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으면 잃으리로다(창43:13-22)-2021.7.11
인간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일중에 하나가 자기의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가진 것을 포기하는 것은 말로는 쉽지만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내려놓기만 하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고 끝나는데도 불구하고 가진 것을 내려놓지 못해서 더 큰 것을 잃어버리고 화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문제는 우리가 내려놓지 못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자신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작 내려놓아서는 안 될 것은 너무 쉽게 내려놓고, 내려놓아야 할 것들은 꼭 붙들고 살아가지요.
한마디로 보배로운 것은 너무 쉽게 내려놓고, 쓰레기같이 별 볼일 없는 것들은 내려놓으면 죽을 것처럼 붙들고 시름하며 살아간다는 말이에요. 사실 인생의 승패는 분리수거를 통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미련 없이 버리고, 버려서는 안 될 것은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붙들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무엇보다 영적인 것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은 목숨보다 귀하게 붙들어야 해요. 그런데 미련한 인간은 자꾸만 거꾸로 살아가지요. 신령한 것은 쉽게 내려놓고 포기하면서, 땅에 속한 부질없는 것들은 내려놓지 못해 안달부달하지요. 대부분의 인간들이 다 마찬가지에요.
문제는 영적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유한한 존재에요. 사실 성경에 욕심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사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야곱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에서의 발꿈치를 붙들고 태어난 사람이에요. 간발의 차로 동생으로 태어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이지요. 그만큼 강렬한 욕심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이 남의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요(창25:26), 남을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창27:36).
무엇보다 그는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지나친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장자에 대한 부러움으로 한 맺힌 세월을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말이에요.
(1) 야곱의 콤플렉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기회가 찾아 온 것입니다. 동생으로 태어난 것을 보통 사람 같으면 타고난 운명으로 받아드리고 살아갈 터인데, 욕심쟁이 야곱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운명을 바꾸는 모험을 강행합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야곱이 집에서 팥죽을 쑤고 있었는데 들에서 일을 하던 형 에서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팥죽은 배고픈 에서의 식욕을 자극했습니다. 에서는 팥죽을 먹게 해달라고 야곱에게 부탁하지만 욕심쟁이 야곱이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순간 간사한 야곱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팥죽과 장자권이 서로 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야곱은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다소 엉뚱한 거래를 제안합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거래였지요. 팥죽 한 그릇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자는 것입니다(창25:31). 이른바 장자의 명분을 팔라는 것입니다. 배고픈 형 에서의 마음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지요. 참으로 치졸한 거래를 제안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거래가 의외로 쉽게 성사가 되고 맙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배고픔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거래에서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의 식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게 됩니다. 역시 육신의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에 대한 것이 우선순위라는 것을 말입니다. 인간의 기본욕구 가운데 가장 으뜸되는 욕구는 식욕입니다.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에서는 식욕의 욕구를 이겨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깨달음은 사람이 자기 입으로 고백한 것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한마디로 입술의 고백이 곧 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약속이 얼마나 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야곱의 거래가 장자권에 대한 사모함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이른바 야곱의 욕구는 영적인 장자권에 대한 사모함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야곱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초월하여 성사시키는 냉혈인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빼앗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장자권을 쟁취한 후에 늙은 아비의 축복권까지 강탈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아버지를 속여 축복권까지 빼앗간 것을 알아차린 에서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지요. 결국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다짐합니다. 형제간의 피의 혈투가 불가피했던 것을 듣게 된 어미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 야곱은 밧단아람 외갓집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지요. 하지만 야곱은 외갓집에서 삼촌 라반을 통해 또 다른 인생을 배우게 됩니다. 기는 놈 위에 나는 놈을 만난 셈이지요. 자기보다 한 수 위의 삼촌의 꼼수를 야곱이 당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야곱은 삼촌으로부터 사랑에 속고, 시간에 속고, 재물에 속았던 것입니다. 물론 야곱도 자기 삼촌을 속임수로 되갚아주었지요. 야곱의 버릇이 어디 가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에 복을 더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을 서서히 변화시켜 가십니다. 