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생수가 답이다(요4:7-14)-2021.9.12
우리 사회에 생수라는 말이 낯설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생각해서 좋은 물을 찾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가정에서 정수기 사용이 일반화되었지만 이제는 생수를 마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전에 물 값이 기름 값보다 비싸다는 말이 결코 틀리지 않은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물이 없으면 한시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물론 모든 생명체가 마찬가지이지요. 좋은 물을 마시려는 인간의 욕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좋은 물은 인체 건강에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물이 좋은 물일까요? 그래도 생수가 아닐까요?
요즘 마트나 백화점을 가면 여러 가지 브랜드의 생수들로 넘쳐납니다. 먹는 물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나라 생수시장 규모가 2020년 기준으로 1조원이 넘었답니다. 생수 종류만 해도 천연암반수, 빙하수, 이온수, 탄산수, 해양심층수, 백산수, 석수등 생소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브랜드만해도 백 여 개가 훌쩍 넘는답니다. 가격도 천차만별입니다. 문제는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검증되지 않는 부적합한 물을 파서 생수로 팔아먹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 생수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생수는 말 그 자체로 살아있는 물(Living water)입니다. 물도 살아있는 물이 있고, 죽은 물이 있거든요. 생수는 살아있는 물이에요. 본문은 생수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런데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야 하지요. 팔레스틴 지도를 보면, 북쪽으로 갈릴리가 있고, 남쪽에 유다가 있고 중간에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합니다. 만일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지 않으려면 요단동편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아주 번거롭고 불편한 것이지요. 당시 유대인들은 그랬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상종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사마리아 땅 자체를 밟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친히 사마리아 땅을 밟으시고 수가라는 동네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꺼려하는 땅으로 들어가신 거예요. 그리고 그곳에 있는 야곱의 우물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물을 길러온 한 여인을 만납니다. 당연히 사마리아 여인이었지요.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여인이 깜짝 놀랐습니다. 감히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붙였기 때문이지요. 이는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는 유대인의 파격적인 행동이었거든요.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치 않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당신은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목마른 자에게 한 모금의 물을 주면 될 터인데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질문한 거예요. 도저히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목마른 사람이 물 한잔 얻어 마시겠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목마른 나그네가 물 한잔 얻어 마시는데 체통이 필요합니까? 신분을 따져야 하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조건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만큼 유대인들의 인종적 편견과 종교적인 편견이 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당시 유대인들의 혈통적 자존심이 만들어놓은 율법의 높은 장벽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여인과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물론 여인으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내용들이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에게 메시아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물론 여인에게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이었지만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점진적으로 당신이 메시아임을 계시해 주십니다. 당연히 우물곁에 있는 물을 소재로 말입니다. 일상적인 물을 소재로 하여 여인의 호기심을 자극한 후에 생수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지혜로운 전도법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전도자들은 막무가내 식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무대포식이지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가 논쟁을 하게 되고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왜냐면 상대방의 마음이 열리지 않은 상태로 일방적으로 대들었기 때문이지요.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상태로 복음을 전하려고 하니까 반감이 심한 거예요. 실제로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기독교인들의 전도방식이 맘에 들지 않아서 싫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그들이 복음이 싫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의 방식이 싫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들의 소리를 한번쯤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무에게나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식의 전도 방법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불신자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못한 상당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우리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결국 믿는 자가 본이 되지 못하고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지혜로운 전도법을 배워야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주변에 있는 재료들을 소재로 하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셨지요. 그래서 비유법을 자주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을 소재로 여인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을 통해 생수 이야기를 전하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생수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생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생수의 영적인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물에 관한 말씀이 많습니다. 물론 생수와 관련있는 말씀이지요.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시편, 잠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스가랴서와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구절까지는 찾아볼 수 없지만 생수를 의미하는 물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생수에 관한 해석도 분분합니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생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10절).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 중에 최고의 선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물론 그 최고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3장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독생자 예수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랑은 예수 안에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 있는 거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때문에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수가 생수요, 은혜가 생수며, 말씀이 생수라는 말이에요(암8: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의 영광을 보고, 주의 사랑의 생수가 우리 마음에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마음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사는 인간은 육신의 우물을 마시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우물만 마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육신의 우물은 마셔도 마셔도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마셔도 목마릅니다. 인간은 물이 없으면 살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70%가 수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해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는 물을 마시지 않으면 부석부석해지고 깨지고 부서집니다. 그래서 한시도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것이지요.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우물을 마시고 자기 영혼을 적시려는 것처럼 살아간다는 거예요. 실제로 육신의 우물만 마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지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율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육신의 우물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야곱의 우물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율법을 상징하는 우물입니다. 그 물은 마신 자마다 목이 마릅니다. 그런 자들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물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생수입니다. 하나님의 생수를 마셔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지요. 당연히 육신에 속한 여인도 이해를 못했던 것이지요. 물론 여인에게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본문의 정황으로 볼 때 이 여인은 육신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6절에 제육시(12시)쯤 물을 구하러 우물가를 찾은 것을 보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던 것이지요. 또한 내면적인 상처가 깊은 여인이요, 영적인 목마름이 있는 여인입니다. 한마디로 육에 속한 여인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생수 이야기에 그녀는 동문서답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여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직분이 있을지라도 이 세계를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수는 복음입니다. 목마른 인간은 누구나 생수를 구해야 합니다. 생수를 구한다는 것은 복음을 구한다는 말이요, 복음을 구한다는 말은 예수를 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수를 구한다는 말은 예수를 구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1) 생수를 구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신의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육신의 떡은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영혼은 육신의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육체의 생명은 자꾸 육체의 소욕을 따라 육체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려고 하고, 영적 생명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원수 마귀가 가만 내버려두지 않아요. 육체의 생명대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유혹해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지 못하면 영원히 죽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거든요. 어떤 식으로든지 동정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영원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들만 들어가는 곳이에요.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만 들어가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절대 들어갈 수 없어요. 천국은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만 들어가는 거예요.
