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사는 사람들(요12:24-25)-2020.11.8
어느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통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념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설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통념을 뒤집는 이론도 있습니다. 그것이 역설입니다. 역설은 언뜻 보면 논리적으로 어긋난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속에는 심오한 진리를 품고 있습니다. 때로는 정설보다는 역설이 훨씬 더 호소력이 있고 설득력이 강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주 역설을 사용합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역설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역설의 종교라고도 말하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약할 때 강하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 혹은, ‘주라 그러면 후하게 주리라’ 또한, ‘버리면 얻는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등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역설을 보십시오(24-25절). 한마디로 죽어야 산다는 것이지요. 죽으면 죽는 것이지 죽어야 산다니요? 대표적인 역설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죽어야 사는 종교입니다. 죽지 아니하면 절대 살수 없는 종교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단어조차 꺼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전제하지 않고는 복음을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죽음은 육신적인 법칙에서의 죽음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을 염두 해 둔 말이지요.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죽어야 합니다. 아니 모든 교회들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목사들이 죽었으면 좋겠고, 성도들도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분 나쁘십니까?
우리가 죽지 않으니까 세상에서 교회와 성도들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어설프게 죽으니까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짜 미안하지만 기독교의 탈만 쓰고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비난을 받고 공격을 받는지 아십니까? 혹은 복음을 믿지 않고 종교생활 하는 극도의 광신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송두리째 훼손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남양주에 있는 수진사라를 작은 사찰에 방화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방화책임자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40대의 여자 개신교인으로 밝혀지면서 논란이 됐습니다.
오죽하면 대한불교조계종에서 ‘개신교인에 의해 자행되는 사찰 방화를 근절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차별금지법을 조속히 제정하라고 국회를 압박했겠습니까! 정말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와 목사들의 일차적인 책임이요,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죽지 않으니까 이런 엉뚱한 사고를 칩니다. 죽어도 어설프게 죽으면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지요. 소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소금 없이 살수 없습니다.
소금의 역할에 대해서는 잘 알 것입니다. 맛을 내는 조미료 역할에서부터 썩어져가는 것을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까지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반드시 소금이라는 자기 형체가 죽어야 합니다.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면 죽어야 간이 배고 음식의 맛을 내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음식에 들어간 소금이 녹지를 아니하고 그대로 있으면 음식을 먹어도 소금이 씹힙니다. 음식에 소금덩어리가 씹혔을 때 기분을 아십니까? 성경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 이니라’(마5:13)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우리 시대 교회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요? 목사와 성도된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시원하게 동의하시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세상 불신자들보다는 더 낫다고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 싶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과 교회를 돌이켜 보십시다. 어쩌면 지금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비난과 질타를 받았던 적이 있었을까요? 물론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의 질타는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볼 수 있는 이유 있는 비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교회가 세상을 향해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사와 성도가 죽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기독교는 죽어야 사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죽지 아니하면 세상은 절대로 교회에 어떤 기대감이나 호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죽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웁니다. 믿는 자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불신자에게 덕을 끼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오직 기독교가 이 세상에 희망이 되고 소망이 되는 길은 교회가 죽고 목사와 성도들이 죽는 것밖에 없습니다.
(1)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
우리가 죽음에 대해 말한다고 너무 기분 나빠하실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생사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죽으라고 해서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요, 혹은 죽지 말라고 해서 죽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우리 인간에게 죽음보다 가까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날 때부터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과 사는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언제라도 죽음이라는 친구가 우리를 부를 때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라’(히9:27)고 말입니다.
