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한 추수를 얻으라(슥8:9-13)-2021.7.4
이스라엘의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나라와 족속의 운명이 다 마찬가지지만 특히 이스라엘의 운명은 더욱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친밀하면 하나님이 책임지고 보증하사 복을 주시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자기 백성들이라도 징계하셨습니다. 징계를 주시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사생자는 징계가 없는 법이거든요. 그래서 히브리서12장8절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시지요.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치가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치지요. 그래서 그들은 항상 거룩한 부담감을 갖고 살아야 하는 민족이지요.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라도 징계하실 수밖에 없는 거예요. 솔직히 자기 자녀가 바르지 못한 길로 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바른 길을 가기 위해 때로는 회초리로, 때로는 몽둥이로 훈육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순간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요. 그만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스가랴는 1차포로 귀환 시에 유다로 돌아와서 학개 선지자와 동시대에 예언활동을 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베레갸요, 할아버지 잇도는 제사장이었습니다(느12:4). 당시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인들의 우선목표는 성전재건입니다. 그래서 성전재전에 착수하여 기초를 다지고 열심을 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주변 사마리아인들의 조직적인 방해공작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성전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스4:24). 그리고 그들은 서서히 초심을 잃어버린 채 성전건축이라는 역사적인 사명마저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역사적으로 정리해보면, BC538년경에 바사 왕 고레스는 칙령을 통해 유다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조서를 내립니다. 이 조서에 따라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위시한 지도자들과 대략 5만 명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지요(스2:64-67). 그리고 그들은 고레스 왕 2년2월(BC536년)에 성전건축의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스3:8). 그러나 성전재건이 쉽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중단되고 말았지요. 무려 15년 동안 성전건축이 중단된 것입니다. 성전건축이 중단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정체성이 흔들린 것입니다. 믿음이 흔들린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와 학개 선지자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성전건축에 불을 지피게 하신 것이지요. 물론 이 두 선지자에게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건축하라고 독려한 반면에 스가랴 선지자는 눈이 보이지 않는 성전 재건을 독려한 것이지요. 그래서 스가랴서는 미래의 성전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고통 속에서도 성전을 재건할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고취시켜주는 것이지요. 그만큼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중심의 신앙이거든요. 성전중심의 신앙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성전에 두시고, 당신의 마음을 성전에 두고 계십니다. 그래서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이 성전을 재건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성전에 대한 열정을 갖고 계셨던 것이지요. 결국 중단되었던 성전은 BC521년 다리오왕의 즉위로 건축이 독려되고, BC516년에 완공을 보게 됩니다. 성전건축은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전도 마찬가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성전은 더욱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은 성령이 거하시는 각 사람의 심령성전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성전재건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각 심령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을 떠나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시는 것이 회복이에요. 하나님은 그런 회복을 원하십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회복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복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1)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
8장2절에 보면, 하나님이 시온으로 돌아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지요. 하나님이 돌아오시는 것이 회복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산 시온은 성산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예루살렘 길거리에 지팡이를 든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입니다(4절). 그리고 성읍에는 동남동녀들이 가득하여 장난을 칠 것입니다(5절). 그동안 파괴된 예루살렘의 길거리에는 사람이 없었지요. 노인도 없고, 젊은 아이들도 없었어요. 평화의 도성이었던 예루살렘이 적막강산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그 시온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돌아오신다는 것입니다(3절). 그리고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실 것입니다. 이제 다시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으로 회복이 될 것입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의미하지요. 그동안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방과 서방에서 몰려올 것입니다(7절). 예전의 영광을 다시 찾게 된다는 말이지요. 사람들 눈에 보이는 그런 광경은 정말 기이한 일이 될 것입니다(6절). 물론 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것은 결코 기이한 일이 될 수 없겠지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런 예루살렘의 회복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 것일까요? 분명히 회복에 대한 분깃점이 있을 것입니다. 회복의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회복의 분깃점이 무엇일까요? 9절을 보십시다. 이른바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하려고 지대를 쌓던 날’을 하나님이 기억하신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백성들은 성전건축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폐허가 된 예루살렘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소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려는 열정뿐이었던 것이지요.
