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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으로 평화하라(롬12:17-21)-2021.4.11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1.04.10|조회수336 목록 댓글 0

모든 사람으로 평화하라(롬12:17-21)-2021.4.11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야 하고, 너와 나 인간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은 데 인간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믿음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요, 인간관계는 좋으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건강한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역시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균형 잡힌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른바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고, 인간관계도 좋다는 말이지요.

 

로마서12장은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은 자들의 생활윤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1절과2절 말씀은 기독교 윤리를 이루는 대강령과 같은 말씀이요, 3절에서8절까지는 교회봉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성도의 교회 섬김의 자세와 성도들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21절까지는 신령한 삶의 지침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9절에서 13절까지는 하나님사랑과 형제사랑을 다루고, 14절부터21절까지는 이웃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 싶은 말씀은 이웃사랑에 관한 부분입니다. 왜냐면 이 부분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자주 부딪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이웃 사랑이라 함은 친밀한 이웃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다지 친밀함이 없는 이웃은 물론이요, 심지어 탐탁치 않는 모든 이웃을 포함합니다. 심지어 원수 같은 이웃까지도 포함합니다. 무엇보다 믿음이 있건 없건 상관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두워진 세상의 빛으로, 썩어져가는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로마서12장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과의 관계, 더 가까이는 우리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평화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말은 쉬운데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다못해 주차문제나 쓰레기 배출하는 문제 같은 것으로 이웃과 부딪히고 큰 소리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 이웃과의 문제 가운데 가장 큰 이슈가 되는 것은 그들과 평화 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는 말씀으로 전하려고 합니다. 사실 평화는 그리스도인의 덕목 가운데 굉장히 중요한 덕목입니다.

 

노벨상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상입니다. 한 나라의 국격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사용될 정도로 격조가 있는 상이지요. 노벨상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상은 평화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벨평화상은 인류평화를 위해 기여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되는 상이거든요. 사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유와 평화일 것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동물과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만큼 자유와 평화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는 단순히 구호만 외친다고 보장되는 것이 아니지요. 평화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고 상호간 노력이 있을 때 평화가 보장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평화를 지키려는 자들과 깨뜨리는 자들이 공존하고 있거든요. 어떤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촌에서 평화협정을 맺은 사례가 8천 건이 있었으나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화를 지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에요. 때문에 UN도 평화를 만드는 기구가 아니라 평화를 중재하는 기구인 셈이지요. 그러나 UN이 중재해도 지켜지지 않는 것이 평화입니다. 모든 평화는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평화를 가진 자들이거든요. 지구촌에 거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 프랜시스’의 ‘평화를 위한 기도문’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문장입니까? 정말 모든 인간이 이렇게만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기도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구촌은 지금 코로나19와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오대양 육대주에 거하는 모든 나라와 민족이 코로나19와 싸우고 있지요. 그래서 지금 지구촌 어디에도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욕망이 있다합니다. 오래 사는 것, 부자 되는 것, 정복하는 것이랍니다. 사람들은 이런 욕망을 달성하려고 서로를 물고 뜯고 분쟁하며 평화를 깨뜨립니다. 그런데 깨어진 평화 속에서 그런 것들을 차지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평화 없는 소유는 가치가 없고, 평안도 없습니다. 그것은 뜨거운 불을 품고 사는 것과 같거든요. 오히려 고통스러울 뿐이지요.

 

진정한 평화는 무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도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고 경고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 단계로 소개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악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최종적으로는 평화를 도모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5장18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화목의 대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소극적으로는 악을 버려야 합니다(17절상)

 

세상에 평화를 깨뜨리는 주범이 있는데 그것은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시키는 주범입니다. 죄를 주관하는 사단은 평화를 깨뜨리는 주범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을 걷어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죄악을 품고서는 자유하거나 평화할 수 없거든요. 하나님이 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모든 평화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입니다. 모든 평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원하거든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모든 평화는 하나님 안에 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야 해요. 누구든지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면 찾아집니다.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마7:7)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찾는 방법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도록 장치를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행4:12)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지요. 하나님 안에서 발견된 자신의 가장 큰 발견은 자신 안에 있는 더러운 죄악을 보는 것입니다. 죄인의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죄를 토설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그 더러운 죄와 동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마음의 죄악이 거두어집니다. 물론 인간은 여전히 더러운 죄가 이끼처럼 자라납니다.