사실 죽음보다 공평한 것은 없습니다. 만일 돈 많은 인간이 돈으로 죽음을 막아낼 수 있다면 돈이 없는 사람에게 있어 죽음보다 불공평한 것이 있겠습니까? 혹은 권력으로 죽음을 방어할 수만 있다면 죽음보다 불공평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신 죽음도 역시 공평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 앞에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공평에 대한 착각을 합니다. 그 착각은 모든 사람의 조건이 동일하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 속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공평일까요?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모두가 다 대통령이 되어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아무 조건 없이 동일하게 살고 죽는 것이 공평일까요?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동일한 평수의 아파트를 사는 것이 공평일까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얼굴을 갖고 사는 것이 공평일까요? 그것은 공평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는 말씀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어떤 결정적인 상황이나 조건 속에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공평하십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죄에 대해서 눈감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똑같이 다루십니다. 바로 이것이 죄에 대한 공평입니다. 또한 죄의 삯에 대해서도 공평하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사망이라는 죄의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사 이래로 죽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변개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도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인간의 죽음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혹은 명예나 권세나 학벌이나 미모를 가지고 죽음을 대신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죽음을 해결하시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죽음의 해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죽은 자는 죽어도 살지만, 믿지 않고 죽은 자는 영원한 죽음을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죽음은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아쉽고 섭섭할 수는 있지만 결코 두렵거나 무서워 할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져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장막이 세워지는 것입니다(고후5:1). 그러므로 주안에서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죽음을 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잠자는 영혼을 깨우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러 오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말할 때 기분 나빠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의 죽음의 의미는 진짜 목숨을 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정과 욕심을 못 박는 것입니다. 이른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못 박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육신에 속한 나를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못 박히는 것이지요.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나 성도들이 육신적으로 너무 부요해졌습니다. 너무 교만해졌고 세속화되었습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말로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하면서도 신령한 것에 관심이 없고 땅에 속한 것에만 민감합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것에 부요합니다. 때문에 주님 앞에 죽지 못합니다. 아니 죽으려는 사람들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예전의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던 시대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죽는 시늉이라고 하고 살았습니다. 순교자들도 심심찮았습니다. 그분들이 피 흘리고 뿌린 복음의 혜택을 받고 살면서도 복음으로 살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소리를 애써 무시해 버립니다. 예수를 믿어도 죽지 않고 고상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가급적이면 편리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성경도 자기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개성대로 믿으려고 합니다. 성경에도 그런 시대가 있었지요.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한 것이지요. 오늘 우리 시대가 어쩌면 사사시대와 비슷한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믿음을 자기중심대로 하고, 자기 생각대로 믿으려고 합니다. 자기 멋대로 행동하지요.
그들은 성경의 진리보다 세상적인 질서를 더 우선합니다. 주의 종들의 소리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소리를 더 경청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통제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목사의 영적 지도를 꺼려합니다. 그래서 이상한 종교적인 관습이나 틀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려놓는 것을 지옥 가는 것보다 힘들어합니다. 그것이 부서지고 깨어지면 은혜 받을 수 있는데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이 자라지 않지요. 항상 제자리걸음이거나 침륜의 빠지는 것이지요. 어쩌면 요즘은 제자리걸음만 해도 보통수준인지 모릅니다.
믿는 자들이 자꾸만 거꾸로 가고 옆으로 갑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말도 많습니다. 나름대로 기발한 종교적인 변명을 한두 가지 정도는 항상 휴대하고 다닙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불리해지면 자기를 방어하는 기제로 사용합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죽으라고 하면 거세게 반항합니다. 솔직히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라는 말은 최고의 행복한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답게 살라는 주문이요, 성도답게 살라는 강권이거든요. 성도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존귀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사는 것이지요. 이른바 주님의 성전 된 우리가 성전의 머리되신 주님의 명령을 받아 그분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 쉬운 말로 하면 복음 안에서 복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그것이 듣기 싫은 소리입니까? 기독교인들에게 최고의 축복된 명령이 아닌가요? 한마디로 새 언약의 복음 안에서 살라는 명령은 최고의 축복이지요. 이보다 더 축복된 주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복음 안에서 복음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2) 죽지 아니하면 영원히 죽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 없습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정말 힘들고 피곤합니다. 믿음생활도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재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취미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재미가 없는데 취미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재미가 있으면 그것이 좋아서 죽습니다. 오직 그것을 위해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박에 재미를 붙이면 도박이 좋아서 죽습니다. 낚시 취미를 가진 사람은 낚시 외에는 좋은 일이 없습니다.