때문에 그들이 도착하여 자기들의 살 거처를 마련하거나 살 궁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성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를 기억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지대를 놓던 날을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받으신 것이지요. 비록 그들이 가진 것은 없었을지라도 오직 마음을 다하여 성전의 지대를 쌓을 때를 하나님이 보고 계셨고 감격하신 것이지요.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업적이나 결과를 보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거든요. 지금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거든요. 우리의 보잘 것 없는 행실이라도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세요. 그것은 바로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는 것을 보시고 감동하시던 주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이 성전건축의 지대를 쌓던 날을 잊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 손을 견고히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낙심치 말고 담대하게 전진하라는 말이지요. 당연히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이지요. 오직 그 하나님만 믿고 담대하게 추진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약속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성전의 지대를 쌓던 날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환점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전에’(10절상)라는 말과 ‘이제는’(11절, 13절)이라는 말을 비교하여 사용하고 계십니다. 10절의 ‘그날 전에는’라는 말은 성전의 지대를 쌓기 전을 의미합니다. 성전의 지대를 쌓기 전에는 예루살렘이 엉망진창이었지요. 한마디로 폐허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때는 사람들이 삯을 얻지 못했습니다(10절). 한마디로 일거리도 없었거니와, 일을 할지라도 삯을 줄만한 형편도 못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일을 해도 열매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당시 예루살렘은 사람이 살수 없는 죽음의 도성과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짐승도 일은 하지만 먹을거리가 없었어요. 예루살렘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씨를 뿌리고 밭을 갈아도 얻는 것이 없고, 일한 짐승들도 먹을거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입에 풀칠 할 것이 없으니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다 비참했던 것이지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대적들 때문에 출입을 할 수 없었어요. 하나님이 뭇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셨거든요(10절하). 한마디로 사람이 살수 없는 무서운 도성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평화의 도시가 아니었던 거예요.
예전의 예루살렘의 영화를 아십니까? 예루살렘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가장 성스러운 도시입니다. 신앙의 중심지요, 어머니의 젖줄 같은 도성이지요. 온 세상의 예배의 중심지가 되는 예루살렘은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그랬던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지 않고 불순종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 그 예루살렘의 영광을 다시 회복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죽음의 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도성으로 회복해주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성전의 지대를 쌓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성전건축이 완성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결과는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회복에 대한 언약을 미리 해주시는 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우리의 드러나는 결과물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일하기 시작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전이 건축된 것으로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시고, 성전을 건축하기로 작정하고 삽을 뜨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엇이든지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에요. 무슨 일이든지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결단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돌이키는 순간 하나님은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비록 그것의 결과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집중하는 순간부터 일하기 시작하시지요. 그래서 시작이 중요한 거예요. 우리가 시작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지대를 놓던 날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2) 성전지대를 놓을 때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이 성전 건축의 지대를 놓는 순간 이스라엘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시작된 거지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한 순간이요, 하나님을 위해 영광을 돌리기로 결단한 순간이지요. 그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로 작정한 거예요. 이른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에 대한 걱정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고 영광을 두신 성전을 건축할 마음뿐이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과 정성을 받으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육신의 사람들이었으면 자기들이 먼저 살아갈 궁리부터 했을 테지요. 일단 자기들이 살 수 있는 터를 확보하고, 여유가 있으면 성전을 재건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돌아오자마자 성전재건 할 생각만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 일부터 추진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것입니다. 사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의 삶의 획기적인 변화가 시작됩니다. 물론 그 변화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었지요. 문제는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실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하고 시행치 않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그대로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감동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행동에도 크게 감동하십니다. 우리의 작은 행실에 민감하시고 격한 반응을 보이십니다. 물론 그들이 성전의 지대를 쌓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려 15년간이나 건축이 중단되었지요. 시작과 달리 과정이 신통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과도 신통치 못했지요. 그러나 일을 시작하기로 작정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감동은 시작되고 하나님의 역사는 추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작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요. 아무리 좋은 꿈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언약하신 변화는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예전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 새로운 방식은 전일과 같이 아니하실 것입니다(11절). 완전한 변화를 추구하시는 것이지요. 가장 구체적인 변화는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12절상). ‘평안한 추수’는 과연 어떤 추수를 말하는 것일까요? 추수가 불편한 추수가 있고, 평안한 추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있습니다. 모든 소득이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의를 겸한 소득도 있고, 불의를 겸한 소득도 있습니다.
