하기 가장 좋은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자기 스스로 연약함과 비참함과 무능이 고백되어 질 때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 어떤 일도 하지 아니하십니다. 주님 없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할 때 주님은 손을 떼십니다. 무덤 속에 갇힌 나사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습니다. 사실 문제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았다고 하나 실상 죽은 자와 같은 산 자들입니다. 실제로 죽음을 경험한 나사로보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낙담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더 큰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영적으로 다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런 자들은 자기들의 죽은 상태를 모른다는 것이에요. 사실 육신의 소경보다 영적인 소경들이 훨씬 위험하고 비참한 것이지요. 우리 주변에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덤에 갇힌 상태로 있는 영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이 죽은 상태라는 것을 모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교회 안에도 차고 넘칩니다. 이는 신앙의 연륜이나 경륜이나 직분과 상관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태입니까?
돌을 옮겨 놓으라는 주님의 명령에 반신반의 하면서 옮겨놓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눈을 들어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43절)고 말입니다. 감히 누가 무슨 권위로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명령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당신을 증거 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수족을 동인 나사로(44절상)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명령 앞에 나사로의 믿음이 작동할 때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들은 나사로가 반응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옵니다.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장례를 치를 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훨씬 현실감이 있지요? 하지만 이 또한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현실감을 주시려는 연출은 아닙니다. 하나씩 하나씩 질서대로 반응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질서대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주만물을 통치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못할 자 없고, 거부할 자도 없습니다. 죽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나사로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자기 양을 찾으시는 선한 목자의 음성입니다. 요한복음10장 27절을 보십시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비록 주안에서 죽은 자라 할지라도 믿는 자는 자기 주인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음성은 안 듣습니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10:5).
나사로는 죽었을지라도 여전히 주님의 자녀였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살아서 주님을 자기 주인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았을지라도 주님을 자기 주인으로 영접치 아니한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안에서 죽은 자는 주인의 음성을 듣고 깨는 것이 정상입니다. 죽은 나사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옵니다. 그런데 좀 모습이 이상하지요?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사로가 나옵니다. 그 얼굴은 아직 수건에 싸여 있습니다. 분명히 나사로의 모습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답게 활동할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영적으로 보면 그 상태가 신령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모습만 갖춘 상태였던 것이지요. 나사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난 것이지요. 주님의 생명줄을 붙잡고 부활한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줄을 붙드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선물입니다.
만일 사람이 그 상태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섬뜩하지 않겠습니까? 어찌보면 육신과 영적인 상태의 중간자 정도 되는 상태는 아닐는지요? 세상이라는 곳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은 영적인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이른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있을 때가 무덤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무덤 문을 열고 나왔지만 광야를 통과하는 단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광야는 사람이 활동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만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가나안땅을 향해 반드시 통과하는 단계일 뿐입니다.
수족이 베로 동였는데 어떻게 자유스럽게 활동할 수 있겠으며, 얼굴이 수건으로 싸였는데 어떻게 자유스럽게 활동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닌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수족이 동인 채로 다닙니다. 혹은 얼굴에 수건을 싸인 채로 다닙니다. 본인도 부자유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도 불편합니다. 주님은 수족이 동인 나사로를 자유케 하시기 원하셨습니다. 눌리고 억압받는 자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율법의 틀에 갇힌 자들을 자유케 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주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셨습니다. 그 예수가 왕권을 가지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과 함께 다시 영으로,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가 나를 성전 삼고 내안에서 왕으로, 주인으로, 전부로 들어 오사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나는 몸이 되어 예수님이 주는 마음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 있는 자는 누구나 자유합니다. 주님은 수족이 동인 채로 다니는 나사로, 얼굴이 수건에 싸인 채로 다니는 나사로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이 동인 나사로의 수족을 풀어주고, 얼굴에 싸인 수건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도와주어야 하지요. 결국 나사로를 자유케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수족이 동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얼굴에 수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른바 종교적인 틀에 갇혀 피곤한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수족이 동인 것이나 얼굴이 수건으로 싸인 것은 율법 신앙을 의미합니다. 율법으로 사는 자들은 자유함이 없습니다. 항상 뭔가에 묶여 있고, 매어 있고, 싸여 있습니다. 그들의 수족이 자유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영혼도 자유하지 못합니다. 복음은 그들을 묶고 있는 모든 것을 자유케 합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라 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합니다(롬8:1). 율법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지만 복음은 자유케 합니다.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 자유 하는 나사로(44절하)
주님은 나사로의 영혼이 자유하기 원하십니다. 더 이상 율법이라는 제도에 묶이는 것은 나사로를 살리신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나사로의 영혼이 주안에서 자유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매인 것으로부터 나사로가 자유하기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3대 자유를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은 세 가지로부터 자유 하는 사람들입니다. 죄에서 자유, 율법에서 자유, 사망에서 자유입니다. 가장 먼저 죄에서 자유 해야 합니다. 죄에서 자유 함은 율법에서 자유 함을 의미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자유 하는 사람은 당연히 율법에서 자유 하는 셈이지요. 그리고 죄의 값인 사망으로부터 자유 함을 누려야 합니다. 죄와 율법과 사망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독립적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죄가 성립되고 죄의 열매는 죽음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로부터 자유 해야 합니다. 만일 죄에서 자유하다고 말하면서 율법으로 자유하지 못한다면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혹은 율법에서 자유하다고 말하면서 사망에서 자유하지 못한다면 그 역시 잘못된 논리입니다.
죄에서 자유 하는 사람은 율법에서 자유 할 터이요, 사망에서도 자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에서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한순간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키려는 의지 때문이 아닙니다. 나사로로 하여금 주안에서 진정한 자유 함을 누리고 살기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하루를 살지라도 주안에서 자유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 속에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미안하지만 복음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혹은 복음을 믿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능력입니다. 내 영혼을 자유케 하는 능력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묶이지 않습니다. 율법 안에 주어진 계명이나 제도로부터 묶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영혼이나 육신이 풀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자유하기 원하신다는 말이지요. 그리스도 주안에서 자유 하는 것이 복음의 목적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어느 단계인지 아시겠습니까? 내 믿음의 단계가 무덤 속에 갇힌 상태는 아닌지요? 아니면 수족이 동이고 얼굴이 수건에 싸인 상태는 아닌지요? 그러면 내 영혼이 주안에서 자유 하십니까? 누구든지 세 부류 가운데 속할 것입니다.
혹시 지금 내 영혼이 무덤 속에 갇힌 상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줄을 붙잡고 나오십시오. 혹은 내 영혼이 수족을 동인채로 수건에 얼굴이 싸인 상태라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십시오. 나 혼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낑낑대며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당당하게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것이 바로 나사로를 부활케 하신 주님의 목적입니다.
누구든지 죽은 나사로의 발달 과정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보시고, 그리스도 예수 주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지금 모든 인간에게 이렇게 외치십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입니다. 스스로는 자기의 묶인 것을 풀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의미하지만 절대 그들이 도움의 주체는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우리의 도움이시오, 우리를 도우실 하나님이십니다(시121:1-2).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시115:9-11). 나사로를 살리시는 능력이 오직 그리스도 우리 주안에만 있고,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십니다. 아무도 나사로를 살릴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율법의 짐에서 풀어 놓아 자유케 하실 능력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안에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기적의 현장에서 주님의 일하심을 친히 목도케 하려 하심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친히 목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심이지요. 주님이 나사로를 살리시는 목적은 나사로 한 사람을 살리시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주변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친히 사랑하사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하심입니다. 한마디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특별하신 배려라는 말이지요. 우리 모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안에서 자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