들은 이야기지만 낚시를 좋아하는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이 여름방학을 시작하자마자 낚시를 떠나서 개학식 날 돌아오더랍니다. 얼마나 낚시가 좋으면 그렇겠습니까? 그 사람은 낚시에 죽은 사람입니다. 마약에 재미를 붙이면 마약에 죽은 사람입니다. 바람이 난 사람은 그 상대에게 죽은 것입니다.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주님 안에서 내가 주님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주안에서 죽지 아니하면 믿음생활도 재미가 없습니다. 예배도 답답하고 기도도 답답합니다. 믿음 생활자체가 너무나 무료할 것입니다. 재미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주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아니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서 나에게 믿음을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지요. 주님의 권능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죽으면 행복합니다. 어떤 곳에서든지 내가 죽으면 분위기가 살고 평안해집니다. 하지만 주안에서 죽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목사 모임에 가끔 참석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정말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혈기가 죽지 않고 큰소리치고 따지고 덤벼드는 목사님들 때문에 분위기가 엉망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느낍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남들 판단하지 말고 내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답이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아니하면 결국 내 자신도 피곤하고 주변 사람들 모두가 다 피곤해집니다. 솔직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면 가정이 평안하고 교회가 행복합니다. 어떤 공동체라도 내가 죽으면 행복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죽으려고 오셨습니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이 우리 인간의 죄의 옷을 입으시고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죽고 내가 대신 산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그분과 함께 우리가 죽은 것이지요. 그리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산 것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2:5). 이 부분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2장20절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때문에 지금 내가 산 것은 예전의 내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나는 이미 죽었고, 영적인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으로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진짜 그럴까요? 내안에 진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일까요? 내안에 예수님이 사시는데 그렇게 밖에 살수 없는 것일까요? 사실은 내가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화내고 분내고 삐지고 토라지고 죄 중에 거하는 것이지요. 만일 지금 내 안에 주님께서 살아계신다면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될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아직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않아서 그런 것이에요.
제물과 동물의 차이를 아시나요? 제물은 죽은 짐승이고 동물은 산 짐승입니다. 제물이 죽지 아니하면 절대 제사를 드릴 수 없어요. 구약의 동물의 제사법을 보세요. 제물은 모두 죽였습니다. 죽지 않으면 제물이 될 수 없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제물이 못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옛 언약의 성도들을 위해서는 동물이 인간을 대신하여 죽어 주었지만, 새 언약의 성도들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우리가 동물을 잡아서 제물로 드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죽은 동물의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죽은 동물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거룩한 산제사입니다. 예배로 말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왜냐면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성전 삼고 나와 함께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은혜로, 그분의 권능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전의 내가 아닌 것입니다. 예전의 나는 죽었습니다. 때문에 죽은 자가 무슨 혈기가 그렇게 많습니까? 죽은 자가 어찌 그리 말이 많습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내안에 정욕이 살아 있다는 말은 아직 내가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어설프게 죽는 시늉만 낸 것이겠지요. 죽으려면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푹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내가 죽으면 이제는 내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게 됩니다. 나는 그분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주안에서 죽지 않으면 영원히 죽게 됩니다. 죽지 아니하면 영원히 죽는다는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주안에서 죽으시기 바랍니다.