추수도 마찬가지에요. 추수는 좋은 것이지만 의를 겸한 추수가 있고, 불의를 겸한 추수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의의 추수는 마음이 평안하고 삶도 평안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추수는 마음이 불편하고 삶에 평안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평안한 추수’를 약속하십니다. 12절의 말씀하십니다.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평안한 추수’를 얻게 하십니다.
(3) 평안한 추수를 약속하시는 하나님
불편한 추수는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삶을 부담스럽게 합니다. 마음에 흡족함이 없습니다. 그런 추수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지요. 차라리 없는 편이 낫습니다. 그런 추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마비시키고, 인간관계도 파괴시킵니다. 오히려 그런 추수의 열매 때문에 가정이 분열되고, 너와 나의 관계가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이 됩니다. 이른바 그런 추수는 불편한 추수요, 불안한 추수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런 추수는 자기 힘으로 능으로 얻는 추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추수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닥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 추수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안한 추수’는 다릅니다. ‘평안한 추수’는 하나님이 주시는 추수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추수는 ‘평안한 추수’입니다. ‘평안한 추수’는 ‘불편한 추수’와 다르고, ‘편안한 추수’와도 다릅니다. 혹시 ‘평안한 추수’를 ‘편안한 추수’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절대 다릅니다. ‘평안한 추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지만, ‘편안한 추수’는 육신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거든요. 때문에 모든 평안함은 편안함을 수용합니다. 그러나 모든 편안함이 평안함을 수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은 편안한데 마음이 평안치 못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마음이 평안하면 육체의 편안함은 따라오는 법이지요.
그래서 본문은 편안한 추수가 아니라 ‘평안한 추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안한 추수’는 자기들의 수고나 노력으로 얻는 추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얻어지는 추수입니다. 이른바 ‘얻어지는 추수’요, ‘이루어지는 추수’이지요. 때문에 ‘평안한 추수’는 마음에 어떤 거리낌도 없고, 불편함이 없는 것입니다. 추수의 평안은 양적인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평안한 추수’는 마음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합니다. 영혼이 얼마나 행복하고 편한지 모릅니다. 비록 소득은 없을지라도 마음이 평안합니다. 가진 재물이 없을지라도 심령이 평안하지요. 그런 추수는 소득이나 결실과는 상관이 없거든요.
그런 추수는 하박국 선지자가 외치던 추수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절). 이런 추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안한 추수’를 약속하십니다. 그 ‘평안한 추수’는 어떤 추수일까요? 12절을 읽어보십시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12절하).
한마디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추수하는 방식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얼마나 마음을 졸이겠습니까? 하다못해 하늘에서 비를 내리지 않으시면 애간장이 타들어가겠지요. 우리는 씨 뿌리는 순간부터 나지 아니할까 걱정하고, 추수 때에는 거두지 못할까 염려할 것입니다. 한시도 마음 평안한 날이 없겠지요. 때문에 그 추수는 마음을 졸이는 근심의 열매가 될 것이요, 눈물의 씨앗이 될 것이며, 눈물의 결실이 될 것입니다. 그 추수 열매 속에 우리의 눈물과 고통과 근심과 괴로움이 다 들어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평안한 추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이 하시는대로 기다리는 추수입니다. 그런 추수는 시작부터 결실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되어지는 추수입니다. 그래서 어떤 근심이나 걱정이 없는 추수지요. 추수로 인하여 자기를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추수를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거두게 하신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마음이 평안하지요. 하나님이 추수케 하시니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고 적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냥 주신 것에 감사하고, 주신 만큼 감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추수는 ‘평안한 추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거두려고 하는 추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작도 내가 하고, 결실도 내가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수고와 자랑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땀 흘린 수고를 자랑하고, 자기의 열심과 부지런함을 자랑하지요. 때문에 평안할 수 없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자기를 자랑하고 마음이 평안하던가요? 솔직히 돌아보면 양심이 부끄럽고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랑하면 영혼이 얼마나 평안한지 모릅니다. 추수도 마찬가지에요. 자기중심적인 추수를 원하는 사람은 평안이 있을 수 없어요. 마음이 정말 불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두게 하시는 추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한 추수’는 열매와 결실과 상관없이 평안합니다. 영혼 육이 평안합니다. 지난 육 개월을 돌아보십시다. 금년 상반기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여기는 사람, 추수열매를 하나님이 주신 추수라고 여기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자기 주관으로 된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가졌어도 평안이 없고, 얻었어도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평안한 추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평안한 추수’를 약속하셨습니다(12절). 최고의 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다 ‘평안한 추수’에 참여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추수를 믿는 자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한 추수’에 참여한 사람이요, 그렇지 않는 자는 편안한 추수는 거두었을는지 몰라도, ‘평안한 추수’는 맛보지 못한 자일 수 있습니다. 금년 상반기를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평안한 추수’에 참여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평안한 추수’는 누리는 추수입니다(12절하). 