한마디로 야곱의 욕심을 내려놓게 하시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야곱은 디나의 강간사건을 계기로 인생에 집착하며 살아온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은 디나의 강간사건을 계기로 야곱에게 남아 있던 인간적인 욕망과 집착하는 모든 근성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 나가셨던 것이지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라헬의 죽음과, 장남 르우벤의 자기 첩 빌하 간통사건, 그리고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아들 요셉의 실종 등 하나님은 야곱이 집착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하심으로 연단해 가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야곱을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해 가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야곱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이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풍랑 이는 바다와 같았던 것이지요. 어쩌면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는 야곱의 천연적인 성품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 안에 자기가 집착하는 영역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온 야곱의 삶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자기 고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에요. 그래서 노년까지 힘든 세월을 살았던 것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안에 자기의 영역이 남아 있는 한 하나님 우선주의로 살 수 없어요. 그러면 평안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끝까지 야곱이 집착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가 유난히 사랑했던 막내아들 베냐민을 끝내 내려놓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가 베냐민을 내려놓는 것, 그리고 인간적으로 사랑에 집착했던 라헬을 포기하고 레아와 함께 묻히기를 원했던 것, 이른바 화려한 애굽에서 묻히기를 거절하고 가나안에 묻히기를 소망한 것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지요. 결국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2) 야곱의 기질을 바꾸시는 하나님
본문에서 우리는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과 요셉을 잃은 후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혈육 베냐민을 포기해야 하는 결단의 순간에 이르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동안 야곱은 베냐민에게 온갖 애정을 다 쏟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베냐민마저 내려놓아야 할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인생에 가장 아픈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된 것이지요. 야곱은 인생의 노년에 사랑하는 아들까지 빼앗겨야 할 처지에 이른 거지요.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향하신 마지막 내려놓음이 아닐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당신보다 더 사랑하고 집착하는 어떤 것도 용납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알다시피 야곱은 12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은 자기 형들의 질투를 받고 미디안 상고에 은 이십을 받고 팔려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요셉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리게 되지요. 참으로 기구한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을 형통케 하신 것입니다. 그는 결국 애굽의 2인자가 되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지요.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요셉을 지혜롭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지혜로 말미암아 애굽은 일곱해 풍년을 맞이하고 일곱해 흉년을 대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요셉의 예언대로 애굽을 위시한 온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아주 심각한 기근이었지요. 결국 각 나라 백성들이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찾아옵니다. 가나안 땅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가나안에 살고 있던 야곱의 가족들도 기근으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서 식량을 구해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야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야곱의 아들 열 명이 식량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다만 일행 중에 베냐민만 빠진 것입니다. 이유가 다소 황당합니다. 혹시 베냐민에게 재난이 미칠까봐서 그런 것입니다. 창세기 42장4절에 보면,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을 그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이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함이었더라”(42:4). 참으로 기가 막힌 이유이지요. 물론 그 생각은 야곱의 생각입니다. 야곱이 그만큼 베냐민을 사랑했던 것이지요. 베냐민은 야곱의 막내아들입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의 친동생이지요.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유난히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통해 얻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요셉은 잃어버렸지만 베냐민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애지중지 아꼈던 아들이 베냐민이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야곱의 아들 열 명이 애굽으로 식량을 사러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애굽의 총리 요셉 앞에 나아가 엎드려 절을 합니다. 물론 야곱의 아들 열 명은 요셉을 모르지만 요셉은 금방 자기 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옛날 요셉이 꿈을 꾸던대로 이루어진 것을 본 것이지요.
요셉은 꿈쟁이었습니다. 어릴 적 요셉은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결국 형들에 의해 미디안 상고에게 팔렸던 것이지요. 형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요셉의 생명을 보호하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원수 같은 형들이 지금 요셉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마도 자기가 전에 꿈꾸던 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짜릿한 전율을 느꼈을는지 모릅니다.
