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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단을 수축하라(왕상18:30-40)-2021.7.18

작성자최규진|작성시간21.07.17|조회수208 목록 댓글 0

무너진 단을 수축하라(왕상18:30-40)-2021.7.18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선지자 사백 오십 명과의 유명한 갈멜산 전투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대리한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신을 대리하는 선지자들과의 영적전투이지요. 갈멜산 전투는 너무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합니다.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그 전쟁에서 엘리야가 완승을 거둡니다. 사실 이 전투는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는 최고의 전투요, 여호와의 종교가 부활되는 대사건이었던 것이지요. 당시 아합 왕은 우상숭배에 젖어 부패하고 타락한 정권의 원흉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준비하셔서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회복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포악무도한 우상숭배의 괴수 아합 왕의 정권 밑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엘리야 선지자야 말로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하나님의 참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불의한 아합 왕의 정권 밑에서 굴복당하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여호와의 신앙을 되살리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을 깨우는 하나님의 참 선지자였던 것이지요. 엘리야는 결국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갈멜산 전투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영웅시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어진 것이지요. 결코 엘리야의 용기도 아니요, 엘리야의 능력도 아닙니다.

 

물론 엘리야가 한 시대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감당했던 전설적인 인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엘리야 개인을 칭찬하고 싶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위인도 아니요, 영웅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약한 엘리야를 들어서 하나님의 강한 용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할 뿐입니다. 아합 왕의 폭정 밑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마치 국교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어찌 이 지경이 되었단 말입니까?

 

그만큼 한 사람의 지도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당시 바알종교는 아합 왕의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세력을 크게 확대해 나갔습니다. 무엇보다 바알을 믿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이스라엘에 여호와의 신앙이 퇴락하고 바알종교가 이스라엘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무너져가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다시 회복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도 악한 시대에 남은 자를 준비해 두셨던 것이지요.

 

(1) 하나님의 단을 무너뜨린 아합과 이스라엘

 

당시에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입 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의 신실한 자들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왕상19:18). 그리고 그 중앙에 엘리야가 있었던 것이지요. 엘리야라는 당대에 가장 능력 있는 선지자를 예비하셔서 꺼져가는 여호와의 종교를 다시 회복시키는 불씨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 엘리야를 아합 왕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오죽하면 아합 왕은 엘리야를 향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왕상18:17)라고 힐난했겠습니까? 그러나 정반대였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만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사단의 주범이었던 것이지요.

 

드디어 엘리야와 아합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어차피 함께 갈수 없는 거짓 신과의 한판 대결이 불가피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아합은 자기가 믿는 바알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았습니다(18:20). 갈멜산은 당시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장소였지요. 그들이 천둥과 비의 신을 상징하는 바알신의 본거지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먼저 모든 백성들 앞에서 갈멜산 전투의 대결을 선언합니다. 일종의 선전포고지요. 엘리야는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가 과연 어느 때까지 하나님과 바알 신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고 책망합니다(21절). 한마디로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고 촉구합니다. 왜냐면 그동안 이스라엘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한편으로는 바알 신을 섬기면서 줄타기를 하고 살았거든요.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지요. 이른바 삼년 반 동안 극심한 기근에 시달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기근을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영이 죽었으니 분별력이 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에 대해 철저히 죽은 자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를 알 턱이 없지요. 그래서 왕의 체통을 걸고 기근을 해결해 보려고 발버둥을 친 것입니다. 물을 얻기 위해 수맥까지 탐색하는 열심을 냈던 거지요. 5절을 보십시오.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러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한마디로 수맥을 찾아다닌 거예요. 그것도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짐승에게 마실 물을 구하다니요.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왕이 아닙니까?

 

아합은 기근을 하나님의 징계로 여기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발버둥을 친 것입니다. 오히려 아합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는 데만 국정의 모든 에너지를 허비한 거예요. 때문에 그 땅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전멸될 위기에 처한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시대마다 당신의 남은 자를 예비하셔서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당시에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갈멜산 전투의 대리인으로 사용하신 것이지요.

 

마침내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 선지자들의 생명을 건 혈투가 시작됩니다. 참 선지자와 거짓선지자를 분리하는 전투였지요. 물론 전투의 목적은 달랐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했지만, 엘리야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의 이름을 원수들의 목전에 드러내기 위해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전포고를 엘리야가 먼저 한 것입니다(19절). 그 말을 들은 아합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소집합니다(20절). 그리고 엘리야가 자기 백성들 앞에서 모두 발언을 합니다(21절). 갈멜산으로 소집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지요.