이 땅에서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과 열정으로 신앙생활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어요. 천하 어떤 인간도 예수 이름 외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에요. 예수 이름을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거예요. 요한복음7장37절과 38절을 보십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또한 이사야서55장1절도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런데 마귀는 자꾸만 속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속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종교적 열심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속입니다. 혹은 우리의 남다른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고 속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에게는 교회의 직분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들어간다고 속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속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종교적인 열심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자기들의 헌신과 희생을 믿음의 금자탑처럼 자랑합니다. 그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고 합니다. 모두 다 사단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에 주는 율법으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의로움도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의로움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의 형식적 종교의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나의 열심과 헌신과 희생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성취하신 새 언약의 복음으로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복음은 하나님이 맹세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분과 한 생명으로 사는 것이요, 그분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며, 그분의 마음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생을 누리는 생명이지요. 그 생명은 죽지 아니하고 썩지 아니하는 생명입니다. 우리의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지요(벧전1:23). 그렇다면 그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분이 공급하시는 생수로 사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안에 거하시면 날마다 그분이 내게 주시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분이 주시는 생각으로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분이 내안에 생수를 부어주십니다. 그분의 생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히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이 내안에서 깨닫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은 내안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시는 생수입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을 통해서 성자 예수를 증거하시기 위해 우리 가운에 오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알 수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12:3). 한마디로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십니다(고전2:10). 성령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기 때문에 요한복음7장39절에서 성령을 생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요7:38-39). 그렇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믿게 하는 하나님의 생수인 것입니다.
생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새 언약의 중보자로 보내주시는 사랑이요, 그 사랑을 알고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생수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요, 적극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보여주십니다.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생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수를 적극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생수는 새 언약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온통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으로는 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이 새 언약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랑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 생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새 언약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중보자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생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주시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라면 결국은 생수를 구하는 것이 예수님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주님께로 와서 마셔야 합니다. 목마름이 있는 자는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적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수를 구합니다. 이 여인에게도 영적인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육신을 통해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이 있었던 거예요. 주님은 그녀 안에 있는 영적인 목마름을 끌어올리시기 위하여 육신의 목마름을 이용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여인의 남편을 소환하는 방식입니다. 16절에 보면,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녀에게는 여섯 명의 남편이 있었지만 남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만큼 그녀에게는 육신적인 목마름이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주님이 공급하시는 생수를 마시게 되면 목마름의 모든 문제가 한방에 해결될 것입니다.
(2)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수를 구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구할지라도 마시지 못하면 누릴 수 없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내게 몇 십억 짜리 통장이 장롱 안에 있으면 뭐합니까? 아까워서 벌벌 떨며 필요할 때 쓰지 못하고 통장에 넣어두면 무엇합니까? 단 돈 십 원짜리 하나라도 내가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내 돈입니다. 어떤 이는 지갑에 돈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든든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갑에 들어 있는 돈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필요할 때 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누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이 복음을 누리지 못하고 주머니 속에 담아 가지고만 다닙니다. 그래서 복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복음을 누리지 못하므로 영적인 자유가 없는 것이지요. 항상 뭔가에 눌리고 메여서 살아간다는 말이에요.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무언가에 눌리고 자유함이 없는 거지요. 마치 복음을 상상속의 복음으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아니면 마음속에 간직한 채로만 살았다고 할까요? 그래서 복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누리지 못하면 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짐만 되지요. 하나님의 생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수를 구하여 얻었을지라도 누리지 못한다면 자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누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거예요. 그분이 주시는 마음으로 믿고, 그분이 주시는 생각으로 분별하며, 그분의 마음되어 사는 것이지요. 이것이 생수를 누리는 것입니다. 또한 생수를 누린다는 것은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음성을 들어야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수를 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생수를 마시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수를 누리려면 마셔야 합니다. 생수를 사모하여 마시고 생수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 드렸던바 생수를 마신다는 의미는 생수이신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생수는 날마다 마시며 살아야 합니다. 어느 특정한 날을 잡아서 실컷 마시고, 한 달 쯤 혹은 일 년 쯤 살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날마다 생수를 마시고 살아야 합니다.