요셉은 한눈으로 자기 형들임을 알아차렸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했습니다(8절). 자기 형들을 알아본 요셉은 그들 중에 친동생 베냐민이 없음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동생 베냐민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입니다. 순간 요셉은 소년시절에 꾸었던 꿈을 기억했습니다. 분명히 열한 별이 엎드려 절하는 꿈을 말입니다(창37:9). 그러나 그 앞에는 지금 열 개의 별이 엎드려 절하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 나라를 엿보러 온 정탐꾼이라는 누명을 씌워 베냐민을 데려오게 한 것입니다. 자기 친동생 베냐민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지요.
아무리 자기 형들이 정탐꾼이 아니라고 변명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자기 친 동생 베냐민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셉은 말째 아우를 데려오지 않으면 애굽에서 나갈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삼일동안 억류시켜 버렸습니다(17절). 그리고 삼일간의 억류가 끝난 후에 요셉이 그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만 볼모로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서 말째 아우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들이 과거 자기들이 행한 죄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 일어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예전에 요셉에게 했던 못된 행실대로 지금 자기들이 당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장남 르우벤은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죄를 범하여 죗값을 지금 치르고 있다고 책임을 전가합니다(22절). 항상 무슨 일이 터지면 인간들은 이런 복기를 합니다. 이른바 자기 말을 듣지 않아서 상당한 보응을 받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의 방언을 모르는 줄 알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요셉이 모를 리 있습니까?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요셉의 마음은 하염없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 밖에서 울고 들어온 것입니다.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결국 요셉은 둘째 아들 시므온을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여 억류했습니다(24절). 그리고 나머지는 곡식을 채워서 집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더 큰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던 야곱의 아들들이 객점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어보다가 깜짝 놀란 것입니다. 곡물 자루에 보니 곡물 값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돈뭉치로 인해 근심했습니다. 자칫하면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가나안에 돌아온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의 걱정은 더해만 갔습니다. 그는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는데 또 다시 애지중지 아끼는 베냐민까지 빼앗아가고자 하냐고 역성을 냅니다. 다들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고 해를 끼친다는 것이지요(36절). 야곱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노년에 야곱의 마음이 영 편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야곱의 근심이 아주 편파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야곱의 근심은 오직 베냐민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애굽에 볼모로 잡혀 있는 시므온에 대한 걱정보다는 베냐민에 대한 걱정뿐이었던 것이지요. 사실 시므온도 지금 애굽에 억류되어 있으므로 아버지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여야 할 텐데 야곱은 시므온의 관심보다는 오직 베냐민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었던 거예요. 이는 야곱의 육신적인 한계입니다. 야곱의 편협적인 사랑은 오히려 깊은 상처만 남겼었지요. 사실 요셉도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말미암아 형들의 질투를 받아 잃어버린 거지요. 그런 사실을 아버지 야곱은 아직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의 마음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아직 그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없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마음이 야곱에게 있었다면 그럴 수 없거든요. 하나님의 마음은 편협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편애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치우침이 없는 공평한 사랑이요, 공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야곱은 육신적인 마음이 앞선 사람이요, 육신적인 생각이 앞선 사람입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은 내려놓게 하시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의 만져주시는 작업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고집으로 집착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하시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인간의 모난 부분을 하나님의 말씀의 정과 끌로 다듬어 가시는 것이에요.
도저히 베냐민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야곱을 장자 르우벤이 중재하고 나섭니다. 아버지 야곱을 위로하며 나선 것이지요. 자기가 책임을 지고 시므온을 데리고 올 테니까 베냐민을 맡겨주시라는 것입니다. 만일 시므온을 데려오지 못하거나 베냐민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진다면 자기의 두 아들들을 죽이시라는 맹세까지 합니다.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3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생각은 단호했습니다. 결코 베냐민을 데려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38절). 어쩌면 고집스러운 아버지 야곱과의 밀당 게임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 야곱의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습니다. 보통 고집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에게 또 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이 애굽에서 사온 식량이 다 떨어져 간 것입니다. 다시 그들은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가야할 형편에 처한 것이지요. 아버지 야곱은 다시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야곱은 끝까지 베냐민을 데려가라는 말을 안합니다. 그때 다시 유다가 나섭니다. 만일 아우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우리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43:3-5). 아버지와 담판을 벌인 거지요. 그러자 야곱이 다시 궁색한 질문을 합니다. 어찌하여 아우가 있다는 말을 그 사람에게 했냐는 것입니다(43:6). 야곱은 끝까지 베냐민을 내어주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시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자기 몸을 담보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43:9). 한마디로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지요.