 

엘리야는 그들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의 결단촉구는 비장했습니다. 마치 그 옛날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마지막 결단을 촉구하던 그 때의 결기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서24장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수아의 마지막 메시지를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나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을 섬기든지 혹은 가나안의 우상을 섬기든지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우물쭈물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우상을 섬기든지 양단간에 결정해야 합니다. 어쩌면 여호수아의 결단촉구나 엘리야의 결단촉구가 개인의 신앙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회복하는 큰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결단 촉구를 전적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들은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수24:16절). 그런데 엘리야의 결단촉구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21절하).

 

그만큼 시대적으로 이스라엘의 영적상태가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이 죽은 것이지요. 하나님 편에 서지 못할 정도로 그들의 영혼이 죽은 상태였던 거예요. 그래서 결단을 하지 못한 것이지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거예요. 그러자 엘리야가 다시 이번 갈멜산 전투의 방식을 제안합니다(23-24절). 그는 각자 믿는 신을 향해 제단을 쌓고 제물을 불로 태워 응답하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너희는 바알 신을 불러서 불로 응답하는 신이 하나님이라고 하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에게 먼저 모든 것을 양보합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송아지를 잡고 바알 신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기세를 높이며 바알을 부릅니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라고 말입니다(26절). 그런데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그들은 기도의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제단 주위를 뛰면서 자기 신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응답이 없습니다. 그들이 서서히 조급해져갑니다. 그러자 오정에 이르러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합니다(27절). 더 큰 소리로 불러보라는 것입니다. 혹시 바알신이 묵상중인지, 혹은 외출중인지, 주무시는지 모르니까 더 큰소리로 불러 보라는 것입니다(27절).

 

그러자 바알 선지자들이 흥분하여 더 큰 소리로 바알을 부릅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들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카드는 자기 몸을 자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몸에 피가 흐르도록 칼과 창으로 자해했습니다. 자해는 자기들이 믿는 신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다짐하는 의식입니다. 자기들이 믿는 바알 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 최고의 카드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것이 인본주의 종교의 만상입니다. 인본주의는 신이 자기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신을 도와주는 방식이지요. 자기들이 믿는 신이 얼마나 무능하면 그러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을 감동시키기 위해 별스런 짓을 다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는 바알신은 저녁 소제를 드릴 때까지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지도 않습니다(29절).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우상은 사람이 만든 죽은 신입니다. 그런 신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며 냄새를 맡지도 못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미련한 인간은 우상을 신으로 섬깁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인간의 종교성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어 하는 종교성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우상들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결국 죽을 짓만 골라서 하는 것이지요.

 

(2)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엘리야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모든 백성들을 자기 앞으로 가까이 오라고 했습니다(30절). 그는 바알 선지자들처럼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종교적인 퍼포먼스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기로 했습니다.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것으로 볼 때 그곳에 이미 여호와의 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던 단이 무너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무너진 단을 수축하기로 한 것입니다. 수축하는 것은 고치는 것이요, 회복하는 것입니다.

 

당시 그곳에 바알 신을 섬기는 제단은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단장되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단은 무너져 흔적만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었음을 의미하지요. 이 말씀 한 구절만으로도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무너진 단을 수축하기로 한 것입니다. 수축하는 방식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는 방식이었지요.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다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니라 하신 자더라”(31절).

 

이는 여호수아를 필두로 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열두 돌을 취하였던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가장 먼저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가운데서 열두 돌을 취하여 자기들의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두었습니다(수4:8). 물론 요단 가운데에도 열두 돌을 세웠지요(수4:9). 열두 돌을 세운 것은 후세대들에게 사건을 기억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가 제단을 수축할 때 열두 돌로 쌓은 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언약이 변치 않았음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야곱의 열두 돌의 의미는 이스라엘의 모든 열두 지파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한마음과 한 뜻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징계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었지만 여전히 야곱의 열두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돌단을 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단 주위에 도랑을 만들었습니다(32절). 물이 흐르는 수로를 만든 것이지요. 그리고 제물로 송아지를 잡았습니다(33절). 한마디로 엘리야는 율법의 규정대로 행한 것이지요. 그리고 특별한 행위를 한 가지 더 추가했습니다. 통 넷에 물을 채워서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번만 아니라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34절).