상당수의 성도들이 특정한 날을 정하여 기도원 같은 곳으로 가서 집중기도를 한 후에 그 기도의 힘으로 한동안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른바 평상시에는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수는 매일 매일 마셔야 합니다. 마치 육체의 끼니를 일주일치 혹은 한 달 치를 한꺼번에 먹고 살수 없듯이 말입니다.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날마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 안에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그분이 주시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생수를 구하고 마셔야 합니다. 내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 날마다 생수를 구하고 마셔야 합니다. 절대 그냥 보관하고 다니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혜를 보관하고 다니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은혜도 누려야 합니다.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은혜도 아니요, 사랑도 아닙니다. 마치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고, 정박되어 있는 배는 배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생수를 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생수를 마시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인은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 안에 있는 목마름의 실체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영적 비늘들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풀리지 않던 예배문제는 항상 그녀를 목마르게 하는 영적 목마름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자기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을 고집하니 도대체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합당하냐는 것이지요(20절). 사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거든요. 때문에 그녀는 예배장소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예배장소를 물어 본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그녀에게 풀리지 않는 영적 목마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한마디로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는 것이지요. 그녀는 주님을 통해 예배 장소만이 아니라, 예배자의 자세와 방법에 이르기까지 답답했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 받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육체의 목마름을 상징하는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로 들어가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전한 것입니다(요4:28-29).
(3) 생수가 흐르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생수를 찾았다면, 혹은 하나님의 생수를 마셨다면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나 혼자만 마시고 살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수를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복음은 나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거든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생수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생수를 마시고 누리며 산다할지라도 전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10장13-1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한마디로 전해야 듣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생수를 알고 마신자라면 마땅히 내안에서 생수가 흘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요한복음 7장38절의 말씀처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할렐루야!!! 다시 말해 내 심령에서 예수님의 생수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나야 함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고 전해주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다시 말해 내 안에 있는 생수를 흘러나오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에요. 나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수가 흘러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엘서2장28-29절을 보면,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어준다는 말씀은 거하게 한다는 말이요, 자신을 내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이지요. 성령이 내안에 부어졌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생수가 내 안에 가득 부어졌다는 말이요, 채워졌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생수가 부어짐은 내가 예수님과 한 생명이 되어 그분이 주시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지요. 그분의 마음되어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이 무엇일까요? 주님의 마음은 이 땅에 모든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주님과 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우리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서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생수를 그들에게 소개하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생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생수를 바르게 알고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함이지요. 하나님이 맹세로 약속하신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받게 하려함입니다. 그분과 한 생명이 되어 천국 되어 살게 함이에요. 결국 새 언약의 일군 되어 살게 하려는 것이지요.
새 언약의 일군 되어 사는 것은 복음의 일군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새 언약의 일군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군은 새 언약의 일군입니다. 고린도후서 3:6-9절을 읽어 보십시다. 새 언약의 일군은 율법의 일군과는 질이 다릅니다. 새 언약의 일군은 영의 직분이요, 의의 직분이며, 영광스러운 일군입니다. 그러나 옛 언약의 일군은 율법의 일군이요, 의문의 직분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님의 성전이 되어 머리되신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 주님이 나를 성전 삼으셨습니다. 이른바 새 언약의 일군을 삼으신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 생수를 찾았고 생수를 마셨습니다. 그녀는 생수를 자기 혼자만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녀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지체 없이 새 언약을 증거 하는 일군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의 일군 되어 살아야 합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은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일군이 되어야 하는지 결론은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 새 언약의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새 언약의 일군이 되려면 반드시 내가 새 언약의 복음을 믿고 생수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수를 마시고 누려야 합니다. 또한 모든 이들에게 생수를 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생수를 구하고 마시고 누리고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주님께 나오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수가 부어지고 채워지고 흘러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생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생수가 답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생수가 부어지고 채워지면 내 영혼은 주님으로 인하여 만족하며 기뻐 뛰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생수요, 하나님의 사랑의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가 생수며, 예수님을 우리 안에 연합시켜주시는 성령 하나님이 생수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 생수요, 예수님의 은혜가 생수며, 성령님의 감동이 생수입니다. 한마디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생수이십니다. 할렐루야!!!