 

그래서 순간마다 하나님께 자기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요일1:9). 사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세탁을 하고 입었던 옷이 더러워져서 다시 세탁을 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보다 성숙해질 것입니다. 성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성화되어 간다는 말이지요. 비록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모든 죄 가운데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죄 사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주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마음의 죄악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하나님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참된 평화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평화를 얻으려면 하나님을 더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고 신뢰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는 마음의 죄악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죄악을 소멸하는 것이요, 소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평안이 찾아옵니다. 결국 내 마음이 평안해야 다른 사람으로 더불어 평안할 수 있는 겁니다. 내 안에 평화가 없으면 다른 사람을 평화로 초청할 수도 없고, 평화를 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 마음의 악을 품고서는 평화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악으로 선한 일을 도모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선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는 일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면 반드시 악은 악을 낳습니다. 또 다른 악을 생산해내지요. 사실 동양문화 정서는 보복을 당하면 복수하는 문화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식은 일생을 바칩니다. 설령 그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을지라도 복수당한 자의 자식은 다시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됩니다. 이른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악익악 선익선’이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한 자가 있어서도 안되지만, 비록 악을 품었을지라도 악으로 악을 갚으면 안됩니다. 보복하면 안된다는 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납하고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심지어 원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절대 악으로 악을 갚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악을 무기로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누군가 우리를 저주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저주하면 안됩니다. 만일 누군가 우리를 원수처럼 대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원수로 대하면 안됩니다. 비록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들과 다른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하지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사상도 아니요, 믿음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 스데반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자기 동족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가 전하는 복음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불편하게 생각하고 그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때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했던 기도를 아십니까? 그는 너무나 분통이 터지고 억울하지만 그의 기도는 마치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하실 때의 기도와 같았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작은 예수였습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그들을 저주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용서를 구하며 평화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는 악으로 악을 갚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악을 그리스도의 선으로 막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위대함입니다. 결국 그의 기도에 힘입어 변화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일등공신이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 증인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랬던 사울이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데반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가 바울을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스데반 덕분이었다’고 말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진 스데반의 평화를 위한 기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용서를 간구하던 스데반의 평화를 위한 기도가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2) 적극적으로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17절하)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것이 소극적인 권면이라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적극적인 권면입니다. 사도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누가 우리를 핍박할 때 우리가 그를 저주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일입니다. 비록 속으로는 못마땅해도 겉으로 침묵하면 됩니다. 일종의 소극적인 대항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수준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어쩌면 침묵은 비겁한 수준의 반항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것을 주문하십니다. 그런 차원에서 성도는 소극적인 신앙을 버리고 적극적인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옛날 기차가 흔치 않던 시절에 주변에 살던 개구쟁이 어린이들이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일이 더러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별 생각 없이 던지곤 했지요. 그러나 가끔씩 그것 때문에 기차의 유리창이 깨지기도 하고, 승객들의 머리가 깨지는 피해가 일어났던 거예요. 그래서 시간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장난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구쟁이 아이들의 장난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 한분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철로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기차가 지나갈 때 아이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애들아!!! 우리가 저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자’. 그래서 선생님과 함께 아이들이 손을 흔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열차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도 덩달아서 손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손을 흔드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손을 흔들기 시작한 거예요.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질이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그동안 돌멩이를 던지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장난질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손을 흔들며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으로 바뀌자 자연스럽게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질이 없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의식의 전환이요, 발상의 전환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악으로 악을 갚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일지라도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를 이루는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평화는 결코 소극적인 침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평화를 사모하고 평화를 도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설령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지 말고,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 때 불화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참된 평강이 찾아올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19로 인하여 서로가 불편할 때 내가 먼저 평화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평강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평화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만드는 것이에요.

