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은혜에서 떨어진 자(갈5:2-4)-2020.11.22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0.11.21|조회수1,000 목록 댓글 0

은혜에서 떨어진 자(갈5:2-4)-2020.11.22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마무리됩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은혜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막상 은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시원하게 대답하는 자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면 은혜는 한 두 마디의 문장으로 설명되어질 단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호의입니다. 물론 은혜도 크게 보편적인 은혜와 특별한 은혜로 구분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본문 4절에서 말하는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는 말씀속의 은혜는 보편적 은혜라기보다 율법의 반대적인 개념으로서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른바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특별 은혜라고 볼 수 있지요. 즉 구원, 죄사함, 영생 등 아무도 줄 수 없는 은혜, 혹은 아무도 자기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은혜라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어떤 인간이나 어떤 신도 해줄 수 없는 은혜라는 말이지요. 다른 차원으로 말씀드리면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은혜라는 거지요. 그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인 셈이지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 은혜 없으면 살 수 없고, 은혜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은혜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은혜 받을만한 일을 했다거나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라면 결코 은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은혜이지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은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그것은 우리 행위에 대한 보상이요, 삯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자기 공로나 행적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말하는 것이지요.

 

전적인 은혜는 적당한 선에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거나 보충해주는 대가성 은혜가 아닙니다. 혹은 아무에게나 무작위로 주어지는 싸구려 은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일방적인 시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풍성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잘 받아야 합니다. 또한 받은 은혜를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받은 은혜를 잘 보존하지 못하거나 관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다 원색적으로 말씀드리면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입니다.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끊어진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들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사람들이지요. 세 가지 표현이 다 같은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2절의 말씀을 빌려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그들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이거든요.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입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복음도 아니요, 누군가로부터 배운 복음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1장 11절과 12절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의 복음은 자기가 직접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이요, 배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누구보다 선명하고 정확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만 자랑하고 복음으로 교회를 세우고 다닌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1차전도 여행 중에 세워진 교회들입니다(행14:21-25). 갈라디아 교회는 성숙한 신앙이 아니라 개종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초신자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 드렸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갈라디아 교회 안으로 율법의 물결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가만히 들어와서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미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갈2:4). 그들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유혹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결국 율법의 상징과 같은 할례를 받으라고 미혹한 것이지요. 마치 육신의 할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나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이방신을 섬기다가 개종한 성도들이요, 그들의 믿음이 견고하지 못함을 감안할 때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종교적 혼란이 야기된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렸던 복음의 자유에 대한 회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지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들의 유혹에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대율법주의자들이 전한 가르침은 그동안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요. 그래서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논증함으로써 복음의 확실성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는 원색적으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경고한 것입니다(3:1).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고 책망하면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탄식합니다(3:3). 이 말씀은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려느냐는 말입니다. 그는 ‘다른 복음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1:7). 그리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합니다(1:8).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다른 복음은 대표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영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어떤 자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은혜에서 떨어진 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입니다. 은혜 없으면 한시도 살 수 없는 자들이지요. 솔직히 우리는 거저 받은 은혜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최고의 정성을 쏟아 부어주신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분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신 은혜를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은혜의 가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종종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라고 너무 쉽게 말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은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죄악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편에서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은 거저 받은 은혜이지만 싸구려 은혜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때로는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이른바 진액을 다 짜내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물론 우리가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했기 때문에 은혜가 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우리가 진액을 짜내었기 때문에 은혜가 임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은혜의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은혜받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에요. 은혜는 싸구려가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런 은혜를 우리가 소홀히 여기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만큼 귀하게 받은 은혜를 잘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책임이지요. 그래서 성도는 받은 은혜를 잘 관리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받은 은혜를 소홀히 여기거나 가볍게 생각하여 무감각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에 받은 은혜는 첫사랑이 되어 흥분할 정도로 기뻐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에 대하여 둔감해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은혜를 헌신짝처럼 가볍게 취급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마치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리는 에서처럼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생기고, 은혜에서 아예 떨어져버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비참하게도 오늘날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보다 세상이 주는 싸구려 은혜를 더 동경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왜냐면 은혜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런 자들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은혜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은혜의 고마움을 모르기 때문에 육신으로 보이는 세상의 값싼 은혜를 더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무덤덤하게 여기다가 결국 은혜에서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은혜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치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책망하시기를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계2:5). 분명히 은혜가 떨어진 시점이 있고,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은혜가 무덤덤해지고 사모함이 없어지고 갈급함이 없어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은혜가 고갈되는 시점도 있고, 원인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원인과 시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됩니다. 그저 두루 뭉실하게 은혜를 회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떨어진 어떤 시점이나 원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면 처음 받은 은혜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졌다면 분명히 어떤 원인과 시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반드시 찾아서 은혜를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 영혼이 사는 길입니다.