누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하셨던 것을 인정하고 즐기는 것이지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13절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이방가운데 저주거리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이 어찌 이방인의 손에 노략거리가 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자기들도 창피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수치가 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이 저주받는 것을 친히 목도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성하게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만만하게 볼 것입니다. 이른바 별 볼일 없는 민족으로 본다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그들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그들의 자존심은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주변에 있는 열방들이 이스라엘은 그냥 그렇고 그런 민족으로 치부해 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13절). 그들의 실추되었던 명예를 높여주시고, 그들의 무너진 자존심을 세워주시겠다는 말입니다. 땅바닥에 떨어진 그들의 위상을 높은 곳으로 올려주시겠다는 것이지요. 완전한 회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감동케 한 작은 행동하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는 기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재기에 성공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대사를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반전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축복하시겠다고 언약하십니다(13절).
더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는 것뿐입니다. 이른바 두려워하지 말고 손을 견고히 하는 것이지요(9,13절). 그 말씀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믿고 온전히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두려움은 무엇이든지 자기 스스로 하려고 하는 욕망의 바이러스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 맡기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내안에 있는 모든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믿음의 최대의 적인 것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모든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평안한 추수’를 주실 하나님만 신뢰하면 모든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또한 모든 열방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근심이나 걱정이나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결국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같이 갈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믿음의 대적은 의심이요, 두려움입니다. 믿음은 모든 두려움을 걷어내고, 모든 의심을 몰아내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언약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본문13절에서 ‘손을 견고히 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믿음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13절의 ‘손을 견고히 하라’는 것은 믿음의 다짐이요, 결단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노라 할지라도 손을 견고히 하지 않고 연약해지면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믿노라면 반드시 손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손은 사람의 행동을 나타내는 수단이요, 도구거든요.
사람은 손으로 행합니다. 손은 행동을 나타내지요. 그래서 손을 견고히 하라는 것은 행동을 단호하게 하라는 것이에요. 담대한 행동을 하라는 것이지요. 두려움은 마음으로 나타내는 믿음의 흔적이요, 손을 견고히 함은 외적으로 나타내는 흔적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의 현장에서 손이 연약하여 떨어진다면 살아있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진짜 살아있는 믿음은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외적으로 연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건강한 믿음이 되고, 균형 잡힌 믿음이 되는 것이지요.
입으로는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하면서 실제 두려움에 연약해진다면 하나님의 언약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행하실 언약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회복하셔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도로 찾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감동시킬만한 기폭제가 필요합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그런 것을 경험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반전드라마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시기도 합니다. 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백성을 축복하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쉽게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보증하시고 책임지고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요, 끝없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상반기 6개월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예배드립니다. 그것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하반기 6개월을 살아가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유월절을 통해 받은 은혜를 감사하고, 맥추절을 통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장차 우리에게 허락하실 은혜를 감사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3대절기의 감사정신입니다. 이른바 유월절은 에벤에셀의 감사요, 맥추절은 임마누엘의 감사며, 추수감사절은 여호와이레의 감사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결코 감사가 중단될 수 없습니다. 감사는 절기와 상관없이 일 년 365일 동안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편이나 상황에 개의치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비록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께 감사치 못했을지라도 이번 기회에 감사를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평안한 추수’를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추수가 축복은 아닙니다. 반드시 ‘평안한 추수’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평안한 추수’는 하나님이 위로부터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추수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