 

(3) 평화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입니다(18)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첫째 단계와 둘째 단계는 조건이 없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아무에게도’라는 말은 어떤 사람도 제한하지 말고 용서의 대상에 포함시키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용서의 대상이요, 화해의 대상이며, 축복의 대상이고 평화의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절대 악으로 악을 공격하거나 복수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검을 든 자는 검으로 망하듯이 악으로 악을 갚으려는 자는 반드시 악으로 낭패를 당합니다. 일종의 부메랑의 법칙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라는 단어에는 조건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이지요. 그런데 18절은 다릅니다.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지요. 여기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은 조건적인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히 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평화를 도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평화의 대상은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것이지요.

 

평화는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평화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이 받아주지 아니하면 어떻게 평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내가 화해를 원할지라도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으면 진정한 화해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평화도 마찬가지지요. 평화는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의 평화는 반쪽짜리 평화인 셈이지요. 진정한 평화는 더불어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가는 곳마다 평화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핍박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그를 미워했던 것이지요. 심지어 그를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믿음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들과 평화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손에 바울은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지요. 이처럼 평화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대상이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악에게 지지 말아야 합니다(21절).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물론 악을 악으로 대항하여 이기는 방법도 있고, 악을 선으로 대항하여 이기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방법으로 악을 이겨야 할까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여기서 ‘선’은 헬라어 ‘칼로스’입니다. 칼로스는 하나님과의 선과 거룩을 의미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은 무조건 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21절의 말씀처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악을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른바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이기면 금방은 이긴 것 같지만 심령이 개운치 않습니다. 악을 악으로 이기는 방법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한마디로 오른뺨을 치면 나도 오른뺨을 치는 방식입니다. 그것도 모자라면 화풀이까지 해서 되갚아 주는 방식이지요.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음에 납덩이보다 무거운 것이 짓누를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모든 사람이 내 마음에 맞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도 있고, 적대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적대적인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 됩니다. 상대방은 나보다 낫게 여기면 트러블이 생길 이유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내 기준과 내 눈높이에서 접근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만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아리따운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해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까 얼굴은 예쁜데 살림은 엉망입니다. 그는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눈이 삐었지, 여자가 얼굴이 전부가 아닌데 왜 내가 그 사실을 잊어버렸을까?’. 결국 그는 그 여자와 이혼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부지런한 여성을 찾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마음에 딱 맞는 부지런한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까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부지런한 것은 좋은데 입까지 부지런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잠시도 쉴 새 없이 지껄였습니다. 더 이상 질려서 살수 없던 남자는 다시 그녀와 이혼했습니다.

 

그는 다시 조용한 여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물론 그녀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도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조용한 것은 좋은데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결국 남자는 그 여자와도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인생은 가위 바위 보와 같구나’. 무슨 뜻이겠습니까? 가위 바위 보는 항상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다는 말이지요. 예컨대 가위는 바위에게 집니다. 그러나 보자기는 이깁니다. 그런데 보자기는 바위에게 이깁니다. 그런데 가위에게는 집니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솔직히 내 마음 나도 모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이 내 마음에 100% 맞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저 그 사람의 나쁜 점과 단점을 보지 말고, 좋은 점과 장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더불어 평화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 주변에 분열과 다툼과 싸움을 부추기는 세력들은 있습니다. 혹시 그 사람이 내가 아닌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하늘의 평화를 맛본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평화를 모든 이에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이로 더불어 평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림으로 모든 이들에게 이 평화를 증거 하는 사명자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전달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평화의 현장이 되고, 나와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참된 평화를 널리널리 전파하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지구촌을 위한 평화의 기도를 드리십시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온 세상을 덮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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