 

(2)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

 

은혜에서 떨어진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본문 4절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라고 말합니다. 은혜에서 떨어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집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면 예수님께로부터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원리입니다. 은혜는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생활하면서 수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은혜가 고갈되면 예수님이 고갈됩니다. 예수님이 고갈됨은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이 나타나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 말은 주님의 마음이 내안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요일5:12).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요14:6).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안에 있고, 최고의 은혜는 영생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영생보다 더 큰 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17:3). 한마디로 영생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영생이 있고,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영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라는 말은 그 안에 영생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생이 없다는 것은 최고의 슬픔이요, 불행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라고 하면 대단한 충격을 받는데,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하면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같은 의미인데 반응이 이처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은혜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은혜를 매우 추상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은혜의 방편이 수없이 많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은혜를 그대로 믿는다면 은혜에서 떨어진다는 말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말인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생명보다 귀히 여겨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구원과 직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숨 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살아가지요. 주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이 은혜요, 사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 없으면 살 수 없고,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믿고 오직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은혜 속에 강건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은혜를 점검하고 확인하고 날마다 은혜의 확신 속에 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

 

은혜에서 떨어진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요,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로움을 얻으려는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입니다(3절). 아주 간단하지만 육체의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고 할례를 받는 자는 반드시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왜냐면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야고보서2장10절을 보십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악한 것일까요? 혹은 부족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율법이 악하고 부족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악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율법은 지극히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로마서7장 12절을 보십시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들이 악한 것입니다.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그 거룩하고 선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주신 이유는 천하 인간 중에 한 사람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심입니다(갈2:16). 한마디로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표지는 되지만 구원을 이루는 수단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방편으로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은혜의 방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 은혜의 방편이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시대라고 생각했던 구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시대라고 하는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율법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에요.

 

결국 믿음은 율법과 복음의 선택이요, 싸움입니다. 무엇을 믿을 것이냐의 선택이요, 삶이라는 말이에요. 결국 믿음은 복음을 의지할 것이냐, 혹은 율법을 의지할 것이냐의 싸움이에요. 그 선택에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사람들은 그들이 의지하는 것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복음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율법을 믿는 사람들은 율법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율법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절대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오직 자기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려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열정과 수고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반대적인 개념은 자기공로입니다. 자기의 열심과 수고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이루어 드리려는 것이지요. 오직 자기 의지와 능력으로 말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기독신자들이 이런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율법으로 자기들의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지요. 이런 자들은 항상 모든 기준이 자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공로주의가 나오고 공로주의신학이 나옵니다. 은혜는 없는 거지요. 그들은 자기만족에 빠져 하나님을 끌어드리는 겁니다. 이른바 하나님께 자기들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하나님을 맞추는 식이지요.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일 뿐입니다.

 

절대적인 은혜는 자기의 공로와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반면에, 상대적인 은혜는 자기들이 이루어 놓은 공로와 의지만큼 하나님이 보상하신다는 논리입니다. 일종의 자기들의 행적에 따른 반대급부라고나 할까요? give-and-take라는 방식이지요. 이것은 은혜가 아니라 거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래가 아닙니다. 한번도 하나님은 은혜를 가지고 우리와 협상하시거나 거래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거래였다면 전적인 은혜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인 은혜라는 말은 우리의 의지나 열심, 공로나 수고가 전혀 첨가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일하지도 않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일방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만일 일을 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라거나, 혹은 일한 것만큼의 대가를 받은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전적인 은혜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이요, 대가일 뿐입니다. 즉, 삯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은혜는 일을 아니할지라도 거저주시는 혜택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그릇이 되었기 때문에 받는다거나, 혹은 구원을 받을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구원은 은혜의 구원이 아니요, 행위의 구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행위로 구원받을 인간이 세상에 있을까요?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롬3:10). 이른바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지요(롬3:12).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에요(롬3:23).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롬3:24). 한마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만일 누군가 자기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추가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요, 은혜를 받지 못한 자입니다. 이는 여전히 율법의 옷을 벗지 못한 사람입니다. 율법 안에 사는 자들은 모든 기준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항상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살아갑니다. 모든 일에 항상 자기가 왕 노릇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결코 의롭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행위를 그리스도의 구원에 보태려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율법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을 이루어 드리려는 어떤 마음이나 생각은 하나님의 속성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 안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고 앞세우는 자들은 반드시 율법의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복음의 옷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그리스도가 주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안에서 사심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갈2:20). 그 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혹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소중함을 모르는 분이 계시다면 이번 기회에 은혜의 가치를 다시 한번 깨우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복된 하나님의 선물인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아래 사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에서 떨어진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는 율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잊지 마십시다. 이 세 가지의 말이 다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세 가지의 말씀 중에 소중하게 여기는 말씀이 있고, 덜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되는 말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라고 하면 수십만 볼트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충격을 받을 수 있으나,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하면 상당히 충격이 완화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율법 안에서 의로움을 얻으려는 자라고 하면 어떤 충격도 없이 무덤덤하게 받아드릴 수도 있습니다. 같은 의미의 말인데도 말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하여 본문말씀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라는 제목보다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말씀의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소중하고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안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소홀히 여기거나, 가볍게 여기지 말고 오직 은혜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 없으면 나는 살수 없고, 은혜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여,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사모합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가득가득 부어 주시옵소서. 은혜 속에 강건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내 심령에서 고갈되지 않게 하소서.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하게 하시고,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 있게 하소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은혜 안에 사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