 

그러자 물이 단에도 흐르고 도랑에도 흘러넘치게 된 것입니다. 이는 혹시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차단하는 의미에서지요. 인간적인 꼼수나 속임수가 없음을 공개하는 것이에요.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단 종교에서 제단 밑에 빈 공간을 판 뒤에 그 속에서 불을 붙인 후에 이것을 자기들의 이적이라고 속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합니다. 그런 오해의 소지를 애초부터 차단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엘리야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꼼수나 방법을 근본적으로 차단한 것이지요.

 

엘리야는 오직 이 갈멜산 전투의 승부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처음부터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단에 불이 붙는 것 역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 외에는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것이지요. 엘리야는 오직 믿음의 방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엘리야의 간구 역시 얼마나 인격적이었는지 아십니까?(36절). 그는 바알 선지자들처럼 큰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광란의 퍼포먼스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간적인 자해행위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아주 짧고 간결했습니다.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언부언 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의 기도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36절을 보겠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길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입니다. 그의 기도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종 됨과 그리고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졌음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상한 기도입니까? 자기의 생명이 경각간에 달려 있으니 생명을 구해달라는 기도가 아니요, 혹은 우상숭배자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살려달라는 기도도 아닙니다. 이른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도 아니요, 자기의 목적을 위한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기도였지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입니까? 모든 기도의 중심에 하나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 됨과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졌음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야 말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였던 것이지요.

 

사실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예의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하나님의 보좌를 인정하는 것이요, 창조자 하나님의 영역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지요.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입니다. 사단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장이 반역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지요. 이사야서14장12-14절의 아침의 아들 계명성 루시퍼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위에 자기의 보좌를 높이고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영역은 분명하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그분의 발등상입니다. 그분은 창조자요,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지요. 이 분명한 한계를 무너뜨리면 안됩니다. 이 영역을 침범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분명한 영역이 존재합니다. 이 분명한 영역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 사단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무너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영역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체가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사단의 꼼수이지요.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역은 하나님의 이름이요,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입니다. 결코 어떤 것도 넘볼 수 없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에 도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권한과 보좌를 침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천사라도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는 자를 용납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그 어떤 것도 허용치 아니하십니다.

 

(3) 단을 수축함은 신앙의 보수공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고백할 수 있는 가장 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선포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그분의 권위가 세워지고 그분의 보좌가 확보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영역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대부분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앙이 무너진 것이지요. 하나님께 제사 드리던 단이 무너진 거예요. 이제 그 무너진 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단을 수축하는 것은 신앙의 보수공사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고상하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지요. 이 관계가 무너지면 안됩니다. 이 관계가 무너지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이지요. 때문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먼저 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각 사람의 믿음을 세워주는 기준이 되거든요. 우리가 속한 어떤 곳에서든지 각자에게 맡겨진 영역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속한 자리요, 자격이요, 자질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세워지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가장의 자리가 세워지고, 가장의 자격이나 자질이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만일 그런 질서와 관계가 무너지면 가정은 풍비박산되는 것이지요. 영적인 관계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더욱 그러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거든요. 만일 그 관계가 무너지면 믿음은 헛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본문의 엘리야의 기도는 최고의 기도요, 최상의 기도인 것이지요. 우리의 기도역시 엘리야의 기도처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기도인 것이지요.

 

또한 엘리야는 자기가 주의 종이 됨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36절). 이 기도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자라면 마땅히 필요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고, 나는 그분의 종이 됨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기도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와의 관계를 바르게 알지 못해서 믿음이 병들고 파선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은 믿음의 기본이요, 근본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 됨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고 영성 있는 기도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짐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알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상당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 됨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졌음을 믿지 못하는 경향이 많아요. 마치 자기들의 열심이나 수고 혹은 자신의 능력으로 되어졌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이른바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자기공로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는 것이지요.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데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가로채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대적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믿음의 최종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의 시종이 하나님께로부터 되어짐을 믿어야 하지요. 이른바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믿는다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엘리야 기도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모든 것의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셨습니다. 불로 응답하신 것이지요. 38절에 보면,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아 버린 것입니다. 엘리야의 믿음대로 하나님의 불이 제단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깜짝 놀라 엎드렸습니다(39절). 그리고 말하기를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백성들이 똑똑히 보았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목도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단에 불이 임한 것도 중요하지만 엘리야가 기도한대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났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짐이 모든 이들 앞에 드러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보았고, 아합도 보았으며, 바알 선지자들도 보았던 것이지요. 결국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의 기도는 제단에 불이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불을 달라는 원색적인 기도는 하지 않았어요. 여호와의 제단에 여호와의 불이 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하나님이 당연히 불로 응답하실 것을 믿었던 것이지요.