(3) 내려놓음의 축복
그러자 야곱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애굽 총리에게 가져갈 선물까지 준비하라고 시킵니다. 그 선물은 가나안 땅의 아름다운 소산입니다. 유향과 꿀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입니다(11절). 그리고 자루 속에 들어 있던 돈을 배나 더 가지고 가서 식량을 구해오라는 것입니다. 전에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을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 막내 아들 베냐민도 데리고 가라는 것입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십시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그의 고백이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는 것입니다(14절). 그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것이지요. 기근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음을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내리시면 아들을 얻을 것이요,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잃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동안 무엇이든지 자기 고집을 앞세우고 자기 힘으로 밀어붙였던 야곱이 달라진 것입니다.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는 고백은 야곱의 자기 포기선언입니다. 야곱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야곱의 마음은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정말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알다시피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욕심이 많은 사람이잖아요. 세상말로 잔머리에 능하고 꾀가 많은 사람이지요. 그런 야곱이 변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베냐민을 잃으면 잃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백기를 든 것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성정으로 볼 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지요. 그러나 이 마음은 단순히 자기를 포기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 앞에서 은혜를 베푸사 다른 형제들과 베냐민을 반드시 돌려주실 것을 믿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그의 믿음이 그의 마음을 내려놓게 한 거예요. 무슨 일이든지 내려놓으면 길이 보입니다. 그리고 답이 나옵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꼬이고 풀리지 않는 것은 자기 것을 내려놓지 못함이에요. 우리가 우리 가진 것을 내려놓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가 잃으면 잃으리라는 다짐을 할 때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의 내려놓음으로 인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베냐민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의 호의와 환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베냐민이 야곱의 아들들과 애굽의 총리 요셉 사이를 연결해주는 중보자가 된 것이지요(16절). 무엇보다 이 문제가 쉽게 풀리게 된 것은 야곱의 내려놓음 때문입니다. 만일 야곱이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못하도록 고집을 피웠다면 과연 이 문제가 어떻게 풀렸을까요? 쉽게 풀릴 수 있었겠습니까?
야곱이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내어놓음으로 말미암아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 요셉을 다시 얻었고, 억류되었던 시므온을 다시 석방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양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얻은 요셉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일생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야곱의 가정에 일대변혁이 일어나게 된 것이지요. 야곱의 가정에 진정한 평화가 나타난 것입니다. 형제간의 화해가 일어나고 평화가 일어난 것이지요.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해졌습니다. 심지어 형제들이 사랑의 끈으로 결속이 된 것입니다.
최종적으로는 야곱의 일가족을 요셉이 애굽의 고센 땅으로 초청하여 기근을 면하게 하고, 한 민족을 이루는 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46:7). 한마디로 드라마 같은 야곱의 축복이 시작된 것이지요. 야곱의 일가족 70명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야곱의 내려놓음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것이지요. 다만 야곱의 모난 부분을 말씀의 정과 끌로 일생동안 다듬어 사용하신 것입니다.
결국 노년에 야곱의 모든 근심이 사라졌습니다. 창세기 45장 27절은 야곱의 기운이 소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고 기록합니다. 애굽 총리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초청하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 기운이 소생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죽었던 아들 요셉이 살아있는 것도 축복인데 그 아들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기들의 기근을 해결해주고 장막 터까지 제공해 주었으니 더 이상 무슨 소원이 있겠습니까? 이는 야곱이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 인하여 받게 된 축복입니다.
대부분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고집하던 것을 내려놓으면 의외로 문제가 쉽게 풀립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기 가진 것을 붙잡고 내려놓지 못하면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치고 화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어도 육신의 즐겨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니다. 물론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나를 성전 삼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마음을 주사 나로 하여금 육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다만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과 마음으로 그분께 집중하여 주가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나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내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도록 그분께 내 마음과 생각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