(3) 죽으면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죽으면 우리는 영원히 삽니다. 이른바 죽어야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 안에서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더러운 육신의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내안에서 죽지 아니하면 결국은 이런 것들이 나를 죽이고 맙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영원히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의 말씀처럼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죽는다는 말은 예수 믿고 예수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죽는다는 표현은 이제 더 이상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 마음대로 행사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께서 행사하시도록 양도해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가 지금 이곳에 살고 있을지라도 주안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는 영원히 살기 위함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주님이 내안에서 거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안에서 살게 되면 주님이 내안에서 거하실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의 처소가 되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자연인으로서 우리는 누구나 죄 덩어리입니다. 때문에 자연인으로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고, 주님의 처소가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처리되어야 주님이 내안에 거주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처리하기 위해 주님이 어린양의 제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여러 가지지만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심령 안에 들어와 사시려면 반드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여 하늘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가 왕권을 가지시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과 함께 영으로,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가 나를 성전 삼으시고 왕으로, 주인으로, 생명으로, 전부로 들어오셔서 나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과 한 생명 되어서,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나는 그분의 몸이 되어 예수님이 주는 마음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 언약의 방식으로 이루신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면 주님이 내안에 들어오신 이상 나는 없습니다. 내안에 주님이 사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살되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요,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며, 주님의 권능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없습니다. 주안에서 나는 죽었고, 주님과 함께 일으킴을 받은 자이며, 주님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죽되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처럼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밀알의 희생을 신비한 삶의 비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밀알의 삶은 희생입니다. 헌신입니다. 그래서 밀알은 우리에게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자신만을 위해 존재할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차가운 땅에 떨어져 묻힐 때 위대한 기적이 일어납니다. 죽은 것 같으나 다시 살게 됩니다. 죽음은 부활의 전제조건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밀알처럼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죽으면 다시 삽니다. 그런 차원에서 믿음은 자신을 죽이는 훈련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 것이지요. 이처럼 믿는 자들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죽는 연습을 하는 자들입니다. 과거의 더러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자들입니다. 물론 그 일마저도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오직 내안에서 나를 성전삼고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요, 주님의 권능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그 주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나의 시선을 고정하고 나의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안에 계시는 주님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내 스스로는 나를 죽이지 못합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내 스스로는 나를 죽이지 못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도 하루 동안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살게 해달라고 다짐을 하건만 그렇게 살아지던가요? 솔직히 우리 스스로의 의지나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내안에서 나로 하여금 그렇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살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물론 육체를 입고 사는 인간들이 완전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비슷하게 사는 삶 같아도 내 스스로의 의지로 사느냐, 혹은 내안에서 나를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의지로 사느냐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우리 보기에 차이가 없어 보일지라도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판단이 전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예전의 내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절대 주안에서 살수 없습니다. 예전의 나는 죽어야 합니다.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로 살게 됩니다.
성 어거스틴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처음부터 거룩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젊은 날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를 믿고 회심하여 성 어거스틴으로 거듭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어느 날 어거스틴이 예수 믿고 회심한 이후에 거리를 걷고 있는 데 뒤에서 누가 부릅니다. 전에 자주 들랑거렸던 술집의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못들은 척하고 가는데 그 여자가 계속해서 따라오면서 부릅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이 뒤를 돌아보면서 여자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는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소! 나는 그때의 어거스틴이 아니라오! 라며 가던 길을 걸어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죽은 사람의 행동입니다.
기도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죠지 뮐러도 말하기를 “나는 어떤 날 죽었다. 죠지 뮐러에 대해서 죽고,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에 대해 죽고, 책망에 대해서도 죽었다”고 고백합니다. 옛 사람이 즐겨하던 모든 것이 죽었다는 말이지요. 유명한 부흥 강사 중에 김익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예수 믿고 제일 처음한 일이 있었다합니다. 자기 장인에게 ‘김익두 사망’이라는 부고장을 보낸 것입니다. 얼마나 장인의 속을 썩였으면 그러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이전의 나는 죽어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의 나와 믿은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도는 죽어야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역사가 예수님 오시기전(BC)과 오신후(AD)로 나누어지듯이 개인의 역사도 예수 믿기 전의 삶과 믿은 후의 삶으로 나누어집니다. 개인에게도 BC와 AD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각자 그런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렇고 그렇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요. 대부분의 성도는 거듭나기 전과 거듭난 이후의 잊을 수 없는 삶의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경험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절대 옛 사람이 즐겨하던 것으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이제는 예수로만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안에 주님이 계심을 확신해야 합니다(고후13:5).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이름으로 살수 없습니다. 당연히 주님의 권능으로 살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살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 한 알의 밀알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자들이 되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