 

만일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 했을 테지요. 하지만 엘리야는 불로 응답하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불로 응답하실지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기도는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고, 보게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신앙을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그것이 엘리야 선지자의 유일한 소망이었던 것이지요.

 

엘리야의 기도대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지체없이 드러내셨습니다. 그러자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시선이 달라진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엎드려 말하기를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39절). 한마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받아들이고 고백한 것이지요. 그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엎드렸다는 말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39절).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알게 된 것이지요. 이른바 엘리야가 기도한대로 말입니다(36절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즉각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친히 목도했거든요. 그런 백성들을 향하여 엘리야가 명령합니다. 바알 선지자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잡으라는 것입니다요(40절). 그들은 엘리야의 명령에 즉각 순종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엘리야의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지요. 엘리야의 소원대로 된 것입니다. 그들은 엘리야의 명대로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바알 선지자를 일망타진 한 것입니다. 최소한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바알 선지자들 편에 동조했던 사람들이거든요.

 

아합 왕과 바알 선지자들의 눈치 때문에 결단을 촉구하는 엘리야의 책망에 한마디 말도 못했던 것이지요(21절). 그러나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역시 하나님은 사신 하나님이시오, 하나님밖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엘리야의 역할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시 여호와의 종교가 소멸될 기로에 서 있었거든요. 그런데 엘리야의 갈멜산 전투를 통해 여호와의 종교가 회복되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마12:10).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잠자는 이스라엘을 깨우시기 시작하신 겁니다.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서 있던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시는 틀을 마련해 주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억하시어 나 한 사람이라도 지금 깨어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각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에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주인공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단은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단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단은 예배의 처소가 될 뿐 아니라, 예배의 근거가 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신성한 장소가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단이 무너지면 안됩니다. 제단은 여호와 신앙의 중심축이 되거든요. 이스라엘 신앙의 고향 같은 곳이지요. 단은 예배의 처소요, 예배의 시간이며, 예배의 모든 것을 수용하는 그릇이요, 심장부 같은 곳이지요. 때문에 여호와의 단이 무너지면 안됩니다. 혹시 단이 무너졌다면 단부터 수축해야 합니다. 이른바 예배의 자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비록 그곳이 출석하는 예배당의 자리일지라도 말입니다. 혹은 개인이나 가정제단일지라도 말입니다. 분명히 무너진 담은 수축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단이 무너져 있는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선순위가 잘못되었거든요. 지금 내가 속한 곳에 어떤 단이 무너져 있는지를 점검하셔서 먼저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일에 우선하시기를 바랍니다. 한마디로 단을 수축하는 것은 무너진 신앙의 기본을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요한계시록2장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중에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았습니다(계2:4). 분명히 에베소교회는 첫사랑을 가진 교회였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첫 사랑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제 에베소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첫사랑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촛대를 옮겨 버리신다고 경고하시거든요. 다시 말해 첫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은 무너진 단을 수축하라는 말입니다. 무너진 제단을 다시 보수하라는 말이에요. 믿는 자에게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진 신앙의 단이 있습니다. 이른바 신앙의 기초가 되는 시간이나 장소나 은혜의 자리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신앙의 단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신앙의 감격도 사라졌고, 뜨거움이나 차가움도 없는 미지근한 상태에 빠져 있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혹은 침륜의 상태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무너진 단을 먼저 수축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다만 무너진 단을 굳이 눈에 보이는 장소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은 얼마든지 영적인 의미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각 사람마다 기도의 단이 무너진 사람도 있을 수도 있고, 예배의 단이 무너진 사람, 헌신의 단이나 봉사의 단이 무너진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말씀의 단이 무너져서 마음 고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하나님과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무너진 단으로 인해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무너진 단이 먼저 수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을 수축하지 않은 채 영적인 어떤 행위를 추가하는 것은 설거지도 하지 않은 그릇에 음식물을 담아 먹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무너진 단을 수축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무너진 단이 있다면 단을 수축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통로로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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